1987년 12월 24일.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세상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전역이다"
나는 수도 없이 마음 속으로 '프리덤'을 외쳤다.
부대에서도 숨은 잘 쉬고 살았다.
하지만 제대 후 경험하는 호흡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서울의 공기에선 '자유'의 맛이 났다.
한없이 달콤했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이듬해인 1988년 3월에 다시 캠퍼스로 복귀했다.
'88 올림픽'의 열기가 몹시도 뜨겁던 해였다.
복귀하자마자 과대표를 맡았다.
과대표 선출은 친구들의 만장일치 박수로 싱겁게 끝났다.
일사천리였다.
드넓은 캠퍼스 곳곳에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눈길이 머무는 데마다 꽃대궐이었고 몹시도 향기로웠다.
그런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강의실 앞 칠판에 백묵으로 큼지막하게 '흑추위'라고 썼다.
그 글자를 본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내게 물었다.
"흑추위가 뭐냐?"
나는 힘주어 대답했다.
"우리 강토의 남서쪽 끄트머리에 아름답고 신비로운 섬이 있다. 바로 '흑산도'와 '홍도'지.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에 돌입하면 곧바로 우리 국토의 남서단, 그 태고적 비경을 찾아서 야무지게 떠나보자. 그 망망대해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우리 강토의 진주를 있는 그대로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부대껴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곳 방문은 사실 나의 오래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나의 제안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흑산도 탐방 추진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여 '흑추위'가 결성되었다.
대여섯 명이 그 자리에서 선뜻 동참하겠다고 선언했다.
죽이 잘 맞았다.
모두 복학생이었다.
그날부터 매달 일정한 금액을 각출했고, '흑추위 기금'을 키워 나갔다.
88년 6월 말,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긴 여름방학에 돌입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설레는 가슴을 안고 '서울'에서 '목포'까지 야간열차로 내달렸다.
잠도 오지 않았다.
'목포항'에서 다시 여객선을 타고 '흑산도'를 거쳐 '홍도'까지 들어갔다.
한적한 바닷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시작했다.
청정한 바다, 시원한 바람, 인적 없는 바닷가는 바로 우리의 낙원이었다.
내가 서울에서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고요했고, 푸르렀으며 광활한 바다였다.
'엘도라도'가 따로 없었다.
저녘무렵이 되면 광막한 수평선 너머로 펼쳐지는 웅대한 해거름의 장관은 그야말로 장쾌하고 웅혼했다.
다른 곳에서의 낙조도 숱하게 보았지만 아예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다.
'홍도'만의 불타는 선셋과 강렬한 색채미는 단연코 압권이었다.
최고였다.
뜨겁고 선명했으며 비단같이 고왔다.
그래서 더욱 감격적이었다.
완전한 해방감, 무한의 자유로움, 이십대 중반 청년들의 옹골진 함성, 그리고 다채로운 추억만들기까지 '홍도'에서의 시간은 그야말로 완벽한 휴식과 재충전을 의미했다.
꿈같은 며칠을 보냈다.
마냥 행복했고 감사했다.
사람 구경하기 힘든 검푸른 바닷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좋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멍 때리며 흥얼거리기만 해도 좋았다.
낚시, 수영, 다이빙, 잠수를 하면서 자연산 어폐류를 낚고 채취하여 즉석 별미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배를 타고 '홍도'를 일주해 보고 싶었다.
견물생심이었다.
언덕을 내려와 마을까지 걸어갔다.
평생을 거친 바다와 함께 사신 어부 아저씨께 '홍도일주'를 부탁했다.
물론 공짜로 부탁한 건 아니었다.
우리 수준에서는 적잖은 경비를 드리면서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 분도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을 흔쾌하게 받아 주셨다.
작은 목선을 타고 그렇게 홍도의 바깥쪽 명승지를 신명나게 주유할 수 있었다.
숨이 막힐듯한 빼어난 풍광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어선 덕분에 매우 가까이에서 멋진 대자연을 마음껏 감상하고 흠향했다.
웅장한 해식애와 수직 절벽의 절경을 어찌 나의 부족한 필설로 표현 할 수 있으랴.
불가능했다.
배가 섬을 끼고 돌 때마다 매 순간 순간 홍도의 비경과 풍광 앞에서 감탄과 찬미가 쏟아졌다.
신이 빚으신 대자연의 위대한 파노라마였다.
기암괴석들의 신비한 자태와 형상에 완전히 넋을 잃었다.
꽤 긴 시간 동안의 유람을 마칠 즈음, 선장님이 예정에도 없었던 즉석 회 파티를 열어주셨다.
푸르고 깊은 바다 위 선상에서 펼쳐진 생선회 파티.
상상해 보시라.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종은 달랐지만 모든 횟감은 찰지고 쫀득했다.
정말로 기가 막혔다.
'홍도여행'은 시종일관 기쁨과 만족의 코러스였다.
한마디로 환상이었다.
그곳에서 바다, 섬, 사람의 완벽한 물아일체를 경험했다.
잔잔한 파도에도 가볍게 미동하는 목선의 하부 어창이 궁금했다.
선장님께 봐도 좋겠냐고 여쭤보니 좋다고 하셨다.
뜰채를 들이대자 각 어창마다 파닥거리는 물고기들이 그득했다.
"와우. 이 배는 진정 엄청난 보물선이군. 보물선이야"
우리 눈엔 그래 보였다.
우리를 태우기 전에 갓 잡아 올린 싱싱한 물고기라고 하셨다.
탱글탱글한 횟감에 두꺼비가 어찌 빠질 수 있겠는가.
사십 대 중반의 어부는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을 자신의 친 조카처럼 살갑게 대해 주셨다.
우리는 환상적인 풍경과 훈훈한 인정 속에서 그렇게 '홍도'의 깊고 푸른 바다를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동승했던 선장님의 막내 아들도 이미 우리의 어린 조카로 변해 있었다.
귀엽고 착한 섬마을 소년이었다.
정말로 멋진 시간이었고, 황홀한 홍도 일주였다.
'홍도여행'을 마치고 귀로에 '흑산도'에 들렀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오랴 싶었다.
'흑산도'에서도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다시 한번 야영을 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노래도 불렀고, 대화도 많이 나눴으며 잠수해 전복도 땄다.
시종일관 기쁨과 미소가 넘쳐 흘렀다.
그리고 뭍으로 나와 해남 '대흥사'와 '두륜산' 트레킹까지 잘 마친 다음 열차로 상경했다.
상경하는 길에 열차 안에서 약속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면 이 멤버들 그대로 4년 후 여름 휴가 때 다시 오자"고 했다.
모두가 격하게 동의했다.
그러나 그 굳센 다짐은 26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미완의 언약으로 남았다.
나 뿐만 아니라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 모두가 그 뒤로 다시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었다.
쇠뿔도 당김에 빼는 게 맞았다.
다음 기회는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확률이 훨씬 더 컸다.
나는 살면서 가끔씩 '흑추위'를 생각했다.
그것은 '적시성'과 '현재성'에 대한 나의 작은 독백이자 '인생원칙' 중 하나였다.
적어도 나에게 '흑추위'의 교훈은 매우 중요한 생의 이정표였다.
"막연한 미래에 기약 없는 약속이나 여망을 두지 말자"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상대가 귀한 사람이라면 '지금' 편지를 쓰고, 안부가 궁금한 친구가 있다면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대면을 원칙으로 삼았다.
만나서 식사도 했고, 커피도 마시며 끝까지 소통하려 힘썼다.
"사랑하는 가족들, 부모형제, 친구나 선후배들, 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일과 사람에 대한 균형'을 잘 유지한 채 살겠노라"고 다짐했었다.
캠퍼스를 떠나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변함 없이 동일한 패턴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물론 잘 안 될 때도 많았다.
하지만 분명한 나만의 원칙을 견지하며 살고자 기도했다.
내 영혼의 나침반은 언제나 동일한 방향을 기리켰고 여전히 뜨겁게 내 혈류를 타고 흘렀다.
26년 전 '홍도'에서 승선했던 작은 목선의 어창이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서울에서 내려 간 도시 촌놈들에겐 어창의 많은 물고기에 놀랐고, 어창에서 막 건저올린 싱싱한 횟감에 넋을 놓을 정도였다.
정말로 끝내주는 맛이었고 최상의 분위기였다.
그 어창 안에서 팔딱거리던 수많은 활어들이 제 아무리 애써도 끝내 어선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유한성'과 '일회성'이라는 인생의 한계를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생자필멸'이라는 신의 그물코를 빠져나갈 수는 없다.
그런 존재는 없었다.
딱 한 번뿐인 우리네 인생길, 살면서 시시때때로 마주치는 다면적 스펙트럼에서 각자의 삶이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거나 균형이 깨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살고 있다.
영혼과 육신, 일과 휴식, 헌신과 배려, 말씀과 기도, 도전과 겸손, 용기와 지혜, 삶과 죽음.....
깊어 가는 한여름 밤이다.
러시아 대문호 '푸슈킨'의 '삶'이란 시를 다시 한번 나즈막히 읊조려 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항시 미래를 바라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푸슈킨'도 아마 우리와 비슷한 정념이었을 게다.
아주 오랜만에 '흑추위' 앨범을 열어 보았다.
그때 그 사진들이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손짓했다.
몹시도 정겹고 흐뭇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흑추위'의 추억과 교훈이 이상하리만치 더욱 또렸해 지고 짙어 지는 것 같다.
바로 지금,
바로 오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단디 계획하고 철저하게 실천하자.
내일이면 늦을 지도 모른다.
'좌고우면'은 당뇨 같은 무서운 '습관병'이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2014년 7월 7일.
26년만에 흑추위 앨범을 다시 보면서,
NOW & HERE 라는 생의 교훈을 반추하며 몇 자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