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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저자 : 어니스트 헤밍웨이
1. 한 페이지 요약 및 견해
어니스트 헤밍웨이!
1899년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음악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여섯 자녀 중 둘째로 출생. 고등학교 졸업 후 신문사의 수습기자로 취직하여 그의 문체인 ‘하드보일드(강건체)를 익히게 된다. 대게 신문기자 출신들의 글이 간단명료하고 읽고 정리하기에도 편리하다.(김훈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하면 떠오르는 그의 대표작품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리고 생존해 있을 시절 맨 마지막 작품이면서 그의 최후의 걸작으로 할 수 있는 『노인과 바다』. 그 고전을 이제야 접해본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노인과 바다』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 산티아고 의 이야기이다. 노인은 소년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함께 배를 타는데, 물고기를 잡지 못해 소년은 다른 배로 떠나고 노인은 혼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어느 날 먼 바다까지 나간 노인의 낚싯줄에 걸린 5.5m(자기의 조각배 보다 더 크다)의 청새치를 잡기위한 나흘 동안의 실랑이. 잡고 난 후 다시 상어 떼로부터 청새치를 보호하기 위한 상어들과의 사투를 그린 내용이다. 그 과정에 홀로 싸워야하는 외로운 노인의 투쟁이 그려진다.
『노인과 바다』를 통해 헤밍웨이의 작품을 처음 접해보는데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대 부분의 글에서 질문(의문)과 대답이 하나의 문장으로 완결되는 것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과 답은 항상 상반되는. 반대되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단어와 단어에서, 자연의 상태에서, 어떤 상황에서 항상 대립하고 있다.
- 노인과 바다. 엘 마르와 라 마르, 어부와 물고기...
- 바다는 다정스럽고 아름답긴 하지. 하지만 몹시 잔인해질 수도 있는데..
- 저녁 햇살과 아침 햇살의 비교
- 고기야, 네놈이 지금 나를 죽이고 있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네게도 그럴 권리는 있지. 등.
이렇듯 노인과 바다에서 단어와 문장은 항상 맞서고 있으며, 그럼에도 반대편의 입장을 늘 마련해놓고 있다.
결국, 그런 것들을 통해 『노인과 바다』는 자연과 생명, 인간을 대하는 노인(산티아고)의 삶의 자세를 아름답게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 생각해본다.
==> 노인이 청새치를 잡기위한 나흘간의 사투에는 깊은 바다 속에서 청새치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지. 노인은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숙련되고 노련한 어부이다. 그러한 노인이 긴 기간(노인 주장 84일, 소년주장 87일)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자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2. 나를 확장시킬 책속의 내용
P.25
늙은이는 왜 그렇게 일찍 잠에서 깨는 걸까? 하루를 좀 더 길게 보내고 싶어서일까?
P.30-31
바다가 이렇게 잔혹할 수도 있는데 왜 제비갈매기처럼 연약하고 가냘픈 새를 만들어 냈을까? 바다는 다정스럽고 아름답긴 하지. 하지만 몹시 잔인해질 수도 있는 데다 갑자기 그렇게 되기도 해.(.....)
저 새들은 바다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 연약하게 만들어졌단 말이야.(.....)
노인은 바다를 늘 ‘라 마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이곳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 때 사용하는 스페인 말이었다. 바다를 언제나 여자인 것처럼 불렀다.
젊은 어부들 가운데 몇몇, 낚싯줄에 찌 대신 부표를 사용하고 상어 간을 팔아 번 큰돈으로 모터보트를 사들인 부류들은 바다를 ‘엘 마르’라고 남성형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바다를 두고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인 것처럼 불렀다.
==> 어느 나라이건 세대에 따라 자연(삶의 터전)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자연이 돈의 터전으로 연결되어 간다.
P.31
달이 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바다에도 영향을 미치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P.34
평생 동안 이른 아침 햇살에 눈이 상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내 눈은 아직도 멀쩡해. 저녁 해를 똑바로 바라보아도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으니까. 저녁 햇살이 지금 햇살보다 훨씬 강한 빛을 내뿜는데도 말이야. 하지만 아침 햇살에는 눈이 따가워.
==> 실재 저녁 햇살이 더 강할까?
P.40-41
이렇게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소년이 배에서 떠나고 혼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부터인 것 같았다.(.....)
바다에서 쓸데없이 말을 지껄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으며, 노인은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대로 지켰다. 그러나 지금은 귀찮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지껄여 댔다.
==> 바다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공동체)와 같지 않을까?
P.42
오늘로 벌써 여든 날 하고도 닷새째이니...
==> 고기를 잡지 못했던 날짜가 왜 노인과 소년이 다를까?
P.42
그는 모든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180미터나 되는 바다 밑에서 지금 청새치 한 마리가 낚싯바늘의 뾰쪽한 끝과 중간 부분을 덮고 있는 정어리들을 뜯어 먹고 있는 것이다.
P.49-50
노인은 자신의 낚시에 걸린 큰 고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멋지고 별난 놈이야. 도대체 나이를 얼마나 먹은 놈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저놈에게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와 마찬가지로 그저 필사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일까?
P.50
뾰족한 주둥이를 잡고 몽둥이로 골통을 마구 후려치자 마침내 고기 색깔이 거울 뒷면의 색깔처럼 변해 버렸다.
P.51
이놈이 선택한 방법이란 온갖 올가미나 덫이나 계책이 미치지 못하는 먼 바다의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겨 있자는 것이지. 내가 선택한 방법이란 모든 사람이 다다르지 못하는 그곳까지 쫓아가서 그놈을 찾아내는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지 못하는 그곳까지 말이야.
P.60
물속의 고기 놈한테도 먹을 것을 좀 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저놈하고 난 형제 사이니까. 하지만 나는 저놈을 꼭 죽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빠져서는 안 돼.
==> 왜 카인과 아벨이 생각날까?
P.62
바다에 나가 있노라면, 허리케인이 불어올 때는 며칠 전부터 하늘에 그 조짐이 나타난다. 뭍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는 까닭은 허리케인의 조짐을 볼 수 없기 때문이야.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물론 뭍에서도 구름의 모양이 평소와 다르기는 하지.
P.73
어두운 조류에서 재빠르게 돌아다니는 고기들은 왜 하나같이 자줏빛 등에다 흔히 자줏빛 줄무늬나 반점이 있을까?
P.94
고기야, 네놈이 지금 나를 죽이고 있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네게도 그럴 권리는 있지. 한데 이 형제야, 난 지금껏 너보다 아름답고, 또 너보다 침착하고 고결한 놈은 보지 못했구나, 자, 그럼 이리 와서 나를 죽여 보려무나. 누가누구를 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 같은 바다에서 태어나고, 같은 바다에 살며, 생활의 터전이 같다. 고기도, 어부도
마치 형제처럼.
P.95
노인은 모든 고통과 마지막 남아 이는 힘, 그리고 오래전에 사라진 자부심을 총동원해 고기의 마지막 고통과 맞섰다.
P.96
난 내 형제인 이 고기를 죽였고, 이제부터는 노예처럼 더러운 노동을 시작해야 한다.
P.98
자줏빛과 은빛이 뒤섞여 있던 고기 색깔은 이제 순전한 은빛으로 변해 있었고, 줄무늬는 꼬리와 똑같은 엷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P.100
고기는 아가리를 굳게 다물고 꼬리를 꼿꼿이 아래위로 흔들면서 우리는 지금 마치 형제처럼 항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 노인의 머리가 다시 약간 흐려지기 시작했다. 고기가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고기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고기를 뒤에 두고 끌고 가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고기 놈이 모든 위엄을 잃어버린 채 지금 배 안에 있다고 해도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지. 하지만 고기와 배는 지금 서로 묶인 채 나란히 항해하는 중이야. 만약 고기 놈이 나를 데리고 가는 거라면 그렇게 하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꾀가 있어 저놈보다 나은 것일 뿐 저놈은 내게 아무른 적의도 품고 있지 않았거든.
P.104
이 고기는 잡은 적도 없고, 지금 이 순간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하지만 고기를 죽여서 정말 안됐지 뭐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카인과 아벨이 생각날까?
P.106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죄 아닌게 없지(.....)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P.107
“내가 그 녀석을 죽인 건 정당방위였어. 그리고 정당한 방식으로 죽였다고.” 노인은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것들을 죽이고 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고기를 잡는 일은 나를 살려주지만, 동시에 나를 죽이기도 하지.
P.108
노인은 고물 쪽에서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돋우기 위해 청새치의 살을 가끔 뜯어 씹으면서 두 시간가량 항해해 나갔다. 바로 그때 상어 두 마리 중 첫 번째 놈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 노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외침 소리는 다른 어떤 말로도 옮겨 놓을 수 없었다. 손바닥을 뚫고 널빤지에 못이 박히는 것을 느낄 때 무의식적으로 지르는 그런 소리라고나 할까?
==> 노인이 잡은 물고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간접적으로 살짝 들어냈다.
노인과, 소년, 물고기의 이름이 왜 자주 언급되지 않고 절제되었는지.
P.113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P.116
“고기는 이제 반동강이가 되었구나. 한때는 온전한 한 마리였는데. 내가 너무 멀리까지 나왔어. 내가 우리 둘을 모두 망쳐 버렸어.” 노인은 말했다. “하지만 너랑 나 둘이서 많은 상어를 죽이고 다른 고기들도 죽이지 않았느냐. 고기야, 지금까지 넌 얼마나 많이 죽였니? 대가리에 뾰족한 창날 같은 주둥이를 공연히 달고 있는 건 아니잖아.”
P.118
너무 멀리까지 나왔을 때 너는 이미 운수를 망쳐 버리고 만 거야.
==> 계속하여 꿈이길 바라며 후회하고 있다...
P.121
뭐니 뭐니 해도 바람은 우리의 친구니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때에 따라서 말이지, 하고 그는 단서를 붙였다. 그리고 거대한 바다, 그곳에는 우리의 친구도 있고 적도 있지.(.....)
한데 너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하고 그는 생각했다.
“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 작품 해설
P.129
백조는 일생 동안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단 한 번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울고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흔히 예술가들의 마지막 작품을 ‘백조의 노래’라고 일컫는다.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남긴 백조의 노래이다.
P.134
작가는 흔히 무의식에서 작품을 창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릇된 평가를 내리기 쉽다. 또 작품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탓에 기억에 남는 작품을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P.141
내세나 피안에 희망을 두기 보다는 현세나 차안의 삶을 만끽하려는 헤밍웨이의 주인공들처럼 그 역시 먹고 마시는 일 말고는 이렇다 할 관심이 없다.
P.142-143
산티아고가 맥주를 마시려고 마놀린과 함께 ‘테라스’에 가서 자리에 앉자 많은 어부들이 노인을 어리석다고 놀려 대지만 그는 조금도 화를 내는 법이 없다. 그가 좀 더 자연과의 합일을 꾀하면서 우주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이렇게 나이가 들면서 원숙해진 그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P.144
시인들이 삶을 흔히 항해에 빗대듯이 바다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터전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은유이기 때문이다.(.....)
멕시코 만류에 떠 있는 산티아고의 조각배는 말하자면 소우주인 셈이다.
P.145
외부 세계보다는 내면세계, 사회 문제보다는 개인 문제에 주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P.146
영국 소설가 D.H. 로렌스가 일찍이 “작가란 원고지 위에 지신의 피를 쏟아 놓는다.”라고 말한 것은 아무리 자신의 삶을 감추려고 해도 작품 속에는 어쩔 수 없이 작가가 살아온 고단한 삶의 흔적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P.147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어느 소네트에서 노래하듯이 “미인의 이마에 밭고랑 같은 주름살을 파 놓는‘ 것이 시간이요 세월이다. 또 그는 ”시간의 낫 앞에 베어지지 않는 것 없어라.“ 라고 노래하면서 시간이나 세월을 풀을 베는 낫에 빗대기도 했다. 이렇듯 서양에서는 풀을 베는 낫은 흔히 노령을 상징한다. <노인과 바다>의 화자는 산티아고가 잡은 청새치에 대해 ”노인은 커다란 낫처럼 생긴 꼬리가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낚싯줄이 빠른 속도로 다시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P.150
처음에는 청새치 그리고 나중에는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이는 산티아고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 같은 인물이다. 신화의 주인공이면서도 신이 아니라 인간인 시시포스는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에 끝까지 맞서 싸우는 인간의 용기와 의지를 보여준다. 산꼭대기를 향해 커다란 바윗덩이를 쉴 새 없이 밀어 올리는 그 고역의 주인공처럼 산티아고도 온갖 시련을 겪지만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운명에 도전한다.
P.152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는 문장. 언뜻 보면 ‘패배’와 ‘파멸’ 사이에 이렇다 할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실제로 사전을 보아도 전자는 어떤 대상과 겨루어서 지는 것을 뜻하고, 후자는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파멸’은 ‘파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헤밍웨이는 산티아고의 입을 빌려 물질적. 육체적 가치와 관련된 반면, ‘패배’는 어디까지나 정신적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
==> 끝까지 해보겠다는...끝까지 해야 한다는... 무서운 얘기다.
“돛은 여기저기 밀가루 부대 조각으로 기워져 있어서 돛대에 높이 펼쳐 올리면 마치 영원한 패배를 상징하는 깃발처럼 보였다.”라고 말한다. 그의 어선에 달린 돛이 상징하듯이 주인공은 어느 모로 보나 삶의 패배자요 낙오자이다.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는 사실(.....)
그러나 산티아고는 물질적으로는 이렇게 패배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조금도 위축하지 않는다.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좀처럼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P.155
헤밍웨이는 언젠가 확실하지 않은 내세를 생각하기보다 지금 현세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무덤 너머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신을 줄 수 없는 우주의 일부이다. 종말은 암흑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고 인간 자신에게서 용기 있게 빚어 낸 실천적 윤리로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라고 말이다. 이 말에서는 여러모로 실존주의적 삶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삶은 일회적이기 때문에 더더욱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자만심은 겸손함과 깊이 연관되어 있따. 그에게 이 두 가지는 상호 배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호 보완적인 개념이다.
P.156
산티아고는 결과보다는 과정, 목표보다는 수단과 방법에 무게를 싣는 인물이다. 죽음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삶이란 어쩔 수 없이 ‘승산 없는 투쟁’일는지 모른다.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 곧 인간 실존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패배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백절불국의 정신이다.(.....)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승산 없는 투쟁’ 이라면 이러한 투쟁을 좀 더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다.
P.160
산티아고는 상어 떼한테 고기를 빼앗긴 것이 운이 나쁘기 때문이고, 이렇게 운이 나쁜 것은 동료 인간과 멀리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164
“두 팔을 쭉 뻗고 손바닥을 위로 펼친 채 신문지에 얼굴을 파묻고” 잠을 자는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 여러 비평가가 지적해 왔듯이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아주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사자는 마놀린뿐만 아니라 성서에 기록된 내용처럼 그리스도와도 합쳐지는 셈이다.
P.167
그 어느 때보다 환경 위기나 생태계 위기가 중요한 의제로 떠오르는 지금,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읽어 낼 수 있다. 이러한 문제가 지금처럼 그렇게 첨예하게 부각되지는 않은 1950년대 초엽에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인간 중심주의에 회의를 품고 자연 친화적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산티아고의 자연 친화적인 태도는 그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먼저 엿볼 수 있다. 산티아고는 바다를 언제나 여성으로 간주해 ‘라 마르’라고 부른다.
“장미는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없다.”라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한 대상을 어떠한 이름으로 부르느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 명가명 비상명
P.169
여성들이 달의 영향을 받듯이 바다도 달한테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이 대지의 젖을 빨고 살아가는 것처럼 인간은 또한 바다에서 온갖 자양분을 섭취하며 살아간다. 산티아고처럼 이렇게 대지와 바다를 자애로운 어머니라고 생각한다면 자연에 대한 태도는 달라질 수 없듯이 인간은 자연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곧 어머니를 해치는 근친상간이요, 궁극적으로 어머니를 죽이는 친족 살해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모신이나 해모신을 숭배하는 민족치고 자연 친화적이지 않고 생태적이지 않은 민족은 거의 없다.
P.170
산티아고가 낚싯줄과 낚시 그리고 미끼를 사용해 전통적인 방법으로 고기를 잡는 것과는 달리, 젊은 어부들은 낚싯줄을 떠 있게 하는 부표를 사용해 고기를 잡는다.(.....)
편리하고 쉽게 고기를 잡을 수만 있다면 젊은 어부들은 어떠한 방법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차이가 단순히 고기 잡는 방법의 차이가 아니라는데 있다. 그것은 곧 세계관의 차이요 자연에 대한 태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부표나 모터보트가 상징하듯 이 젊은 세대 어부들은 자연을 지배와 종속, 심지어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위 인용문에서 찬찬히 눈여겨볼 것은 젊은 어부들이 바다를 남성형으로 부르면서 “경쟁자, 일터, 또는 심지어 적대자인 것”처럼 부른다는 점이다. 산티아고가 바다를 “큰 은혜를 베풀어 주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부를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난다.(.....)
자연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며 또 자연의 피조물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들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한다. 즉 인간은 주체인 반면 자연은 객체이며 한낱 지배와 정복의 대상이요 더 나아가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P.171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일부요, 좀 더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생태계의 소중한 구성원일 뿐이다. 인간과 자연은 마치 육체와 영혼의 관계처럼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육체를 영혼에서 분리하는 순간 사멸하듯이 인간도 자연에서 분리되자마자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P.183
상실을 이득으로, 패배를 승리로, 심지어 죽음을 부활로 바꾸는 영웅적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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