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군산시 해망로 230 (장미동 32)
관람시간 매일 하절기(3월~10월) 09:00-18:00 / 동절기(11월~2월) 09:00-17:00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 성인 500원 / 청소년 300원 / 어린이 200원
65세이상 무료관람
군산근대미술관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있던 일본 지방은행이었던 구(舊) 일본 제18은행이
당시 조선의 인천에 1880년에 처음 문을 열고 전국에 지점을 개설하여
1907년(순종 원년)에 처음 개설되어 1911년 군산에 일곱번째 지점으로 준공되었던 건물이다.
군산항에서 미곡반출과 토지강매 등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의 조선수탈을 위한 식민지 금융기관이었던 곳이다.
1936년 조선식산은행에 매각되었고, 1938년에는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훗날 대한통운) 지점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2008년 2월 등록문화재 제372호로 지정 이후 보수복원을 통해 현재는 군산근대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 수탈의 상흔이 우리의 등록문화재가 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셈이다.
이 건물은 영업장으로 사용하던 단층의 본관과 사무동과 금고로 사용했던 2층의 부속건물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이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에, 금고는 별개의 벽돌 건물로 지어서 본관 후문을 통해 바로 연결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은행의 자본으로 조선인의 토지를 사들였고, 그 토지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에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당시 일본 제18은행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보수 복원해 놓았다.
은행 이름에 붙은 숫자 18은 일본에서 은행 설립을 허가받은 순서로 별 다른 의미는 없다.
일본 은행의 모습을 복원해 놓고 군산근대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공간활용도를 높이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생각되지만...
그래서 오히려 건물의 정체성은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다.
전북투어패스를 이용하여 무료로 이용했다.
"땅에 울림(Echoes of the Earth)" 강용면 작가 초대전
2022. 10. 25.(화) ~ 2023. 2. 5.(월)
강용면 작가는 군산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한국미술 청년작가 대상, 중앙 미술대상전 우수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등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한 이력이 있다.
또 한국미술 독일순회전, 호주 현대미술전, 싱가포르 아트페어 등 해외에서 개최된 전시에서도 꾸준히 활동해 왔다.
이번 전시는 강용면 작가의 26번째 개인 전시회로 40년 활동기간에 고향인 군산에서는 첫 전시회다.
뒤쪽 벽면의 메인 작품인 "울림-고군산열도"는 군산 선유도, 무녀도, 신시도 등 63개 섬으로 구성된 고군산군도에서 볼 수 있는
붉은 낙조의 풍경이 새만금 방조제로 인해 사라져 버린 갯벌과 자연환경의 변화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바다와 섬을 묘사했고 붉은 낙조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경고의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붉은 색을 넓게 사용하였다.
작품명 요정1 (2021)
나무 프레임에 엑포시가 입혀진 헝겊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2m 가로 세로 각 1.2m의 크기이다.
독창적이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명 땅에 울림(Echoes of the Earth) (2022)
스틸 프레임에 우레탄 페인트를 분사해서 만들었다. 높이 2.9m 가로 4.2m 세로 3m 크기의 작품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분쟁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경제 교류 활동이 다른 국가에게 생기는 식량난에 관하여
옥수수 형태를 빌려 왔고
푸른색은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는 식량난에 대한 경각심과 잘 헤쳐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를 담았다.
가까이 보면 옥수수가 다양한 사슬에 얽매여 있어 헤쳐나가기 힘든 국제문제의 복잡한 구도를 표현하는 듯 하다.
작품명 요정2 (2020)
판넬 나무 우레탄 도색 작품이다.
작품명 만인보 (2021)
레진 우레탄 도색 작품이다.
작가의 작품관인 "온고지신"의 의미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은 작품들로 구성돼 있으며
코로나19와 분쟁, 과도한 발전으로 인해 많이 달라지 인간의 삶이 자연이 주는 벌 또는 경고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품명 요정3
판넬 나무 우레탄 도색 작품으로 가로 세로 50cm 크기다.
군산을 찾은 관광객은 물론 군산 시민에게도 우수한 미술 작품을 관람할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딱 여기까지가 이름에 걸맞는 미술관 본연의 공간이다. 이후의 공간은 근대역사관의 모습으로 180도 변모한다.
전시 뒤편 공간에는 당시의 사진과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건물역사 전시실이 있다.
당시 지점장실을 들어가 본다.
1870년 일본 나가사키에 있던 대규모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출발한 은행인 18은행은
나가사키가 무역항으로써의 기능을 잃자 1878년 국립 18은행으로 변하여 무역과 상업을 통한 수탈을 위해 조선에 진출했다.
18은행의 역할은 무역에 따른 대부업이 주종을 이루었고 초기에는 사업을 빙자하여 싼 이자의 대출을 받은 일본인들이
그 돈으로 조선인들에게 토지를 담보로 고리대금업을 하여
원금 상환기일을 못 맞춘 농민의 농토를 갈취하는 수법으로 빼앗은 논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스팔트 도로는 어디에 건설되었을까? 서울? 인천?
바로 이곳 군산이다.
일제는 쌀을 더 많이 약탈하기 위해 고종에게 전군가도(全群街道)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전군가도는 전주와 군산을 잇는 도로다. 전군가도는 1908년에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아스팔트 도로다.
구) 일본 제18은행 건축 수리복원과정과 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본관의 관람을 마치고 뒤 별관 2채는 안중근의사 여순감옥 전시관과 금고 관람이다.
어떤 연유로 여순감옥을 이곳에 재현해 놓았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공교롭게도 방문한 날 바로 뮤지컬 영화 "영웅"을 보기로 되어 있어서 관람에 조금 더 열심이었다.
1층은 여순(뤼순)감옥 체험실이고 2층은 여순(뤼순)감옥 재현관으로 되어 있다.
중국 다렌 시내에서 45km 떨어진 여순(뤼순 旅顺) 지역은 랴오뚱 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여순(뤼순)감옥은 총 275개의 감방에 2,0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규모로 지어졌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항일 지사를 사상범이라는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잡아 이곳에 수감했다.
여순(뤼순)감옥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어 눈길을 끈다.
명문가의 자손이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회영 선생, 역사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신채호 선생이 수감돼 있던 흔적도 있다.
일본의 만행이 가장 끔찍하게 드러나는 곳은 사형장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사형을 집행하는게 아니라, 세 사람을 나란히 세워 목에 줄을 동여맸다.
사형을 집행한 후에는 목숨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느다란 쇠꼬챙이를 목구멍에 꽂아 보았다.
시신은 사형장 아래 나무통으로 떨어뜨려 반으로 접어 넣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당시 사용했던 도구와 사진으로 과정을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뤼순 감옥 - 다음백과]
이토히로부미 저격 딱 5개월만인 1910년 3월 26일 이토가 사망한 시각에 맞춰 사형이 집행되었다.
일제는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조선이 저항을 하고 있다는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숨기기에 급급했다.
당시에 옷을 입고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겨울인지라... 그냥 다들 지나치신다.... 우리도 패스!
안중근 의사도 훌륭하지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는 조마리아 여사도 정말 비범한 분이셨던 것 같다.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여순(뤼순)감옥을 재현해 놓은 2층으로 올라가본다.
2층에는 감동과 응원의 메시지들이 붙어있고...
"우리들이 단 한 번만의 의거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을 꺾으려 해도 꺾이지 않고 올해 안 되면 내년에 해보고 그것이 십년 백년이 걸려도 좋다.
우리가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아들 대에 가서 또 손자 대에까지 가더라도
기어이 대한국의 독립권을 되찾고 그런 다음에야 그칠 것이다."
<두만강 전투시 안의사가 동지들을 격려한 내용>
정면으로 안중근 의사의 여순(뤼순)감옥 독방을 재현해 놓았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당시 재판을 본 영국기자는
"일본의 근대문명도 시험대에 올랐다.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고 자유로운 얼굴로 재판장을 떠났다"고 작성하며
안중근 의사를 결의를 엿볼 수 있게 했다.
안중근 의사는 수감 생활 중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평화를 꿈꿨던 것이다.
집필이 끝날 때까지 사형을 미뤄주겠다던 일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사형 집행 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라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유묵을 남긴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일이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일본의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안중근의 사형 집행 후 시신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물론,
안중근의 가족들을 30년간 회유하고 협박해
둘째 아들 준생을 이용해 "안중근의 아들이 이토에게 사죄했다"는 기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아직도 유해을 찾지 못해 효장공원에 비어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
독립이 되면 반장(返葬)해 달라는 유언은 113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죽거든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데려가다오.
독립된 조국에서 편히 잠들고 싶다. 꼭 부탁한다."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은 40여명이 독립운동에 힘썼으며 건국 훈장을 받은 인물만 17명에 달했다.
조상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청렴결백을 강조했던 것으로 밝혀져 더욱 큰 울림을 주었다.
"누가 죄인인가?"
안중근 의사가 밝힌 이토가 죽어도 마땅한 명백한 죄목은 무려 15가지나 된다.
이런 많은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은 너무 마음이 아프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애비는 비록 이 두 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쐈지만
우리 자식들의 두 손은 기도하는 손으로 모아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동양평화입니다. 전 일본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우린 너무도 가까운 이웃이기 때문이죠. 다만 제국주의 야욕을 당연시하는 일부 사람들이 미울 뿐입니다."
재판장: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안중근의사: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재판장: 그런 원대한 계획이었다면 범행 후 체포당하지 않으려 했을텐데,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안중근의사: 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안중근의사의 본명은 안응칠이었으나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 한곳에 머물러 있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안중근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가 개명하였다.
별채 2동 중 나머지 하나는 은행금고다.
일본의 은행금고 보면 뭐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바로 옆이니 슬쩍 보기로...
금고답게 두꺼운 철제 문으로 되어있고... 별 감흥은 없었다.
뭐 있겠냐 싶어서 그냥 기념사진 한장 찍고 돌아서려다가... 슬쩍 안을 들여다 보았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듯 하여 한동안 자리에 머물러서 멍하니 있었다.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
근대역사관의 본질을 잊고 있었다.
일본 것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우리 민족의 고통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아픈 상처를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렇게 군산근대역사투어에서 또 하나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