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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 법
1971.08.16. 유영모 선생
로마 8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단죄라는 건 내 죄가 요만한 정도로 졌다. 그걸 단정하는 겁니다. 꼭 죄가 요만큼 하는 죄를 네가 졌다. 그게 단죄에요. 그런데 이게 판결 받았다든지 정죄를 했다든지 매양 그렇게 원 뜻으로 되었는데 여기는 단죄라고 했어. 그 단죄를 받는다고 그래.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은 결코 단죄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 목숨 아무 고장 없이 목숨이 자꾸 돌아가는 거, 그렇게 하게 하려는 게 생명을 누린다는 소리야. 누리게 하는 그 순전히 목숨이 순한 게 돌아가기만 하면 거기는 반드시 성령이 함께 하세요. 그래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그 생활법이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 말씀이 돌아가게 되는 때는 그 생활 하는 데는 반드시 성령의 법이 그걸 돌려서 성신이 늘 함께하는 목숨이 돌아가는 거예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이라 그랬습니다.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 ‘해방을 해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법에 성신과 함께 숨이 돌아가고 말씀이 돌아가고 그러한 그 성신의 법인데 그 법칙으로만 돌지를 못하면 그와는 반대, 반대의 무슨 법을 가지고 숨이 돌고 말씀이 돌게 되요. 원칙으로 숨이 바로 가장 순하게 돌아가는 그 숨, 그렇게 쉬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를 희망해 나오고 남이 그렇게 잘 내놓은 말이 귀로 순하게 들어오는 그 말씀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그 성령의 법이 거기 함께해서 돌리는 말 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갖게 하시고 그 아드님도 이 세상에 보내시는데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꼭 죄인 된 인간의 모습과 똑같이 갖게 하셨어요. 그 육체를 인간의 모습과 꼭 같은데 예수 역시 살 몸둥이를 가졌단 말이야. 육체, 육체를 죽이심 으로서 예수의 몸도 오신 것 은 종당 피 흘려 죽으시려고 오신 거니까. 죽으심으로서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왔다가 죄인 사람의 몸을 두고 하셨다가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시려고 그 가져오신 몸을 죽였단 말이야.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서 사는 우리들이 성령을 따라서 살 그럴 거 같으면 그 우리들, 그 속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우리 속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 속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 졌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성령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마음을 씁니다. 그런데 이 번역이 이 사람이 육십년 동안을 보던 그 번역 그 말이 참 이거 보고서 참 뜻을 깨닫기 아주 쉽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 을 참 새로 번역 하는 게 꼭 필요한 것이 필요하게 이루어 진겁니다. 법을 행할 수 있느냐? 행할 수 없느냐? 로마서에 이건 대단히 문제가 많이 있었는데 원문이 이렇게만 처음부터 되었으면 그 뜻을 바로 알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번역이 이런 뜻은 아주 순 합니다. 이 사람 여기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해가지고 그걸 퍽 말씀 하고 또 말씀 하고 이렇게 저렇게 맞춰서 어떻게 돌아가는 거, 그것도 자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씀을 고쳐가지고 몇 절 외우기도 하고 그리고 야단을 했는데, 여기 이 번역으로 보면 그렇게 할 까닭이 없었어. 번역이 이쯤 되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아주 가장 순하게 깨달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더더군다나 오늘 아침에 오 집사께서 말씀을 하시는, 나 오 집사 말씀 들으면서도 여기를 자꾸 생각 했습니다. 번역이 아주 잘 된 거 같다. 그런즉 성신의 법, 그건 생명의 법입니다. 율법의 법, 율법으로 해서 그걸 율법 그대로 하면 산다. 그것이 율법인데 (끊김)
같은 결과를 갖는다. 그겁니다. 그것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하면 그 법, 그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는 그 법, 그럼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는 건 성신이 함께하시는 생명의 법이에요. 그러나 율법적으로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고 조금도 틀림없이 율법에 나타난 그것대로 실행을 해보자. 그건 어떤 귀퉁이가 틀리면 그게 틀리고 말지. 꼭 맞춰서 실행이 되지를 못한다고. 제일 걱정은 그게 사망의 법이야. 생명이 구원 받을 수 없어. 그거 아니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법으로 하면 그 성신과 함께 사는 게 되기 때문에 그 생명의 법이 되요. 그런다고 해서 그건 믿음이라. 실행 할 수 없는 율법 이라는 걸 그건 성신의 생명의 법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 어려운 것이 이렇게 내려 온 건데 여기 번역대로 하면 그렇게 어려운 것처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쳐 말하면 요, 행할 수 없는 율법의 법이라는 그 말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성신이 함께하는 생명의 법이라는 그것이 율법을 행해서 그대로 하면 잘 살 것 같다.
그러나 율법은 실행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 그렇게 들릴게 왜 애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의 작정을 모두 어째 그렇게 하셨나요? 그것은 대개 율법으로 정해진 게 육신을 가지고 사는데 살 몸둥이를 가지고 사는데 밥 먹고 싶고 다른 거 뭐 하고 싶고 그런 몸둥이 인 데 그것을 생명의 법, 영원히 사는 것이 충실하게 되는 법, 죽지 아니하게 하려는 법, 거기 돌아가게 하는데 모든 걸리는 허물된 거 죄 된 거 그럼 법을 어긴 거 그것이 없이 성신의 법이라는 데로 은혜로만 입어 살아나가게 되는 그쪽으로 가서 사는 거, 그건 믿음에 사는 거예요. 뭐를 실행을 해서 맞추겠다는 게 아니고 믿고서 하나님을 따라만 가는데 그대로 생명이 점점 커져 점점 높이 올라가, 그렇게 하는 법이에요. 그러니까 율법적으로 맞추려고 만든 거는 밤낮 틀린다고 그래서 실행 할 수가 없다. 그러면 반대로 성신이 함께 하시면 진리의 뜻대로 숨을 쉬고 피를 흘려서 들어가면 험한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영원 생명의 법으로 살아나가는 그거라고 그러는 건데 복잡하게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이 다른 말로하면 쉬운 게 있어요. 은혜라고 하는 그것은 성신이 함께해서 진리의 올을 쫒아서 성하게 올라가 그 옳게 숨을 쉬고 옳게 말씀이 들어가고 그렇게 하는데 그렇게 하는 정신은 예수 믿는 게 되요. 그런 정신으로 예수 믿고 가면 그 길은 기름 바른 길이 되요. 기름 발랐다는 건 그리스도의 길이 된다는 거야. 예수는 그리스도야. 예수를 믿어서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 나가요. 그리고 속 알 만이 길러지는 게 그리스도 길이에요.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지를 않아요. 그러나 정말 갈 길은 그 길 뿐이에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를 믿음으로 죄의 정함을 받지 않고 구원 길로 들어가서 영생의 나라로 들어가고 만다는 거예요. 그래야 은혜로 구원 한다는 거예요. 믿음만으로 구원 얻는 다는 소리입니다. 그게 그 소리입니다. 하려해도 틀리고 하려해도 틀리고 하는 그 율법을 실행 한다는 거, 그걸 쫒는 게 아니야. 그 까다롭게 고르지 말고 그리스도 길을 데리고나가. 그리스도 길 이라는 것은 그 길에만 좁은 길이니까 험하지. 험한데 미끄러지지만 않기를 주의를 하고 착착 왼발 내디디고 바른발 내디디고 가면 가장 순하게 그 길을 제가 통과해요. 많은 사람이 그걸 거쳐 가지는 않아요. 그러나 적은 사람이 가더라도 그건 생명길이야. 생명 길 밟고 나가면 뜻밖에 그렇게 어려운거 아니에요. 뜻 밖에 생명이 있는데 언 듯 보기에 좁은 거 같애. 그러나 순하게 나가면 순하게 나가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건데 이것이 율법이니 사망이니 이러는 거 보담도 오늘 아침에 오 집사께서 말씀하신 그거, 사람 인생은 어떤 것 인고 하니 잘 살아가지고 마지막 썩 잘 끝을 내는 거야. 잘 살아가지고 마지막 썩 잘 끝을 낸다는 거야. 이거 죽는 거야. 살아가지고 죽는 거야. 그럼 뭣이 죽는 거야? 이 껍데기 벗어내 버리는 걸 죽는다고 그래요. 혈육을 벗어 내 버리는걸 죽는다고 그래. 생명이 죽는 게 아니에요.
그 속에서 기른 속 알이 이걸 벗어. 이것을 내어 던지고 흙에서 난 것은 흙에 내 던지고 이것이 자꾸 솟구쳐 올라가는 겁니다. 솟구쳐 올라가는 것이 하늘나라 들어가는 문은 좁아요. 넓지 않아요. 좁은 문으로 쑥 빠져 나가는 거예요 그래 생명의 법을 쫒아 생명을 쫒아 가는 게 그게 은혜에요. 은혜 내가 애를 써서 가는 게 아니니까 생명의 법을 쫒아서 가서 이 벗어 내던지는 거 이 땅에서 나온 거 땅에다 내 던지고 땅에다 던지고 기른 목숨만이 길이 좁고 문이 작은 거 같아도 실상은 디디고 가면 그 문을 나가보면 순하게 나가져요. 이 육체가 나올 때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그건 몹시 괴로운 거예요. 이건 좁은 문이고 험한 길이지만 가장 순한 거예요. 가장 순하게 그 문을 벗어져 나가는 게 영생의 세계로 탄생하는 건데. 그런데 오늘 아침에 오 집사가 말씀한대로 죽어야 해요. 죽어야 하는 게, 이게 그 율법에 길이 도저히 범하기가 쉽지 아주 완전한 실행이 어렵다고. 그 사망의 법으로 가려니까 그래. 아주 죽어버려. 그 말은 사망의 법을 내던지는 거야. 내 던져. 그러니까 죽어버려. 내던지고 나가면 다할 데 없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그 생명의 법으로 살자는 거야.
그 생명의 법으로 올라가, 올라가 입니다. 자꾸 올라가 좀 쉬었다 가는 것도 없어요. 자꾸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 그것뿐입니다. 오른다는 것이 옳다는 것같이 말이 되지 않았습니까? 오르고 오른다는 건 옳고 옳다는 것이 그 성질이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죽어야 되요. 아주 죽어야 순하게 사는 길을 가는 거예요. 그럼 자꾸 올라가요. 아닌 게 아니라 그 정욕 뭉텅이, 거기에 재미난 게 있다고 해서 그걸 놓지 못하고 거기에 가다가는 끌리고 끌려서 그것들의 종이 되고 말아요. 그것을 가르쳐서 율법이라는 건 실행할 수가 없다. 하는 결론을 갖는 거예요. 도저히 실행할 수가 없다. 그럼 죽어야해. 실행할 수 없는 거, 그건 내버려야 돼. 내버려, 그걸로 내 속 알이 자라는 거 아니라면 내버려. 그리고 생명의 법으로 생명 길을 쫒아 올라가야해요. 그건 길이 험해요. 막연해서 나갈 구멍도 대단히 적은 거 같고 여간 봐가지고는 그리로 나갈 거 같지 않아. 그러나 의심할거 없이 믿고 나가 그 험한 길로 가고 또 문이 작아, 좁아. 배낭이 부딪치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믿음 그대로 나가 봐요. 그럼 뜻밖에 순하게 나가지는 거야. 그것은 크게 거듭나는 겁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한테 사람은 거듭나야 한다. 니고데모는 어떻게 거듭나겠습니까? 어머니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들어가서 다시 어머니가 두 번째 해산을 하게 하겠습니까?
그런 네가 이스라엘에 가르치는 사람이 돼서 거듭나는 이치도 모르고 어떻게 가르치겠냐? 거듭나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다시 말씀도 안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친다고 하는 네가 그걸 그렇게 모르고 거듭나는 걸 모르면 어떻게 선생 노릇을 하겠어? 거듭나야 한다. 그러니 거듭나는 걸 모르니 자꾸 깨고, 깨고 자라는 대로 깨고, 깨고 그러는 겁니다. 자꾸 깨 나가는 게 거듭나고, 거듭나고 거듭나는 거지요. 당장 우리가 자꾸 거듭나서 사는 것을 알 수 있는 게 아이들이 철 안 났다고 할 적에 네가 나이가 몇 살인데 조금도 자라지를 않고 속 알이 달라붙어 가지고 속 알이 우리가 길러야 하는데 자라지를 못했다는 거야. 말라붙었다는 거야. 나이는 몇 살인데 속 알이 아주 달라붙어 가지고, 또 속 알 머리가 없이 그래 자라지를 않는 게 속 알에 머리가 없어. 말라빠졌지. 자라기는커녕, 이렇게 되. 그럼 기르는 부모가 보면 답답하거든. 너 나이가 몇 살인데 이제는 철 날 때가 되었는데 그저 속 알이 달라붙어 가지고 그러고 있으니 저런 못난 자식이, 그 말이 다 어떻게 된 말입니까? 못났다면 아직 어머니 배속에서 못 나왔어요? 그 말이 가만히 들어보세요. 이상한 말 아닙니까? 그거 하늘에서 내려온 말이에요. 네가 나이가 몇 살인데 못난 자식이라. 난 사람더러 어째 못났다고 말해? 못생긴 자식이라. 못난 자식이라. 속 알이 달라붙었다. 속 알이 달라붙은 걸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생명 지키면서 속 알을 길러야해요. 자꾸 속 알을 길러야해요. 길러야 커지지. (끊김)
삼복이 나고 입추가 되고 했으니 요새 더위 끝머리가 더 늙은 더위가 되서 몹시 더웁디다. 그러나 쓸데없어. 벌써 입추야. 가을은 시작해. 그런데 그게 번 데가 더위가 다 가는데 복이 나고 하는데 입추되고 한 그때 대낮에 뜨거운 것은 아주 더 뜨거워요. 땀이 나도록 훨씬 오늘 같은 날이 제일 지내온 더위보다 훨씬 더 땀이 더나요. 그러니 늙은 더위라고 노염 이라고도 하는데 늙은 더위가 더 뜨거워요. 해는 벌써 얕게 뜨기 때문에 가장 더운 때 마루에 볕 하나도 없지요. 죄다 나가 버렸어요. 벌써 요새는 무던히 남창으로 볕이 들어와요. 볕이 들어오는 건 볕이 얕이 뜨니까 볕이 높이 떠야, 곧이 곧장 떠야 해요. 마루에 겨울에는 그중 얕게 뜰 때는 볕이 여기까지 와요. 그런데 더워지는 대로 날이 길어지는 대로 자꾸 나왔던 볕이 저리 물러가요. 물러가서 하지 때 같은 때는 도무지 마루에 들어오지 못해요. 맨날 꼭대기 높이 해가 떴으니까, 어째 거기 뭣 이가 동창 쪽으로 기웃하고 들어올 수가 있어요. 그래 벌써 이제 해가 얕이 떴으니까 벌써 다시 이제 이 남창 쪽으로 이렇게 해서 가루 비춰 들어오기를 벌써 해요. 무던히 마루로 기어들어왔어. 그러니까 퍽 서늘해 졌는데 아직 여기 공기 속에 그저 남아있는 그 뜨거움이 많기 때문에 정 낮에는 훨씬 더 덥단 말이에요.
‘그 아까 하신 말씀에 옛날에 살 속에 빠진 것이라 했다고, 그렇게 선생님 번역 같이 하셨지요? 그러면 그 뜻은 우리가 훨씬 더 알기 쉬운데, 지금 번역보다.’
‘제가 그 몇 절 보고 그렇게 해 놓은 건 그렇게 해 놔야, 빛이 해박하게 되니까 그런 거예요.’
‘옛날 그걸 우리가 지금 가져야지요.’
‘그거 내가 나 가지고 있는 책에도 그거 꼭 있었는데 지금 그 책이 안 가져 왔어요. 또 그거 한참 할 때는 내가 입을 딱 떼면 그대로 외웠는데 그런데 이제는 한동안 안보니까 그대로 외워 질려는지 알 수도 없고, 어제 오 집사가 말씀한 거 아주 죽어야 한다는 거야.’
그 율법 그쪽에 그걸 의지해서 나가지를 않아요. 생명의 법으로 들어가서 믿음으로 가서, 그리로 가면 된다고, 그래 한쪽으로 죽고 한쪽만 살려나가야 한다. 이거야. 그럼 순하게 나갈 수 있다고. 아주 죽어버려. 그럼 사는 쪽으로만 전심전력해 나가. 그럼 길이 험하고 끝에는 문이 작지만 믿음을 가지고 걸어봐. 실상 걸어보면 걸리는 게 조금도 없는 길이요. 문에서도 결코 걸리지 않고 순하게 나가버려요. 다른 건 도무지 더하는 게 없습니다. 믿음에는 도무지 다른 거 더하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세상 떠날 시간이 가까운 것은 자꾸 느껴지니까 단단하게 됩니다. 단단해. 그래서 이런 마음 가지고 날마다 사는 사람이 적어요. 적기는 적지만 나이 들면 가는 수밖에 없어요. 가, 가면 과히 어렵지 않아요. 걸어가요. 얼마 안 있으면 나는 문 볼 줄 압니다. 내 앞에 문이 있소. 문이 크지 않을 테지요. 적을 테지요. 그것도 믿음으로 적다고 생각이 안 이를 테지요. 실제로 나가보면 순하게 나가질 겁니다. 나는 그 마음만은 날마다 때때마다 그 마음 분명히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건 뭔고 하니 기도하는 겁니다. 생명을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길이에요. 길 생명 길입니다. 기도하는 생명 길로 타박타박 가면 가장 순하게 거듭나고, 거듭나고 거듭났어요. 나중에는 영이 숨 쉬고 그 나갈 좁은 문으로 쑥 나갔어요. 순산이에요. 문 좁은 건 난산일 것 같아요. 그러나 나가보면 순하게 나가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걸 다시 좀 생각해 보세요. 그리스도의 원 뜻은 기름 바른다는 거예요. 기름 바른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렸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게 뭘까? 구세주가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를 인도해서 율법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생명의 법으로 은혜로, 순하게 갈수 있게 하는 그런 메시야가 온다는 거야. 그리스도가 온다는 거야. 그런데 말은 기름 바른다는 거야. 기름 바른다는 소리는 길을 닦는 다는 소리에요. 영생의 나가는 길이 그리스도인데 그 기름 바른다는 건 길을 닦았다는 거예요. 늘 닦아놔요. 그게 메시아에요. 그럼 메시아가 그럼 내 앞에 서서 기도를 끌어들이면 아주 항상 고맙게 끌어드는 그거에요. 길의 앞잡이, 우리가 딛고 갈길 어디까지 이끌어주는 그게 그리스도에요. 기름 바른 다는 거는 길을 닦아 준다는 거예요. 길을 쓸고 닦아. 걸림돌 없이 그게 기름 바르는 거야.
그런데 길을, 길을 닦는 거야. 길 닦아, 길이 길 되어 늘 열려가지고 있으라고 지도하는 게 되요. 그게 생명의 법이에요. 그게 믿음의 은혜에요. 우리가 애써서 뭘 실행을 해서 거기 맞춰서 그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은혜로 되는 거지. 그 무엇에 꼭꼭 뒤 맞춰놔서 우리가 실행한 결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맞춰서 그렇게 가려고 하는 그 소견이 어디가 있는가 하면, 잘 맞추면 이를 남긴다. 이것도 맞춰서 이 남겨보자. 저것도 맞춰서 이 남겨보자. 장사하려고 하는 거와 같은 거예요. 그렇게 맞추려는 마음만 드니, 그렇게 이만 남기려고 맞추니 꼭꼭 맞아지는 세상이 아니에요. 그래 사망의 법이에요. 그 허영만 자꾸 들뜨게 하는 법이에요. 그래 종당 그대로 시행이 안 된다는 거야. 그런데 그런게 왜 마련이 되었을까요? 율법이라는 걸 왜 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이 나요 율법이라는 건 율법이 뭐 하늘에서 안 하드래도 우리가 뭐 좀 하려고할 때 몇 사람이 하려고 할 때 무슨 순서는 정해 가져야 해요. 학교에 교육을 할 때 과정표는 꾸며놔야 해요. 무슨 시간에 뭘 가르치고, 무슨 시간에 뭘 가르치고 그거 꼭 짜 놓아야 해요. 짜 놓은 대로 해야 너무 쓸데없는 거 하지도 않고 꼭 해야 할 거 빠트리지도 않고 꼭꼭 과정표대로 그렇게 해야 종당에는 졸업을 하는 건데 그대로 꼭 꼭 하기는 어렵지.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해. 그러나 그건 대개 그것도 역시 과정 짜는 것도 잘 되게 해야 되. 과정표를 잘 못 짜면 시간 못하지. 그래 법이라는 건 그쯤 되는 거야. 먼저 과정표를 짜 가지고 그대로 착착 해나가는 거 그래서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러나 그게 과정표를 잘 못 짜면 그대로 꼭꼭 되지를 못해요. 그대로 실행하기가 어려운거야.
그래 원 학문이 온전히 되는 것. 그때, 그때 부분, 부분 과정표를 꼭 짜서 그렇게 해야겠지요. 전체로 모든 것을 모아가지고 정말 생명이 자라는 거기에 지혜를 두도록 하는 그 상식, 그것을 얻어서 이루는 것은 그것도 과정표 적으로만 되는 것은 결코 안 돼. 그것은 뛰어 넘어가, 뛰어 넘어가지요. 한정 아니 하고 연구하고 한정 아니 하고 생각해 가지고 그 생명의 정도는 완전히 이런데 까지 가야 할 거예요. 그 이치는 마찬가지니까 규칙적으로 정한 거 꼭꼭 하기는 해야 하는 데 그것으로 생명이 완성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실행이 안 된다는 건 사람이 그 생각을 하는데 당장 공부한 결과에요. 졸업 논문도 써봤지만 그게 그대로 순하게 받아져서 인제는 무슨 학문을 얻는다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아니야. 상을 얻는 거고, 거기 틀려서 여간 상을 얻지 못하고 아주 몸이 비비꼬이게 되는 형편이고 그 뭘 뜨게 되는 형편은 불안하고 괴로운 건데. 그 정한대로 법대로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안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학문도 그 과정표 적으로 하는 그것이 꼭 있고 부분 부분의 학문은 과정표를 짜가지고 그대로, 그대로 해야지요. 대강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건 아니거든. 언제든지 낙제 자는 수효가 적고 그래도 급제자의 수효가 많은 거거든. 어찌되었든지 규칙적으로 되어 나가는 거는 괴로운 거예요.
학문도 역시 그거 뚝 뚝 뛰어넘어가서 아마 학사 공부라든지 박사 공부보다는 그 이상으로 대학원 올라가서 그 공부쯤 되면 그건 좀 더 무슨 규칙적 율법적 그걸 떠나서 참 생명적 자유연구 적으로 될 겁니다. 신앙의 은혜로 되는 거 모양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오늘 저녁에 이렇게 생각하는 거 이건 가끔 생각해 보세요. 우리 길 가는데 아주 법칙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죽는 거 너무 겁내지 말아요. 죽는 거 걱정하는 걸로 우리 생명이 자리지는 못해요. 그거 할 적에 죽지는 않고 살기만 해야겠다는 건 그건 율법적 생각이에요. 그거 다 내버려. 그리고 믿음의 생활, 그리스도의 생활, 그 길을 밟아 나가요. 그게 믿음이에요. 믿음에는 겁이 없어요. 믿음으로 나가면 험한 길 같으나 실제 지내보면 잘 딛고 갈수가 있어요. 길이 좁은 거 같으나 오히려 순한 길이예요.
그 길로 들어서서 착착 가다보면 오히려 순해요. 나중까지 나갈 문이 있는데 그게 좁은 거 같애. 그러나 실제 나가봐요. 가장 순합니다. 그렇게 압니다. 그 고쳐말하면 이 살, 살과 있다는 이 법, 그건 순한 거 같으나 그게 꼭꼭 들어맞지 않아요. 자꾸 틀려요. 죄다 내버려요. 아주 마음도 죽어버려. 마음으로 그쪽 그렇게 하는 거는 죽여 버려. 사망의 법인데 사망도 내버려요. 내버리면 생명의 법으로 생명의 은혜의 길에, 어떻게 보면 험한 거 같애. 그러나 실제 디뎌 봐요. 믿음으로 디뎌 봐요. 순합니다. 그래 그게 제일인거야. 그 제일 옳은 줄거리 붙잡고 오르고 올라가야해. 옳게 가야지 맨 끝에서 나갈 데가 있는 건데, 구멍이 좁게 있는 거 같아. 나가기 대단히 어려운거 같애. 아니야. 그저 믿음으로 나가야해. 가장 자연하게 순하게 나가요. 이걸 벗어내 버려. 그래 정신만 나가. (그러나 의심이 생겨.) 그걸 생각하면 글쎄, 믿음이니까 나갈 길이 있을 거 같고, 올라갈수록 험할 거 같은 건데, 급기야 문이 있기는 한데 문이 있어야 시원하게 널찍하게 그렇게 있지를 않아. 대단히 조그만 문이 있는 거 같아. 아 저거 나가질까? 이렇게 되는 거야. 그러나 믿음으로 나가 봐요. 뜻밖에 곧은 거 보다 대단히 쉽게 나갈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