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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1장
1. 흩어진 나그네(1-2)
베드로 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지로 흩어진 성도들에게 쓰는 서신입니다. 그것은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서신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권면해야 할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닥쳤던 박해와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서 나그네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어떻게 이기라는 것을 말하기 전에, 나그네라는 성도의 본질에 대해 먼저 말함으로써, 성도에게 있는 고난과 어려움들은 당연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라는 것은 편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그네에게는 그가 머무는 모든 곳이, 떠나야 하는 곳일 수밖에 없습니다. 곧 세상에 정착할 것이 없는 것이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기업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의 삶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나그네’로 부름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알아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나그네라는 성도의 본질을 말함으로써, 어려움과 고통의 환경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의 환경에서 세상은 나의 나라가 아님을 인식하고, 주님의 나라에 돌아가 영원히 사는 것을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성도라는 존재에 대해, 참으로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2절의 내용을 보면, 나그네 된 성도의 존재가, 서글픈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절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2절의 말씀은 나그네 된 성도가, 어떤 은혜를 누리는 자인가를 보여줍니다. 성도는 세상에서는 나그네이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맏았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의 행실도 보지 않으시고, 돈도 보지 않으시고, 그 어떤 조건도 보지 않으시고, 택하시고 부르시는 은혜 때문에, 나 같은 자도 하나님의 택함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다른 세계에서 살도록 하셨기 때문에, 참으로 복된 존재가 나그네인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이 말씀이, 과연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으로 다가옵니까?
지금 베드로는 고난과 어려움에 있는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부르면서, 또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라는 이 호칭 속에,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것이 들어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성도라는 이 호칭에 담겨 있는, 놀라운 은혜와 권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항상 문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대한, 무감각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도, 택한 자만이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은혜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그 마음이 빠져들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은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신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기에, 은혜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시큰둥할 뿐입니다.
로마서 5장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란 진노의 대상이고, 멸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를 얻게 하셨습니다. 원수에 불과한 우리에게 이러한 은총이 쏟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 안에 있게 된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감사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와 비교할 만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피 뿌림의 은혜는 멸망의 자식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 뿌림의 은혜만으로는 성이 안찬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다른 것을 향하고 있습니다. 마치 10원짜리 사탕만 먹고 싶은 아이에게 만원짜리를 주면, 버려 버리고 십원짜리 달라고 졸라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도하신 그 자리가, 얼마나 엄청난 자리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직 세상만 보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붙들렸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구출 받고,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면서, 진리의 길로 인도받는 자리로 불려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권세에 붙들려서, 멸망의 권세로 달려가던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를 모릅니까? 이러한 은혜를 입었는데, 또 뭐가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만원짜리를 손에 쥐어 주셨는데, 10원 안준다고 불평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우린 너무 어리석고 무지합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마음을 하나님께 두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일에 대해서도, 낙심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달라지게 했는가를 보지 않기에, 세상을 보면서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주셨는데도, 좋은 것을 좋을 것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무지한 것이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피 뿌림의 은혜 안에 있다면,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소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속에서 자신을 나그네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그네이기에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와 어려움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얻는 것과 비할 바가 없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를 택하시고, 피 뿌림을 얻게 하신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은혜와 평강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2. 삶의 내용물(1-2)
대개 보면 성도의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부분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있으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성경이 요구하는 성도의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삶을 그런 방향으로 이해하게 되면,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힘으로 넘지 못할, 벽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서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서에서는 성도의 삶을 위해, 뭔가 실천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이 성도를 어떤 삶으로 이끌어 가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성도가 실천하는 좋은 행실이 아니라, 성도에게서만 보여지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도 실천할 수 있고, 보여지는 것이라면, 성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성도의 실천을 보면서, ‘믿는 사람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다’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다면, 그것은 하늘의 삶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곧 하늘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내고,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의 삶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의 삶은,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이란 인간의 의지에 의한 행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로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실천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을 하나님의 선물의 결과물로 바라본다면, 나에게서부터 나오는 나의 행함이 아니기에, 그것을 경쟁과 자랑의 도구로 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채워 가시는, 삶의 내용입니다. ‘내가 행동을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채워 가신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라고 생각한다면, 아직까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그네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그네란 본향을 소망하면서, 자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할 곳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을, 떠나야 할 곳으로 바라보면서, 본향이라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은,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결과입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삶의 방식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인해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나그네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채워 가시는 삶의 내용입니까, 아니면 나의 행함입니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이 채워 가시는 삶의 내용인 것입니다.
2절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여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피 뿌림을 얻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나와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가능한 은총일 뿐입니다. 그래서 피 뿌림을 얻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이, 성도의 삶에 채워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죽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피 뿌림이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문설주에 피를 뿌렸을 때,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그냥 넘어갔습니다. 이유는 피를 보고, 그 집을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피 뿌림을 얻었다는 것은, ‘너는 죽었다’는 것을 선언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은 나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는가?’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 앞에 죽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죽은 자일 때 주님의 십자가가, 놀라운 은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죽은 나에게서는 선한 것, 의로운 것은 나올 수가 없는데, 나그네로 살아가게 되고, 본향을 소망하게 되고, 십자가로 항상 기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우신 삶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다스리고 징계하시고, 고쳐가시면서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내가 살고 싶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부르셔서, 살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성도의 삶은 내용은, 예수님이 세상을 사셨던 것과 같은 본질의 것으로 채워집니다. 골 1:24절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덜 받으신 고난이 있어서, 그것을 사도가 마저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되어질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 고난을 우리의 육체, 곧 삶에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예수님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성도의 삶에 채워서, 계속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스스로 성도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삶을 요구한다면, 성도라는 자신의 말이 거짓말임을 증거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고난은 육체적 괴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어둠의 세력이 주관하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소망하고 바라보는 것을 보지 않고, 전혀 다른 세계를 소망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이, 이미 고난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시고 계획하신 삶을 살아가는 자로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의 간섭과 부르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고난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길로 부름 받았습니다. 성도를 예수의 증인되게 하시겠다는 것도,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삶으로, 채우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삶에 순종하는 것이,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고, 성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3-4)
세상은 인간의 죽음에서 인생의 허무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죽음은 인생의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이 인생의 허무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생은 허무하니까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 다 포기하고, 갖고 있는 것도 다 버려 버리고,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갈까요? 이런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가 있고, 허무한 인생을 허무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허무한 인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세상에 보람된 일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에 대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내가 죽은 뒤에, 세상이 자신의 업적을 두고 칭송을 한다고 해서, 죽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모든 인생은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다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인생은 죽는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인생은 죽는다’는 것으로 끝이지만, 성도는 엡 2:1절의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는 말씀에 의해서, 죽은 나를 살리신 분을 향한 소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 때문에, 죽음에서 인생의 허무를 생각할 뿐이지만, 성도에게는 나를 살리신 분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허무도 없는 것입니다. 곧 성도는 죽음 위에 놓인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 위에 놓인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죽음을 이길 수 없고 피할 수는 없지만, 내 편에 서서 죽음을 이기신 분을 알고 있고, 그분을 의지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나를 살리신 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감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나그네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성경이 성도를 나그네로 말하는 것은, 떠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떠돌이는 돌아갈 곳이 없이,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떠돌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라고 말하면, 떠돌이라는 시각에서 왠지 쓸쓸하고 초라한 삶을 떠올리게 되지만, 성도는 쓸쓸하게 나그네 설움만 부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앞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그네에게 찬송하리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곧 나그네란 쓸쓸하고 초라한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찬송이 있고 기쁨이 있는, 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찬송하리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찬송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나그네인 성도에게서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성도에게서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나그네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그네란,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돌아갈 본향이 아무에게나 주어집니까?
나그네는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지는데, 그들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한 죄가 용서되고, 예수님에 의에 참여된 된 자로서, 거룩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그네의 산 소망입니다. 나그네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일을 아는 자이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안에서 찬송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찬송을 자기 기분이나 감정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노래가 나오는 것처럼, 찬송도 기분 좋을 때 부르는 노래 정도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이기에 유행가 대신 찬송을 부름으로써, 자기 기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찬송은 내 기분이나 감정, 내 형편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찬송은 노래가 아닙니다. 그래서 찬송에서 중요한 것은 잘 불렀느냐, 못 불렀느냐가 아닙니다. 박자 음정이 맞았느냐, 틀렸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찬송의 내용입니다.
3-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사도의 찬송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이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일이며, 산 소망이 있게 하신 것,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기업을 잇게 하신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사건들이, 과연 기쁨으로 다가옵니까? 그래서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찬송하게 됩니까?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일들은 모두가 세상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돌아갈 하늘나라와 연관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고,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도,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한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긍휼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 죽은 자는,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자의 불쌍함입니다. 영원한 멸망이라는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사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죽음에서 살려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운명에 참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곧 영원한 나라, 본향으로 들어가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나그네에게 하나님의 긍휼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아닐 수 없기에, ‘찬송하리로다’는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어 놓으면 환영받지 못하고, 팽개침을 받고, 개도 물어가지 않을 것에 불과한데, 성도에게는 너무 큰 기쁨이 되어서, 찬송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과연 누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겠습니까? 세상은 하늘에 대한 것을, 막연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세상이 확실하게 여기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바로 거듭난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얻는 것도, 하늘의 기쁨에 견줄바가 못됨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하늘의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기뻐하고,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찬송의 이유와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찬송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내가 기분이 좋아서도 아니고, 좋은 일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총의 일들 때문에, 찬송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보화를 하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사망에서 건져내어서 생명이 있는 곳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리석고 무지한 우리에게, 그 어떤 양보도 하지 않으십니다.
땅의 것만 바라보고, 땅의 것에 소망을 두려고만 하는, 미련한 우리들에게 양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조차도,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항상 세상을 향할 뿐이고, 육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들인데, 이러한 우리들의 욕망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이 양보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내 뜻을 받아주지 않으시고, 내가 원한 대로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것에도, 감사가 되고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에 양보하신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찬송하는 자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한 대로 해주신다면,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베푸신 일만을 바라보고,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믿음의 확실함(5-7)
성도에게 있어서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받는 자는 선물로 인해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삶의 모든 것은, 기쁘고 좋은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삶을 진심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여긴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언제나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삶을 주셨는지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삶의 내용물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내용물이 담겨 있지 않은, 삶에 대해 기뻐하지 않습니다. 감사도 물론 없습니다. 대신 삶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채워 달라는 마음으로만 예수님을 찾을 뿐입니다.
이런 마음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도, 예수님을 향해 가는 것도 아니기에, 한마디로 삶의 목표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에,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쉽게 흔들리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등산가들이 산맥으로는 히말라야나 알프스를, 산으로는 에베레스트나 몽블랑을 등반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위험한 등반이라고 해서, 기피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도 등산을 좋아하지만 목숨까지 거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 이해를 못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고 나면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산을 오르지 않으면 안되는 급박한 상황 때문도 아닙니다. 또는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서,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산이 좋아서 산을 오르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 전문 등반가들의 하나같은 얘기입니다.
어떤 유명한 등산가는 ‘왜 산을 오르는가?’라는 물음에,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거기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등산가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면, 성도는 예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가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가는 길이고, 예수님을 소망하는 마음이라면, 그 길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다른 길로 가고자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등산가의 눈에 산만 보인다면, 성도의 눈에는 예수님만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이러한 삶의 길을, 소원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고난이라는 것이 걸림돌도, 방해물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산이 좋아 산을 가는 사람들에게, 빙벽이든 바위든, 방해물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선물하신 삶의 내용물이 고난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선물 안에서 성도만이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6-7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시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시험이나 믿음의 확실함(시련)은, 모든 인간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확실함(시련)이나 시험으로 말미암아 근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 근심은, 잠깐 동안의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쁨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험과 믿음의 확실함(시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꼭 시험과 믿음의 확실함(시련)으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것입니까? 남들보다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그 대가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간다는 것은, 죽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 죽은 것이고, 죄에 대해 죽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에게서는, 인간의 공로가 나올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알았기에, 자신이 공로로 여겼던 모든 것, 곧 자신에게서 나왔던 모든 것이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었을 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확실함(시련)’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확실함(시련)과 시험의 의미를 알았기에,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지만, 결국 크게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확실함(시련)은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려 가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증표가 기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을 예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해, 믿음의 확실함(시련)을 주신다는 것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싫으냐는 것입니다.
시험이나 믿음의 확실함(시련)은, 진노도 심판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시험이나 믿음의 확실함(시련)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준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시험과 믿음의 확실함(시련)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확실함(시련)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오셨을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실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험과 믿음의 확실함(시련)을 동원해서까지 징계하고 가르쳐야, 겨우 예수님께 눈을 두는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우리를 붙드시고 절대로 놓지 않으시고, 시험과 믿음의 확실함(시련)을 갖게 하시면서도,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것이, 결국 우리를 기쁨과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함을 안다면, 성도는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확실함(시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확실함(시련)과 시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과 믿음의 확실함(시련)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내용을, 하나님이 채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골라서 채우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것으로 인해, 원망과 불평과 실망에 주저앉을 뿐입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믿음의 확실함(시련)을, 환경적 고생이나 고통의 의미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고,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도에게는 믿음의 확실함(시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의 확실함(시련)이 없는 삶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 하나님의 붙드심과 계획안에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우리의 운명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어떤 일에서도 기뻐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5. 믿음의 결국(8-12)
여러분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여러분을 붙들어 어디로 끌어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대개는 자기의 믿음으로 천국을 향해 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의 믿음으로 천국을 향해 가는 것이라면, 과연 천국에 도달할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믿음으로, 뭔가 해보려는 사람들은, 모두 실패를 맛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날마다 절감하는 것이, 믿음의 실패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의 삶의 근거를, ‘행함’에 두고 있다면, 자신의 실천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함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가령 매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았는데, 몸이 아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몸을 움직일 수 없는데, 어떻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느냐?’라는 반문을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은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곧 나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언제나 우리의 행함을 부인하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게 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음이 좋아서라는 생각은, 오히려 믿음에서 멀어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아니라, ‘믿음에 이끌려 어디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이끌려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이란, 믿음에 이끌려 가는 것이기 때문에, 삶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곧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가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시험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련과 시험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시련과 시험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렇게 대접하실까요? 택한 백성이라면, 사랑하는 자라면, 고통이 있는 시련의 길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합당하지, 오히려 시련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시련이 있으면, 대개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해서, 하나님이 시련을 주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의 길을 갔던 사도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했습니까?
사실 성도에게 고통일 수밖에 없는 시련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온전한 자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7절 “너희 믿음의 확실함(시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시련(믿음의 확실함)이 믿음을 연단하여, 참으로 귀한 것을 얻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시련에서도 근신하며, 오히려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시련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에 대해서, 외면하려고 합니다. 믿음을 버리기는 싫지만, 시련 또한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시련을 얘기하지 않는 믿음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시련은 없고 축복만 있는 믿음 안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8-9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여기서 믿음의 결국을, 영혼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 믿음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생각하는 것은 영혼 구원일 것입니다.
곧 믿음으로 천국 간다는 것만 생각할 뿐, 믿음이 우리를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이끌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련도 택한 자의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해도, 그런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자신이 시련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말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는 정도일 뿐입니다. 곧 시련으로 인해 구겨질 수 있는 자존심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으로 보상받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 2:21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주의 이름이라면, 구원은 아무나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님을 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원한다는 것은, 주님의 모든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이, 주님의 삶과 일치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흘리심의 은혜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지, 세상에서 남들처럼 좋은 것, 많은 것을 누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주여’라는 말은 하면서도, 참된 의미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좋지만, 주님의 삶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기에, 결국 영혼 구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십니까? 시련과 시험을 동원하여, 우리의 마음이 주를 향하게 합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헛됨을 깨닫게 하시고, 참된 것을 향한 마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고난으로 채워진 주님의 삶이, 결코 고생의 차원이 아니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진심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보지 못하나, 믿으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에 붙들려, 이러한 길로 인도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련은 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10-12절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구약때 활동한 선지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할 은혜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의 활동을 통해, 예언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곧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은 오래전부터, 엄밀히 말하면 창세전부터,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임하는 시련도, 자기 백성의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의지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은, 참으로 놀랍고 신비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예수를 믿기로 마음먹고, 교회를 다녀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계속되어진,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시련도 그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일이기에, 성도는 어떤 형편에서도 찬송과 기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6.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13)
13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사도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 성도에게 주어질 은혜가 있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란 바로 완전한 구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떠나서, 하늘나라에 완전히 거하게 되는 구원의 은혜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바라는 자로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시련 속에 있었습니다. 고초를 겪으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가져오실 은혜는,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시련과 고난의 눈물을 씻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의 마음은, 시련을 겪는 성도들이 시련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 속에서도 그 마음이 흔들림이 없이, 다시 오실 주님에게로 향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를 향한, 사도의 참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사도의 마음을 안다면, 엉뚱한 욕심을 내보일 수가 없습니다. 형제 관계에 있는 성도가, 아무런 시련과 고초를 겪지 않고, 편히 살기를 원하는 것은, 극히 인간적인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마음을 따라 일어나지 않음을 아는 것이 곧 성도입니다. 시련이 없기를 원한다고 해서, 시련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성도라면, 시련에 있는 형제의 마음이, 주님이 가져오실 큰 은혜를 향함으로, 흔들리지 않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은 허리에 띠를 띠는 것으로, 길을 떠나는 자의 준비입니다. 출 12:11절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이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음식을 먹으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먹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모습으로 음식을 먹으라고 하셨습니까? 길을 떠날 시각이 급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애굽 땅을 떠나야 할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전에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삶은, 이제는 끝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월절 음식을, 특이한 모습으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유월절에 먹은 양은 그냥 양이 아니라, 희생의 양입니다. 곧 유월절의 양은 양의 죽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죽음을 담아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양을 먹으면서, 자신의 죽음까지 인식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죽음입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애굽 땅에서의 삶은, 이제 죽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삶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떠나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단순히 생활하는 터전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것은, 마음을 세상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세상에서 떠난 자로 보고, 자신을 살피면서 예수님이 오실 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아는 성도가,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 두어야 할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도를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거할 곳이 없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집도, 자신이 거할 곳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저 잠시 육신이 머무는 공간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에서, 좀 더 좋은 집에 머물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좀 더 편하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하는 욕심에서 떠나지를 못합니다. 이런 것들이 주님이 오실 때 가져오실, 은혜의 귀함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의 부요함을 소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 그 마음이 애굽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애굽에 있기 때문에, 고난이나 시련에 대해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이나 시련을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이 있을 때, 하나님이 고난과 시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보게 하시고, 소망하게 하고자 하시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장차 주어질 영광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소망하게 됨으로써, 성도의 마음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굳건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를 압니까? 그 은혜의 부요함을 소망하고 살아갑니까? 주님이 가져올 은혜를 소망한다면, 그것은 그 마음이 이미 세상에서 떠났음을 뜻합니다. 세상에서의 삶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그 날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시련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흔히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자’라는 말을 합니다. 듣기에는 아주 경우 있는 말로 여겨집니다. 받았으니 보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바른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은혜를 갚으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그처럼 무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도는 받은 은혜를 갚는 존재가 아니라, 은혜를 알았기에, 예수님이 가져오실 은혜를 더욱 기다리고,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맛을 알았기에, 은혜를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도를 흩어진 나그네로 말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성도에 대한 사도의 말을 보면, 성도는 참으로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가 곧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도에게는 하나님께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는, 참으로 귀한 은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찬송의 내용도 이러한 것입니다. 3-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처럼 사도의 마음은, 위의 것을 향해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인 것입니다. 위의 것을 향한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 간직해 놓으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져 오실 은혜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편히 잘사는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그 마음을 애굽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땅의 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유업, 곧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를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이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은, 위의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에 소망을 두는 것이야 말로, 은혜를 아는 성도입니다.
7.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4-16)
14절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는 말씀을 하는데, 과연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즐거워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사욕을 따라 사는 것을 즐거워합니까?
사람이 자기 사욕을 따라 사는 것이, 인생이나 육신에 고통으로 다가온다면, 자연히 사욕을 따라 사는 것을 피하겠지만, 정반대로 사욕을 따라 사는 것에, 인생의 쾌감과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귀찮음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사람이 무엇을 회피하고, 무엇을 따라갈지는 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욕을 본받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사욕이란 이전에 알지 못한 때에 따르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사욕을 따르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아는 자로서 새롭게 된 성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욕은 자기 정욕을 뜻합니다. 육체를 기초로 한 욕망이지요. 이 욕망을 따른다면 그 사람은 주님이 오실 때 가져올 은혜를, 바라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가져올 은혜는, 우리의 육체와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에 대해 마음이 멀어진다면, 그것은 사욕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성도가 믿음을 버린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오히려 믿음을 버리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을, 마음껏 즐기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전에 알지 못한 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새롭게 알게 된 새로운 세상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알게 하였고, 다른 삶에 대해 눈을 뜨게 했습니다. 영원한 것에 대해 알게 하였고, 하늘을 향해 소망을 두게 했습니다. 그러한 성도가 사욕을 따르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천국을 말하되 천국을 부인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욕을 따르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성도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을 말하는 여러분이 진심으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원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 그대로 살아가면서, 천국을 들먹이는 것은 분명 위선이고, 위장된 신앙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이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세상을 추구하는 믿음이 있다면,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성령에게 다스려지며, 하나님께만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면서, 하나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품이 있기에 그를 성도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세상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새롭게 된 성도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라, 벗어 버리고 싶은 악한 냄새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거룩한 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사고방식이 이미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망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욕망에 대해 부자연스럽게 여기고, 벗어나야 할 굴레로 여긴다는 것이야 말로, 그가 이미 새로운 것에 대해 눈을 떴다는 것이고, 자기 욕망이 달성되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세상 사람이 아니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기에, 거룩한 자로 일컬음 받게 되는 것입니다.
15-16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거룩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거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거룩을 보여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한 것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줄 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세상과의 구별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죄악된 세상과 철저히 구별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을 입었다는 것은, 성도 역시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하나님께 부름을 입었음을 뜻하는 것이고, 거룩하라는 말씀 역시,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별된 존재로 사는 것이, 곧 자기 사욕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이 성도라면, 성도인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부르는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없이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기 때문에, 성도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진 채,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해서 살아가는, 종교인의 모습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고, 천국을 말하면서도 소망을 세상에 두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신 길은 회피하고자 하는 종교인 말입니다.
성도는 주님이 가져오실 완성된 그 나라를 소망하면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이끌려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거룩한 삶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고, 또한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를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 주어진다고 해도, 설령 시련과 고난이 계속된다고 해도, 성도는 자신이 주님에게 붙들려 인도 받고 있는, 그 나라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있을 때, 힘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마음조차도 자신의 욕망으로 여기면서, 시련과 고난에서 나타내고 보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음식 규례가 등장합니다. 부정한 음식과 부정하지 않은 음식을, 규정하고 구별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라면 당연히 나타날 거룩의 모습이 있습니다. 성도가 나타내고 보여야 할, 거룩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성도로 살아가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다니고 예배드리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고 해서, 성도라고 여기지 말고,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입은 자로서, 거룩을 보여주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손을 붙들고 주님이 이끌어 가시는, 그 나라를 소망함으로서, 전혀 다른 세상을 향해가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말입니다.
8. 구별된 성도(17-19)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거룩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거룩을 얻을 자로 불러냄을 받긴 했지만, 거룩하게 살 능력은 아예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거룩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거룩에 대한 이해에 따라, 나름대로 거룩을 생산하고자 할 것입니다. 대개 보면 거룩을 외적인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옷차림새나 말하는 것에 주의를 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노숙자나 걸인들은, 거룩과 먼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도 거룩과 거리가 멀었다고 해야 합니다. 머리 둘 곳도 없는 예수님의 차림새는,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테이프를 들어 보면, 목소리 좋은 성우들이 그럴듯하게, 녹음해 놓은 것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서도 거룩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만, 과연 말에 거룩이 담겨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음성과 말투가 어떠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거룩은 외적인 것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입니다. 그래서 18-19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처럼 거룩은 우리의 노력이나 실천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얻어진 은총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왜 거룩에 대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성도는 거룩을 입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불러내신 것은, 단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추구하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도가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고, 한번 받은 용서는 취소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도, 결국 용서 받은 자로 천국가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의 잘못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용서를, 자기 멋대로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피로 인한 용서를, 진심으로 알고 감사한다면 ‘어떻게 살아도 용서되겠네?’가 아니라, 용서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용서는 용서 받은 자로 하여금, 용서의 은총을 증거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으로 감사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거룩해지라고 말씀하면, ‘거룩하게 살면 복받는가?’라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14절에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욕을 본받는 것, 곧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은혜를 알지 못했을 때 따르던 본성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은 사욕을 본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유익을 추구하고 소망하면서, 참된 소망이 되는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것이,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환경에서도, 거룩이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고 해서, 거룩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심으로 우리의 주로 자리하신다면, 어떤 시련에서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소망으로 자리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이고, 그러한 거룩을 증거할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있다면 시련에 처한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서는 시련을 겪는 성도에게 보낸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시련을 겪고 있는 성도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떤 내용이 인간적이겠습니까? 위로가 되고 힘을 줄 수 있는 말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든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든지, 시련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서신을 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인간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도가 어떤 사람인가만 말할 뿐입니다. 베드로는 그들로 하여금 위로를 받고, 잠간이나마 그 마음에 힘을 주려는 의도로, 이 서신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 속에서도 성도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함으로써, 성도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서신을 쓰는 것입니다.
시련에서의 참된 위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시련이 비록 고통이긴 하지만, 시련에 담긴 하나님의 일을 알게 됨으로써,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다만 그리스도만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는 이런 사람이다’는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련이 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을 입은 성도로서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소망하며 나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시련이 있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런 성도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시련을 성도를 연단하는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 환경과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다만 내 열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척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환경과 형편에 의해 달라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어떤 경우에서도, 예수님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러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시는 분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사도는 외모와 행위를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외모는 겉으로 보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행위도 외모에 속한 것이 아닙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이 행위니까요.
하지만 사도는 행위를 우리의 행동, 곧 실천의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우리의 중심을 붙들고 있는, 믿음에 의한 행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의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시련 속에서도 나를 구속하신 보배로운 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세상에서 떠날 자로 사는 것이고, 사욕을 본 삼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세상과 구별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분명 우리의 실천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은, 시련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소망하는 행위를, 믿음으로 여기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말로 들을 때는, 내가 마치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은 자로 세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말해도 시련이 오면, 육신의 괴로움으로 인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것이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육신의 문제로 고민할 때, 영혼의 문제로 고민하는 이것이, 구별된 성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9.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20-2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성경에 등장하는 분들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를 하려고 하고, 사도들이나 믿음의 사람들이 겪었던, 시련과 고초를 이해해주는 식이 되면, 곤란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말씀 밖에서, 말씀과 상관이 없는 자로서, 말씀을 들여다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난과 그 심정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당하신 그 저주와 죽음이, 곧 우리의 것이었으며,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난과 고초 역시, 우리의 것임을 알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시련을 겪는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시련과 상관이 없는 자로 여기고 이 말씀을 대한다면, 우리는 단지 베드로 사도가 쓴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 전부일 뿐, 시련에서 맛볼 수 있는, 은혜와 복음의 능력은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이 말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하늘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가져올 은혜를, 지금 세상에서 이미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21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실 때 가져올 은혜는, 지금 이미 현재에 시작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주어질 구원의 은혜가, 지금 이미 우리를 붙들어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있게 한 것이라면, 성도는 지금 이미 은혜와 능력에, 붙들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서 현재는, 고난과 시련만 있는 세월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길로 이끌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은혜 안에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이끌어 가시면서, 장차 주어질 은혜의 부요함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다가, 은혜의 부요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주어진 환경이나 여건에 상관없이, 복되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 고난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사도들이 고난 속에서 어떻게 기쁨을 누렸겠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옥에서 어떻게 찬송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고난에서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곧 주님이 오심으로 완전히 드러날 은혜의 부요함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 속에, 이미 주어져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시련이 고생이 아니라, 장차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고, 소망하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장차 예수님이 가져오실, 은혜의 부요함을 소망하며 사는 성도에게서는, 무엇이 보여지겠습니까? 사도는 그것을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사도는 왜 갑자기 형제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일까요? 시련을 겪는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할 때,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형편은, 누가 낫다고 할 것 없이, 거의 같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시련을 겪는 상황에서, 더 낫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처럼 같은 형편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어려운 형제에게 재물로 도와주는 차원이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복음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은, 21절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진리를 순종하는 것이고, 영혼이 깨끗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22절의 말씀은, 참된 형제 사랑은 믿음에서 나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이나 윤리에서 나오는 사랑은, 어려운 자의 형편과 처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도와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그의 육신에 도움이 될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나오는 형제 사랑은, 육신의 처지나 형편을 보지 않습니다. 물론 형편에 대해서는 아예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의 형편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23-24절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육체를 풀과 같은 것으로 보는 성도가, 육체의 형편을 도와줌으로써, 그를 도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육체는 풀과 같은 것으로 보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세세토록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 성도라면, 형제와 함께 영원한 것을, 나누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가 시련 속에 있는 성도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하나님께 두도록, 서로가 도우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향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이런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돕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지만, 복음 안에서의 사랑은,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형제를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에게 있게 한 구속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고,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성도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같은 소망과 같은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자연히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도를 사랑으로 이끌어 갑니다. 나의 구원만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져오실 구원의 은혜를 함께 소망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 안에서, 나눌 수 있는 사랑은 바로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