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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을 살려야 한다
信天함석헌
생명의 원리는 “천천히”
내가 어려서 글자를 배우고 세상물정을 알기 시작하던 때는, 이제 나라가 망하게 됐다고, 사람들의 마음이 물 끓듯 했습니다. 그래서 개명(開明)이라는 말이 많이 돌아갔습니다. 요새 말로 한다면 근대화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서양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뭐라했냐 하면 은둔자(隱遁者)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사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말인 듯합니다. 그러나 실속은 하나입니다. 사람은 다 제 살 길을 아는 것인데, 대원군이라는 독재자가 있어서 고집을 하게 되면 거기 혼란이 일어납니다.
꼭 같은 일이 지금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근대화를 신문마다 대서특서 한 것이 불과 7,8년인데 지금은 또 교통난으로, 물가폭등으로, 농촌노동력 부족으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겉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듯한데, 속살로는 한 가지 문제 때문입니다. 서울역에서 벌 떼 같이 야단을 치고, 날마다 무슨 사고 무슨 변으로 떼죽음을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농촌서 일손 없어 논밭 묵인다는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잘못된 판단에서 나온 혼란입니다.
이 우주는 역(易) 곧 변하는 힘의 마당이고, 삶이란 거기 적응하면서 자기 창조를 해 나가는 것인데, 그 적응이 잘못됐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잘못입니까?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 되는 생명의 원리가 “천천히”라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깨뜨릴 수 없는 법칙이 있습니다. 변하지만, 천천히 됩니다. 그것이 진화라는 것입니다. 씨는 일정한 날이 지나야 싹이 나고, 뱃속의 아기는 일정한 단계를 거쳐서야 나옵니다. 그것을 거스릴 학자나 권력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욕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 법칙을 무시하다가, 과속으로 닫던 차처럼 부서지고 맙니다. 우리 속의 생명은 어진데 우리 생각은, 아노라기 때문에, 어리석습니다. 어떤 개인이 모든 사람을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과 재주를 내가 가졌다 할 때는 더욱 어리석습니다.
농촌 문제는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무리를 한 결과가 오늘의 혼란이요, 그 상처가 곧 농촌입니다.
씨알을 깨우려는 노래 - 농부가
넘어지려는 큰집처럼 위급해진 나라를 놓고 안간힘을 쓰던 그때에 씨알을 깨우려는 목적으로 새 노래가 많이 나돌았는데, 그중에 농부가란 것이 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생각나는 몇 절을 적어 보면 이렇습니다.
하늘이 주신 우리나라
편편 옥토가 이 아닌가
높은데 갈면 밭이 되고
낮은데 갈면 논이 된다.
세계에 유명한 농산국이라
어얼널널 상사디야.
앞뫼에는 차 심으고
뒷동산에는 뽕 심어서
엽차는 따서 외국에 수출
누에는 쳐서 부모에 공양
과목의 수업도 할 만하지
어얼널널 상사디야
남은 토지가 있고 보면
포풀라 낙엽송 많이 심자
사오년만 지나고 보면
한주에 일원은 갈 데 없네
수목이 많아야 비 잘오지
어얼널널 상사디야
참새가 울 때 일찍 일어나
농기를 차리고 세수하고
○○ ○○○ 둘러메고
이웃집 동무와 같이 나가
저 구름 정자에 농부가로세
어얼널널 상사디야
종일토록 일하다가
초혼 달 띄고 돌아와서
세수하고 새 옷 입고
부모 처자와 함께 앉아
보리밥 파냉국 재미있네
어얼널널 상사디야
저녁이 되면 삼삼 오오
이웃집 친구집 모여앉아
짚신도 삼고 꾸리도 곁고
신문 잡지나 들어보세
세계의 형편도 알만하지
어얼널널 상사디야
…………
…………
…………
농촌이 살아야 망하지 않는다.
이 노래를 부르노라면 마치 에덴동산에라도 간 듯한 느낌입니다. 순진한 태고의 바람이 아직도 불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라디오 텔레비에 나오는 가요와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기사와 대조해 보십시오. 얼마나 다른가? 이렇게 순진하고도 씩씩한 노래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평화스럽고 희망에 찬 생활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는 나가자, 달리자 따위의 선전도, 몰아침도, 선동도, 하나도 없습니다. 작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누구인 것을 물을 것 없이, 이것은 씨알의 노래입니다. 묶은 깍지를 깨뜨리고 새로 나려는 씨알의 입김이 그것을 불어낸 것입니다.
나는 몇 번이고 반성해보며, 반성할수록 고맙게 느낍니다마는, 나라가 망하는 시기라면서 이렇게 평화스럽고 건전한 자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그때를 소년으로 살아보아서 압니다. 그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직도 협동으로 되는 농촌자치의 공동체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농촌이 살아 있는 한 민족도 나라도 망하지 않습니다. 한일합방이 됐을 때 전주 이씨와 거기 붙어먹던 양반계급의 정부가 망한 것이지,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닙니다. 나라는 씨알의 것이요, 씨알이 건재하는 한, 비록 한 때 정치권이 남의 손에 들어갔다 해도,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도로 찾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노래가 보여주는 그 정신대로 나갔다면 나라는 틀림없이 바로 됐을 것입니다.
정말 망하기 시작한 것은 그 후입니다. 씨알들이 두 가지 잘못을 함으로부터입니다. 하나는 우리말이 아닌 외국말로 하는 교육을 그대로 받은 것이고, 또 하나는 자본주의 경제에 말려들어서 농촌의 촌락자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농촌이 살아 있고서야 되는 것입니다. 일본이 아무리 우리 정치를 빼앗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내놓지 않는 한, 가슴에서 참과 사랑을 뺏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참과 사랑이 남아 있는 한 정치는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존을 위해서라 하면서, 외국말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유리하다 하면서 옛날로부터 있던 촌락 협동으로 하는 자치생활을 버리고 일본사람의 돈을 빌려 쓰고, 날품팔이가 되고, 그 공장의 노동자로, 장사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온 것이 민족 분열입니다. 참과 사랑을 버린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그랬다 변명하지만, 개인에서도, 민족에서도 살잔 길이 망하는 길이었습니다.
농촌은 비고, 도시는 몰리고
우리는 오늘의 문제도 이 원리로 풀어야 합니다. 해방이 되고 일본 관리자가 갔다 해서 저절로 새 나라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잘못을 뉘우치고 내버렸던 참과 사랑을 다시 찾을 기회가 왔다는 것뿐입니다. 이제 참을 하고 사랑을 하면 나라는 자동적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하면 독립국의 형태는 있으나 참 자유하는 나라는 아닙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독립의 형태는 왔는데 독립의 실속은 없습니다. 일본 사람은 가고 일본말은 없어진 듯하나 일본 때에 배웠던 그 사고방식과 그 하던 자본주의 경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남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몇 배로 강화되어 있습니다. 그 정치가 그렇고, 그 경제가 그렇고, 그 교육이 그렇습니다. 정치가 그렇게 됐기 때문에 경제도, 교육도 그렇게 됐습니다. 거짓, 부조리, 불진실, 강제, 수탈, 억압이 몇 갑절로 늘었습니다. 그것을 사람에게 물을 것 없이, 전문가의 분석을 기다릴 것 없이, 도시는 너무 몰려들어서 걱정이고 농촌은 텅텅 비어서 큰일인 현상이 웅변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농촌을 살려낼 생각을 하여야 사람도 살아나고 민족도 살아납니다. 그렇지 않고도 살아 있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누구를 안락하게 하기 위해 있는 기계요 가축이며, 다른 민족의 죄짐을 대신 지는 속죄양일 것입니다.
한 가지 반드시 깨쳐야 하는 큰 잘못이 있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일이요, 그래서 “미래의 쇼크”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인데, 정치하는 사람들만이 모르고 있습니다. 혹 알면서도 실리주의에 눈이 어두워 일부러 못본 체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날까지 서구 문명주의를 그저 좋은 것으로 알아 거의 무비판하게 따라왔지만, 이제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대규모의 기업주의 문명은 그대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근대화는 결국 그것 따라가잔 것이고, 기적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거기서 성공했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 이제 자랑하는 말을 끝을 채 맺기도 전에 혼란이 닥쳐왔습니다. 정치란 권위의식에 사는 것이므로 실패를 하고도 좀처럼 솔직히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것은 옅은 생각입니다. 육체만 아니라 정신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고, 또 설혹 정신이 뭔지를 상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답게 10년, 20년 나 죽은 후의 세상을 생각한다면 지기 싫은 생각에 천하가 다 걱정하는 불행을 나홀로 태연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지식이 넓지도 못하지만, 근대화한다고 할 때 벌써 농촌이 잘못될 것 짐작했고, 그래서 농사하는 내 밑에 있는 것들 보고 주의시키기도 했습니다.
“어서빨리”에서 오는 잘못
결코 어려운 이치 아닙니다. 진리란 쉬운 것입니다. 언덕에서 내리 닫는 차를 운전할 때는 브레이크를 대야 하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차 한대가 그렇다면 나라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어서 빨리”라는 데서 잘못됩니다. 노자가 그래서 천하(天下)란 신기(神器)라, 할 수 없다 했습니다. 내 소견, 내 고집해서는 아니 된단 말입니다. “내”가 무엇입니까? 욕심 덩어리입니다. 재주 있고 수완 있달수록 더 그렇습니다. 나라 하려면 욕심 없어야 하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욕심 강한 사람들만이 나라를 쥐게 됩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늘도리가 고마워서 그 잘못에서 전체의 멸망을 면케하려고 씨알에게는 겸손과 참는 덕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원한 진리의 말씀 “겸손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했습니다. 씨알이 못난 척 견디고 참지 않는다면 인간의 종자 벌써 망했을 것입니다. 참기 때문에 생명자체의 지혜에 의해 다 망한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납니다.
이 나라가 뉘 나라입니까? 결코 임금, 영웅, 대통령, 정치가의 나라가 아닙니다. 씨알, 죽도록 참는 참음으로 다시 살아나는, 씨알의 나라지.
애당초 농촌을 참는 것들이라고, 말못하는 것들이라고, 무시하고, 그 기업가라는 욕심장이들만을 내세운 것이 잘못입니다. 이제 그런 식의 대 기업은 앞이 없습니다. 어린이도 알 수 있는 진리, 나라마다 강대국 되어 기술 발달시켜 생산 많이 하여 팔아먹어서 부강하길 원한다면, 그 물건 사기만하고 원자재 대주기만 할 짐승 같은 것들은 어디 있으며 어디 있어야 합니까? 이제 먼저 해먹은 소위 강대국이라는 나라는 그 모순의 문제를 냉전, 대리전쟁이라는 것으로 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조리의 번영이, 그 거짓 문명이 얼마나 계속될 것입니까?
기독교의 경전인 창세기가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창세기만 아닙니다. 동서양의 모든 신화가 일치해서 가르치는 말이 인류는 다 잃어진 낙원의 향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낙원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자연에 순응해 욕심 적은 살림하던 옛날을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그때가 좋았고, 옳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은 스스로 지능이 발달한 것을 자랑으로 알면서도, 그 지능 때문에 세상은 점점 잘못 돼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화는 정말 어진 마음이 후세의 인간을 생각하여서 남겨놓은 것인데, 그것을 무식 때문이라고 웃어넘기고 욕심을 점점 더 강하게 하고, 많이 하는 것을 발달이라 하면서 근세의 몇 백 년을 내려 왔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세계 현상입니다. 카터와 등소평이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한편에서는 몇 개의 데모가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술이냐, 정신이냐
이제 인류는 한 큰 전환을 하여야 하는 시기에 다가왔습니다. 이 대기업주의의 경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군비를 갖추고 1분 1초도 안심을 못하고 신경전을 하는 스파이 정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사상의 자유를 억제하며 종교와 철학과 과학을 영구히 통제 밑에 두어야 하는 이 문명을 계속할 것인가? 인류의 존속과 새로운 향상을 위해 종래의 그것을 내버리고 새 출발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한다면 기술이냐, 정신이냐, 동양이냐, 서양이냐 그 말입니다. 물론 기술의 발달 없이 향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흔히 많은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결코 먹고 입는 문제가 우선 해결되어야 정신이 발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학의 연구가 나가면 나갈수록 인간은 처음부터 종교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농업의 발달은 처음부터 종교적 동기도 강하게 작용해서 된 것이랍니다.
흔히 후진국 의식이라는 말을 합니다마는 그 후진국 의식의 빠지기 쉬운 잘못은 지금 따라가는 방향을 영구히 그럴 것으로 무의식 리에 긍정하고, 감히 새 방향을 찾을 엄두를 못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달리 인류가 된 것은 사실은, 엉뚱한 딴 방향을 찾음으로 됐습니다. 이번의 혼란기는 생명의 진화에서 그전 어느 때보다도 더 엉뚱한 돌변화가 나오려는 시작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위 사람의 지혜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절대의 지혜에서 나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인 말로 계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 계시가 어느 혼 위에 어떤 형식으로 언제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 오는 것을 도둑같이 기다려야 합니다.
개인 사상의 자유와 촌락 공동체의 자치를 무시하는 민족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련을 정신으로 이기고 나면 인류를 건지는 운동의 앞장이 될 것입니다.
씨알의 소리 1979. 2 81호
저작집; 3- 217
전집; 5-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