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있는 사람이 부럽다 / 양선례
지난 어린이날이었다. 여름 장맛비처럼 비가 쏟아졌다. 지독했던 봄 가뭄이 비로소 해갈되었다는 소식이다. 그 비를 뚫고 열한 시에 만나기로 했다.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올리며 가고 있는데 광주 사는 동생이 벌써 도착했다고 전해 왔다. 예약해 둔 기정떡(증편, 술떡의 전라도 방언) 한 상자를 찾아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는 잠깐 사이에 옷이 흠뻑 젖었다.
오늘은 두 여동생 부부와 남동생, 우리 부부까지 이모를 찾아보기로 한 날이다. 엄마의 일곱 형제 중 서울 삼촌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남은 분이다. 요양원 들어갔다는 소식을 몇 달 전에 들었는데도 찾아가지 못했다. 아니 관심이 가지 않았다. 엄마 돌아가시니 외갓집도 멀어졌다. 간간이 장례식장에서나 사촌을 만나야 이런저런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막내까지 기다렸다가 병원 문을 두드렸다. 현관 유리창에 코로나로 면회를 제한한다는 안내장이 붙어있다. 모처럼 모였는데 그냥 갈 수가 없어서 대표 번호로 전화하니 사람이 내다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모 이름을 대니, 그런 사람은 없단다. 이종사촌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외삼촌에게 전화하여 겨우 알아냈으나 이번에는 요양원 측에서 딴소리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 내리기가 바쁘게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는 형편이라 면회 금지란다. 우리야 슬쩍 보고 가면 그만이지만 이후 누가 감당하겠냐며 양해해 달란다. 뒤늦게 전화를 걸어온 이종사촌이 사정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마침 사무장이 들어섰다. 직접 환자를 돌보는 요양 보호사보다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이모 생각이 나서 왔다고 하니 잠깐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나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는 어렵겠다고 했다. 한 가지 대안이라며 내놓은 게 영상통화였다. 담당자가 내 전화번호를 묻더니 5층으로 올라갔다. 안 본 새 이모가 그렇게 나빠졌나. 이제야 찾아온 게 후회되었다.
휴대폰의 작은 화면으로 이모와 마주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살이 빠진 걸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익히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눈썰미 좋은 막내가 우리 이모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알고 보니 이모는 ‘주리’인데 하필 성도 같은 ‘두리’ 할머니가 그 요양원에 있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엄마 이름은 ‘자’로 끝나는데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이모는 지금 들어도 세련된 이름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두례’는 집에서 부르던 호칭이었던 것이다.
이모가 휠체어를 타고 면회실로 들어왔다. 마스크를 벗고 보니 엄마랑 많이 닮은 얼굴이 드러났다. 연세에 비해 얼굴도 깨끗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더니 곧 우리들 이름도 떠올리며 반가워했다. 남동생에게는 살이 쪘단다. 이모는 치매보다는 돌봐 주는 자식이 없어서 요양원에 왔다. 낮에는 요양 보호사가 있어서 괜찮지만, 밤에 혼자 있는 동안 넘어져서 다치고, 골절되는 일이 잦았다. 이모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아흔세 살. 이리 오래 살아서 뭐 할끄나.”라고 했다. 나이를 정확하게 맞힌 거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런데 느그 엄마는 왜 한 번도 안 오냐? 보고 싶은데.” 그때서야 알았다. 아, 이모도 치매구나. 엄마 돌아가신 장례식장에 당신보다 먼저 가는 게 어딨냐며, 발 뻗고 대성통곡한 일은 잊었나 보다. 나도, 형제들도 그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모는 엄마보다 열 살이나 많다. 5남매의 자식들이 모두 서울에 산다. 너무 멀어서 자주 오지 못한다. 이모부가 돌아가면서부터 혼자 살았으니 그 세월이 30년이다. 80이 넘어서는 침대에서 떨어져 골반 뼈가 부러졌다. 일 년 넘게 입원했으나, 털고 다시 일어선 의지의 한국인이다.
엄마는 이모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눠 먹을 줄 모르고, 움켜쥐기만 하는 독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모 집은 전기세가 5천 원도 안 나왔다. 그 돈이 아까워서 마당에 불도 켜 두지 않았다. 텔레비전도 거의 보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바쁜 농사일을 마치면 쌀은 물론, 고춧가루, 깨 등을 바리바리 싸서 서울에 다녀오는 게 연례행사였다. 그때마다 밤 10시 반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려고 우리 집에 왔다. 이모 집은 첩첩산중 산골이라서 버스가 일찍 끊겼기 때문이다. 막차를 타고 와서 집에서 머물다가 밤 기차로 서울에 갔다.
그럴 때마다 기정떡은 단골 메뉴였다. 감 이파리가 떡과 떡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떡이 부드럽고 물기가 많은 데다 쫀득쫀득해서 서로 엉겨 붙지 말라고 넣은 것이다. 지금이야 편하게 비닐로 낱개 포장을 하지만 그땐 크고 두꺼운 감나무 잎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이모는 이고 온 보따리를 마루에 내렸다. 떡이 담긴 대나무 석작이 여러 개였다. 식구들 맛보라고 몇 개를 내놓았다. 겨우 한 사람 앞에 한 개씩 돌아갈 양이었다. 우리처럼 쌀을 사 먹는 형편도 아니니 넉넉하게 해서 우리도 한 석작 주면 어디 덧나느냐는 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인정머리 없는 이모를 욕하면서도 기차 시간에 맞춰 보따리를 기차역까지 날라다 주곤 했다.
이모의 자식들은 학벌이 좋지 않았다. 아들은 고등학교, 딸은 중학교까지만 보내고 타지로 쫓았다. 없는 형편에 새끼들 줄줄이 대학 보내서 고달픈 것 아니냐며 엄마를 흉봤다. 그래도 엄마는 홀로 사는 그녀를 살뜰히 살폈다. 해마다 언니 몫의 김치까지 김장했다. 이모는 수시로 엄마를 찾았다. 태풍으로 쓰러진 벼를 묶어야 해서, 감 딸 때가 되어서, 깨를 베어야 해서 등 이유도 다양했다. 엄마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는지, 의지하던 큰이모가 돌아가시고부터는 꽤 다정하게 지냈다.
형제들과 국밥으로 점심을 때우는데 그새 소식이 전해졌는지 이모의 작은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자 사촌들은 간혹 만났지만, 그녀는 초등학교 때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전화였지만 어릴 적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치매 걸린 엄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너무 오래 살아서 걱정이란다. 질투가 난다. 이치에 안 맞는 말일지라도 손 붙잡고 이야기 나누고,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인지 언니는 아직 모르나 보다. 엄마 있는 사람이 부럽다.
첫댓글 엄마에게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돌아오는 토요일 술한병 준비해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네. 진짜 엄마 있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요양원에 계신 이모를 면회하셨네요. 그래요 엄마 있는 사람이 부럽지요.
나도 그래요.
78세 된 큰형님도 그러시더라고요.
엄마는 세월이 가도 더 그립다고요.
그런 존재가 엄마인가 봅니다.
요양원에 계신 이모님을 찾아 뵈시고, 선생님도 참 정이 많은 분이시군요. 가슴을 울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 늦게 간 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계시니 종종 가려고요.
이모 얼굴에 얼굴을 비비고, 꼭 안아 주고 왔습니다.
그 감촉이 좋았습니다.
글 쓰시면서 눈이 흥건해 지셨겠습니다. 읽는 사람도 그러니까요. 아침에 읽기 좋은 글이네요.
댓글 다는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가끔 혼자 있을 때 "엄마, 엄마!" 큰소리로 불러보기도 합니다. 순천만 정원 박람회에 오는 나이드신 분들을 보면 더 생각난답니다.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저도 그럽니다.
특히 차 안에서는 "엄마"라고 불러 볼 때가 많습니다.
어느날, 문득, 그냥 생각나는 존재가 엄마인 듯싶습니다.
저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부러워요.
하하. 그런가요?
엄마와 애증의 관계인 모양이네요.
언제 털어놔 보세요.
@이팝나무 친해지고 있습니다. 하하
@황선영 아무리 나빠도 엄마는 또 친해지더라고요.
나이가 들수록 더요.
아마 선영씨(와우, 친밀감이 확 드는 데요?)도 그럴 겁니다.
독자가 웃다가 울다가를 하게하는 글이네요.
그럴 목적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었네요.
고맙습니다.
갑자기 효도하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섬세한 묘사가 너무 좋았어요.
그날 일이 선명해서 '질투'에 억지로 붙여 보았답니다.
살아 계실 때 잘 해야 하는데, 만날 때마다 나중에 후회할 말, 행동을 하는 것 같아요.
형제들이 모두 모여 이모님을 뵈러 가는 마음이 따뜻합니다.
연세 드셔도 정갈한 '엄마'가 계시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박 선생님 엄마를 질투합니다.
엄마와 닮은 이모 뵙고 더욱 엄마가 그리웠겠어요.
양선례 선생님은 살아생전 엄마 마음을 잘 헤아리는 효녀였을 것 같습니다.
많고 많은 단어 중에 '엄마'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요?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나중에 후회 남기지 않으려면 원 없이 잘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는 글입니다.
주변에도 제게도 엄마한테 잘하라는 말 많이 했습니다.
나 정도야 뭐.
하고 방심하고 있는 사이, 엄마가 돌아가신 거지요.
항상 뒷북치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