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잡록-권근
◈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가원이다. 어릴 때 이름은 진이다. 고려조의 정승 권보의 증손으로 호는 양촌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여 일찍이 표문을 지어 명나라 조정에 조회하려 금릉에 이르니 황제가 문연각에 올라 시를 짓도록 명하였다.
본조에 들어와 벼슬은 찬성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충이다. 문장은 당대에 으뜸이었으며, 저서로는 〈입학도설〉 《오경천견록》이 있으며, 또 《양촌집》이 세상에 전해진다. 태종 원년에 수창궁에 불이 났다. 권근이 능에 내려가 여섯 가지의 글을 올렸다.
첫째 성심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을 돈독히 하는 것.
둘째 정사를 청단하는 것을 힘써 할 것.
셋째 조정 선비들을 대우할 것.
넷째는 경연에 부지런할 것.
다섯째 절의를 포상할 것.
여섯째 여제를 행할 것. 《국조보감(국조보감)》
◈ 국가 초기에 글을 올려 황조의 법대로 여귀에게 제사 지내니, 이름하여 여제라 하였다. 열읍에 이르기까지 모두 단을 설치하여 제사 지냈다. -동상
◈ 명나라에 조회할 때 황제가 친히 지은 시문을 하사받은 이래로 중국 문사가 사신으로 오면, 국경에 이르러 반드시 공의 기거를 물었다. 만나면 반드시 시문을 얻어 가지고서 돌아갔다. 〈행장〉
◈ 양촌이 하루는 한유항과 같이 조정에서 숙직하였다. 양촌이 식사하면서 글을 보니 한유항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경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보네. 입으로는 먹으면서 눈으로는 보니, 마음을 오로지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양촌이 듣고 두려워하였다. 〈행장〉
◈ 양촌이 말하기를,
“학문을 하려면 마땅히 먼저 뜻을 세워야 하며 뜻이 세워지지 않으면 비록 만권의 책을 읽는다 해도 어찌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행장〉
◈ 양촌이 명나라 조정에 조회할 때 한 졸개가 전삼(솜털로 만들어 윗도리에 입는 작고 짧은 옷)을 잃어버렸다고 값을 물어달라고 하여 값을 주려하니 명사 발라가 알고 그 졸개를 추국하니, 졸개가 말하기를,
“듣건대, 공은 전에 우졸이 갈모[립모]를 잃어 버렸을 때, 값을 비교도 하지 않고 주었다기에 그랬습니다.”
하니, 발라가 이내 그에게 벌을 주었다. 〈행장〉
◈ 양촌이 문장을 이루는 붓끝이 도도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예문이나 중국에 올리는 사명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행장〉
◈ 신우가 경망하고 음탕하여 권근이 좌의정이 되자 소상을 올려 지극히 간언하니 우왕이 그 말을 받아 들이고 상소문을 사본하여 병풍에 붙였다. 〈행장〉
◈ 고황제의 신정을 축하하는 표전에 희롱하고 모욕하는 말이 들어 있어 표문을 지어 올린 자를 문책하겠다고 하니, 권근이 떠나려 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권근의 아우 권우를 불러 비밀리 황금 10량을 주어 전하여 주도록 하며 급히 사용해야 할 비용에 쓰도록 하라 하였다. 〈행장〉
◈ 공민왕이 일찍이 연소자가 외람되게 과거에 올랐다고 대노하였다. 권근이 나이 18세로 병과에 급제하여 응려(급제하여 임금이 불러 대답하고 나가는 것)에 이르니 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저 어린아이도 급제하였는가?”
하니, 전공거 이색이 답하기를,
“그 기량이 장차 크게 쓰일 것 같으니 어리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하여, 왕의 노기가 마침내 풀어졌다. 〈행장〉
◈ 일찍이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을 저술하여 후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임무로 하여서 모여드는 학도들을 곡진하게 가르치기에 침식을 폐하기까지 하였다. 〈행장〉
◈ 일찍이 《주역》ㆍ《예기》ㆍ《시경》ㆍ《서경》ㆍ《춘추》에 있어서 선유들이 해석하기 어려운 곳을 모두 변론한 것을 《오경천견록이라 제목하였다. 〈행장〉
◈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대학》을 처음 오래 읽었으나 의심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또 오랫동안 읽으니 절마다 의문이 생겼고, 또 다시 오래 읽으니 점차 환하게 깨달아 지는 것 같았다.”
하였다. 〈행장〉
◈ 양촌이 죽으니 삼관(홍문관ㆍ예문관ㆍ교서관)의 선비와 성균관 유생들이 모두 소뢰로써 제사지냈다. -본집
◈ 양촌의 기영회에서는 약법하기를, 잔을 헤아리지 말고 돌아가며 술을 마시는데 많이 마시든 적게 마시든 자작하여 주인은 권하지 않고 객 또한 사양하지 않고서 얼근히 취하는 것만 헤아렸다. -본집
◈ 동양주를 읊은 시에,
병에 가득한 신선주를 동양이라 하는데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기 이상도 하여
담담한 춘당에는 계수나무의 그림자 어우러지고
영영한 새벽 이슬은 난초의 향기를 적셨네
하였다. 또 두부(두부)를 읊은 시에,
누른 콩을 맷돌에 가니 눈 같은 물이 흐르고
가마솥에서 펄펄 끓으니 불을 비로소 거둔다
기름이 엉겨 번드르한 동이 뚜껑을 여니
옥같이 자른 것이 쌓여 밥상에 가득하다
하였다. 본집
◈ 양촌이 말이 들리지 않아 병상에 누워 있는데 임금이 의사를 보내 뜸질로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마침내 〈이롱시〉를 지어 이르기를,
나이 이순(이순 60세)이 되고 보니 도리어 귀는 어두워져
허공에 가득한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는 것 같네
사람의 말은 입술의 움직이는 것만을 보니
손님이 와도 뜻이 통하지 않아 한탄하네
좋고 나쁜 것 알지 못하고 그저 웃기만 하니
음성을 분별하고자 하나 모두 허탕이네
하였다. -본집
◈ 김익의 자는 자오다. 얼굴이 심히 검어 스스로 흑죽자라 호를 지었다. 이웃 동리 사람들은 흑인이라고 불렀다. 양촌의 〈흑옹행〉이란 시에,
흑죽을 모두 참으로 검다 말하나
까마귀의 검은 것은 오히려 옥씨와 사씨의 제비일세
옛 역사에 금부라는 자만 있었던 것 아니고
고래로 여민 중에 어진 이 어느 시대에 없었던고
하였다. -본집
◈ 분연시가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뜰에 못 만들기 어려워
화분에 연꽃을 심었네
진흙 가운데 벽옥 같은 싹이 나오니
수면에 연잎이 첩첩이다
하였다. 《양촌집》
◈ 찰 벼피[나도패]의 이삭과 뿌리를 제거하고 그 중심을 취하여 깨끗한 그릇에 태운 재를 끓는 물에 넣고 맑기를 기다려 찌꺼기를 제거하고 먹으면 갈증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양촌이 이 법을 써서 만들었다. 〈회탕지갈〉이라는 시에 이르기를,
아이가 약을 구하려고 이르니
노복은 재빨리 짚으로 재를 만들어 달인다.
하였다. -본집
◈ 밀인은 꿀벌을 기르는 사람이다. 꿀벌 중에서 큰 것은 많은 벌들의 왕인데 주인은 몰랐다. 마침 밖으로부터 그 집으로 날아서 들어가는데 주인은 왕벌이 이상하게 생겨서 꿀벌을 해칠까 두려워 마침내 죽여버렸다. 후일 많은 벌들이 한 곳에 완전히 모여 모두 죽어버리니, 주인이 그때야 알고 눈물을 흘렸다. 양촌은 〈밀봉설〉을 지어 기록하였다. 《양촌집》
◈ 홍무중은 고성군(고성군)의 한 노부인데 일곱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질병에 걸렸는데 무당의 말이 빌미가 있으니 마땅히 피해야 한다고 하여 일곱 아들은 아버지를 후원에 들것으로 옮겨 놓았는데 한밤중에 호랑이가 아버지를 보고 물어 가버렸다. 일곱 아들은 깊이 잠이 들어 알지 못하고 집으로 모셔 오려고 들어가 보니 계시지 않았다. 아침에 가서 찾으니 호랑이가 시체의 반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일곱 아들은 몹시 무서워 추적하지 못하여 결국 호랑이를 잡지 못하고 반토막 시체를 가지고 돌아와 장사지냈다. 양촌이 전을 지어 10가지 죄목을 헤아려 일곱 아들을 책망하였다. -본집
◈ 서경에 골골이라는 새가 많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새가 많으면 뽕나무와 삼[마]이 성하지 못한다.”
하였다. 양촌이 〈서도잡영〉에 이르기를,
뽕나무 사이의 골골새
때때로 객을 향해 우네
만약 화살을 다 쏜다면
다시 밭두둑에 무성한 삼을 보리라
하였다. 《양촌집》
◈ 〈입학도설〉에 〈심문〉 1편이 있는데 심문천이라는 글을 저술하기를,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음란하면 화를 받는 응보에 있어서는 명확치 않은 점이 있어 세상 사람들은 선을 다하고 악을 버리는 것을 알지 못하니 대개 마음이 주재하는 것에 의탁하여 하늘에 물어 따랐다.”
하였다. -본집
◈ 양촌이 말로써 우봉현으로 귀양갔다. 와서 위문하는 한 농부가 있었는데 이에 〈전부언〉을 지었다. 본집
◈ 서경 사람들은 갈대를 엮어 부채를 만들어서 파리를 쫓으니, 양촌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갈대를 엮어 부채 만들었는데
파리를 다 쫓아내지는 못하네
엮어진 무늬는 꾸밈없이 순박하고
드러난 마디 또한 네모지네
펴서 힘있게 흔들면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고
접어 쥐면 곧 몸을 부축하네
유량의 먼지 피할 수 있으니
서도에 있는 그대를 사랑하노라
하였다. -본집
점춘일 성남즉사(점춘일성남즉사)에,
봄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니 청명(청명 4월 15일, 6일경)이 가까운데
이슬비가 부슬부슬 늦도록 개이지 않네
집 모퉁이의 살구꽃은 모두 피고자
몇 가지에 이슬을 머금고 사람을 향해 기울었네
하였다. 삼봉(삼봉) 정도전이 비점하기를,
“말이 조화를 빼앗았다.”
하였다. 《양촌집》
◈ 권근이 진정(진정)하는 차자를 올려 부친의 봉작을 회복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당시 권근의 부친 권희는 나이 83세로 개국 초에 검교 시중을 제수받고 부원군에 봉되었다가 대간의 상소로 인하여 도로 거둬들였는데 권근이 차자를 올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전의 작위와 봉록을 돌려줄 것을 청한 것이다. -본집
◈ 양촌이 일찍이 말하기를,
“고려 5백년 사이에 유명한 사람이 많았으나 도은(이숭인)과 같이 성대하고 전아한 이는 없었다.” 하였다. -본집
◈ 새해를 축하하는 표전에 희롱하고 모욕하는 글자가 있다고 해서 명나라 황제가 표를 지은 사람을 불러 권근이 명나라 황제에게 알현하니 황제가 두터운 예로써 대접하고 조정의 문사들로 하여금 교유하도록 하였다. 또 글제를 주어 시를 짓도록 하고 친히 세 편의 시를 지어 주어 응제시라 하였다. 《양촌집》
◈ 삼봉 정도전ㆍ도은 이숭인이 양촌 권근과 더불어 서로 평생의 즐거운 것을 논하는데, 양촌이 말하기를,
“흰 눈이 뜰에 가득하고 붉은 해가 창을 비치면, 따뜻한 온돌방에 병풍을 둘러치고, 화로를 안고,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고, 그 가운데 쭉 뻗고 드러누었는데, 미인은 수를 놓다가 때때로 바늘을 멈추고 밤을 구어 먹으면 이것이 족히 즐거움이다.”
하니, 정도전과 이숭인 두 선생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의 즐거움이 우리들을 흥기시킬 만하네.”
하였다. 《골계전》
◈ 양촌이 충주에 귀양가 있는데, 우리 태조가 계룡산에 행차하였다. 권근이 부름을 받고 행재소에 나아가니 은으로 만든 쟁반 하나를 주며 여러 재상에게 활로 내기하라 하였다. 무신도 모두 맞히지 못했는데 권근은 평생에 한 번도 활을 잡아 본 적이 없으면서도 화살 하나가 적중하여 은으로 만든 쟁반을 얻었다. 《필원잡기》
◈ 정치는 이것을 향해서 문명하고, 벌은 이것을 향해서 중정하고, 남와(여름에 변화하는 일, 즉 사물이 성장하는 것)는 이것에 머물러 평질하니 천지의 남이요, 봄보다 먼저 따스하고 날이 저물도록 따뜻하며, 구렁에 얼음이 얼 때도 생의가 앙연함은 한 산의 남쪽이요, 처마가 비어 바람이 오고 창문이 밝아 해가 비춰도 여름에는 더위를 씻고 겨울에는 햇빛을 쪼이는 것은 한 집의 남쪽이다. 〈남곡기〉
◈ 그 소리가 굉장하고 춤이 돌면서 변화하여 훨훨 쌍나비가 꽃에 둘린 듯, 굼실굼실 두 용이 구슬을 다투듯, 봄을 재촉함보다 화하고 귀양감보다 빠르니, 악부 가운데 가장 기이하다. 〈무고설〉
◈ 〈천문도〉의 석본은 옛날 평양성에 있었다. 고려말 병란으로 인하여 강에 빠져 분실되었다고 한다. 국초에 한 본을 바치는 자가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별이 돌아가는 도수가 차이가 나 다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여 지금의 네 가지를 해질 무렵과 해뜰 때에 힘써 새로운 그림을 만들고 또 새로 〈중성기〉 한 편을 수찬하여 올렸다. 〈양촌도설〉
◈ 작은 물방울이 떨어져 처마를 적시고 이끼 낀 뜰안이 낮에도 적막하니 바둑 두기에 적당하고, 섬돌에 물방울이 떨어지니 처마 밑 오동나무는 밤에 소리를 내니 거문고를 연주할 만하고, 심한 더위가 이미 씻기니 맑고 상쾌한 바람이 시원하여 혹 술자리를 마련함이 적당하고 혹 시를 읊을 만하다. 양촌의 〈우정기〉
◈ 양촌이 명나라에 조회하니 고황제가 문연각에 올라 제목을 주며 시를 짓도록 명하였다. 또 황제가 지은 글을 하사하고 이어서 두루 보도록 허락하였다. 매양 사물에 익숙한 수재라고 청하였다. 응제시의 ㈜
◈ 명나라에 조회할 때 황제는 두터운 예로써 대우하고, 또 명하여 남시ㆍ북시ㆍ내빈ㆍ중역ㆍ학명ㆍ취선에서 노닐게 하니, 모든 누관의 아름다움을 두루 보지 않는 것이 없었다. -동상
◈ 황제가 8수를 명하여서 지어 바치도록 명하였다. 모두 〈왕경작고〉ㆍ〈이씨이거)〉ㆍ〈출사〉ㆍ〈봉조선명지경〉ㆍ〈도경서경〉ㆍ〈도압록〉ㆍ〈유요좌〉ㆍ〈항래주해〉 등이다. 또 제18수를 지어 바치도록 명하였다. 그 정화하고 아름다운 음향이 옥구슬 같아 황재가 두루 살펴보고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동상
◈ 어떤 사람이 뱃 속에 기생충이 있어 배가 불러, 먹고 마시지를 못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 그 사람에게 연거푸 소주 두 잔을 마시게 하니 곧 취하여 기침을 심히 하더니 갑자기 고기 부대를 토하였다. 헤쳐보니 가득히 들어 있는 것은 모두 살아 있는 벌레였다. 또 한 덩어리를 토하였는데 모두 죽은 벌레가 전번의 배나 되었다. 수일이 지나자 그 사람은 심신이 회복되어 일어났다. 그 후 병은 완전히 나았다. 양촌의 〈경험설〉
◈ 난초를 사랑함은 향기롭고 덕성스러워서이고, 대를 사랑함은 굳센 절개 때문이요. 매화를 사랑함은 청초함 때문이요, 혜를 사랑함은 수려함 때문이다. 〈사화기〉
◈ 고려 신우 경신년에 우리 태조가 운봉현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적의 장군 아지발도를 참수하였는데, 성균 좨주 권근이 경하하는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삼천의 마음과 덕이 모두 같으니
군율이 오늘날 같음은 태조의 힘이었네
국가에 바친 충성은 밝기가 해를 꿰뚫은 듯
칼날 꺾는 용렬함엔 찬기운 일어나는데
동궁(옛날 천자가 공이 있는 제후에게 하사하는 붉은 화살) 혁혁하여 은혜와 영광이 무거운데
지휘하는 깃[제갈공명이 지휘할 때 든 부채]이 우뚝 솟아 영웅의 기세로다
한 번 개선하니 종묘 사직이 정해지고
마상에서 기이한 공 세웠음을 알겠네
하였다. 《동각잡기(동각잡기)》
◈ 봄에는 밭갈이하고, 가을에는 거두어들여, 위로는 세금을 바치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먹인다. 혹 지팡이 끌고 홀로 가고, 혹 술통을 끌고 □□ 〈농은기〉
◈ 논자가 이르기를,
“목은(이색의 호)은 소동파와 꼭 같다.”
하자, 어떤 이는 너무 지나치다 하니, 양촌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돌아가서 소동파의 〈전적벽부〉ㆍ〈후적벽부〉와 이색의 〈관어대부〉를 읽어보면 스스로 그러함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시화총림》
◈ 양촌의 시는 온후하고 전실하다 하여 홍무(명나라 연호(1368~1389)) 연간에 부름을 받아 입조하였는데, 명나라 황제가 글제를 명하여 시 24편을 짓도록 하였다. 모두 붓을 잡고 즉석에서 지었는데 시사의 표현이 아주 치밀하여 점철을 가할 것이 없으니 황제가 더욱 기이하게 여겼었다. 《시화총림》
◈ 고려 말 권근이 상소하기를,
“요즘에 증설한 관직은 인원수를 정하지 아니하여 공이 있는 자는 직위를 얻어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공이 없는 자는 무릅쓰고 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관작의 천함이 꼭 진흙 같습니다.”
하였다. 《고려사》
◈ 간관 주사충이 이숭인의 죄를 논하여 탄핵하니, 권근이 글을 올려 구하기를,
“이숭인의 말은 약간 과실은 있으나 공문[공함]을 보내어 문책하는 데 그쳐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고려사》
◈ 신우 때 권근이 명 나라 연경에 입조하였을 때 중국 예부에서 고려 왕씨가 살해를 당하고 다른 성으로써 대를 이은 죄를 문책하는 질문서를 보내는 것을 권근이 사사로이 뜯어 보고 후에 정부에 회부하였다. 헌부에서 사사로이 뜯어 본 것을 논하여 천기를 누설하였다고 멀리 유배시켰다. 《고려사》
◈ 권근ㆍ이직이 고려 조정에서 출신하여 파리와 개 같은 행동을 만족하게 여겼으니, 정몽주와 최영이 목숨을 바쳐 한 번 죽는 것과 비교한다면 보잘 것이 뭐 있겠는가. 사람들이 흰 실[소사]은 고정성이 없어 검정 실과 누런 실로 대용했다는 것으로 비교했으니, 정몽주와 최영을 일컫는 것이다. 《잡록》
◈ 한산 늙은이 이색이 주서로 길재가 편찬한 사기를 편수하고자 하는데 권근은 고려 때 사람으로 본조에 들어와 실제 일을 먹으로 지워서 뒤바뀐 내용이 많았다. -상동
◈ 지정(원나라 연호) 신축년에 홍건적이 경성을 함락하니 이때부터 여러 군이 기세만 보고도 항복하여 공복을 입고 환영하는 자까지 있었다. 안성 사람이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잔치를 베풀어 군사를 취하게 하여 섬멸하니, 다시 남하하지 않았다. 양촌의 〈안성루기〉
◈ 국초에 우리 태조가 의흥 삼군부에 명하여 사인소(병사가 거처하는 곳)를 설치하고 교도관 배설하여 모든 신하로 하여금 보증하여 추천케 하였다. 분과별로 문과 무의 과업을 익히게 하는데, 경학을 익히는 곳은 체를 밝혀 적용하는 당[명체적용지당], 병학은 먼저 계획하여 이기게 하는 당[선계제승지당], 율학은 흠휼지당), 산학은 상명지당, 의는 제생, 사는 관덕이라 하였다. 15, 6세 이상으로 벼슬을 못한 자는 모두 속하게 하였다. 〈양촌기〉
◈ 고려 말 안동[안가]에 어떤 은사가 있었다. 일찍이 주군의 수령으로 백성을 해롭게 하는 것을 제거하는 데 힘서 항상 말하기를,
“다스리는 자는 농부와 같다. 농부는 마땅히 먼저 벼를 해치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
하더니, 시골로 은퇴하였을 때는 항상 가래삽이 있는 장대, 잘 갈아진 칼, 짧고 예리한 낫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말하기를,
“세 벗이다.”
하였다. 풀을 벨 수 있는 것은 가래삽이요, 나무를 자를 수 있는 것은 낫이요, 물건을 깎고 다듬을 수 있는 것은 잘 갈려 있는 칼이다. 〈양촌기〉
◈ 의창을 설치하여 풍년에는 거둬들이고 흉년에는 나누어 주어, 백성이 가난하고 궁핍함이 없었다. 〈의창기〉
◈ 글은 홀로 보되 강론할 필요는 없고, 시는 자기 홀로 읊되 서로 주고 받을 필요는 없고, 술은 홀로 따라 마시되 손님과 주인이 있을 필요는 없다. 봄날 아침에 꽃을 보면 꽃을 즐길 수 있고, 가을밤에 달을 보면 달을 즐길 수 있다. 구름 낀 봉우리의 기이함과 눈 낀 소나무의 기이함은 즐길 만하고 희귀한 새의 소리와 제 때에 알맞게 오는 빗소리는 즐겁게 들을 만하다. 혹 정원을 거닐고 혹 침상에 누워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그림자와 더불어 같이 간다. 〈독락원기〉
◈ 송도(개성) 서쪽에 벽란도가 있는데, 그곳은 바다와 가깝기 때문에 조수가 사나워 건너는 자들이 매우 고통을 받았다. 그 강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식파라 현판하니 이섭 (《주역》에 나온 말)의 뜻을 취하여 이름한 것이다. 〈양촌정기〉
◈ 홍무(명나라 태조의 연호) 병자년 1356년 태조 5년에 연경으로 조회가니 명나라 태조가 장구 사운시 세 편을 친히 지어 주었다. 칙령을 받들어 귀국하는데 꿈에, 몽롱하게 천상에 올랐는데 깨고 나니 먼지와 흙 속에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황제가 지어 준 글이 상자 속에 있으니 의당 10겹으로 싸 소장하여 영세의 가보로 삼겠노라. -양촌이 본국에 도착하여 쓴 글
◈ 하늘 천자는 한 일과 큰 대 자로 되었다. 한 일은 이를 말할 경우는 짝이 없고 운행을 말할 경우는 끊임이 없다. 대는 체를 말한 것으로 무궁한 것이다. 《입학도설》
◈ 초옥자가 동두(대머리)라 자호하였다. 다만 술이 있으면 진한지 묽은지 맑은지 탁한지를 묻지 않고 마시며, 취하면 모자를 벗고 이마를 내놓는다. 〈동두설〉
◈ 양촌은 얼굴이 검어 사람들이 지목하므로 소오자라 자호하였다. 〈동두설〉에서 나옴
◈ 험한 경지에 처하면 두려워서 당황하고, 두려워서 당황하게 되면, 경계할 수 있어 안전하게 나갈 수 있다. 〈주옹설〉
◈ 신유정이 경원을 다스리게 되자, 양촌이 글로써 경계하기를,
“그곳 백성의 성질이 사납고 거칠어서 길들지 않은 금수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위엄으로만 다스리면 물지 않으면 달아날 것이니, 마땅히 정성으로써 어루만져 그들로 하여금 기쁘게 복종하게 하여야 한다. 이는 곧 야수를 몰아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니 산림에 있는 것도 나의 울타리를 엄하게 단속하여서 저절로 오기를 기다려야 하고 반드시 산림까지 쫓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본서〉
◈ 무릇 사람이 말[마]을 고삐로써 제어하고, 소를 수레로써 부린다면, 소임이 무겁고 일이 수고로워도 마음과 같이 안 됨이 없고, 발에 차이거나 뿔에 찔릴 염려가 없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를 이용한 것이다. 〈양촌서〉
◈ 병은 국가의 큰일이니, 병을 주도하는 주권이 흩어지면 통솔할 수 없다. - 사병을 해체하라고 청한 글
◈ 양촌은 문장으로써 이전의 문사들 중에서 뛰어났고, 그 이름은 중국에까지 떨쳤다. 아들 권제는 장원으로 뽑혀 문장으로 대를 이어 세종[영묘]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동문선》
◈ 원나라 이설이 가족을 데리고 동쪽 우리나라로 왔다. 그 선인인 도운은 국가를 위하여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그래서 신이 되어 기이하게 나타나 전쟁을 독려하였으니 신하로서 충신이요, 부인은 일찍이 과부가 되어 의를 지켰으니 여자로서 정부요, 아들 총관은 10세 때 넓적다리를 베어 어머니 병을 치료하였으니, 아들로서 효자다. 한 집안 안에 삼절이 잘 갖추어졌으니 그 당을 삼절당이라 이름하였다. 양촌의 서문이 있다. 《동문선》
◈ 고황제 27년 원단 하례에 정총이 표문을 짓고, 김약항이 전문을 지은 것을 권근이 윤색하였는데, 고황제가 표문과 전문에 희롱하고 모욕하는 말이 들어가 있다고 하여 노하여 정총ㆍ김약항ㆍ권근을 불러 힐책하였다. 권근은 용서를 받아 돌아오고, 정총과 김약항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필원잡기》
◈ 문충공(권근의 시호)이 일찍이 《입학도설》을 저술하였는데, 주자의 〈태극도〉와 주자의 《중용장구》의 해설에 의거하여 천인심성합일도를 만들었다. 이것은 내용이 광대하고, 모든 이치를 빼놓지 않고 다 포함하였으며 정심하고 미묘하여 옛 성인이 발명치 못한 것을 확충하고, 무궁토록 후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군자는 이것을 닦기 때문에 길하고, 소인은 이것을 거슬리기 때문에 흉하다’는 설로 다만 중요한 강령만을 열거하여 배우는 자들에게 보여준 것이니 그 뜻이 심오한 것이다. 《필원잡기》
◈ 고씨가 고구려를 세우고, 왕씨 고려를 세워서 연대도 다르고 나라 이름도 다른데, 한ㆍ진으로부터 수ㆍ당에 이르기까지 항상 고려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세대의 선후가 서로 혼잡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분별하지 않고서 옛 그대로 둔다. 응제시의 (주)
◈ 오직 그의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벼슬이 끊김이 없이 오늘에 이르러 더욱 성대하니 사람들 모두가 말하기를, “양촌. 양촌.” 하여 마치 덕행이 있는 듯이 여기고 있으니 이름을 도적한 것이 너무 심하다. - 신상촌의 설
◈ 병권은 국가의 큰 권력이니 마땅히 통솔에 소속됨이 있어야 하고, 통솔의 주권이 흩어지면 안 된다. 병권을 관장하는 자가 많아지면 각기 도당을 심어 화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니 동기간에 서로 죽이고 공신이 보존할 수 없는 것이 항상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 사병을 혁파하라는 장계
◈ 오직 우리 태상왕께서 개국 초에 특별히 의흥부를 설치하여 병권을 전담하여 장악하도록 하니 당시 평하는 자가,
“혁명 초에는 인심이 미처 정해지지 않았으니 뜻하지 않은 변란을 마땅히 대비하여야 하므로, 응당 훈친으로 하여금 각기 사병을 관장시켜서 창졸간에 일어나는 변란에 응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집안 지친에서 화가 일어나니 대간의 일찍이 혁파하라고 청한 그 말이 징험이 있다 하겠다. 〈주장〉
◈ 수창궁이 실화되자 성상께서 8가지 일로써 자책하시며 직언을 들어 재변을 없애고자 하시니 신 권근이 감히 마음속 깊이 간직한 것을 다 털어서 아뢰지 아니하겠습니까.
첫째, 효성을 돈독히 할 것[독성효].
둘째, 정사를 청단하는 것을 힘써 할 것[근청정].
셋째, 조정 선비를 접견할 것[접조사].
넷째, 경연에 힘쓸 것[근경연].
다섯째, 절의를 포상할 것[포절의].
여섯째, 여제를 행할 것[행려제].
일곱째, 여덟째, 두 가지 글이 빠졌음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시행하기가 심히 어렵지 않으나 행하면 매우 유익합니다.
8가지 일은 모든 정치의 요점이 되니, 한 가지라도 도를 얻지 못함이 없으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하고, 하늘의 뜻에 합치할 만하고, 화기를 부를 만하고, 재변을 없앨 만하고, 지극한 정치를 일으키고, 큰 복을 오래할 만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임금께서 단호히 거행하셔서 만세를 다행하게 하소서. - 수창궁 화재 때 올린 글
◈ 신 권근은 장구의 말학으로서 오랫동안 문한의 소임에 있었고 외람되이 유학 제조가 되었으니, 감히 소견을 다하여 문치에 만분의 일이나마 돕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늙은 나이로 병이 많고 정신이 혼미하니, 비록 후학을 가르치려 하나 실지로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러기에 삼가 권학사목에 관하여 몇 조목을 들어 갖추어 아뢰옵니다.
“그대는 선대의 음덕을 입어 문예를 장식하고 조정의 반열에 나아가 청요직에 드날리며 거침없이 큰 거리를 달리고 후한 녹을 받아서 집을 윤택하게 한 지 여러 해였으나 조정에서 일찍이 그대를 버리지 않았으며 대각에서도 어느 누가 그대를 모르리오. 옷깃을 연하고 여럿이 어울려 다니며 수레를 접하여 여럿이서 희롱하며 청운을 향하여 나래를 치고 임금을 받들어 영광을 보셨습니다. 밖으로는 향리를 빛나게 하고 안으로는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가 있었으니, 그대가 조정에 나간 것은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마땅히 공을 생각하고 사를 잊어야 하며, 진실을 추구하고 명예를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발끈 성내어 남을 거역하지 말고, 이익을 구하여 분주히 왕래하지도 않는다면, 공명을 보전할 것이니 뉘 감히 그대와 경쟁할 것이며, 부귀를 지킬 것이니 뉘 감히 그대를 거스르겠습니까. 그대는 이렇게 나가지 않고서 마침내 죄인을 두둔하여 벼슬을 잃게 되었으니, 이는 저 사람의 죄를 풀어 주고자 하다가 자기가 죄에 걸릴 것을 알지 못하고 저 사람의 불효를 변명하고자 하다가 어버이 마음을 상할 것을 걱정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대의 죄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진 임금을 만나서 형벌에 처하지 않게 되어 지극히 다행한 일인데, 어찌 활발하지 못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 듯이 보이오?”
하였다.
“노인의 말이 옳소. 나도 또한 소회가 있으니 감히 말하겠소. 방금 국가에는 성군과 현신이 서로 만나서 밝은 자는 그 명찰함을 다하고 통달한 자는 융통력을 다하며, 뛰어난 호걸이나 초야의 궁한 선비라도 자신의 능력을 다하여 간사한 소인을 쫓아내고 오랜 폐단을 개혁하여 정치의 도가 이처럼 융성해졌습니다. 나는 사람됨이 적당히 쓸 곳도 없고 학식은 한 가지도 통하지 못했으나 외람되이 특별한 발탁을 입어 오래도록 조정의 반열에 끼어서 편히 지내왔소. 무릇 사람이 이만큼 착한 것이 있으면 나는 그에게 복종하고, 사람이 이만큼 통한 것이 있으면 나는 그의 어짊을 믿어서 충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온 마음을 바쳤습니다. 하물며 그 사람의 행실이 단정하고 성품이 자상하되 일찍이 자기의 능력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으니, 어찌 이익만을 따라서 스스로 꾀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비방을 입어 남쪽 구석으로 쫓겨가게 되니 어찌 국가를 위하여 애석한 일이 아니며 세도를 위해서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령 이 사람이 산골에 은거하고 있다 해도 오히려 마땅히 불러들여야 하겠거늘, 하물며 관직이 높고 선비의 원로로 뛰어난 명성이 화이에 떨치고 문장이 해와 별처럼 빛남에 있어서랴! 나는 편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진 이를 추대할 뿐이오. 내가 사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도를 확장하자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감히 임금 앞에 호소하면서 재앙이 미칠 것은 생각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아! 한 사람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되면 저, 이윤 같은 이는 이것을 측은히 여겼고, 어진 이를 추대하고 능력 있는 자를 의논하는 것은 주 나라의 법도에 있으며, 공자는 곧은 이를 버리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는다.”
고 경계하였으니, 거룩한 이 교훈이여! 후세 임금의 법이 될지로다. 비록 백 마리의 새매[지]가 있더라도 큰 독수리 한 마리만 같지 못하다 하니, 저 같은 사람이야 아무리 많은들 무엇이 나라에 보탬이 되겠는가. 저 《시경》의 치의를 노래하고 백구를 잡아매어 차라리 한 세상에 미움을 받을지언정,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겠소. 뭇사람이 상소하여 나에게 죄줄 것을 청해서 헤아릴 수 없는 화를 입게 되었는데 어진 우리 임금과 덕이 있는 정승이 특별히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서 이렇듯 밖으로 쫓겨나왔소. 마음 놓고 돌아다니니 이 산골짜기에 산이 웅장하고 물이 굽이쳐 흘러, 산 높고 물이 기니, 덕에 감격함이 그지없네. 그침과 행함 영화롭고 욕된 것은 하늘이 시키는 것이니, 내 어찌 즐겁지 않으리.”
하였다. 농부는 이에 술잔을 들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취하도록 마시고 일어섰다. 〈전부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