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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22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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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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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iDTWGv7fMc&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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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못 볼 사람>
남도의 한 명산을 다녀왔습니다. 산 능선에 오르니 산 아래로 펼쳐지는 장관에 다들 탄성을 질렀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니 별것도 아닌 걸로 아웅다웅, 티격태격 그렇게 살아왔던 지난 삶이 새삼 부끄러워집니다. 이래서 등산이 좋은가봅니다. 자주 올라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산 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걸으면서 우리네 인생도, 우리네 사랑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사랑에도 분명히 오르락내리락, 심한 굴곡이 있기 마련입니다.
서로 좋아 살짝 맛이 갔던 시절, 잠시라도 못 보면 힘들어 죽습니다. 그런 시절이 불과 10년, 20년 전인데 이젠 어떻게 하면 잠시라도 좀 떨어져있을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왜 저 사람은 해외출장 한번 안 가는가, 불만입니다.
'저 사람으로 인해 내 인생이 행복하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이제 '저 사람이 없어야 내가 숨을 쉬겠구나'라고 까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려는 노력입니다. 앞만 보고 서로 으르렁거릴 일이 아니라 철저하게도 가련한 그의 약함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아주 건강상태가 양호한 노인과 마주한 의사 선생님, 노인의 종합 검진 결과서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이는 85세이신데, 몸의 나이는 50대였습니다. 도대체 건강관리의 비결이 뭐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혼 초에 부인과 약속 한 가지를 했었는데, 그걸 평생 지켰더니 이렇게 건강하더군.”
“그 약속이 뭔데요?”
“결혼생활 해나가다 보면 분명 서로로 인해 화날 일이 생기고, 언성을 높일 일도 생길 텐데, 그럴 때마다 즉시 남편은 집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고, 부인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독서나 음악 감상을 하기로. 서로간의 완충지대를 두고 끝까지 지켜나가기로.”
결혼생활하시는 분들, 배우자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의 존재 자체가 싫증이 날 때, 계속 붙어있다 보면 심각성은 더해만 갑니다. 과감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가까운 산이라도 다녀올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면 안 된다고, 강하게 역설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기는 계명들은 주로 어떤 것들입니까? 죽을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로 가까운 사람들로 인해 어기게 됩니다.
고백성사꺼리는 어디 다른 하늘 아래서 잘못한 것이 아니지요. 주로 부모 자녀 사이, 배우자 사이에서, 절친한 동료 사이에서 주로 생겨납니다.
매일 저녁이면 저녁 마다 어제의 그를 내 안에서 몰아내면 좋습니다. 그 빈자리에 처음 만난 그, 좋았던 시절의 그, 상냥하고 싹싹하고 친절하던 그로 채우는 노력을 한번 반복해보십시오.
매일 저녁 잠 자리에 들 때마다 ‘그’를 바라보며 주문 한 가지를 습관처럼 외워보십시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못 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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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율법은 사랑이라는 완전한 걸작과 같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dZiNTn6x2o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거의 지옥이 없는 것처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있다고 하시는데 왜 어떤 분들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고해 성사를 할 때 어떤 신부님은 저에게 자신과 화해하고 화가 날 때는 화를 내고 성욕이 올라올 때는 굳이 막으려 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시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고 가르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루카 11,42; 마태 23,23)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제가 십일조에 대해 말하면 마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치는 듯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마치 지옥도 없다고 말하고, 화를 내도 되고 성욕도 좋은 것이라고 말하며 십일조와 같은 것들은 개신교나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자비로운 사제로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왜 율법에서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될까요? 모든 율법을 하나로 모으면 ‘사랑’이란 한 자가 나옵니다. 즉, 율법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총합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표현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니 율법 자체는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모자이크나 훌륭한 작품에서 어떤 한 조각이 빠지면 완전한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율법이라도 어기거나 또 그래도 된다고 말하면 하느님의 모습을 그만큼 훼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자세로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사람이 가져간 작품은 무언가 빠져있거나 불완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작은 율법 가운데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지키고 나머지는 바꿔버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보다 나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까지도 자기 뜻대로 변형시키게 됩니다.
5천 명의 시민이 사는 스페인 북부 작은 시골 마을 보르하의 한 성당에는 19세기 화가 엘리아스 가르시아의 벽화 ‘에체 호모(여기 사람이 있다)’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붉은 망토를 걸치고 가시관을 쓰고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매우 정밀한 걸작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메네스라고 하는 할머니가 성당 청소를 하다가 습기 때문에 벗겨진 그 그림을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려진 예수님께 뭐라도 해 드리고 싶어서 벗겨진 부분을 물감으로 덧칠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수님의 얼굴을 마치 원숭이처럼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화가의 손녀에게 소송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신문에 나자 오히려 그 그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 시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하느님의 법을 우리가 수정할 수 있다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지옥이 있다면 있다고 믿고, 십일조를 내라고 하셨다면 내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그러려는 노력을 시작합시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가 그린 하느님의 법을 들고 올라가야 합니다. 저런 식으로 하느님의 법을 망쳐놓았고 그것을 가져간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율법은 하느님 본성인 사랑을 그려낸 걸작입니다. 거기에 인간이 손을 댔다가는 훼손만 될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새겨봅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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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율법과 예언서를 만드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하심으로써 모두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이미 파스카 식사의 신비를 당신의 수난으로 완성하셨을 때 율법을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잘 보존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가르쳐 하늘 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작은 것들도 하늘 나라라는 위대한 미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 가르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율법과 예언서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때, 그 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옛 것은 사라질 것이다.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가르침이 얼마나 참되며 거룩한지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알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신데 어떻게 실제로 행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는가?그분은 당연히 율법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지키셨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지만 지키지는 않는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 계명들 가운데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 반대되는 법을 만들어 낸 자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을,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법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의 약속이다.그리고 그것은 최선의 것은 아니다. 법은 어떤 최소한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을 어기게 되면 불편해지는 것이 법의 모습이다. 우리 모두는 법의 한계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기에 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에 매여,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마음의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율법에 나의 이웃을 대입시키고 판단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하느님의 눈으로 성서의 정신을 따라 인간을 생각하고 행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율법주의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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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아우토반’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독일의 고속 도로 이름입니다. 우연히 이 도로에서 운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길이 잘 닦여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운전자들이 추월선과 주행선을 확실하게 지키기 때문에 안전하게 10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운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기회에 이집트에 갔습니다. 땅이 넓은 곳이라,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고속 도로가 어느 정도 잘 닦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운전자들은 차선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고속 도로임에도 무단 횡단을 하는 이들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균 60킬로미터 정도밖에 달릴 수 없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였습니다.
이 두 나라의 운전 상황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로 사정이 약간 다르기는 합니다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도로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도로 규칙은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 줍니다. 그리고 그 규칙 자체는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니 힘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지켜야만 하고, 힘이 없는 사람도 당당하게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정녕 예수님께서는 율법 안에 사랑을 담아 그 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어 율법 안에서도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는 덫이 아니라 온전하고 자유롭게 하느님 나라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징검다리로 삼게 해 주셨습니다. 유다인이든 이민족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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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율법>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들이 미완성 상태여서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너무 부족하고 잘못되어 있는 상태여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가르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법을 폐지하고 당신의 독자적인 법을 세우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느님 법의 실천’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오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바리사이파의 ‘율법주의’는 잘못된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겉으로만 보면 계명들과 율법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완벽한 신앙생활로 보이지만,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겉으로만, 또 형식적으로만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키는 잘못된 신앙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계명들과 율법들을 주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식일을 지킨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날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정하신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율법주의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일 잘 지키고, 교무금 잘 내고, 판공성사 잘 보고, 단체 활동 잘하고... 그러나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복을 받아 누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겉으로만 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 실천은 없는... 그런 모습도 율법주의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법은 영원하다는 뜻이고, 또 아무도 그 말씀과 법을 마음대로 폐지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다. (폐지와 개정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그 권한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음식에 관한 율법들을 예수님께서 폐지하셨는데(마르 7,19), 그 율법들의 바탕이 되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폐지하신 것은 아니고, 이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을 올바르게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십계명의 경우를 보면, 원래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었던 제3계명을 우리 교회는 주일을 지키라는 계명으로 바꾸었는데, 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심으로써 안식일보다 주일이 더 중요한 날이 되었기 때문에 주일로 바꾼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정하신 하느님의 뜻과 주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뜻을 모두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본래 ‘안식일의 정신’은 쉴 틈 없이 일만 해야 하는 노예들도 쉴 수 있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4-15)>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똑같이 중요하니까, 똑같이 지켜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해서, 덜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무시하고 안 지키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자기 혼자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그것을 시킨다면, 그것은 더 큰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율법주의의 반대쪽에 편의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형식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들을 자기 마음대로 무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편의주의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가, 아닌가? 를 판단하는 것은, 신앙인 자신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여기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라는 표현 때문에,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신경과민증에 걸릴 정도로 세심하게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시는 것은 아닌가?”라고 오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고, 인간들이 마음대로 계명들과 율법들을 분류하고, 무시하는 것을 금지하신 말씀입니다. (“가장 작은 것 하나”라는 말은,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가장 작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하나”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가장 작은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라는 말씀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 쏟아서, 계명이 큰 것으로 보이든지 작은 것으로 보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계명들을 모두 다 잘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작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무시하는 것은 사랑 없는 태도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자세는 ‘정성’입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믿고 섬긴다면, 정성을 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앙생활에 정성이 없다면 그것도 사실상 형식주의이고, 율법주의입니다. 무대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가들은 음 하나라도 틀리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집중합니다. 만일에 한 음이라도 틀리게 연주하면, 그 연주 전체를 망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바로 그렇게 집중하고, 바로 그렇게 정성을 다 쏟아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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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처음 외국에서 지낼 때입니다. 2005년이니까 15년 전입니다. 한국에서 당분간 지낼 수 있는 돈을 가져왔습니다. 교구에서도 매달 생활비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돈을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분명 지갑에 돈이 있었는데 낯선 곳에서 지내는 두려움, 외로움 때문에 잘 쓰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행 계좌도 만들었고, 한국 성당에 주일미사를 도와주었고, 강의를 다니면서 시간도, 여유도 생기면서 돈을 쓸 수 있었습니다. 돈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입니다. 삶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두 번째 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월급도 나오고, 한국에서 쓰던 카드가 있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여유롭게 돈을 쓰고 있습니다. 성격 탓인지 아직도 몇 번씩 생각해보고 마트에서 물건을 구입하기는 합니다.
군자는 중용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소인도 중용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군자의 중용이 시의적절한 중용이라면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의 중용이라고 합니다. 군자는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 범람해서 갈 수 없다면 강물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소인은 약속했으니 불어난 강물을 건너다 위험에 처합니다. 군자는 쓰임과 재능과 본성을 알아보는 겁니다. 큰 기둥은 문을 부수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기는 어렵습니다. 쓰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쥐를 잡는 데는 고양이만 못합니다. 재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올빼미는 밤에는 작은 벌래도 볼 수 있지만 대낮에는 산도 보지 못합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인은 쓰임과 재능과 본성을 알지 못합니다. 소인은 열심히 달리지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쓰임과 재능과 본성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도 중용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알았지만 율법의 진정한 쓰임을 몰랐습니다. 안식일을 지켰지만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 의미를 몰랐습니다. 단식하고 기도했지만 자신의 뜻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단식과 기도의 진정한 가치는 하느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와 시대의 흐름을 아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에게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재능을 보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의 재능을 교회를 세우는 재능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죄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닫혀졌던 하느님의 모상을 사랑으로 깨우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중용의 삶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 때 보는 세상은 예전에 보는 세상과는 다른 법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 앞에 무기탄의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틀’을 넘어 시대의 징표와 흐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앞에 시의적절한 중용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심판과 비판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과 자비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구속과 억압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자유와 용서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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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치유법>
마태오 5,17-19 (예수님과 율법)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치유법>
아픈 곳이 있어요
아픈 곳이 없으면
아프지 않겠지
아픈 곳을 없애요
한 곳 없애고
또 한 곳 없애고
아무 것도 없어요
아픈 곳이 있어요
아픈 곳보다
더 아픈 곳이 있으면
그곳은 안 아프겠지
더 아픈 곳을 만들어요
아픈 곳보다
더 아픈 곳
그보다 더 아픈 곳
점점 더 아파요
아픈 곳이 있어요
아픈 곳과
아프게 한 것은 달라
아프게 한 것을
아픈 곳에서 없애요
아프게 한 것을
찾아내서 없애는 것이
힘들고 오래 걸리지만
마침내 말끔히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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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어제 저는 안경을 새로 맞췄습니다. 전에도 강론 시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변화에 무디고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저에게 이것은 매우 커다란 변화입니다.
사실 전에 쓰던 안경테는 새 사제 때 맞춘 것이었습니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잠시 한국에 들어와 안경테를 다시 맞춰야 했는데 익숙한 것이 좋아 똑같은 테를 구해서 써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깐 약 8년이 넘는 시간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었음에도 굳이 같은 안경테를 고집한 셈입니다. 또 다시 시간이 흘렀고 안경 렌즈에 기스도 많이 가서 또 다시 새로운 안경을 맞출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안경원에 갔는데, 어떤 안경테를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많은 분들의 추천으로 얇은 테를 맞추었는데 사실 아직 조금은 어색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새롭게 맞춘 안경테가 이전 것보다 훨씬 가볍고 편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어떤 옷이 마음에 들면 시간이 지나도 그 옷가게에 가서 같은 옷을 구해 입는 것이 저의 스타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유행에 무디고 편의성 보다 익숙함을 더 추구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간혹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것을 경험해야 할 때 피로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뒤늦게 알고 후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가전 제품 혹은 교통편이 그렇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바꿀 걸 혹은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들을 걸 후회하는 일이 꽤나 많이 일어납니다. 익숙함에 속아 새로 나온 좋은 것들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인들은 저의 이러한 삶의 패턴과 정확히 동일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약 시대로부터 내려온 율법은 모세가 이전 시대의 문화에 맞게 제정한 것까지 반드시 지켜야만 하고 변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계명의 깊은 뜻, 즉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아끼며 선을 실천하라는 본연의 뜻은 점차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정확한 해석과 엄격한 실천은 늘 자랑이었으며 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 만이 하느님께 사랑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들 앞에 갑자기 젊은 청년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지금껏 한 번도 변화되지 않았던 법을 어기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킵니다.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의 벌을 받았다고 여겨졌던 병자들과 식사를 나눕니다. 당연히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변화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느끼지 못했던 유다인들에게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결국 이 말씀은 이제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함께하는 만큼 그 이면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이웃에 대한 배려를 더욱 강력히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는 것이 아닌 그 본연의 뜻으로 돌아가 오히려 완성하는 길이었습니다.
실제로 율법은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사랑이 실천 될 때 비로소 합당한 기능을 발휘합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그 힘을 잃게 되고 율법이 없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도덕률을 비로소 완성시키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간혹 일상 생활 안에서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도 있고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아 주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감정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합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새로운 시선을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 마음을 잡고 주님께 정성들여 기도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 등 변화가 필요한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사랑이고 이 모든 것은 이전의 안 좋은 것들을 보완하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행동에 정확히 기준이 되는 율법들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정어린 사랑을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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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클레멘스 신부님의 영적일기와 시편 주해는 신부님의 요청으로 오늘부터 '복향'에 올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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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공지 글)
+찬미 예수님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를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는 조창현 끌레멘스 신부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부탁드립니다. 제가 몇번을 말씀드렸습니다. 영적일기를 공유하거나 복사. 그리고 up하여 고운님 자신의 카스나 다른 카페, 블로그, 그리고 밴드에 올리지 말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제 허락도 없이 영적일기가 많은 곳에 그대로 올라갔습니다. 부탁합니다.. 일기를 올리신 고운님들은 삭제하시든지, 제 일기를 빨리 지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영적일기를 공유하거나 복사하거나, up하여 자신의 카스, 밴드, 카페, 블로그 등등에 올리지 말아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단, 카톡으로 개인적으로 보내것은 허락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에 영적일기를 단체방에 올리실 때는 쪽지로 문자를 보내셔서 제 허락을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카스 친구가 꽉차서 친구 신청이 안되오니... 가급적이면 조 두레박 신부와 함께 하는 밴드에 초대하여 직접 일기를 받아볼 수 있도록 해주심이 좋겠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부족한 제 영적일기가 우리 천주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집단이나 단체나, 그리고 교리가 다른 개신교 신자 모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오해되는 부분도 있어서 제가 곤란해지기도 합니다.
앞으로 영적일기를 공유하거나 복사하거나, up하여 자신의 카스, 밴드, 카페, 블로그 등등에 올리지 말아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으로 행복하고 편안한 날을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조두레박 신부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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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율법의 완성>
예수님께서는 시나이 산의 ‘첫 계약’ 때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새 계약’이 주는 은총의 빛으로 해석하시어,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율법이 더 이상 돌 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의 ‘가슴에’ 곧 그 ‘마음에’ 새겨진 것으로 드러납니다.(예레 31,33)
그 ‘종’은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기”(이사 42,3) 때문에 “백성을 위한 계약”(이사 42,6)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시어,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꾸준히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받는 ‘율법의 저주’를 스스로 받기까지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들이 먼젓번 계약 아래서 저지른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죽으셨기”(히브 9,15)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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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율법의 완성>
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보면 예수님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손씻는 규정라든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쳐 주는 것 등, 사실상 율법의 파손자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서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일 획, 일 점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폐하려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려는 율법은 무엇이고, 예수께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그토록 책망하시었기에,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율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똑같은 한 종류의 율법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말은 네 가지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십계명을 율법이라는 의미로 사용함.
2) 구약성서의 첫번째 5권, 즉 모세 5경의 말씀들을 말함.
3) "모든 성서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율법과 예언"이라는 말을 사용함.
4) 구전 율법이라고 해서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낸 율법을 의미하기도 함.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의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성서 그 자체라든가, 십계명 그 자체에는 규례와 규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으며, 크고 넓은 원칙만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 또는 매사에 적용시키기 위하여 수천 개의 규정과 규칙을 만들어 지키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들이 사소한 규정과 규칙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삶과 죽음이 달려 있는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라고 간주했고,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만들어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하는 그들의 말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이란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낸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 전체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교훈 전반에서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한 자 한 획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하게 율법을 심화하시거나 폐기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유다교의 613가지에 이르는 계율들을 :
- 원수 사랑 (마태, 5, 43-48 :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주시고...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과
- 황금률 (마태 7, 12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리고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마태 22, 37-40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것이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이렇게 환원시키어 단순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풀이하신 율법(계율)을 행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일컬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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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바알 하느님>
독서가 전하는 구절이 은혜롭습니다. 그날 카르멜 산에 모여든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라고 엎드려 부르짖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때 뿐 그들은 다시 풍요한 삶을 위해서 바알을 섬기고 금송아지를 야훼라 경배하는 행동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좋은 게 좋은 것이며 많아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지 고민하는 일은 믿음의 근본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물음에 하느님께서는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미카 6,8)
그날 엘리야 예언자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할 수 있었던 일이야말로 하느님께 철저히 순종했던 자세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전적으로 따랐던 행위임을 깨닫습니다.
때문에 그날 바알 예언자 사백 오십 명과 맞섰던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고쳐 쌓으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무엇보다 먼저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이 모든 일을 한 것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날 엘리야 예언자의 기도야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정과 신의에 꼭 들어맞고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겸손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맨 하늘에서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린 기적은 그 공정과 신의에 충실했던 겸손한 엘리야 예언자를 기뻐하신 하느님의 응답이라 새깁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만 부자가 되도록 출세하도록 큰소리를 치면서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풍요를 빌고 부귀영화를 청하는 기도에 솔깃해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잡신들처럼 복채에 따라서 복을 줬다 뺏었다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세상에서 얻는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도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
주님께서는 무조건 이 땅의 것은 소홀히 여기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집이나 가족들을 팽개치고 돌보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 집보다 더 내 것에 연연하는 마음보다 좀 더 많이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영광을 기억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할 때에는 꼭 현세에서도 여러 곱절을 채워 주실 것을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이 주장하고 권하고 따르는 재태크 방법을 하느님의 뜻보다 낫게 여긴다면 바알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창하고 향하는 갖은 유형의 특별하고 대단한 삶을 위해서 온 정성을 쏟고 있다면 바알을 숭배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날 엘리야 예언자에게처럼 기쁨의 응답을 쏟아 부어주실 수가 없도록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라고 엎드려 외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은 진리입니다. 때문에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그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기를 청하는 것일 때 내가 바로 그분의 종임을 깨닫고 순명할 때 그분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응답하여 주신다는 이르심이라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언제까지나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이냐?”고 물으십니다. 무어라 답을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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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형제님으로부터 “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누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10분 정도 기다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예측을 합니다. 경제, 정치, 문화……. 그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예측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번 본 것을 가지고서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을까요? 선거 때 보면 선거 전에 여론 조사를 몇 차례 합니다. 예측을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단 한 번의 예측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정확한 예측만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예측을 하며 말합니다. ‘너무 어려워.’, ‘안 될 거야.’, ‘못해’, ‘나는 부족해’, ‘소용없어. 그래봤자 달라지지 않을 거야.’ 등의 예측을 자신을 향해서 합니다.
그러나 이 예측이 틀렸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전문가들의 미래에 대한 예측도 50% 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전의 앞뒤를 맞추는 것보다 더 낮은 확률입니다. 이 낮은 확률을 왜 맞다고 생각하면서 단정을 짓습니까?
이런 잘못된 예측은 하느님께 대한 잘못된 예측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을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치 자신이 하느님 양 끊임없는 예측을 하면서 그것만 맞다고 단정 짓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시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음을 말입니다.
예언서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랑이 예언서와 율법의 정신이고, 따라서 이 사랑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고, 사랑을 철저히 지키려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예측은 사랑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 대한 잘못된 예측을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적대적인 모습을 취했고, 그 적대적인 모습이 후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섣부른 예측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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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자체를 볼 수 있어야합니다.>
종종 “그 사람은 ~한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떤 행동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만으로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즉, “저 사람은 할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할 일을 뒤로 미뤄요.”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화장실을 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오줌싸개’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단지 화장실 가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이렇게 행동 자체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 행동을 보고서 믿으라고 말씀하셨지요. 주님께서는 ‘~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음을, 대신 행동 자체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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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전사>
-기본에 충실한 삶-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여정중 잊지 못할 추억은 전혀 순례길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힘껏 걸었고 새벽 2시에 일어나 언제 어디서든 매일 강론을 써서 아이패드를 통해 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이어 도반형제와 미사를 봉헌하고 새벽 5시 넘어 어둠중에 이마에 헤드랜턴을 하고 순례길에 올라 오전 내내 걸었습니다.
배낭을 메고 출발할 때는 마치 전장에 출전하는 주님의 전사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걸었을 때는 80리 32km 오후 2시쯤 하루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참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신기했던 것은 최종 목적지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에 가까워질수록 뛰다시피 할 정도로 발걸음이 빨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많이 되뇌었던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뻣노라” 시편 구절이었습니다.
객지에서 공부하던 시절 어머니 계신 고향집에 가까워질수록 역시 뛰다시피 빨랐던 발걸음도 생각납니다. 지금의 처지가 비슷합니다. 80평생을 한 생애로 계산하여 인생 경주로 생각한다면 거의 막바지의 최종 목표지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요즈음 더욱 마지막 전력질주할 때임을 느낍니다. 죄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때로는 밥먹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이, 노는 시간이 아까울 때도 있습니다. 넘어지거나 주저앉거나 다치거나 함이 없이 힘껏 달려 마지막 목표지점에 도착할 때 비로소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 승리의 삶일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여기서 새삼 생각하는바 삶의 바탕이 되는 기본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주님의 전사-기본에 충실한 삶’입니다. 제 주변에도 이런 기본에 충실한 분을 많이 만납니다. 특히 예수성심자매회 회원들을 보면 거의가 얼마나 가정생활에, 부부생활에 충실한지 모릅니다. 바로 이런 기본에 충실한 삶이 바로 영적 삶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어제는 수도형제를 통해 주문했던 ‘수덕신비신학’이란 책을 받았습니다. 수덕의 바탕위에 신비요 수행의 바탕위에 관상입니다. 수덕, 수행의 바탕이 없는 영적 삶은 말그대로 사상누각, 모래위의 영적 집일 것입니다. 하여 불가의 삼학三學의 순서도 계정혜戒定慧입니다. 계율을 충실히 지킬 때 마음의 고요와 깊이의 안정이 있고 여기서 피어나는 은총의 지혜라는 것입 니다. 흡사 우리 영적 삶의 정화-조명-일치의 단계와도 흡사합니다. 탐진치貪瞋癡의 인간을 다스리는 데에 철저한 계율 준수의 수행이 우선임을 봅니다. 하여 방장 큰 스님이 있는 불가의 대찰에는 율원律院, 강원講院, 선원禪院이 구비되어있습니다.예전 수도원 초창기 아빠스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영성이전에 기본부터, 일상의 상식이나 양식부터 충실하라. 어줍잖게 묵상하느니 차라리 밖에 나가 풀이나 뽑아라. 머리만 깎으면 도사인가. 내 당신들을 아는데---. 기본도 되지 않고 무슨 영성생활이라고---기본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되어 있어 야지.”
기본도, 기초도 부실한 영적 삶의 폐단을 지적한 것입니다. 분도회 영성의 특징도 기도와 성독과 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기본에 충실한 삶위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문득 어느 타계한 유명 정치인이 생전 묘비명을 물었을 때, “잘 놀다 간다”라는 대답의 인터뷰에 참 기발한 묘비명이라 생각하며 웃었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치열하게 살되 잘 놀다가는 기분으로 기도도 성독도 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선배 수도사제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가 전사라는 말마디를 맨 처음 알게된 것도 ‘평화의 전사’인 분도회 수도승이 되어야 한다는 그분의 글에서입니다. 그 신부님은 당신을 찾아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냐의 수도자들의 질문에 한결같이 답하셨다 합니다.
“규칙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규칙을 지키면 규칙이 날 지켜줍니다. 아주 평범하나 자명한 진리입니다. 살아갈수록 일상의 기본과 기초가 되는 규칙에 충실한 삶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안에 숨어있다 합니다. 지도자는 디테일이 강해야 한다 합니다. 아주 섬세하고 자상하며 주도면밀周到綿密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충, 얼렁뚱당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의 이해는 자명해집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단호한 예수님이신지요. 율법은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으로 깊이 보면 사랑의 율법입니다. 예수님의 율법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어떠한 세부 사항도 소홀히 다뤄선 안된다는 것입니다.사실 정말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한다면 어느 율법하나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디테일에 강할 수뿐이 없습니다. 내적 무너짐은 아주 작다 생각되는 것을 소홀히 할 때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디테일이 강한 분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매사 기본에 충실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좀 그렇습니다만 기본基本이나 본질本質이란 한자는 일본日本말이고 기본이 강한 일본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됨을 봅니다. 누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요, 가장 큰 자입니까?
바로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요,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평범 자명한 진리이지만 너무 잘 잊고 지내는 우리들입니다. 이러면 됐다가 아니라 늘 기본으로 돌아가 언제나 초보자의 수행자 정신으로 살아야 함을 봅니다. 이런 수행의 여정과 함께 가는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제1독서 열왕기상권의 엘리야 또한 하느님의 전사입니다. 하느님의 전사이자 예언자인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 450명과의 결전에 승리한 엘리야입니다.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 사백오십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인 엘리야는 참으로 기본에 충실했던 분임이 분명합니다. 저는 주저없이 ‘기본의 승리’, ‘믿음의 승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거듭된 엘리야의 간청에 하느님은 응답하시어 엘리야에 승리를 안겨 줬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비굴하고 비겁했던 백성들도 얼굴을 땅에 대고 부르짖으며 고백합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전투지만 얼마나 피말리는 상황이었는지요. 그러나 엘리야의 영적전쟁은 이후로도 계속됩니다. 우리 역시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 우리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본에 충실한 주님의 전사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편25,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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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큰 사람이 되십시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되고 맙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여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 보다는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의 핵심인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작은 것,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직은 것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가운데 큰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의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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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말씀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들을 완성하러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기존 종교 지도자들과 결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과 의혹이 술렁이기 시작하던 차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절대 가치를 지닙니다. 다만 해석과 적용 과정에서 가중된 부수적 규정들에 본질적 정신들이 가려져 버렸지요.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 사랑이며,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임을 몸소 보여 주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마태 5,18)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시한을 언급하신 걸 보니, 율법이 영원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율법도 변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당신에 대해 예언한 바를 모두 이루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희생제사를 바치십니다. 사랑만이 그 동기이고 목적이지요. 이제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 이스라엘이 새 계약을 통해 주님의 백성이 됩니다. 율법은 이 모두를 준비하고 지탱하지요.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그러나 여전히 여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에서 맞이할 새 예루살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는 성전이 없다고 합니다. 성전이신 분이 현존하시니 그렇습니다. 이어 묵시록 저자는 그 도성에 해도 달도 필요없다고 하지요. 빛이신 분이 계시는 그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오면, 율법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이신 분이 현존하시는 앞에서 조례나 판례를 뒤적이는 건 좀 우스꽝스러울 것 같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으니 이제 율법은 사랑이 되어 존재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이시고 사랑의 완성이시니까요. 예수님은 인간인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시면서도 우리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지키는 바를 가르치는 존재가 되길 바라십니다. 곧 사랑하고, 사랑을 전파하는 존재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를 제1독서에서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매우 극적인 장면이 벌어집니다. 사백오십 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단 한 명 남은 주님의 예언자 엘리야와의 대결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1열왕 18,21)
엘리야가 먼저 온 백성에게 묻습니다.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당장 이득만 된다면 적당히 다른 우상들을 기웃거리며 섬기는 행태에 도전장을 내미는 겁니다. 절뚝거린다는 표현은 두 다리의 균형을 잃은 모습을 희화한 것이지요. 앎과 삶, 지식과 실천, 신분과 태도가 통합되지 않으면 겉보기엔 제대로 걷는 듯해도 실은 영혼이 절뚝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제(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에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도 같은 의미의 권고를 서간에 담았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마음으로는 세속을 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라"고 하셨던 권고의 다른 표현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믿음과 실천의 일관성, 통합입니다. 그리고 사랑만이 이 둘을 아우르며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1열왕 18,36).
엘리야의 고백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루실 표징이 제 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자신과 거기 모인 모든 이에게 선포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그저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에 따라 행하는 존재일 뿐임을 명확히 합니다. 말씀을 사는 사람의 근본 정신이고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의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알게 된 사랑을실천하는 사람이지요. 그 자신이 곧 복음입니다. 말씀과 함께 하루하루를 사랑으로 엮어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고 나누며 말씀의 향기를 퍼뜨리는 벗님은 진정 "하늘 나라의 큰사람"(마태 5,19 참조)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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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하느님께 감사드릴 때 기쁨이 유지됩니다.
기쁨의 옷을 입는 데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그 옷은 무겁지도 않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행한 일은 곁에 있는 모든 이를 들어올립니다. 기쁨은 내면에서 우러나옵니다. 그러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릴 때 기쁨이 유지됩니다. 그 기쁨은 견고하게 뿌리내려 사람들에게 전달되며 행복하게 해 줍니다. 쾌락을 추구하면 참기쁨이 사라집니다. 기뻐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매일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기쁨 목록을 가지고 기도하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세요?」에서
♣슬픔에 저항하기 위한 몇 가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 자신을 용서하지 못함 * 완벽주의 * 열등감 * 야심 * 이기주의 * 자신을 찾음 * 관능 슬픔의 악마가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 슬픔을 지배하고 없애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의 뜻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기로 약속한 뒤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1).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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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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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강조하는 문자적 의미의 율법준수를 종종 거부하시곤 하셨습니다. 곧 안식일 법, 정결례 법, 단식 법 등을 지키지 않으시고, 또한 율법을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시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파괴자’라는 낙인이 찍히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폐지나 단절이 아닌, ‘율법의 완성’으로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는 복음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로마 3,20)
결국, 당신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는 율법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이 보충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율법이 당신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잘 지키는 데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먼저’ ‘지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타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지켜질 때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되게 됩니다. 곧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리고 그는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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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소서.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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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I70bpDM_bs&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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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뒤집을 수 없는
삶의 질서가
있습니다.
생명에도
폐기할 수 없는
생명의
기본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일회용 관계가
아니듯 일회용
율법이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기본으로 지켜야 할
삶의 질서 속에서
서로의 자리를
빛나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을
되찾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모호한 율법이
아닌 선명한
사랑의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생명의
고유성을
되찾는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완성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단 한순간도
주님 사랑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사랑을
완성하시는
주님께
우리자아를
의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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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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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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