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성당/ 피신처, 안식처?
내 안태고향은 밀양시 丹場面 국전리이다. 거기 양지 마을에 가면 경주 이 씨 집성촌이 있다. 지금은 많이 쇠락하여 스무남은 가구쯤 될까? 일가친척도 다 합해 봐야 1백 명이 쉰 명가량일 것이다. 가톨릭의 '가' 字도 못 들먹일 정도로 집집마다 불교를 믿었다. 완전 폐쇄!
거기서 자랐다. 초등학교까지 다녔다는 뜻이다. 나도 당연히 엄마 따라 절에 다녔다. 양반이라 스스로 여기며 타성 이웃에 큰소리치는 걸 어릴 때 봤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으니, 내가 부족한 것은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유학을 했다. 대도시 부산중학교로. 삼랑진에서 통학을 했다. 그런데 형님 댁에서 지척인 칠기점이란 동네에 가까운 일가가 더러 살았다. 그런데 그분들 상당수는 가톨릭 신자였다. 4종형님 한 분 슬하에 신부와 수녀가 각각 한 분 수녀 세 분이 났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또 다른 수녀는 나와 비슷한 촌수이고 아내의 초등학교 제자!
세월이 흘러 내 나이 예순이 넘어 영세(領洗)를 하고 가톨릭을 믿게 되었다. 부산에서다.삼랑진 평화의 마을에서 궂은일도 하고, 회지 편집도 맡았다. 평화의 마을 바로 건너편에 한국 최초의 증거자 김범우 토마스의 묘소가 있다. 부산가톨릭문협 회원 자격으로 가끔 들렀고, 평화의 마을 홍보부장을 졸라 개인적으로 참배하기도 했다.
충격을 받았다. 토마스 증거자가 명동 성당 부지를 기증함으로써 명동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고 했으니….게다가 그분은 귀양살이를 단장면에서 했다는 것이다. 우리 고향에서 산을 넘으면 이십 리 남짓한 곳이다. 그보다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경주 이 씨 조상 중에 휘자(諱字/ 돌아가신 분의 성함) 李蘗이란 분이 독학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입교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김범우 증거자와 이벽 할아버지가 상당한 교유(交遊)를 했다는 사실 앞에 나는 차라리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씨 가문을 가장 빛낸 분은 이분, 이벽 세례자 요한이시다.
나는 이제 시쳇말로 '빽'이 있다. 하느님 외에 두 분이 명동 성당에 계시는 것이다(억지 논리이긴 하지만). 여기 용인에서 한 시간 남짓 1호선을 타면, 명동 성당에 갈 수 있다. 지난해 10월 2일 26사단에 갔다가 손자와 함께 성당에 들렀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미사 참례는 못했었다. 그러나 여섯 달 만에 아내 손을 잡고 그제 찾았을 때는, 토요 특전 미사 시간에 성전에 앉을 수 있었다.
과연 명동 성당의 미사는 달랐다. 어찌 본당 미사에 비교할 수 있으랴만! 그래도 충분히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요소 내지 덕목들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이나 외국 사람의 태도가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많기도 했다. 그렇게 섞인 신자들이….
부활삼종기도를 먼저 바치고 입당송을 불렀다. 다음 미사 기간이 일곱 시이니, 그걸 어길 수 없는 터. 미리 물리적으로 침(?)을 놓은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군더더기가 없었다. 신부의 강론은 딱 3분, 얼마나 신선한가?
경건했다. <매일미사> 봉독을 하는 교우는 내내 합장을 했다. 일반 본당에 가보라, 그게 어디 잘 지켜지던가? 신부도 마찬가지. '복음' 봉독 하면서 내내 기도 손이었다.
영성체를 하는 걸 눈여겨 지켜보았다. 성체를 받아서 쓸데없이 다시 예수님 고상을 보고 절을 하는 사람은 1/10 수준이었다. 명동성당 본당 신자는 거의 *송기인 신부(각주로 설명) 수준이었다. 다른 데서 온 가족 단위의 신자들이 '꾸벅'하는 것, 그게 옥의 티였다.
헌금함을 훔쳐봤는데, 역시 거기에도 천주교의 전매특허 '천 원'짜리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만원이 많았다. 나도 만원을 넣었다. 연미사 예물로 십 만원을 봉헌했으니, 약간 부끄럽지만 그냥 그렇게 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본당으로 돌아가면 그보다 줄어들 수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아껴 두었다가 26사단 불무리 성당에 가서 전우들에게 뭘 하나 사 먹이고 싶다. 뭐, 그게 그거 아니겠느냐 싶다. 앞서 이야기한 두 분의 '빽'을 믿는다. 영영 그런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안정되면, 돌려야지. 참, 제주도 서귀포 성당에서 하우현 성지까지 여남은 군데에 월 1민원 내지 1만 5천원을 자동이체로 헌금해 왔는데, 조금 쪼들려서 액수를 줄이려다 아내로부터 타박을 받았다. 그래저래 복잡한 함수 관계, 그게 내 신앙이다.
정말 명동 성당의 모범적인 미사 예절(전례). 다른 본당 어린이 미사 시간에 가보라. 해설을 하는 녀석이
"무두 꿇어앉으십시오."
고 명령한다. 물론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다. 그래도 노인이 있는데, 그런 명령을 하다니….
"꿇어앉으시겠습니다."
하면 될 텐데. 물론 명동 성당에는 장궤틀이 그 걱정은 없다. 하나 이 말을 참고로 하자.
"일어서시겠습니다."
"앉으시겠습니다."
잘못 보았는지 모르지만, 신자들이 성가집을 보고 성가를 봉헌하는 것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자기는 그 성가를 꿰뚫고 있으니, 자신 있게 부른다? 천만에, '주여 임하소서'를 보라. 자신이 있다고 해결되는 성가가 아니다. Calm이라 지시해 놓았다, 작곡가가! '조용히'라는 뜻인 줄 알고 있다. 구 성가를 자신 있다고 우렁차게 부른다? 아서라.
이제 며칠 있다가 다시 올라간다. 영어 기도서를 다시 샀으니, 그걸 공부했다가 주일 아홉 시에 미사 참례하여 더듬거리고 싶다. 하느님이 보살펴 주실 것이고 앞서의 두 분 '빽'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딪혀 봐야 하지 않겠는가. 명동성당은 내게 피신처 아니면 안식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