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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1일(주일) 오후예배
말씀 : 신명기 22:1~4
제목 : 길 잃은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라!
도입 : 신명기 언약
우리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백성과의 약속 혹은 계약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언약 중에 노아의 무지개 언약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를 통해 홍수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라랏산에 방주가 멈추고 노아가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게 됩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고 노아에게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노아의 무지개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언약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며 창대한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말씀을 주시면서 시내산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들어가기 전에 요단강 앞에서 모세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우수한 민족이 되어 창대한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신명기 언약 혹은 모압언약이라고도 합니다. 모압평지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의 말씀 중에 오늘은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은 방대하겠지만 구체적으로 오늘은 이웃의 짐승이나 재물에 대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이웃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있으면 반드시 주인에게 찾아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소나 나귀가 길에서 넘어졌으면 반드시 도와서 일으켜 주라는 내용입니다.
첫째, 이웃의 소유를 반드시 주인에게 돌려주라!
오늘 읽은 신명기 22:1에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네 형제의’라고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친형제 만을 말하는 것이 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을 형제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다 야곱 즉 이스라엘의 자손이기 때문에 다 형제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두 가지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형제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그래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호칭하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민족 즉 국가 동족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신앙공동체이기도 하지만 국가 공동체입니다. 즉 그 나라와 국가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라는 행동 지침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표현하자면 이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이웃의 소나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짐승이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가끔 오늘날에도 강아지를 잃어서 찾는 집도 있습니다.
예화) 어릴 때 소 풀 먹일 때
우리가 어릴 때 소 풀 먹이러 다니는 때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학교 다녀와서 오후, 혹은 여름 방학 때면 매일 점심을 먹고 산에 소를 몰고 갑니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한 동네 아이들이 다같이 갑니다. 각자 소를 몰고 산으로 가서 소고삐(줄)을 소 뿔에다 감습니다. 그리고 산등성이 쪽으로 보내면 소들이 천천히 풀을 뜯어 먹으며 오후 내내 풀을 먹으며 산 위 등성이 쪽으로 올라갑니다.
우리 소년들은 오후 내내 냇가에서 물장구치고 놀거나 이웃집 고구마를 구워서 먹거나 언덕 잔디밭에서 게임을 하고 놀게 됩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정해진 장소인 산등성이에 골짜기를 통해서 직행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소가 그곳에 다 모여 있습니다. 산등성이에 묘지들도 있고 나무들이 없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소 뿔싸움도 시키고 좀 놀다가 이제 고개 넘어서 집쪽으로 돌아옵니다.
오다가 보면 작은 냇가가 있는데 소들이 물을 먹습니다. 실컷 먹는데 한 대야정도 먹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물을 먹여보면 큰 대야에 물을 주면 다 마셔버립니다. 그리고 집으로 오면 저녁 먹고 쉽니다. 그리고 소는 밤에 되새김질을 합니다.
그런데 산등성이 소가 모여있는데 어떤 경우 우리 소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소가 풀을 뜯다가 자기 혼자 딴 데로 간 것입니다. 길을 잃고 산등성에 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날이 어두어지기 시작하니 혼자 남을 수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큰 야단을 맞습니다. 뭐하고 놀다가 소 잃어버렸냐고 야단을 맞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후레쉬를 켜고 큰 길을 따라서 그 산 가까이까지 가서 살펴보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밤을 지나면 새벽쯤 되어서 그 소가 어김없이 찾아 돌아옵니다. 집을 알고 돌아옵니다. 소도 영리합니다. 저는 소가 길을 잃어서 집을 못 찾는 경우를 한 번도 못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소도 먼 길을 갔거나 어떤 사연이 있으면 못 찾을 수도 있겠죠. 특히 양은 길을 잘 잃을 수 있습니다. 양은 시야가 좋지 못해서 멀리 못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에 가는 양만 보고 갑니다. 맨 앞에 가는 양은 목자만 보고 갑니다. 그 다음의 양은 그 앞의 양만 보고 갑니다. 그래서 앞서가는 양을 잘 보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양이 제 마음대로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사람처럼 스스로 집을 찾아 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처럼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길 잃은 양을 보았을 때 잘 됐구나 주인도 없으니 오늘 잡아먹어야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주인을 찾아주라고 했습니다. ‘못 본체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오늘날 누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잃어버렸으면 찾지 않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주인 없는 자전거를 보았을 때 잘 됐다고 생각하고 끌고 가면 되겠습니까! 오늘날에는 파출소에 끌고가서 신고하면 됩니다. 경찰서 신고해두면 잃어버린 사람도 경찰서 찾아오기 때문에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2절에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네 형제’는 친 형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동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주인이 멀리 있어서 당장 데려다 주지 못하면 보호하고 있다가 알려서 찾아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을 알 수 없거든, 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알지 못하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그 주인이 찾을 때까지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례에 따르면 주인 없는 짐승을 몰고 왔으면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소리를 쳐야 합니다.
“내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보호하고 있소! 혹시 주인이 나타나면 내게로 보내시오”
라고 여러 번 소리를 쳐야 합니다. 여러 번 소리를 친다는 것은 당일 소리치고 그 다음에 또 동네 사람들에게 소리를 쳐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사람들이 다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 지역에 양을 찾으러 주인이 왔을 때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어떤 사람에게 가보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의 소유를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네가 성심성의껏 힘을 써서 그 짐승이 주인을 찾아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심있는 행동이고 당연히 해야 할 행동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욱 더 그렇습니다. 아멘
3절에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꼭 소나 양 뿐이 아니라 다른 짐승인 나귀라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 뿐 아니라 의복이이라든지 어떤 물품이라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물품이든지 주인 없는 것을 발견하더든 주인에게 찾아주라는 것입니다.
예화)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발견한 책
제가 청년 때 공중박스에 전화를 걸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수첩이 있었습니다. 수첩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 중요하지 않을 수 있어도 주인에게는 아주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오늘처럼 휴대폰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정이나 중요한 상항들을 다이어리에 기록을 합니다.
그래서 보니 주인의 이름이 있고 전화번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습니다. 감사하다고 말을 전해왔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언제 만나자고 하여 만나서 전해주면서 어떻게 보상을 하면 좋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마산성산교회 이웃전도축제가 있었는데 그 행사에 꼭 초청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하고 그 행사 당일에 정말 와서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저도 참 감사했습니다.
둘째, 네 형제의 나귀가 길에서 넘어지면 일으켜 주라!
22:4 말씀에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농경사회입니다. 지금이야 트렉터가 농사를 다 짓고 하지만 우리 어릴 때만 하더라도 경운기가 나오기 전에 소가 쟁기를 끌고 수레를 끌었습니다.
그래서 소나 나귀가 수레의 짐을 끌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처럼 트럭이 발달하여 짐을 트럭이 다 실어 나르지만 그 시대에는 짐승을 이용해서 짐수레를 끌었습니다. 그러다가 짐을 너무 많이 실어서 비탈길에서 수레가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귀나 수가 함께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끌어올리려면 힘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짐을 벗겨내야 되고 소나 나귀가 옆 도랑 같은데 빠지면 올라오게 하는데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장정들이 힘을 써서 들어서 올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힘을 써서 일으켜 소가 힘을 써면 다시 짐을 끌고 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차가 길에서 옆으로 굴러 떨어졌거나 바퀴가 빠졌을 때 사람들이 함께 힘을 써서 올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힘을 써면 차 한쪽 바퀴를 들어서 함께 올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웃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함께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이웃이 고난을 당했을 때 함께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특히 교통사고가 많이 납니다. 만일 우리가 차를 타고 가는데 근처에 교통사고 나서 사람들이 쓰러져 있고 차는 찌그러지고 교통이 마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제일 먼저 119 신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피흘려 쓰러져 있는 사람의 생명을 빨리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112 신고를 하여 경찰이 동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고조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주변을 잘 살펴서 조심을 해야 합니다. 지방의 도로는 그래도 좀 낫지만 고속도로는 차들이 그것도 모르고 달리기 때문에 2차, 3차. 4차 사고까지 나서 생명이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안전한 곳으로 피하여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방의 도로 같으면 사람들이 함께 통제를 하면 교통을 안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빨리 응급조치를 하여서 사람들의 유익을 찾게 해야 합니다.
예화) 인근 도로 교통사고
얼마전에 제가 교회로 오는 중에 혁신도시에서 진주역쪽으로 오다보면 삼성수리센터에서 좌회전해서 진주역 방향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제 얼마 앞에서 승용차 한 대와 자전거가 부딪쳤습니다. 그 승용차가 정지를 하고 자전거 운전자를 안전하게 일으켜 옆으로 이동을 시키고 대화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전거 운전자가 초등학생 어린이였습니다. 그래서 당장 옆길에 차를 세우고 갔습니다. 다행히 소년은 별 크게 다친데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승용차 운전자 역시 보험회사 관련 직업인이라고 하여서 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건강과 안전이 제일 우선이라고 서로 동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에게 아버지께 전화를 걸라 하고 제가 바꾸어서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리 오래 가지 않아 그 부모가 차를 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또 여러 가지 접수를 하길래 저는 인계를 해주고 교회로 왔습니다.
사고가 나면 당황하지 말고 보험회사를 부르고 경찰을 불러서 안전하게 서로 합당하게 조치를 하면 됩니다.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면 모르체 하지 말고 도와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형제는 친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같으면 동포이고 오늘날 우리 같으면 이웃을 말합니다. 지역에 사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오늘은 이런 주제로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 말씀을 들을 지키며 살면 네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창대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예화) 김장환 목사
수원침례교회를 담임하며 극동방송 사장으로 오랫동안 사역을 하신 김장환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6.25전쟁 후 참 어렵게 살았습니다.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며 소년시절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칼 파워스라는 미군상사를 만났는데 이분 선한 분이라 자신의 경비를 대고 헌신을 하여 소년 김장환을 미국에 유학공부를 시켰습니다. 미국의 밥죤스 고등학교를 공부하고 신학대학을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살 때만 해도 예수를 믿지 않았는데 미국에서 고등하교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전도 받아 믿게 되고 신학대학 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학원공부를 하여 목사 한수를 받게 됩니다. 칼 파워스 역시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훗날 김장환 목사님이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가족을 전도하였습니다.
김장환 목사님은 고등학교부터 동창인 트루디라는 자매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돌아와 함께 목회를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극동방송 사역을 맞게 되어 한국복음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서 사역을 할 때 후원을 하신 분이 있는데 예거 장로님입니다. 미국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도 마련해주시고 훗날 여러 사역에서 협력하시며 도와주셨습니다.
특히 칼 파워스는 한국전쟁 때문에 한국에 와서 가난하고 소외된 한국 고아같은 김장환을 자기 돈을 대서 미국 유학 공부를 시켰는데 훗날 그 때문에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되고 구원도 받게 됩니다. 가난한 이웃을 도와서 자신도 큰 영적 도움을 받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결론) 이웃의 어려움을 도와주라!
우리 주님은 이렇게 이웃을 돕는 자를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