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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5 / 당하지 말고 이용하라 (고후12:7-10)
환경오염 때문인지 어제 오전에도 비가 왔습니다만 올해 들어 유독 가을로 들어서며 비가 많이 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봐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뚜렷했는데, 언제부턴지 계절의 경계가 무너진 듯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난여름도 무척이나 더웠는데 그래서인지 몹시 더운 여름이면 빨리 겨울이 왔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겨울이 되면 저만 그런 지는 몰라도 다시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시편 74:16-17절에도 보면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름과 겨울은 물론이고 낮과 밤까지도 하나님께서 다 필요해서 있게 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여름도 겨울도 필요해서일 거고, 낮도 밤도 필요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인생의 밤’을 흔히들 ‘고난의 때’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굳이 이런 고난의 때는 없으면 좋으련만 하나님께서는 낮도 밤도 다 필요해서 있게 하셨다고 하니 결국 인생의 밤의 때일지라도 우리 인생엔 필요한 때일 수 있다고 여기는 믿음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다면 그 상황을 암담한 고통의 때로만 알지 말라는 겁니다. 인생의 밤에는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이나 길과는 달리 새날, 새로운 길로 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루 중에 낮만 있지 않고 밤도 있는 이유는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논리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인생의 밤 즉 고난의 때를 만나면 그때가 바로 영적으로는 휴식과 재충전의 시기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밤이 되면 잠을 잡니다. 그런데 자연치유와 관련한 책을 보면 사람이 잠을 자야 하는 이유가 깨어 있는 동안 흐트러진 몸의 균형과 부작용을 잠을 자는 동안 몸이 알아서 치유 또는 회복시켜 깨어난 이후에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력을 충전시켜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밤이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코 비생산적인 시간은 아닙니다. 일은 안 해도 다시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때가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는 인생의 밤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이 단지 어둡다는 이유로만 밤을 고난의 때에 비유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때는 낮에도 찾아오니까요.
설사 인생의 밤이 고난의 때에 비유된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에게는 고난의 때가 오히려 이전까지의 삶에서 얻은 각종 문제와 어려움 등을 정리하고 회복함과 동시에 앞으로의 새날을 살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새 창조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인생을 제대로 살려고 하면 우린 인생의 모든 현안을 현실적으로만 보려 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영적 싸움이기에 현실 상황이 어떠하든 영혼이 잘 돼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도 이런 사실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당시 바울이 겪고 있던 현실적인 고난과 그 고난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고통받는 현실에서도 그런 고난에 영적으로 반응하는 사도 바울의 믿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7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에게는 일생을 따라다니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고 하는데 혹자는 이 가시가 안질일 거라고도 하지만, 간질병이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시가 무엇이었느냐를 떠나서 바울 본인의 주장대로라면 7절에서 언급되었듯이 바울에게 있던 가시는 ‘사탄의 사자’ 즉 ‘사탄의 역사’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런 가시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을 했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들은 바울의 교만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사탄의 사자를 바울에게 있게 하셨다고들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아무러면 하나님이 인간의 교만 하나 통제하지 못해 사탄의 힘까지 빌리시기야 했겠습니까?
성경에 의하면 사탄은 세상에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이기에 사람이 육신을 입고 세상을 사는 동안은 불가불 사탄의 세력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사는 동안은 사람에겐 사탄의 그 어떤 역사도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바울에게 있던 육체의 가시도 그런 사탄의 역사 중 하나였기에 바울은 그것이 자기에게서 떠나가기를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9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 지라.”
바울에게는 분명 사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바울은 힘들어하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
육체의 가시로 인해 고통받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이제까지의 내 은혜면 너에게 충분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했다면 과연 바울이 가시로 인해 고통을 받았을까요?
혹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일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바울로 하여금 눈앞에 있는 사탄의 역사만 보지 말고 영으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보라는 하나님의 권면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니 사탄의 역사로 인해 약해진 것들일랑은 하나님이 언제든 온전케 하실 수 있음을 바울로 하여금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 하시는 말씀은 바울로 하여금 “내 은혜만 받으면 그깟 가시쯤은 금방 해결될 것을 믿으라.”는 말씀인 겁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믿은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과 다르지 않을진대 하나님이 바울에게 그리 말씀하셨다면 오늘날 하나님은 나에게도 그리 말씀해 주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는 교회의 아무개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믿으십니까?
일단 여기까지만 말씀드리면 성도라면 대부분 ‘아멘’으로 이 말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의 삶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늘 족하고 충분한지요?
행여라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거나 없다고 여기며 살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권면과 약속의 말씀만이 아니라, 본문에서 우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은 바울이 이후에는 어떤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갔느냐 하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9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바울은 말하기를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됩니까? 사탄의 역사가 기쁘다니요? 인생의 여러 약한 것들을 오히려 자랑했다니요?
전에 어떤 코미디 프로에서 어느 개그맨이 만든 유행어 중에 ‘이거 미친 거 아냐?’라는 말이 있었는데, 혹시 당시의 바울이 그랬던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닙니다.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은 자기에게 고난이 있는 이유를 알았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잠시 그냥 두시는 이유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깨달은 그 이유들을 우리도 알아야 할 텐데, 고난이 있는 이유가 사탄의 역사라는 것 정도는 우리도 알겠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탄의 역사를 당장에 쫓아주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세요. 아마도 하나님은 이런 의도로 하신 말씀일 겁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그간 사탄의 역사로 인해 약해진 너의 모든 것을 내가 온전케 할 것이니 너는 사탄에게 당하지 말고 사탄의 역사를 이용하여 내가 주는 은혜받을 기회로 삼아라.”
“사탄의 역사에 당하지 말고 사탄의 역사를 이용하라!”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런 메시지를 읽었기에 믿음을 다시 고쳐 잡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사탄의 역사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사탄의 역사를 자신이 자고 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입니다.
본문 7절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그간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자랑하고 교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스스로가 너무 자고 하지 않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믿음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본 장 1~6절에서도 보면 바울에게는 셋째 하늘에 올라간 놀라운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가시마저 없었다면 그는 아주 높아졌을 것임을 그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있지만 자기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육체의 가시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기에 바울은 스스로 자고 하거나 교만 해지는 걸 막아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자세는 비단 자고 하거나 교만할 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낙심되거나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닥친 일이 무엇이든 그것들이 당장엔 나를 약하게 만들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그것들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이용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로 삼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만 하나님도 그런 저와 여러분을 믿고 계신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장에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신다 싶을 때도 하나님께선 저와 여러분을 믿으시기에 우리가 사탄의 역사에 당하지 않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오히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으로 이겨내기를 믿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탄의 역사는 언제든 어떤 모양으로도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그럴 때면 그것들을 오히려 이용하여 하나님께 나의 믿음을 보여 드리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그런 믿음이 있을 것을 하나님도 믿으시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믿음으로 일어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다.
둘째로 바울은 사탄이 준 가시를 기도하는 기회로 이용했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언제 기도하게 될까요?
역설적이지만 인생에 가시가 있고, 어려움이 있기에 우리는 기도하게 됩니다. 게다가 감당치 못할 어려움을 만나서 드리는 기도라면 진심으로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오게 됩니다.
좋은 땅도 햇빛만 비치면 사막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이런저런 것들로 여러분의 삶을 잠시 흔든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하나님만 찾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시가 있으면 우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탄이 주는 인생의 가시는 하나님께 올릴 성도의 기도 제목이 됩니다.
미국에서는 가끔 지진이 난다고 하는데 재미있는 현상은 그렇게 한번 흔들 때마다 그 주에 교회 참석 인원이 많아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목회하는 동기 목사는 가끔 이런 기도를 한답니다. “하나님! 심하게 흔들지 마시되, 가끔 흔들어 주세요.”라고.
영물인 사탄은 육체를 가진 우리가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존재이고 그런 사탄이 주는 가시는 우리가 가진 힘과 능력, 실력, 재력 등의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우린 사탄이 주는 가시까지도 이용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곳에서는 강을 건널 때면 반드시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건너야 하는 곳이 있답니다. 돌은 분명 짐이지만 그럼에도 물살이 세기 때문에 돌을 지지 않으면 그냥 떠내려가 버리기에 그 지역 원주민들은 강을 건널 때면 예외 없이 무거운 돌을 하나씩 지고 건넌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탄의 역사가 반길만한 것을 못되지만 그로 인해 이제 곧 내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기에 지금 잠시 잠깐 나에게 사탄의 가시가 있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라면 인생에서 내게 지워진 가시나 돌을 내려놓으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고난의 때를 무탈하게 건널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약한 데서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고 하셨고, 바울도 고백하기를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약한 데서 어떻게 온전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을 사는 나에게는 어떠실까요?
한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은 나도 / 붙잡아 주신다.”
그러므로 오늘부로 우린 나의 가시나 나의 약점을 대하는 시각과 방법을 달리 해야 합니다. 바울이 자기의 여러 약함을 자랑했다고 하는 것은 약해질 때마다 강하신 하나님을 붙잡았다는 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가시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시각으로 보면 약할 때가 바로 은혜받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누구라도 위기의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엔 경제적인 위기, 육체적인 위기, 사회적인 위기 등의 수도 없이 많은 위기들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말하기를 ‘위기’는 ‘위험하지만, 기회이기도 하다.’고들 합니다.
여러분 생각엔 어떠십니까?
보세요. 한자로 ‘위기’는 ‘위험할 위’ 자와 ‘기회 할 때의 기’ 자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위기의 때에 앞의 ‘위’만 보느냐, 뒤의 ‘기’를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위기의 때를 만날지라도 위기를 위험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사람은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의 내 형편을 기회의 때로만 보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새찬송가 310장 후렴구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우리가 하나님을 믿듯이 하나님도 저와 여러분을 믿고 계십니다. 즉 사탄이 우리 인생에 어떤 가시를 가져와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들에 당하지 않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믿음으로 일어서고 이겨내리라는 것을.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듯이 하나님도 우릴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탄의 역사를 이용하여 하나님만 믿고 기도할 때면 우리의 모든 연약해진 것들을 온전케 해주시려고.
그러니 우린 각자의 약함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사탄의 가시를 이용하여 우리의 약함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인생의 모든 약함이 온전해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