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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12권 / 비(碑) / 자암서원 묘허비명 병서 〔紫巖書院廟墟碑銘 幷序〕
학성(鶴城 울산(蔚山))의 사인(士人)인 진무(鎭撫) 차장호(車章祜)와 차형규(車瀅奎)가 내가 사는 산속 집 문밖에 와서 말하기를,
“저희들의 선조이신 문절공(文節公)과 강렬공(剛烈公)을 제사하는 자암서원의 유허지에 비석을 세워서 사모하는 마음을 부치려 합니다. 삼가 온 고을의 여론을 받들어 선생님께 비문을 청하옵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문절공은 휘는 원부(原頫), 자는 사평(思平)이다. 시조 제능(濟能)이 신라의 미추왕(味鄒王)에게 벼슬하였다. 공숙(恭叔)에 이르러 헌덕왕(憲德王)이 애장왕(哀莊王)을 시해하고 임금이 되자 아버지인 승색(承穡)과 함께 예양(豫讓)의 고사를 본받고자 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유씨(柳氏)로 성을 바꾸고 유주(儒州)로 달아났다. 고려의 개국 공신 유차달(柳車達)의 아들인 연안군(延安君) 효전(孝全)에 이르러 본래의 성을 회복하였으니 곧 공의 19세조이다.
공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으며 고례(古禮)를 참고하여 제사의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불교를 배척할 것을 극간(極諫)하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나란히 명성을 떨쳤다. 정치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는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으로 물러가 은거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운암(雲巖)을 자호로 삼았으며, 《주역(周易)》의 이치에 침잠하였다. 이때 요동을 정벌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는데, 우리 태조께서 찾아와 계책을 물으시니, 공은 눈물을 흘리며 그 불가함을 말하였다. 태조께서 회군(回軍)하여 돌아오셔서 나라를 창업하고 개국 공신을 녹훈하는데, 사람들이 동맹(同盟)하기를 요구하니 공은 말씀하기를,
“나는 고려의 신하이니 감히 두 마음을 먹을 수 없다.”
하였으며, 또 말씀하기를,
“차라리 다섯 말의 초(醋)를 마실지언정 공신의 대열에는 참여하지 않겠다.”
하였다.
태조께서 만년에 여러 번 꿈에 감응이 있어 하명하여 부르시니, 공은 하사하신 역마(驛馬)를 사양하고 한 필의 나귀를 타고 야인(野人)의 옷을 입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께서 공과 함께 대궐 북쪽의 용연(龍淵) 가를 노닐다가 파씨 여러 되를 뿌리면서 말씀하기를,
“자릉(子陵)이여! 평산의 파가 나를 배부르게 하였는데, 내 정원의 파는 유독 그대를 머물러 있게 하지 못하는구나.”
하셨다. 환관도 물리치고 비밀히 왕위 계승〔輪儲〕의 일을 물어보시니, 대답하기를,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분을 먼저 내세웁니다.”
하였다. 정언, 평의랑(評議郞), 전농시사(典農寺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거적자리를 깔고 질그릇을 쓰면서 초야에 있는 것과 같이 사니 사람들이 가을 물결 속의 빛나는 옥돌이나 얼음과 눈 사이의 맑은 서리에 비겼다. 몇 달을 지내다가 산으로 돌아왔다.
권신(權臣)이 무고하여 공과 내외 친척 70여 명을 송원(松原)과 마원(麻原) 사이에서 추살(椎殺)하였고, 유배되고 적몰(籍沒)당한 자들도 많았다. 야은(冶隱 길재(吉再))이 이 소식을 듣고는 책상을 끌어당겨 등잔을 내던지고 통곡하였다. 뒷날 태종께서 치제(致祭)하시고 찬성(贊成)을 추증하며 후손을 등용하라고 명하셨다. 아들 안경(安卿)과 손자 상도(尙道)가 모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으나 얼마 뒤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스스로 목을 매기도 하고 성을 바꾸어 남의 고용인이 되기도 하였다. 세종께서 더욱 불쌍히 여기셔서 또 시중(侍中)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셨다. 단종께서는 집현전 학사인 하위지(河緯地),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등 여러 신하에게 하명하여 《설원록(雪冤錄)》을 편찬하도록 하셨다.
강렬공의 휘는 운혁(云革), 자는 홍기(弘器)인데 문절공의 종자(從子)이다. 당초에 연좌되어 북변(北邊)에 정속(定屬)되었다. 세조 정해년(1467, 세조13)에 이시애(李施愛)가 그의 동생 이시합(李施合), 이시백(李施伯)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길주(吉州)에 근거지를 두니,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병사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다. 그는 장계를 올려 공을 선봉장으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가 일흔다섯이었다. 공은 그 지역 출신인 정휴명(鄭休明), 조규(曺糾), 박성장(朴成章)과 함께 적진에 들어가서 순리와 역리의 도리로 적을 회유하여 이시합과 이시백을 결박하여 우리 진으로 보내었는데 도중에 탈취당하였다. 그래서 종성(鍾城)과 회령(會寧)의 군대로 마운령(摩雲嶺)을 차단하고 귀순하는 자들을 받아들였다. 부장(副將) 최윤손(崔潤孫)이 배반하여 적에게 붙으매 공과 세 사람은 그에게 생포되었다. 그를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다가 단천(端川)의 옥중에서 돌아가셨다. 반적이 평정된 후에 시신을 찾았는데 수갑을 차고 목에 칼을 쓰고 두골이 깨어져 있었다. 정충 출기 포의 적개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병조 참판(兵曹參判) 연천군(延川君)에 추증되었다.
중종께서 그 형상을 그려서 《삼강록(三綱錄)》에 넣었는데, 임금이 친히 시를 지어 이르기를,
흉악한 괴수가 군대를 거느리고 길주에서 반역하매 / 凶醜稱兵叛吉州
마운령 이북에 해골이 언덕을 이루었네 / 摩雲以北骨成丘
한 장수의 충의가 적의 예봉을 꺾었으니 / 獨將忠義催鋒銳
한 번 죽어 꽃다운 이름 만고에 남겼다네 / 一死英名萬古留
공적은 장순과 허원이 성을 지키던 날과 같고 / 功如張許嬰城日
충성은 안고경과 원이겸이 적을 꾸짖을 때와 같았네 / 忠似顔袁罵賊時
승기를 탄 관군들이 일제히 힘을 모았는데 / 乘勝官軍齊致力
삭방에는 오히려 네 남아가 있었도다 / 朔方尙有四男兒
하셨다. 순조 정해년(1827, 순조27)에 벼슬을 더하여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므로 위판(位版)의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이 두 공의 우뚝한 절개와 공적이며 열성조(列聖祖)께서 포상하여 장려하신 바이다. 그 자손들이 온 나라에 퍼져 살고 있으며, 사액이 된 운암동사(雲巖洞祠)와 순천(順天)의 오천사(鰲川祠)와 초계(草溪)의 덕원사(德源祠)와 이 고을의 자암서원(紫巖書院)은 높이고 보답하는 것을 지극하게 한 것으로써 문장가들의 칭찬과 서술이 이미 사실을 다 밝혔다.
그러나 남몰래 유감스러운 것이 있다. 대저 사람은 천지의 중정(中正)한 기운을 부여받아서 본성을 삼으니 그 누가 군신과 부자의 윤리가 가장 크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가 되면 웅장(熊掌)과 물고기를 구분하여 판단할 줄 아는 이가 극히 적은 것은 다름이 아니다. 이욕에 그 마음이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목숨을 바쳐 뜻한 바를 이루는 것은 곧 학문의 힘이 마음속을 꽉 채우고 쌓여 있어서, 일을 당하면 겉으로 드러나 천리의 정도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문절공의 《역(易)》과 《예(禮)》에 대한 공부를 살펴보면 이것을 알 수가 있다. 강렬공이 이러한 가정에서 70년을 계셨으니 어찌 홀로 닦아서 이룬 바가 없이 갑작스럽게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마음을 일으켜 살신성인(殺身成仁)하였겠는가. 이것은 필시 역사에 빠진 기록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변통(變通)하는 즈음에 큰 인륜 상에서 스승의 법도를 우러러 사모하여야 하며, 또한 마땅히 선후ㆍ본말의 구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백이, 숙제를 부축하여 보낸 / 扶而去之
강태공 같은 분은 없다고 하더라도 / 縱無太公
성스러운 임금님들의 덕은 / 聖祖之德
주나라 때보다도 훨씬 낫다네 / 過於周遠矣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 求仁得仁
또 무엇을 원망하리오 / 又何怨焉
국가에 충성하는 일은 부자간에 전한 가법 / 父子呑炭傳家法
국가에 의리를 부르짖어 들판에서 죽었다네 / 又倡我國原野死
혀가 잘리고 두골이 깨어지니 / 舌斷頭裂
이 시랑만 홀로 미담을 남긴 것이 아니며 / 罔俾李侍郞專美
쌍묘는 헐 수 있어도 / 雙廟可毁
천지의 큰 법도는 끊어지지 않는다네 / 天地之經常莫絶
내 두 공의 성함을 아나니 / 吾知二公之名
백세에 걸쳐서 공적이 열렬하리 / 亘百世而烈烈
[주-D001] 원부(原頫) : 차원부(車原頫, 1320~1398)로, 고려 말의 학자이며 충신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호는 운암(雲巖)이다. 조선의 태조와는 열다섯 살 차이로 자문을 구할 정도로 친숙한 사이였으나 조선 건국에는 관여하지 않고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주-D002] 헌덕왕(憲德王)이 …… 되자 : 애장왕(哀莊王)은 신라 제40대 임금으로 아버지는 소성왕(昭聖王)이고 어머니는 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이다. 13세에 임금이 되어 삼촌인 김언승(金彦昇)이 섭정하였는데, 나중에 그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니 바로 헌덕왕이다. 《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 哀莊王》[주-D003] 예양(豫讓)의 고사 : 예양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부였던 지백(智伯)의 부하였다. 지백이 조 양자(趙襄子)에게 패하여 죽음을 당하자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고 옻을 칠하여 문둥이로 변장한 다음 다리 밑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조 양자를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죽음을 당하였다. 《史記 卷86 豫讓列傳》[주-D004] 다섯 말의 초(醋) :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의 대도독을 지낸 최홍도(崔弘度)는 성격이 엄혹(嚴酷)하였는데,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 “차라리 석 되의 초를 마실지언정 최홍도를 만나고 싶지는 않다.〔寧飮三升醋 不見崔弘度〕”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北史 卷32 崔弘度列傳》 초를 마시는 것이 대단히 고역스러운 데서 나온 말이다.[주-D005] 자릉(子陵) : 후한 광무제 유수(劉秀)의 친구인 엄광(嚴光)의 자이다. 유수가 천하를 평정한 뒤에 엄광을 불러 높은 벼슬에 임명하려고 하였는데, 엄광은 이를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의 칠리탄(七里灘)에 은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태조가 차원부를 엄광에 비겨서 부른 말인 것 같다.[주-D006] 세상이 …… 내세웁니다 : 왕위 계승의 일을 묻는 태조에게 차원부가 대답하기를 “세상이 태평할 때는 적장자를 먼저 내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분을 먼저 내세웁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공이 있는 분이란 조선 개국에 공이 큰 이방원을 암시한 말이라고 한다.[주-D007] 권신(權臣)이 무고하여 : 차원부가 평산에 은거할 때에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 《연안차씨족보》를 편찬ㆍ판각하여 해주 신광사에 보관하였다. 이 족보에는 차씨 문중과 혼맥을 형성한 집안의 서얼(庶孼)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개국 공신인 정도전(鄭道傳), 조영규(趙英珪), 함부림(咸傅霖), 하륜(河崙)은 모두 차씨 집안의 외서손들이어서 이름 위에 모두 ‘서(庶)’를 명기하였다. 여기에 악감정을 품은 하륜이 왕자의 난을 빌미로 차원부는 정몽주(鄭夢周)의 외종(外從)형제이고, 이방과(李芳果)의 원비(元妃)의 증조부 항렬이니 장차 이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제거해야 한다고 하니 이방원이 허락하였다. 이에 하륜은 심복인 이숙번을 시켜 태조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왔다가 개경으로 돌아가는 차원부와 그를 마중 나온 차씨 일족 70여 명을 살해하고, 족보의 판본까지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車原頫雪冤記》[주-D008] 설원록(雪冤錄) :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 혹은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라고도 불린다.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그 존재가 보이며, 현재 전하는 판본은 그 진위에 대해서 학계의 논란이 있다.[주-D009] 조규(曺糾) : 대본에는 ‘紏’로 되어 있는데, 《세조실록(世祖實錄)》 13년 8월 8일 기사 및 《중종실록(中宗實錄)》 11년 5월 20일 기사에 의거하여 ‘糾’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10] 催 : 대본에는 ‘推’로 되어 있는데, 홍석주(洪奭周)가 쓴 시장(諡狀)에 의거하여 ‘催’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淵泉集 卷33 贈戶曹判書延川君車公諡狀, 韓國文集叢刊 294輯》[주-D011] 안고경(顔杲卿)과 원이겸(袁履謙) : 안고경은 당나라 현종 때의 충신이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상산 태수(常山太守)로 있었는데 사촌 동생인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顔眞卿)과 긴밀히 협조하여 적을 막았다. 그 후에 사사명(史思明)의 군대에 포위되어 부하인 상산 장사(常山長史) 원이겸과 함께 적군에게 사로잡혀 안녹산이 있던 낙양으로 압송되었는데, 끝까지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꾸짖으며 저항하다가 낙양 천진교(天津橋)에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舊唐書 卷187下 顔杲卿列傳》[주-D012] 웅장(熊掌)과 …… 판단 : 물고기도 원하고 웅장도 원하는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물고기보다 좋은 웅장을 선택한다. 마찬가지로 삶도 원하고 의(義)도 원하는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해야 한다. 《孟子 告子上》 여기서는 구차하게 살려는 욕망을 버리고 정의를 위하여 죽을 줄 아는 마음을 가리킨다.[주-D013] 백이(伯夷) …… 강태공(姜太公) :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는데, 백이와 숙제(叔齊)가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으며 대의(大義)로써 그 불가함을 말하자 주위의 사람들이 창으로 찌르려고 하였다. 그러자 강태공이 이들은 의인(義人)이라 죽이면 안 된다고 하며 부축하여 보내었다. 《史記 卷61 伯夷列傳》[주-D014] 인(仁)을 구하여 …… 원망하리오 : 공자가 백이와 숙제를 평가하여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엇을 원망하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라고 하였다. 《論語 述而》[주-D015] 국가에 충성하는 일 : 원문의 ‘탄탄(呑炭)’은 숯을 삼킨다는 말이다. 예양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부였던 지백(智伯)의 부하였다. 지백이 조 양자(趙襄子)에게 패하여 죽음을 당하자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고 옻을 칠하여 문둥이로 변장한 다음 다리 밑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조 양자를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죽음을 당하였다. 《史記 卷86 豫讓列傳》[주-D016] 이 시랑(李侍郞) : 북송 휘종(徽宗) 때의 충신인 이약수(李若水)를 가리킨다. 그는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냈다. 정강(靖康) 2년(1127)에 금군이 대거 남침하여 휘종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아가 이약수가 휘종을 모시고 따라갔는데, 그의 인물됨을 알아본 금나라의 태자 점한(粘罕)이 부귀를 약속하며 회유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다가 혀가 잘리고 눈이 도려지며 수족이 잘려서 참혹하게 죽었다. 남송의 고종(高宗)이 관문전 학사(觀文殿學士)에 추증하고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宋史 卷446 李若水列傳》 《資治通鑑後編 卷104 宋紀 欽宗恭文順德仁孝皇帝》
ⓒ 한국고전번역원 | 김용환 (역) |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