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1875~1926)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고?
▲눈 덮힌 알프스를 배경으로 서 있는, 릴케가 만년을 보낸 뮈조트城館
릴케는 1921년부터 스위스 셰르 근처의 산중에 있는 13세기에 지어진 뮈조트 (Muzot) 성관(城館)에서 장미를 가꾸며
시작(詩作)에 몰두했다. <두이노의 비가. 1922>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1922> 같은 대작이 여기에서 쓰여졌다.
뮈조트 성관에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를 비롯하여 많은 릴케의 친구들이 방문하곤 했는데, 1926년 9월, 한 프랑스 시인의
소개로 미모의 코카서스 출신의 이집트 여인 '니엘 엘루이'가 그녀의 친구와 함께 이 성(城)을 방문한다.
릴케는 이 여인들에게 주려고 뜰에 있는, 손수 가꾼 장미꽃 몇 송이를 서둘러 꺾다가 그만 가시에 두 손가락이 찔리고 만다.
이 상처가 곪아서 그는 곧 한 쪽 팔을 쓸 수 없게 되었고 이어서 다른 쪽 팔도 마비되는 불상사를 당한다. 그는 장미 가시에
찔리면서 장미 가시에 묻어 있던 파상풍균에 감염되었던 것이다. 파상풍균의 특징은 턱이나 근육에 침범하기 때문에 감염이
되면 릴케처럼 근육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다고 한다. 1926년 10월 장미 가시에 찔리고 한 달 후, 릴케는 친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장미 가시에 깊이 찔려 생긴 상처가 내 왼손을 수 주일 동안 못 쓰도록 만들었고, 이어 심하고 아픈 것이 감염되어 오른손
으로 쓰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붕대를 매긴 했지만 두 손이 열흘 동안이나 쑤시고 아팠다. 이 재난이 채 극복되기도 전에
시온에서 유행되던, 열(熱)이 나는 장염을 옮아 와 또 2주일이나 아주 쇠약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릴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의사의 진찰을 미루다가 11월 말에야 발몽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진단 결과
릴케의 병은 단순 파상풍이 아니라 백혈병이었다. 파상풍의 발병과 그 심각성은 생성된 독소의 양과 숙주의 저항력에 따라 결정
된다고 하는데, 백혈병으로 저항력이 약해져 있던 릴케였기에 아마도 장미 가시에 찔린 정도의 상처로도 파상풍이 발병한 것
같다. 릴케의 백혈병은 그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처음에는 장에, 말기에는 입과 코의 점막에 검은 농포가 나타나 이것이
터지면서 피가 나와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었다고 한다.
병마를 이기지 못한 릴케는 12월 29일 새벽 발몽 요양소에서 조용히 영면(永眠)에 들어갔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장미는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몇몇 지인들과 동료 문인들만이 참석한 릴케의 장례식은 조촐했다고 전한다. 키펜바르그가 쓴 릴케의 전기에
의하면, 무덤 앞 관에는 마치 눈 속에서 피어나듯 꽃다발 속에 장미꽃들이 피어 있었다고……
"인생은 멋진 것이다. Das Leben ist eine Herrlicbkeit "
릴케가 마지막 병상에서 남긴 말이다.
▲ 유언에 따라 스위스 라롱(Raron)의 언덕 위에 있는 교회묘지에 묻혔다
▲ 릴케의 무덤
장미꽃에 둘러싸인 이 릴케의 무덤은 모조(Imitation)이다.
원래 묘지는 교회당 공사 중 흔적도 없이 파괴되고 소실되어
그의 유골조차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릴케는 죽기 일 년 전인 1925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듯이 유언장을 작성한다.
그가 유언장에 적어 놓은 묘비명이, 릴케 가문의 문장(紋章)이 양각된 아래에 적혀 있다.
Rose, oh reiner Widerspr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픈 마음이여.
| Rose, O Pure Contradiction, Desire To Be No One’s Sleep Beneath So Many Lids. |
(註)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 그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픈 마음이여."
릴케의 묘비명(墓碑銘)이다. 그가 떠난지 95년! 지금까지 묘비명의 의미를 정확히 풀어낸 사람은 없다.
아마 루 살로메 외에는 완전 해독이 불가능한 묘비명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시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감성을 울린다.
▲ 1901년, 클라라와 신혼 시절의 릴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