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마쓰고분(高松塚)과 고구려 문화
윤명철 동국대 교양학부 교수
일본 열도에는 흔히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고구려의 흔적이 많다. 다카마쓰 고분(高松塚)은 일본 열도 내에 가장 확실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고구려계 유적이다. 다카마쓰 고분은 한때 일본 전후 최대의 발굴로 평가됐다. 죽순을 캐던 농부가 발견했는데, 정식 발굴은 1972년 이곳에서 두 정거장 떨어져 있는 가시하라(槿原)고고학 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직경 18m, 높이 5m의 원분으로, 규모는 다른 고분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맞은편 언덕에 있는 문무왕릉 보다도 작고, 바로 위에도 다른 고분 몇 기가 겹쳐 있어 피장자(被葬者)가 그리 중요한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 고분이 그렇게 주목받은 것일까? 당시 일본 학자들은 물론이고 남한과 북한 학자들까지 모여 발굴결과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였었다.
현장에 가면 진짜 고분은 폐쇄해 놓고, 무덤 내부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전시관이 있다. 석실 내부는 길이 265cm, 높이 113cm, 폭 103cm의 조그만 현실(玄室)이다. 부장품들은 거의 도굴되어 발견된 유물은 별로 많지 않다. 다만 고분의 천장과 벽에 그려진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일본에선 벽화가 있는 고분을 보통 장식고분이라고 하는데, 규슈 북부에 몇 개가 있을 뿐이고, 그것 역시 주술적 성격을 띤 간단한 형태의 것이다. 이를테면 삼각형 같은 기하학 무늬나 동심원, 배, 사람 등이 유치한 형태로, 그것도 붉은색과 흰색의 단조로운 색채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다카마쓰 고분은 장식고분의 수준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 사면에 회칠을 하고 그 바탕 위에 정식으로 그린 완전한 채색벽화이다. 이 고분이 처음 발견됐을 때 전 일본 열도가 흥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벽화가 표현하고 있는 사상이나 등장인물이 고구려 계통이었기에 각별한 관심이 쏟아졌다.
다카마쓰 고분에는 천장에 흰 점으로 표시된 북두칠성 등 성수도가 그려져 있고, 사방 벽에는 사신도(四神圖)가 춤을 춘다. 북쪽에는 현무가, 서쪽에는 흰 몸뚱이를 가진 백호가 긴 몸을 휘감고 있다. 머리 위에는 달이 있는데, 희미해서 보이지 않지만 가운데에는 두꺼비나 개구리가 있는 것 같다. 달 안에 동물을 그리는 것은 고구려 벽화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이다. 동쪽 벽에는 용이 있는데, 이 역시 금박의 태양을 이고 있고 그 안에는 발이 셋 달린 삼족오(三足烏)가 검게 그려져 있다. 새는 태양의 전령이면서 태양 자체를 상징한다. 천왕지신총을 비롯한 고구려 벽화에는 신 혹은 인간이 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검은 새인 까마귀나 까치는 태양을 상징한다. 새의 다리가 셋인 것은 우리 민족의 3 사상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三足烏는 우리 민족의 3사상 표현
다카마쓰 고분의 이런 그림들은 모두 만주 통구 집안 지역의 벽화인 오회문 4호묘 5호묘, 그리고 장천 1호분 삼실총 등에서도 발견된다. 만주벌판에서 날아다니던 태양의 새 삼족오, 해모수가 타고 내려온 용이 아스카의 한복판에서 승천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뛰어난 예술품 가운데 하나다. 대담하고 힘차면서도 자유로운 붓질로 화강암이나 회벽에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고 있다.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를 가진 고구려인들은 하늘의 자손이므로 우주 전체를 무대로 생활해야 했다. 또한 인간은 우주의 삼라만상과 공존해야 하므로 벽화에는 다양한 주제와 소재, 그리고 상반된 정신세계가 동시에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니 회화적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매우 주목할 만 하다. 1500년 전의 채색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안료와 민어풀, 해초 등 접착제의 발명과 사용은 현대회화에서도 수수께끼이며, 습도나 온도, 명암 등 내부환경을 조정하는 과학적인 능력 역시 풀어야 할 숙제이다. 건축학적으로도 벽면에서 천장까지 계단식으로 올라가며 쌓은 말각조정 양식 등은 오로지 고구려만의 독특한 능력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벽화 속에 표현된 고구려인들의 우주관과 세계관, 역사관이다. 천(天) 지(地) 인(人)을 구분하되 하나의 세계 속에 통일시키고, 그 통일자의 역할을 인간에게 부여하고 있다. 반수반인(半獸半人), 신인(神人)의 존재, 신과 인간의 극적인 만남 등은 모든 대립을 하나로 무화(無化)시킨다. 다카마쓰 고분처럼 두 마리의 용이 몸뚱이를 꼬아 한 몸이 되어가는 극적인 자태는 고구려인들의 변증법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갈등과 대립을 무화하고, 조화와 합일을 지향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일본인들은 다카마쓰 고분의 벽화를 초당(初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가야, 백제의 영향도 그렇지만 고구려의 영향까지 인정하기는 싫었을 것이다. 그러니 시대적으로 고구려보다 더 늦은 당의 영향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긴 발굴 당시에 일본에 건너간 한국학자들 가운데 일인들의 주장에 동조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카마쓰 고분이 고구려계이며 피장자가 고구려 사람인 것은 벽화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여인들과 남자들이 있는데 이들의 복장은 당시 고구려의 것이다. 남자들은 고구려인들처럼 머리에 모자를 썼고, 바지 위에 긴 두루마기를 입었다. 특히 4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뒤에서 묶었고 상의는 소매가 길고, 허리띠를 매었다. 그리고 치마를 땅에 끌릴 정도로 입었는데, 그 문양이 세로로 난 색동주름치마이다. 덕흥리 수산리고분, 그리고 평양 부근의 쌍영총 벽화고분의 여인과 자매지간인 듯 쏙 빼닮았다. 둥그스름한 얼굴이며, 두껍지만 강한 턱, 기품 있는 눈길마저 똑같다. 집안지역의 장천 1호분에는 100여 명에 달하는 고구려 남녀가 나와 춤을 추고 사냥하고 씨름을 하는데, 이들의 삶을 우리는 다카마쓰 고분의 벽화에서 다시 보고 있는 것이다.
다카마쓰 고분 벽화를 그린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고구려인들을 묻었고 고구려벽화를 그렸다면, 화공 역시 고구려인들임이 틀림없다. 불사와 고분 축조가 한 사람 아닌 여러 사람들에 의한 공동작업의 산물이듯 벽화고분의 제작 역시 한 명의 화공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하다. 이 무렵 고구려에 온 사람들 가운데는 610년 다른 승려들과 함께 온 담징이 있었다. 호류지(法隆寺)의 금당벽화로 알려져 있는 담징은 고구려가 야마토 조정에 보낸 화공집단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 다카마쓰 고분 외에도 다른 고분들을 축조했고, 그곳에는 반드시 고구려 벽화가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다카마쓰 고분(高松塚)은 일본 열도 내에 가장 확실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고구려계 유적이다.

다카마쓰 고분은 직경 18m, 높이 5m의 원분으로, 규모는 다른 고분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일본에선 벽화가 있는 고분을 보통 장식고분이라고 하는데, 규슈 북부에 몇 개가 있을 뿐이고,
그것 역시 주술적 성격을 띤 간단한 형태의 것이다.

다카마쓰 고분 천장에 흰 점으로 표시된 북두칠성 등 성수도를 재현한 공원


무덤 내부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전시관

다카마쓰 고분 공원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