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제가 1999년 4월에 Christian Herald에 4회에 걸쳐 기고한 글입니다. 이글은 바울의 부활신앙(부활체) 담론을 다룬 글입니다. 졸고지만 관심있는 분들께 도움이 될까 하여 이 곳에 올립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고전 15:3-4)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부활신앙이 기독교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죽임의 역사를 깨치고 무한한 영적 생명을 인간 역사에 공급해 줄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로마의 박해 속에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짐승에게 육신이 찢겨 죽으면서까지 그들의 순결한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부활신앙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크리스천이 모든 사람 가운데서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되고 만다(고전 15:19). 부활을 전제하지 않은 믿음의 선한 경주는 허사로 끝나고 말 것이며, 고난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 간다는 것 또한 무의미 할 것이다. 믿는 이들로 하여금 온갖 부정과 불의 그리고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도록 하는 이 부활신앙이 기독교 신앙의 핵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대한 바른 지식을 성서로부터 배우는 것 또한 중요하다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기독교를 유대교의 뿌리로부터 태동되던 초기 시점에서 바라볼 때, 기독교 안에 수많은 신앙의 다양한 갈래들이 공존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종교회의를 거쳐 보다 단순화되고 통합되기 이전 (유대교와의 경계선이 아직은 희미한) 초기 기독교를 생각할 때, 다양한 문화적 토양과 다채로운 신학적 이해에 근거한 단선이 아닌 복선적(혹은 혼선적) 형태의 기독교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활의 문제도 마찬가지 양상을 띤다.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서서히 이탈하는 주후 1세기 무렵에 초기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부활체의 본질에 대한 통일된 관점이 없었다. 이 점은 예수님의 부활체에 대하여 표현해 놓고 있는 신약성서의 몇 곳을 찾아보면 분명해 진다.
▪ 마태복음: 마태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천사가 그 무덤의 돌을 굴려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소생하시지 않았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천사들에 의해 돌문이 굴려진 것은 예수께서 무덤을 떠나신 후였기 때문이다(28:2-6).
▪ 누가복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24:39). - 위의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이셨지만 믿지 못하자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24:41-42).
▪ 사도행전: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2:31).
▪ 요한복음: 예수님이 문들이 닫혀 있는 방에 들어오신 후 도마로 하여금 못 자국 난 손과 창 자국 난 옆구리를 만져서 확인시켜 주시는 사건을 기록해 놓고 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 고린도전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15:50).
위의 구절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육체의 부활로서 제시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이 육체적인 것으로는 강조하고 있으나, 그 부활체의 본질은 전혀 명확치 않다. 그러나 누가나 요한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이야기함으로써, 그 부활체가 예수님의 이전 몸과는 달랐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들과는 달리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체가 "혈과 육"의 부활체가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부활체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견해는 예수님의 부활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한 고정된 전승이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당시 유대교 내에서도 부활에 관한 열띤 논쟁이 있었다. 샴마이(Shammai) 학파는 부활체는 현재와 동일한 몸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힐렐(Hillel) 학파는 부활체가 다르게 구성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주후 2세기경에 이르면, 교회 내부와 외부로부터 제기된 부활에 대한 회의주의(특히, 육체를 경멸하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혈과 육의 부활"을 강경히 주장하는 기독교 저술가의 진술을 눈에 띄게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몸의 부활"과 "육체의 부활"은 동의어이면서 상호 교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 점은 당시 비기독교인들이 종종 순교자들의 시신을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소각하고 그 재를 흩뿌림으로써 순교자들의 부활의 소망을 수포로 돌리고 그들의 신앙을 조롱하였다는 사실에서 보다 분명해 진다. 이러한 매장지의 박탈은 "시신의 부활"을 믿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의 부활"은 바울의 부활신앙과는 그 궤를 달리하고 있음을 고린도전서 15장은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목적은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된 다양한 문제들에 답하기 위해서인데, 그러한 문제들 가운데 부활에 관한 논쟁이 제기되었다. 사랑장인 13장을 고린도전서의 핵심장으로 간주하고 있는 불트만(R. Bultmann)과는 달리, 바르트(K. Barth)는 15장 부활장을 고린도전서의 핵심장으로 여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15장에서 제기된 부활 논쟁을 다룰 때, 우리는 바울서신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이 언급한 "죽은 자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dead)이란 표현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바울이 가르친 "죽은 자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dead, 살전 4:16)을 듣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에 대하여 바울의 적대자들은 "죽은 자의 부활"은 없음을 주장하면서(고전 15:12) 바울을 반박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 교회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용어인 "죽은 자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시신의 소생"과 "혈과 육의 부활"과 동일한 것으로 각각 잘못 해석하였다. 이러한 "시신의 소생"과 같은 개념은 당시 대중적인 신화나 민담에서 자주 언급되던 이야기(마술에 의해 죽은 이를 무덤에서 불러내는 이야기)였기에 고린도 교회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죽은 자의 부활"을 이러한 유의 신화나 민담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죽은 자의 부활"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오해 즉, 죽은 시신이 무덤으로부터 소생한다든지 혹은 "육체의 부활"이 아님을 주장하면서 자신이 주장한 부활은 단순한 "영혼의 부활"이나 "혈과 육의 부활"이 아닌 육과 같이 썩어질 것이 배제된 "몸의 부활"(pneumatic body)임을 고린도 전서 15장 전장에서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체가, 씨에 견주어 지는 꽃처럼, 부활 이전의 몸과는 분명히 다를 것임을 주장한다(15:36-38). 바울은 몸의 분류체계(hierarchy)를 개략적으로 진술하고서 우선 다른 종류의 몸을 언급하기 위하여 "육체"(flesh)를 사용한다. 사람, 짐승, 새와 물고기의 육체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육체가 있음을 바울은 진술한다. 우리는 여기서 각각의 피조물이 각기 다른 우주적 영역에서 존재하며, 각기 자신의 영역에 적절한 몸을 지니는데, 그 몸은 그 영역으로부터 파생된 물질로 구성되었음을 바울이 제시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보다 낮은 존재들(사람, 짐승, 새, 물고기)을 언급할 때만 바울이 "육체"(flesh)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하늘에 속한 몸"(heavenly body: 한글 개역성경에는 "형체"로 번역되어 있으나 실제는 "몸"임)에도 유사한 분류체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데, 이때 바울은 "육체"라는 용어 대신에 "몸"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쓴다. "하늘에 속한 몸"을 이야기할 때, 바울은 왜 "육체" 대신 "몸"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는가? 그 이유는 부활한 인간의 몸이 바로 이러한 "육체"로 구성되지 않은 "하늘에 속한 몸"임을 후에 주장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15:42-44). 바울은 "몸"(body)의 개념을 가지고 "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으로 구분하며(15:40), 또한 "혼적 몸"(σωμα ψυχικόν: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육적 몸"이라고 번역해 놓고 있으나 실제는 "혼적 몸"임)과 "영적 몸"(σωμα πνευματικόν: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신령한 몸"이라고 번역해 놓음)으로 구분한다(15:44). 여기서 "혼적 몸"과 "땅에 속한 몸"은 "육체"에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며, "신령한 몸"과 "하늘에 속한 몸"은 "육체"와는 다른 어떤 것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바울이 해와 달과 별과 같은 천체들(heavenly entities)를 "몸"이라고 여겼던 점과 인간의 부활체를 그러한 천체들의 "몸"에 빗대어 이해한 것은 다니엘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신앙의 형태였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다니엘서의 저자가 지혜 있는 자는 별과 같은 불멸성 얻게 될 것이라는 가정을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바울은 부활체가 육(flesh)과 같은 썩어지는 요소로 구성된 것이 아닌 불멸하며 썩어지지 아니하는 요소로만 구성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 이후 영혼과 육체라고 하는 이분법적(dualistic) 사고를 따라가는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로 들려졌을 것이고 그러한 부활 개념은 그들에게는 생소하고 낮선 개념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오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주장한 부활이 "육체의 부활"이 아닌 육체와 같은 요소가 배제된 "몸의 부활"임을 주장하였다(15:50).
그러면 썩어지는 요소가 배제된 "몸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 "몸"은 "육체"와는 어떻게 다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헬라어 성경 본문에 따르면, "육체"와 "몸"은 σάρξ(flesh)와 σωμα(body)로 엄연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몸"을 이야기할 때, 다소 복잡한 헬라철학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플라톤(Plato)에게 있어서 "몸"은 영혼을 사로잡는 무덤이었다. 따라서 "몸"은 영혼과는 구별되는 욕구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몸"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 이르면, "몸"은 영혼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였으나 영혼보다는 열등하며, 영혼은 가장 훌륭한 입자들로 이루어진 "몸"임을 주장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테르(ether)와 같은 미세한 입자로 구성된 "몸"이라는 것이다. 후대의 스토아주의(Stoicism: BC 100-AD 100)는 인간의 몸과 천상의 몸을 가리키는데 "몸"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나아가 이 우주를 "신의 몸"으로 간주한다.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를 "우주적 몸"(cosmic body)으로 이해한 것은 바로 이러한 헬라철학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멀리는 플라톤의, 가까이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이분법적 사고에 깊이 영향받은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육체"와 "몸"을 구별해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물질과 비물질을 엄격히 구분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영혼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질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부활체의 본질을 논할 때, 어려움에 봉착하고 마는 것은 우리의 시각을 고정시켜 놓은 채 성서가 기록된 당시의 문화나 세계관에 다가가려 하기 때문이다. 성서와 그 메세지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려한다면 우리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서가 펼쳐진 세계와 언어로 다가가는 것이 성서를 가장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고대의 헬라인들이 이해했던 "몸", "영혼", "자연"과 "물질"과 같은 개념들은 그러한 개념들이 갖는 현대적 의미와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종종 헬라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혹은 그 반대로) 그 원어의 풍부한 의미를 상당 부분 상쇄할 뿐만 아니라 현대적 언어나 개념으로 정확히 담아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현대에 있어서 물질과 비물질 사이를 철저히 구분하는 급진적인 이원론(radical dualism)은 데카르트가 가져다 준 사고의 혁명적 발상이었다. 주후 1세기경에는 플라톤의 급진적 이원론에 더 이상 동조하지 않은 사고의 형태가 존재했다. 그러한 사고 형태를 우리는 "수정된 존재론적 일원론"(a modified ontological monism)으로 부를 수가 있는데, 예를 들면, 개체의 비존재성,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의 유동성과 인간의 몸과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의 본질적 연속성과 같은 일원론적 사고구조는 고대 헬라인들이 생각했던 개념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혈과 육"은 "전신"(whole body)을 언급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현대적 의미의 "육체"(physical body)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pneuma)과 "혼"(psyche)과 같은 요소와 함께 대부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요소들을 언급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비물질적 혹은 비신체적 몸을 말함으로써 바울의 부활 개념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바울의 부활신앙을 왜곡시킬 뿐이다. 바울 당시의 철학적 혹은 의학적 이론에 따르면, "혈과 육"은 다양한 체액(예를 들면, 당시에는 피, 담즙, 점액, 우울과 같은 체액의 배합으로 체질과 기질이 정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과 다양한 종류의 물질로 구성된 "몸"의 일부분만을 구성할 뿐이다. 따라서 "혈과 육"과 "영"(pneuma: "물질"과는 반대되는 현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영"은 아니다)은 몸의 모든 부분이거나 혹은 "몸"을 함께 구성하고 있는 다른 형태의 물질들인 것이다. 바울이 부활체를 단순한 (현대어의 "혼"으로 번역되는) "프쉬케적(psychic) 몸"이나 "혈과 육의 몸"이 아닌 (현대어로 "영"으로 번역되는) "프뉴매틱(pneumatic) 몸"이라고 말할 때(15:44), 인간의 몸에 있어서 불멸하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부분이 부활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육체"(flesh)와 같은 썩을 수 있고 썩고 있는 부분이 없는 불멸하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부분에 의해서만 구성된 몸의 부활이 바로 바울이 주장하는 부활체인 것이다. 15장 바울의 진술에서는 신체적/영적으로 구분한다든지 물질/비물질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모두가 물질로 추정되지만 다양한 농도에 따른 실재의 분류체계를 언급하고 있다. 이 점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대조시켜 표현해 놓고 용어들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보다 분명해 진다.
"땅에 속한 몸" "하늘에 속한 몸" (40절) "썩을 것" "썩지 아니할 것" (42절) "욕된 것" "영광스러운 것" (43절) "약한 것" "강한 것" (43절) "혼적 몸"(개역성경은 "육적 몸") "신령한 몸" (44절) "산 영" "살려 주는 영" (45절) "흙에 속한 자" "하늘에 속한 자" (47-49절) "혈과 육" -------------- (50절) "썩을 것" "썩지 아니할 것" (53절) "죽을 것" "죽지 아니함" (53절)
위의 대조표를 볼 때, 우리는 몇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몸"과 "영" 사이를 구분하고, "몸"을 "혈과 육"과 동일시하는 현대적 이원론(dualism)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둘째로, "몸"은 대조되는 두 곳에서 동시에 나타나지만, "혈과 육"은 한 곳에서만 나타난다. 셋째로, "신령한 몸"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물질"이나 "육체"가 아닌 오히려 "프쉬케적(혼적) 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대조가 존재론적이 아닌 분류체계와 상태의 대조임을 알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되기 이전의 인간의 자연적인 몸은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지만 부활체는 이들 중 첫번 두 가지의 것은 파편과 흡사하게 벗어버리고 보다 가볍고 보다 높은 본질의 물질인 "영"만을 보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보다 낮은 땅의 수준에서 보다 높은 천상의 수준으로 분류되는 물질의 분류체계를 상정해 놓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이 가져올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바울은 자신이 주장한 부활이 썩는 것이 배제된 "몸의 부활"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땅에 속한 것"이 완전히 배제된, 천체적 물질인 프뉴마(pneuma)로만 구성된 몸이 부활체인 것이다. (대부분의 당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천체가 불[fire]이나 에테르[ether]나 프뉴마[pneuma/spirit]로 구성되었음에 일치한다.)
고린도후서 5장 1절 이하("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에 따르면, 우리는 부활시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즉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혹은 "처소"는 바로 부활 이후의 상태인 "몸"의 썩어지는 부분이 제외된 "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장막 집"은 몸의 썩어지는 부분인 "육신"임에 틀림없다. (현대적 의미의 "혼"이 아닌) "프쉬케로 구성된 몸"과 (현대적 의미의 "영"이 아닌) "프뉴마로 구성된 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서 각각 이야기하고 있는 "땅에 속한 몸"과 "하늘에 속한 몸"임을 알 수 있다(비고. 고전 15:49). 따라서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부활은 썩어지는 "육체"를 지니고서 다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그렇다고 한다면, 힌두교나 불교의 "윤회"와 같을 것이다) 썩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영적 몸"을 덧입는 것이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는 것,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체인 "영적 몸"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체인 "영적 몸"을 우리가 이해하는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의 감각과 인식을 넘어선 하나님의 신비인 것이다. 역사 속에서 분명 일어났던 그 부활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이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진술하고 있는 것(마 28; 막 16; 눅 24; 요 20-21)과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활체에 대한 상이한 이해는 부활이 인간의 인식 안에서 그 유비(analogy)를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신비한 사건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일으키신 사건을 3차원의 시·공간에 제한된 인간이 자신의 언어로 정확하게 풀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증인들의 입을 통해서 생생하게 증언된 역사 속의 단회적 사건인 예수님의 부활은 그러기에 믿음 안에서만 포착되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부활은 역사를 담보하고 있지만 과학이나 경험의 영역 안에서 인식되어지는 사건이 아닌 믿음의 사건인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언제나 가능태이며 부활신앙은 삶 속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신비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