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가면서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스트레스란 외부에서 오는 다양한 정보나 기운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 나타나는 육체적 또는 심리적인 현상이다. 삶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절망적인 질병으로부터 고통,대인관계의 심적외상후 나타나는 트라우마 그리고 다양한 문명의 이기의 변화에 따른 테크노 스트레스 등...삶의 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적응문제는 우리에게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주며 때론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인이나 연예인들의 충격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하는 비극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 중장년층은 지구촌에서 가장 강력한 문명사적인 변화를 겪으며 살아가는 세대라 할수 있다. 서구 300년의 과학문명과 산업화에 이은 정보화시대의 소용돌이를 100년이 채 안된 조국의 근현대사의 격변기에서 굵은 신경을 마모시켜가면서 강인한 정신력 하나로 버텨온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린시절 그믐밤엔 불빛 하나 없는 칠흑같은 어둠 때문에 지척에 있는 뒷간도 찾기가 힘들었던 원시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향수를 가진 세대이다. 형광불빛이전에 30촉 또는 100촉하는 뜨거운 백열전구는 소나무 송진 불빛에서 공부하던 형설지공의 어둠에서 개명천지를 열었다. 그리고 이장집 유성기 하나로 동네에 문명의 새아침이 시작되었다. 흑백TV, 타자기와 완행열차와 트럭의 먼지 나는 소박한 낭만을 거친후에는 휴대폰, 컴퓨터, 디카, 아이팟, 내비게이터와 같은 문명의 이기가 일상의 필수품이었던 발랄한 세대와 마지막 힘든 교감을 나누어야했다. 그리고 이제는 스마트폰, KTX, 슈퍼컴 그리고 트위터와 같은 21세기 최첨단 문명이 구축한 총체적인 불랙홀같은 와류속으로 그들의 경직된 몸과 마음은 흔들리고 있다.
보통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으로 회자된다. 동양의학에서는 스트레스시에 이에 적응하는 기운인 생명력의 부족은 다양한 신체적 또는 심리적인 증상을 야기 시킨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심한 아이들은 건조한 눈을 지속적으로 깜박거리거나 장기적인 알레르기성 비염에 노출된다. 학생들의 어깨는 물먹은 솜을 한 짐 진 것처럼 무겁고 기운이 없다. 그리고 형광 불빛의 깜박거리는 미세한 빛의 움직임에도 책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짜증을 낼 정도로 여유가 없다. 주부들은 평소 가슴(중단전)이 답답하다가 이것이 심하여지면 가슴을 피가 나도록 손톱으로 긁어댄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세월과 함께 곱던 손의 마디마디를 점점 거칠고 굵게 만든다. 중장년층은 소변빈삭에 수시로 속옷뿐만 아니라 자존심을 적신다. 대변엔 뒤엔 항상 뒤가 개운치 않은 후중(後重)의 증세가 연륜의 무게만큼이나 무겁다. 노인들은 특히 덥고 차거운 한열의 왕래가 심하다. 그러기에 쉽게 더웠다 추웠다하기에 옷을 벗었다 히터를 틀었다하며 본의 아닌 죽 끓는듯한 변덕으로 주변의 질책에 민망할 따름이다.
생명력은 위에서 거론한 이러한 일반적인 스트레스성 증세외에도 면역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기에 생명력 부족 현상이 극대화 되면 이는 후천성 면역결핍증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동의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의 마지막인 후천성 면역결핍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트레스의 대처방법으로 희노사비공의 오정의 조절과 인의예지신과 같은 덕목의 함양외에 주기적인 운동과 지혜로운 섭생이 필수적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인자함과 상반되는 분노의 삶을 사는 사람은 간이 경화되고 간이 경경화가 진행되는 사람은 더욱 남에게 모진 성격적인 행동을 취한다. 주변에 간경화인 사람이 얼마나 여유가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리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와같이 정신과 육체는 유기적인 상호관계를 지니면서 악순환을 심화시킬수 있기에 오상의 덕목과 오정의 조화로움이 요구된다. 섭생으로는 시호나 백복령과 같은 한약과 함께 옥수수,조,녹두, 문어,낙지,오리고기, 양고기 등이나 오곡 잡곡밥등이 강력한 기운을 가진 음식으로 추천되곤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스트레스가 활기찬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중 생태계에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천적 상어가 존재하면 그 주변의 물고기들은 생명력이 크게 증가하며 역동적인 활동을 보인다. 그 반대가 온상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이 경우 역동적인 생명력은 크게 저하된다.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환경은 사람에게도 인생에서의 창의적인 성취감을 반감시키다. 한 예를 들면 미국 뉴잉글랜드의 귀족 집안에 태어나 아이브리그의 명문 학교를 나오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아 말년까지 세속적인 영화와 육체적 건강을 누린 미국의 어떤 노인이 있었다. 그러나 이 노인이 임종하면서 “나는 인생을 반밖에 살지 못하였다고 한탄하였다고” 하는 말이 의미 있게 들린다. 이와 같이 스트레스는 일견 우리에게 독소적인 의미로 들리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창조적인 생명력의 다른 이름이다. 어둠이 없으면 빛 자체도 의미가 없듯이 스트레스는 인생의 활력소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변화를 싫어하고 타성대로 살고 싶어 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과 문명의 이기에 적응에는 다소간에 스트레스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타이프라이터에서 컴퓨터,필름카메라에서 디자털 카메라, 지도보기에서 내비게이터, 삐삐에서, 간단한 핸드폰을 거처 스마트폰과 같은 문명의 변화에 적응하여야 하는 테크노 스트레스를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렇게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속성은 현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관성이라는 뉴턴의 제1 법칙의 관점에서 볼 때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싫어하는 속성이 치매를 야기 시키는 정신적인 원인된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평소 자기가 생각 하던 것 또는 좋아 하던 것 이외의 정보는 간과하고자 하는 경향이 높아진다. 쉬운 예를 들면 평소 '3'이라는 수자를 선호하거나 집착하던 사람은 옆에서 '4'라는 수자를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4'가 아닌 '3'을 이야기하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이가 들어 사고의 경직에서 오는 치매증상의 일부이다. 붉은 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색깔에 관계된 것이면 가급적 붉은 색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여진다.
21세기의 격심한 변화의 와중에서 자기가 가진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수하고자 하는 중장년의 정당한 노력은 때론 그들에게 정신적인 치매의 원인이라는 변화의 거부라는 치명적인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반대로 문명이기에 적응하려는 노력은 때로는 역동적인 삶을 제공하여주기도 하지마는 때론 기계적인 삶속에서 자신을 예속시킴으로써 자유자재한 영혼을 가진 삶에 손상을 줄 수도 있다. 이와같이 스트레스에 야기되는 제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변화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의 문제에는 중용의 미덕과 같은 조화로운 균형감각이 요구되며 이것은 각자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장동순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