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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마이 프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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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목요일 저녁, 우리 가족은 이 곳에서 알게 된 몇 명의 외국인들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네팔에서 유학 온 청년 라훌과 크리슈, 그리고 미국인 빌 목사 가족(빌 목사와 부인, 딸, 그리고 노아라는 이름의 세 살짜리 손자)과 마이클이 그들이었다. 빌 목사는 그 전에 우리 가족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는데, 지난 목요일 우리 집에서의 모임은 그에 대한 답례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모임은, 실질적으로는, 그 동안 우리 가족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사례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아니, ‘답례’니 ‘사례’니 ‘도움’이니 하는 딱딱한 말을 반드시 써야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 모임은, 진짜로는, 그 동안 우리 가족과 친해진 사람들을 불러서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자는 것이었다. 우리 작은 아이의 ‘내가 미국에 와서 좋아하게 된 사람들’의 명단에는, 손순 목사가 1위로 올라있고, 마이클이 2순위, 빌목사가 3순위로 올라있다. 그리고 0순위가 있는데, 그것은 노아다.
내 명단도 대동소이하나 내 명단에서는 마이클이 1순위거나 0순위다. 마이클은, 그 날 우리 집에 초대된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제일 나중에 알게 된 사람이다. 우리 큰 아이가 학교에서 우연히 크리슈(21세)를 알게 되었고, 크리슈를 통해 그 선배인 라훌(30세)을 알게 되었는데, 라훌이 우리 가족에게 빌 목사(70세)를 소개해 주었고, 또 그 얼마 뒤에 마이클(60세)을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빌 목사와 마이클은 네팔과 인도, 중국 등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도와주고 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도와주지만, 특히 메트리스를 기증받아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자주 하여, 그 양반들의 트럭에는 항상 헌 메트리스가 실려 있다. 우리도 마이클에게서 메트리스를 하나 얻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이클에게서 받은 큰 도움은 따로 있다. 마이클은 1시간 반 떨어진 헌츠빌 인근의 양소령 집까지 트럭을 몰고 가서 트럭과 트레일러에 가득히 짐을 싣고 우리 집까지 와주었다. 마이클이 없었으면, 나는 트럭을 임대하여 벌벌 떨면서 손수 트럭을 몰았어야 한다. 짐을 제대로 실을 수나 있었을까? 마이클은 이삿짐 센타 인부처럼 양소령 집에서 등짐으로 짐을 꺼내왔고 또 자동차에 차곡차곡 실었다. 짐이 상당히 많았다. 큰 침대와 8인용 식탁과 의자, 큰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 책상과 책장, 컴퓨터 책상, 테이블 두 개, 텔레비전과 텔레비전을 놓는 테이블, 프린터, 선풍기, 스탠드 두 개 등등. (도합 1,600달러.) 우리 집에 도착해서는 짐을 푼 후 나를 재쳐놓고 짐 하나 하나를 집 안으로 날라주었다. 이 양반은, 도와주기로 작정하였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줘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내 침대를 마련할 때도 그랬다. 나는 허리가 좋지 않아 메트리스에서는 자지 못한다. 한국에서도 돌침대를 썼다. 마땅한 침대를 구하지 못해 마룻바닥에서 자던 중 나는 한 쓰리프트 샵(중고 물건 상점)에서 나무 침대를 발견하였다. 나는 일단 물건 값을 지불해 놓고 마이클에게 전화하여 물건을 실어다 줄 것을 부탁하였다. 마이클이 날라 온 침대에 누워보니 보기와는 다르게 바닥이 울퉁불퉁하였다. 나는 그런대로 쓸 만하다고 말하였으나 마이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이클은 나를 태우고 목재상에 가서 합판을 산 후 자기 집에 가서 전기톱을 가져 와 적당한 크기로 합판을 잘라주었다. 그것을 침대에 올려놓으니 나에게 안성맞춤인 침대가 만들어졌다.
2
한 달 쯤 전의 일인데, 나는 마이클을 따라 자폐증 등의 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수용된 시설을 다녀왔다. 강당에는 장애인 50 여명이 모여 있었다. 마이클은 그들을 상대로 공연을 하였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마이클이 빠르고 신나는 노래, 예컨대 CCR의 Proud Mary나 Elvis Presley의 Hound Dog 등을 부르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춤을 추며 즐겼다. 마지막 곡목은 Amazing Grace였다. 공연 시간은 한 시간이었다. 마이클은 한 달에 한번씩 이 곳에 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1주일에 한 번씩은, 몸을 쓰지 못하는 중증 장애자들을 찾아가 봉사를 하고 온다고 말하였다. 마이클은 ‘너싱’(nurs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거기에는 대소변 보게 도와주고 목욕시키는 일도 포함되는 것 같다. 나는 그 곳에도 따라가 보고 싶다고 말하여야만 하였지만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공연이 끝난 후, 1 시간 동안이나 땀을 흘리며 열창한 마이클을 위하여, 그가 좋아하는 일식집 ‘이치반’(一番)에 가서 점심을 사주었다.
나는 마이클의 도움을 받는 한 편, 이렇게 그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그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는, 물론, 어째서 생면부지의 외국인들을 그토록 열심히 도와주고, 접촉하기에 불편한 장애인들을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니는지를 질문하였다. 마이클은 그 일이 자기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고, 자기가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기 그 일을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마이클의 팔뚝에는 타투 문신이 새겨져있다. 한 쪽 팔뚝에는 예수가 그려져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머리에 단검이 꽂힌 뱀, 아니 뱀 머리에 꽂힌 단검이 그려져 있다. 뱀은 자기 속에 웅크리고 있는 마귀를 상징한다고 한다. 마이클은 “나는 평생에 걸쳐 여러 마리의 뱀을 잡았다.”고 말했다. 마이클은, 4년 전만 해도 자기는 나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빌 목사 부인에게 마이클을 안지 얼마나 되었냐고 물어보았더니, 4년 쯤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마이클은 대단히 지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유모어가 넘치는 사람이고 명랑한 사람이며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다. 지난 목요일 저녁 우리 집에서 식사할 때, 마이클은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김치와 미역 무침 등을 맛있게 먹었다. 와이프는, 마이클은 잘 먹어주리라고 예상했다고 말했다. 마이클은 내가 더듬거리며 말하다가 마땅한 용어를 찾지 못해 한 참이나 시간을 끌어도 끝까지 기다려준다. 마이클의 사진을 본 내 동생은, 마이클을 가리켜, 켄터키 프라이드 할아버지의 동생쯤되게 생겼다고 말했다. 이 말을 마이클에게 해 주었더니 아주 흡족해하더라. 할로윈 데이(10월 31일)이 지나면 마이클은 면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때 산타 할아버지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전기 기술자로 오래 일했는데, 주로 TVA(그 유명한 테네시 강 개발 사업)에서 일했다고 하며, 한 동안은 병원에서 응급조치사로 일한 적도 있다고 한다. 60년대 말에서 70년 대 초에 걸쳐 4년간 월남전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기타를 친 것은 40년이나 된다고 한다. 기타 연주 실력도 세미프로에 가깝고, 목소리가 힘이 있고 윤기가 흐르는 등 가창력도 상당하다. 자기가 작곡한 블루스 풍의 연주곡을 들려 준 적도 있다.
마이클의 집에 가서는 여러 가지로 놀랐다. 널찍한 워크 샵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다양한 공구와 그 공구로 만든 수많은 물건들과 목재, 철재의 재료들이 가득하였다. 차고에는 2인용의 컨버터블 승용차가 놓여있었다. 마이클은 그것을 가리키면서, 저것은 내 장난감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멋진 오토바이가 있었다. 할리-데이빗슨이었다. 마이클이 준 명함에는 ‘기독교 오토바이인 협회, 북서 알라바마 지역 대표’라고 쓰여있다. 자기는 이 협회에서 중령 급의 지위에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체로키 인디언의 ‘눈물의 행렬’(trail of tears)을 오토바이로 재연하는 큰 행사를 이끌었다. 혼자 살지만, 이런 식으로 바빠서, 집에 전화를 해 보면 항상 자동응답기가 나온다. “마이클입니다.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듯, 저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3
마이클은 도움을 좀 주었다고 해서 상대를 아래로 보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니까 자기에게서 도움을 받은 유학생들과 마치 가족처럼 친밀하게 지낸다. 마이클은 나도 그렇게 대해준다. 그러나 마이클과 나 사이에는 그 이상의 특별한 것이 있다. 그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이렇게 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내 쪽에서도 그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지난 주 목요일, 사람들 앞에서 “영태와 나는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타와 군대가 그것이지요.”라고 말하였다. 언젠가, 나도 33개월 동안 군대에 복무했다고 하자, 그는 보직과 지역 등을 꼬치꼬치 물으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나는 미국에 와서 군대 이야기에 열을 올리게 될 줄 몰랐다. “Michael, I was a soldier of radio communication in field artillery, 105 MM. I was young.” (“마이클, 나는 포병 대대의 무전병이었어요. 105MM 말이야. 그 땐 젊었지.” -- 맞게 말했나?) 그리고 여기에 와서, 그 동안 놓았던 기타를 다시 잡게 될 줄 몰랐다. 내가 마이클 집에서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기타로 반주하면서 부르자 그는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나에게 기타 한 대를 일 년 동안 임대해 주었다.
물론 기타와 군대가 전부는 아니다. 기타와 군대 때문이건, 또 다른 무엇 때문이건, 나는 그와 통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말이 통한다. 그리고 말이 통하게 해 주는, 무슨 교감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이러한 통한다는 느낌 -- 왜,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러한 미묘하고 특별한 느낌이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마이클이 나에게 도움을 많이 주어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마이클은 경건하면서도 유쾌하게 사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통한다는 느낌은, 그러한 생각과는 구별되는, 전혀 다른 것이다. 빌 목사와 네팔 청년 라훌도 나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으며 또한 훌륭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그 분들에게서는, 통한다는 느낌, 즉 친구라는 느낌을 느끼지 못한다. 마이클은 어째서 그런 미묘하고 특별하며 인생에서 대단히 소중한, 그러한 느낌을 나에게 주는 것일까? 기타와 군대 이외에도 연령과 문화 등 공유하는 것이 많기 때문일까? 혹은, 마이클이 자기 속의 뱀을 고백할 정도로 솔직하게 나오고, 나는 나대로 그러한 고백에 응답하곤 하기 때문일까? 나는 마이클에게 내 이름자 ‘영태’(永泰)는 ‘long peace(pax, shalom)’를 의미하지만 내 내면은 별로 태평하지 못하다고 말하였다.
물론 그 양반과 나 사이에는 차이점도 많다. 종교에 있어서도 그렇고 -- 마이클은 예수 이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 국가나 정치에 있어서도 그렇다 -- 마이클은 북한이 언제 공격해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남한 사람들은 너무 무감각하다고 말하였다. 사실은 그의 군대 생활과 나의 군대 생활도 크게 다르다. 나의 군대 생활은 낭만적으로 기억됨에 비하여 베트남에서 겪어낸 그의 군대 생활은 그에게 후유증까지 남긴 것 같다. 기타도 그렇다. 내가 비틀즈 쪽이라면 그는 엘비스 쪽이고, 내가 포크라면 그는 락이고, 내가 손가락을 사용한다면 그는 피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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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이클이 싼타 할배 같기도하고 민형이 블로그에 있는 포대화상 같기도 하고..여튼 참 고마운 이웃이다 어딜 가던 이런 착한 사람들 땜시 세상 살맛이 나나보다..영태는 복도 많아요~~ ㅎㅎ
'마이클'을 만나 미국 생활에 더욱 활력이 있겠구나. 여러가지 많은 추억거리 만들어 오시길~
마이클 이 양반, 오늘도 우리 집에 다녀갔는데, 아무리 외국인이라고 해도, 묻지도 않고 그에 관하여 이렇게 써도 괜찮은지 모르겠네. 그 양반에게 고백해야 하겠어.
조 교수께서는 예전 실력으로 기타를 한 번 쳐보여줬겠지요? 그 사람들이 코리아 원더풀! 하면서 눈동자를 크게 굴리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을 것 같은데 ^_^
재능이 많은 친구네~ 고물 자동차 사다가 오래 동안 창고에 두고서 하나 둘씩 고쳐서 자랑스레 타고 다니는 핸디맨이구만. 미국에서 골프장 가보면 이야기 꺼리가 많은데 쩝~
이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들과 같은 노래를 듣고 자랐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더라. 핸디맨 맞아. 픽크도 미끌어지지 않게 한다면서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서 쓰고 기타에 피크 집을 만들어 붙이고...... 골프장?
어젯밤 강국에게서 영태전화번호 받고도 너무 늦어서 전화를 못했다.. 오늘 해야 겠구먼...영태같은 친구를 둔 마이클의 기쁨도 이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