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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열남궁문 현조(顯祖)대제학(大提學) 諱. 璨公을 조명합니다.
璨 顯祖 南宮 璨公은 * 대제학(大提學).* 이조판서(吏曺判書). *제주목사.*강원도 감사(관찰사).贈職^ 吏曺判書.^홍문관.예문관 大提學.^都摠管 .職 받았다.(族譜 記錄)
👉연산10년6월1일(유순.허침.박숭길.김감.등에 명하여. 이극정.유제. 장순손.남궁찬을 국문케하다.
👉((1504년6월1일(강원도관찰사) 현직에서~~^
👉참고 문헌
1,조선왕조실록.
2, 연산군실록 (편)
3,(증직 ) 중종실록
4, 함열남궁씨 족보
갑자사화로. 👈
🤔😒😔😭😫😤 함께 국문 당한 동네친구. 👉장순손을
(1457~1534) 주목하세요,👈
중종반정 성공(1506년9월1일)
後의. 역사를 조명할께요:: 璨公. 아들을 조정에. (요직)추천한 사람입니다.(후견인?)
😄😄璨公) 이력서?😄😄
출생~1452년9.27일~1504년6월1일 이후. 용안유배? 卒년대는~~ 1506년9월1일. 중종반정 성공 以前.
1506년 11월 11일 경. 증직
이조판서. 대재학 (정2품):중종반정 성공後 👉👉(族譜와. 卒 년대가 차이. 있습니다. 연구 할 문제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단종~중종까지
관직 이력 입니다👈👈
1. 성종8년(1477,2,20)26세. 생원(춘당시.대과 장원)
2,성종20년(1489,10.3)기사관 (정9품)
3,성종20년(1489,12,29) 검열(정9품)
4,성종24년(1493.1.8)이조좌랑(조정실무)정6품
5,성종실록. (봉정대부.의정부사인지제교 겸 승문원. 교감()(성종실록 297권)
6, 연산 1년(1495.6,17)사간원 헌납.
7,연산1년(1495,7,11)부교리 (종5품)
8,연산1년(1495.12.9)홍문관 교리 (정5품)
👉연산3년(1497,12,21) 시상 아마 한필씩받다.
9,연산4년(1498,72)남궁찬을 부응교로(종 4품)제수하다.
10, 연산8년(1502 ,3,11) 제주목사(정3품=堂上) 귤과 유감을 진상하도록하다.
👉👉👉👉*부제학(정3품=堂上)보여야 할 곳에. 안보이네요👉(제주목사의 임기는. 30개월 였다.?👈👈👈👉👉
11,연산 10년(1504,5,28) 강원도 감사(관찰사: 종2품)제수하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편))
12,연산10년(1504.6,1)이극정.장순손.남궁찬 국문하다.
~~조선왕조실록 기록~~~
👉👉👉이후 장형 맞고 익산시 용안면 (창리는=현재 (용두포구 입구 금강변)으로 낙향(?)하고. 後. 卒. ? 년대 미정이지만. 중전반정 後에 卒? 이유. 국정에 등과하라는 것을 거절했다는 구전이. 선조님들에게 전해 오고 있습니다.
👉👉중종반정 1506년9월1일
13, 중종1년. (1506,11,11)
죽은 안양군등에게 재물하사. 치제를 명하다.
이때 贈職. 이조판서. 대재학 (정2품)(중종실록에 보입니다.
^~~~^~~~^~~~^~~~^~~
👉👉 장 순손
동내 친구이고 관직은 (1계)아래 였고 갑자사화 때 곡문 함께 받고 변방으로 쫒겨나서 살아 돌아와 중종 조에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우승지.전라도 관찰사.이조 참판. 우참찬.호조 판서. 병조 판서.판의금 부사.우의정.영의정을 조명 할 예정입니다.
익산시 성당면 갈산리. 목사동
관찰사.(대제학) .이조판서 자헌대부(下)="上(정헌대부로)=정2품) .가선대부(下)=上(가정대부로).=(종2품) 묘소 전경입니다.
목사동 비문에 기록된. 성균관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이조판서. 자헌대부.가선대부 비문
조선시대 문신 정2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키워드
👉자헌대부
내용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산계(文散階)의 품계인 정헌대부·자헌대부가 제정되어『경국대전』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정2품에 해당되는 관직으로는 우참찬·지사·판서·판윤·대제학·세자좌빈객·세자우빈객·도총관·제조 등이 있다.
▶️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초기(朝鮮初期) 양반(兩班) 연구(硏究)』(이성무,일조각,1980)
▶️집필자
집필 (1995년)이성무. (인용)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헌대부(正憲大夫))]
▶️▶️영감( 令監)과 ▶️▶️대감(大監) 차이
.목사동 찬 공 호칭을. 어떻게 부를까요 ?
1,국왕의 존칭 = 상감
2.정1품.종1품.정2품(판서.대제학)=대감
3, 당상관 =종2품. (강원감사 : 관찰사)정3품 = (제주목사. 부재학)= 영감
중종반정으로 복권 贈 이조판서. 대재학. (함열남궁씨 대동보 기록)
어떻게 부를까요,
配. 명칭. 정부인에서. 정경부인입니다,
함께 연구해요
익산종친회 南宮 吉. (교리공)
함열남궁씨 본향인 익산시. 성당면 갈산리 산66번지. 현조 남궁찬공 묘소와 신도비문.
1976년 병진간에 기록된. 현조 남궁찬公 예문관.홍문관.자헌대부 대제학.이조판서..관찰사.가선대부. 남궁 찬公은. 아들4형제.
장남 高敞公(필) 차남 縣令公(익) 삼남判尹公(숙) 사남習讀公 (설) 칠 從兄第. (참봉공.교리공.대사성.지평공.연안공.승지공.모현공 분들이 파조를 이루시다.
참고사항
갑자사화 란
(甲子士禍)
갑자사화의 원인
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1479년(성종 10) 폐출(廢黜)되었다가 1482년 사사(賜死)되었다. 윤씨가 폐출 사사된 것은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정숙의(鄭叔儀),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한편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그는 공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任士洪)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때 폐비윤씨의 생모 신씨(申氏)가 폐비의 폐출·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 것이다.
갑자사화의 경과
연산군은 정·엄 두 숙의를 궁중에서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보냈다가 사사하였다. 그의 조모 인수대비도 정·엄 두 숙의와 한패라 하여 병상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그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폐비 윤씨를 복위시켜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權達手)·이행(李荇)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보냈다. 또한 윤씨의 폐출과 사사에 연관된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을 극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의 명신거유(名臣巨儒)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이 외에도 홍귀달(洪貴達)·주계군(朱溪君) 등 수십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갑자사화의 결과
이 사건은 표면상 연산군이 생모 윤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벌인 살육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연산군의 극에 달한 향락생활과 사치로 인해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자 이를 제어하려는 신하들과 연산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신장하려는 신하들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궁중세력(宮中勢力)과 훈구 사림파 중심의 부중세력(府中勢力)으로 나뉘게 되었고, 임사홍이 이러한 구도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임사홍은 무오사화 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인 궁중세력의 신수근(愼守勤)을 끌어들여 부중세력의 훈구파와 무오사화 때 남은 선비들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꾸몄던 것이다.
갑자사화의 평가와 영향
갑자사화는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화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연산군의 비행과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榜書事件)이 발생하자 글을 아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옥사를 벌였고, 이를 계기로 한글서적을 불사르는 등 이른바 언문학대(諺文虐待)까지 자행되어 이후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연산군의 계속된 실정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모색하는 사람들에 의해 중종반정(中宗反正)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양세력의 권력다툼
증종반정 이란
1506년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본문
1506년(연산군 12)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成希顔)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朴元宗)이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낸 사건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愼言牌)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宴樂) 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이에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 폐위를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申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면서 거사에 차질을 빚을 뻔 했으나 호남지역에서 연산군 폐위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이 무사를 훈련원에 규합하였다. 그들은 먼저 궁금세력(宮禁勢力)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영(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2일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중종반정의 결과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나 반정 공신들에 의한 전횡이 이어지면서 근본적인 제도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顯祖. 大提學 公. 諱. 璨.
1, 출생 =1452년 9월.27일생
2, 직위= 관찰사(강원도)=(연산10년.5월28일(1504년)
3, 심문 =연산 10년 6월 1일(1504년) 심문 (곤장. 00대 맞고)
이후 용안으로 유배 오심,
5, 중종반정 박원종. 성희안.신윤무 등 성공 (연산12년. 1506년. 9월1일)
1506년 9월2일 중종 (진성대군 )왕위 계승
6, 1976년 병진 刊.
P (凡)=66~67쪽
👉👉용안유배~6년 卒하니 연산9년 1503년이요. 52세시다.👈👈 족보. 년대가. 조선왕조실록과. 안 맞아요?
👉👉반론. 증거
1, 첫번째 =연산10년(1504년 5윌28일 남궁 찬을 강원 감사로.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53권 기록있고)👈👈
2,두번째
연산군 10년. 6월1일 남궁찬 등을 국문하다 .
👉👉 연구결과. 최소한. 1504년. 6월1일 국문 받고. 용안 유배되었으나. 卒年 代는 구전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국정에 등과하시라는 청원을 사양했다는 선조 님에게서 들었습니다. 깊이 연구하고 진정으로. 토론하게요.
璨公 (최종직위) =관찰사(종2품) =贈職 =대제학.이조판서(정2품)
참고 문헌
검색=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1, 조선왕조실록
2, 연산군일기
3,중종실록
4, 함열남궁씨 대동보
5,두산백과
6,익산시 성당면 갈산리 목사동. 비문 글
7,남궁찬 인터넷. 글
글 ,
익산. 종친회장. 교리공. 정편. 남궁길.
신도비를 관찰합니다.
목사동 신도비에는 원청公 직위가. 문하시랑 평장사 (정2품)으로 기록되여있고. 보령. 원청公 비문에는 문하시중. (종1품)기록되여 있습니다.
👉門下侍中(종1품)은= 고려에서는 성종 1년에 처음 도입하여 성종 8년 최승로가 죽기 직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문종 때는 정원을 정하고 품계를 종1품으로 정했다. 고려에서는 현직 관료로서 실무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품계는 종1품이었다. 정1품은 불교의 대사가 임명되는 국사(國師)와 같이 지위에 가까운 명예직이 받는 품계였다. 정1품 관직은 삼사와 삼공 같은 명예직뿐이다.
목사동 신도비에. 원청 公은 품계(직위)을 門下侍中(종1품)을 낮은 직위 門下侍郞(정2품)= 평장사(정2품)로 기록했습니다.
또. 찬公. 직위는. 목사동 신도비에. 大提學.이조판서 (정2품)인데. 찬公. 墓. 비석은 부제학(정3품) 참판. 등. 낮은직위를 기록했습니다.
낮은 직위는 정부인 (신씨)이고. 높은 직위는 정경부인입니다.
[출처] 현조(顯祖)대제학(大提學) 諱. 璨公을 조명합니다.| 큰소나무
[출처] 함열남궁문 현조(顯祖)대제학(大提學) 諱. 璨公을 조명합니다.|작성자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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