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거노믹스의 창시자’ 아서 래퍼가 움직인 지도자들]
◇ 레이건 前 대통령의 재정정책
1980년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경선 당시 로널드 레이건 후보는 감세(減稅)를 골자로 한 경제 공약을 내놓았다. 적극적인 감세 정책을 펼치면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고 고소득층은 소비를 늘려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이 요지였다. 당시 40세이던 경제학자 아서 래퍼는 "세율을 높이면 처음에는 정부의 세금 수입이 늘어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감소한다. 세율이 높아지면 기업과 고소득층이 투자를 포기하거나 해외로 떠나기 때문"이라며 레이건 후보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공급 중심의 경제정책인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한 당시 미국은 오일 쇼크 이후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으로 경기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정부 자체가 문제다"라며 거대한 정부가 불황의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실제로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민주당) 대통령의 뉴딜정책 이후로 1950년대 '풍요한 사회'를 거치면서 미국 정부는 비대해졌다. 미 정부는 복지정책 시행 등을 위해 무거운 세금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개인과 기업은 투자를 방해받아 결국 경제가 침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레이건 대통령은 본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의 감세 주장에는 개인적인 경험도 한몫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배우 시절 자신이 번 돈의 90%를 세금으로 낸 적이 있었다. 세율이 지나치게 높다 보니 배우들은 영화를 한두 편 찍고는 일을 그만두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레이건 대통령은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28%로, 법인세율은 48%에서 34%로 대폭 낮췄다. 과거 민주당 정부가 추진했던 '풍요한 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연방예산도 삭감했다. 기업에는 투자비 세금 공제와 감가상각비 손비 허용을 확대해 투자 활성화를 유도했다. 기업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도 철폐했다.
♧ 감세와 금리 인상으로 성장과 물가 잡아
레이건 대통령은 감세 정책과 더불어 금리 인상도 단행했다. 전임 지미 카터(민주당) 대통령 시절 10.8%에 달하던 연간 평균 물가 상승률을 잡기 위해 금리를 단기간에 급격히 인상, 물가상승률을 3분의 1 수준인 3.8%로 낮췄다. 이러한 종합적인 경제정책 덕택에 재임 기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7%에서 3.5%로 높아졌다. 1984년 경제성장률은 7.26%에 달하기도 했다. 실업률은 1980년 7%에서 1988년 5.4%로 낮아졌다. 감세에도 세금 수입은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미국 세금 수입 총액은 1980년 7307억달러에서 1988년 1조3342억달러로 증가했다. 감세는 정부가 사용할 재원의 축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작은 정부'와 동의어로 통한다.
레이건은 루스벨트 이후 시행해 온 '큰 정부' 정책을 접고 작은 정부로 향했다. 간섭보다는 자유, 집단보다는 개인, 분배보다는 성장, 의존보다는 자치를 강조했다. 미국이 이러한 방향으로 가면 미국 국민 모두의 자유가 보장되고, 미국이 또다시 번영하는 나라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 시절 요동치던 경제를 안정시키고 1990년대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의 장기 호황 토대를 낳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비판도 있다.
그의 재임 시절 8년 동안 소련과의 군비 경쟁 때문에 국가 채무가 9090억달러에서 2조8679억달러로 3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 부유층을 위주로 한 감세 정책으로 빈부 격차를 확대시키며 사회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소득세율 대폭 인하·공기업 민영화로 ‘영국病’ 잡아]
◇ 대처 前 영국 총리의 재정정책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정책 철학은 대처리즘(Thatcherism) 이라고 불린다. 초대 총리 로버트 월폴 경부터 현재 데이비드 캐머런에 이르기까지 영국에서 배출된 57명의 총리 중 이름 다음에 ‘ism(주의)’이 붙는 유일한 총리이다. 한때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표방했던 영국의 경제와 사회 복지 모델은 전 세계적으로 칭송을 받던 모범 정책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조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한 지속적인 임금 상승, 그리고 생산성의 저하로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하여 소위 고복지·고비용·저효율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영국병(病)’에 시달렸다. 물가 상승률은 20%를 넘어섰고, 영국 국가 재정에서 복지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50%에 육박했다. 1960~1970년대 영국 근로자의 1인당 생산성은 미국보다 50% 낮았고, 서독보다 25% 낮았다. 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60년대에 세계 9위였지만, 1971년에 15위, 1976년에 18위까지 급격하게 추락했다. 급기야 1976년에 국제통화기금(IMF)의 금융 지원을 받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