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어떤 자료를 찾기 위해 오랜만에 아들방에 있는 서가를 뒤졌다.
그러다 예상치 못했던 '황화일' 하나를 발견했다.
"와우. 이게 여기 있었어?"
무지 반가웠다.
거의 20여 년 전의 아주 오래된 아이들의 '독후감 모임집'이었다.
아이들 초등학생 때, 매달 한 권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작성했다.
그리고 그걸 발표하며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공유했었다.
몇 년 간 진행했던 우리 가정만의 또 다른 시스템이었다.
'가족 독서 토론회'
물론, 강압적으로 했던 건 아니었다.
최대한 즐겁고 재미있게 진행했다.
진행자였던 나도 매달 한 권씩 읽고 아이들과 동일하게 독후감을 작성해 발표했다.
아빠라고 해서 특혜나 예외가 있을 수는 없었다.
예외나 변수가 용인되는 순간 우리가 상의해서 결정했던 '시스템'엔 균열이 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지사였다.
나는 '독서 토론회'의 리더였기에 더욱 각근하게 내 자신을 통제하려 노력했다.
아무리 직장생활이 바쁠지라도 매달 세째주 수요일 밤, 가족 독토회 진행은 절대로 빼먹지 않았다.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그 당시 초등생이었던 아이들에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은, 독토회 그 자체보다 바로 이 점이 더욱 중요한 교육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애들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우리 부부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대로 실천했다.
독토회 뿐만 아니라 영화후기, 여행후기, 예상에 없던 주제선정 후 작문하기, 꿈과 비전노트 작성하기 등등 매번 진행양태와 주제를 달리했다.
언제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의 의견과 주장을 경청하려 애썼다.
'가족 독서 토론회' 시간이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란 것을 아이들이 스스로 체득하기를 바랐다.
그런 '황화일'이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주 오래된 자료 모음집을 펼쳤다.
오랜 세월 고이 잠들어 있던 타임캡슐이 긴 잠을 깨고 열리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벙글어졌다.
숱한 글들이 있었지만 3페이지에 있던 '나의 결혼관'이란 딸의 글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마도 그 때 그 날, 작문시간에 예상에도 없던 이런 주제를 내걸었던 모양이었다.
지금 서른두 살인 딸이 초등학교 5-6학년 때였다.
그 때 그 시절, 꼬마숙녀의 솔직한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내용은 이랬다.
주제 : 나의 결혼관.
예전부터 나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결혼에 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참에 한번 점검해 볼까 한다.
먼저 나는 결혼을 최대한 늦게 하고 싶다.
왜냐하면 인생을 충분히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결혼을 너무 일찍한 사람들을 보면 남편에게 얽매여 연애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세대는 여자들도 대부분 사회생활을 할 텐데 일찍 결혼하면 집안일과 육아 때문에 자신의 일에 상당한 지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놀거나 여행을 떠나는 데 있어서도 많은 제한이 뒤따를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건강하고 아픈 곳이 없어야 한다.
건강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힘들게 되고 마음도 너무 아플 것 같다.
그리고 두번째 조건은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옛날부터 여행을 많이 다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폐쇄적인 사람을 보면 너무 답답하고 짜증난다.
그래서 내 남편은 꼭 개방적인 사람이어야 하고 소통과 공감이 잘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
또 다른 조건은 예의범절이다.
나는 누구를 만나든 인사를 먼저 건네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내 남편도 먼저 인사를 건네주고, 예의있게 행동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그리고 또 하나 있다.
내 성격이 너무 까탈스럽고 특이한 AB형이라 내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고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잘 웃고 다른 이들에게도 건강한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내가 원래 좀 웃기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 주고 함께 웃어줄 수 있는 그런 착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을 원한다.
내가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멋지고 생경한 곳으로 가고 싶다.
제주도는 많이 가보았으니까 빼고.
또한 나의 자녀 계획은, 나중에 바뀔 수도 있지만, 2명을 낳고 싶다.
내가 2명의 남매로 살아보니 제일 이상적인 가족 같아서 그렇다.
그리고 집안일은 절대로, 네버, 나 혼자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고 있다.
요샌 남자들도 전업주부의 역할을 많이 하고 있으며 옛날처럼 여자들만 가정일을 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아무튼 가정일은 둘이서 꼭 같이 할 것이다.
늙어서는 시골에서 살거나 대도시의 아파트에서 살거나 둘 다 좋다고 본다.
아직 노후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나는 최대한 결혼을 늦게 할 것이고, 아이는 두 명을 낳을 것이며 착하고 유머있는 남편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것이 미래의 내 꿈이자 소망이다.
우하하하.
내용은 여기까지 였다.
보통 독토회 시간은 2시간 정도였다.
자신의 독후감을 읽고 열띤 토론을 하거나, 돌발 주제를 놓고 모두가 작문을 해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생각의 힘, 공감하는 자세, 경청하는 태도, 자신만의 분명한 논리를 세우고 발표하는 습관을 길러주고 싶었다.
또한 어떤 컨셉의 주제나 세상의 이슈에도 바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도 가끔씩 아들의 블로그를 보면, 글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본다.
애들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합의 하에 중단했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가족 독토회'는 사고의 틀을 깊고 넓게 해주었고, 특히나 글쓰기에 대해 즐거움과 가치를 스스로 체득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 재삼재사 감사하게 생각한다.
글쓰기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사랑과 관심의 대상을 '불멸화' 하는 매우 값진 '고행의 작업'이라고 믿는다.
오랫동안 내가 가슴 속에 품어 왔던 나만의 개똥철학이다.
장맛비가 내린다.
폭우가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길이 상당히 미끄럽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아침이다.
오늘도 최고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하며.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와~~ 초딩 5학년 시절에 저런 결혼관이라니.
정말 진징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꼬마숙녀였네요.
최고의 신부감이네요.
현관에서 대기표 검열하느라 아빠가 심심하지는 않을듯 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