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에 대해 답변을 다 하고 나니 약속한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다음 달에도 궁금한 점에 대해 또 대화를 나누기로 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2시부터 다시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추석을 전후로 북한이탈주민들이 함께 모여 온라인 통일축전을 하는 날입니다. 사단법인 좋은벗들에서는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해 매년 통일축전을 열고 있는데,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통일축전이 초기에는 넓은 운동장에서 뛰고 게임하며 시작했는데 코로나 팬데믹 시대 이후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는 행사로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지역별로 스무 개의 장소가 온라인으로 서로 연결된 가운데 큰 박수와 함께 통일축전을 시작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400여 명, 온라인으로 400여 명, 총 800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먼저 추석을 맞이하여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진행된 합동 차례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 속 편지 낭독은 편지를 쓴 동포가 직접 읽으려고 했지만 감정이 북받쳐 다른 분이 대독 했습니다.
“어릴 적 철없이 강하나 넘어간 것이 지금 이렇게 아픈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그 당시는 몰랐습니다. 하루아침에 실종되다시피 연락이 끊긴 딸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엄마의 속 타는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어 너무 죄송합니다. 그 한이 얼마나 깊은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제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추스르고 명절을 그냥 명절로 받아들이고 ‘이것이 삶이구나’ 하고 지난날의 아픔을 흘려보냅니다. 그리운 가족들에게 지금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전합니다.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갈 때마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이어서 본격적인 행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스님이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추석 때 미국에 머물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자 하는 이산가족의 염원을 담은 평양 수목장 사업을 비롯하여 여러 현안들에 대해 미국의 여러 기관들과 협의를 해보았습니다.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설득해 보았지만, 남한, 북한, 미국의 현격한 입장 차이와 급변하는 국제 정세로 보아 현재의 남북 갈등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들은 하루하루가 급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북한은 남한을 핑계로 삼고, 남한은 북한을 핑계로 삼고, 미국은 북한의 핵을 핑계로 삼고, 위정자들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를 핑계로 삼는 가운데,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 교류, 이산가족 상봉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단 이후 70년 동안의 남북관계를 살펴보면, 남북이 전쟁할 듯하다가 판세가 뒤집어져서 통일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금방 통일을 할 듯하다가도 이내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분위기가 좋다고 너무 들떠도 안 되고, 지금같이 분위기가 나쁘다고 너무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하루라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기를
우리의 염원은 고향을 방문하고 가족을 상봉하는 것입니다. 꼭 통일이 안 되더라도 남북 간 자유왕래가 가능해져서 가족을 만나고 서신을 교환하고 어려운 가족을 위해 작은 돈이라도 지원할 수 있게만 되어도 지금 우리에게는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염원하며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6.25 전쟁 전후 북쪽에서 넘어온 실향민도 아니고, 근래에 남한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도 아니지만, 북한이탈주민 여러분들의 아픈 마음을 저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의 한반도 상황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쪽을 바라보며 임진강 망배단에서 차례를 지내는 모습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가족의 아픈 사연을 들으면서 저도 마음이 찡했습니다. 저희 좋은벗들에서는 두만강 건너편 중국에서 북한을 넘어온 난민들을 많이 도왔습니다. 식량과 약을 구하러 잠시 강을 건너왔다가 돌아가지 못하는 사연, 돈을 좀 벌려다가 팔려간 사연, 몇 년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연 등 아픈 사연을 가진 난민들을 많이 만나고 지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행 중 다행인지 한국까지 오게 됐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롭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고향에 있는 가족이 더 안타깝고 더 보고 싶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의 삶입니다. 6.25 전쟁 때 잠시 헤어진 어린아이가 이렇게 나이가 팔십이 되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헤어질 때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잠시의 헤어짐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 팔십이 되어 검은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고향을 그리워만 하다가 돌아가시는 분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이런 사람들의 아픔을 생각해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은 차치하고라도 인도주의적인 만남을 지원하는 대책을 마련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마저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가족을 그리워하지만 여러분의 소망이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우선 지금 이곳에서 좀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 잘 정착하고 생활해 나가면서 언젠가는 가족을 만나고 고향에 돌아갈 날을 준비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생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벗들에서는 여러분들의 안타까움을 다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고향과 가족을 잃은 여러분들에게 좋은 벗이 되어주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통일축전을 통해 하루라도 고향을 느끼고 그리움을 달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4년간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되었지만 내년쯤에는 직접 만나서 고향 음식을 마련하고 고향의 여러 가지 풍속도 재현해 보고 춤과 노래도 함께 즐겨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온라인으로 만나서 좀 아쉽긴 하지만 두 시간 동안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지역별로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구미, 안양, 인천, 서광주 순으로 지역 소개 퍼포먼스가 펼쳐졌습니다. 시작부터 열기가 뜨겁게 달구어졌습니다.
다음은 장기자랑 시간을 이어갔습니다. 서광주 지역에서는 난타 공연이 현장 라이브로 펼쳐졌습니다. 구미 지역에서는 전자색소폰 연주로 ‘작별’ 노래를 연주했고, 대구 수성구에서는 홀로 아리랑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렀습니다.
흥겨운 한마당을 갖고 스님과의 즉문즉설 첫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시 부산 해운대, 포항, 부천, 청주, 일산, 화성, 서울, 동래, 금정, 동대구, 창원 순서로 장기자랑이 이어졌습니다. 댄스면 댄스, 노래면 노래, 북한이탈주민들은 신나는 공연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다시 스님과 즉문즉설 두 번째 시간을 가진 후 마지막으로 장기자랑 시상식을 했습니다. 인기상, 장려상, 우수상, 최우수상까지 한 명씩 호명될 때마다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스님에게 질문하고 싶은 분들도 많았지만 약속한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스님은 하반기에 즉문즉설만 따로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마련해 보자고 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 모두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통일축전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오후 4시부터는 정토회 실무자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다음 주에 정토회를 방문할 예정인 베트남 불교상가위원회 위원장 스님과 일행 분들을 어떻게 맞이하고, 세부 프로그램을 어떻게 조정할지 의논했습니다. 큰스님 일행 분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몇 가지 일정을 조정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오후 6시에는 불교환경연대 2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이 도착하자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인 법만 스님을 비롯하여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정길 님이 반갑게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대기실에서 차담을 나누며 불교환경연대가 그동안 걸어온 길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을 해오셨네요. 감사합니다.”
스님은 얼마 전 부탄을 다녀온 내용을 공유해 주며 지속가능한 개발 모델을 만드는 일을 비롯하여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에코붓다와 불교환경연대가 앞으로도 꾸준히 연대를 해나가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녁 7시 30분이 되어 지하 공연장으로 내려가니 객석을 가득 메운 200여 명의 청중이 스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요술당나귀의 축하 공연을 시작으로 법만 스님의 인사말을 듣고, 불교환경연대가 걸어온 22년의 역사를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이어서 동국대학교 남진숙 교수님의 사회로 ‘대담한 녹색대담’이라는 주제 하에 스님과의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남진숙 교수님이 미리 준비해 온 질문들을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은 어떤 계기로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질문하면서 대담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어떤 계기로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스님께서는 1990년대에 불교환경교육원을 처음 만드셨고, 그 뒤로 에코붓다라는 환경단체를 통해 많은 환경운동을 해오고 계십니다. 당시에도 환경운동이 철저히 생활실천 운동으로 가지 않으면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고, 환경 문제는 결국 어떠한 삶의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실제로 실천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거나 주장하지는 말자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로 정토회에서 생활 속 환경실천 운동을 해오셨는데, 처음에 어떤 계기로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제가 환경문제에 대해 처음 인식하게 된 것은 1980년대였습니다. 당시 제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일이 있었는데, 감옥에서 ‘엔트로피’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 에너지 준위가 계속 낮아진다는 것을 접하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는 노동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등의 민주화 운동이 주류를 이루었고, 환경운동은 아주 초기 단계의 모습을 띄고 있었습니다. 저도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천으로 옮기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회운동을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기 위해 불교사회연구소와 불교사회교육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불교사회연구소는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과제를 불교적 입장에서 분석하고 연구하는 게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설립한 것이었고, 불교사회교육원은 청년들에게 불교적 관점에서의 사회적 실천 운동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설립한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당시 대학생불교연합을 중심으로 진행된 불교 사회운동은 불교 신자들이 사회주의 또는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주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계 내에서 뿌리를 내리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기 사상, 중도 사상, 카스트 제도의 부정, 비구니 제도의 허용을 비롯하여 불교의 가르침 안에도 성평등 사상, 계급평등의 사상, 평화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사회실천 운동이 있어야 불교계에서도 사회운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불교사회연구소와 불교사회교육원입니다.
그러다가 환경문제가 중요시되면서 불교사회교육원을 환경운동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정비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 후반부터 정치적으로 직선제가 실시되고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제는 농민운동은 농민이 하고, 여성운동은 여성이 하고,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이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종교인들은 보다 미래지향적인 운동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환경운동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환경교육원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환경운동 단체가 아닌 환경교육원을 설립한 이유는 개개인의 삶의 자세가 바뀌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봤을 때 환경 위기에 대해 주장하거나 환경운동을 하면서도 개개인의 삶을 보면 전혀 친환경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개개인의 삶의 자세가 바뀌지 않는 한, 즉 개개인의 소비 수준을 줄이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환경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환경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개혁 운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불교환경교육원을 만든 것입니다.
그 후로 생활 실천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꾸준히 실천해오고 있습니다.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한 쓰레기제로운동을 하고 있고, 발우공양 정신을 살린 빈 그릇 운동을 하고 있고, 지렁이를 이용하여 퇴비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서 확산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정토회에서 하는 환경운동은 저항운동이 아니라 실천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실천운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려면 확신이 필요합니다. 최근 외국에 나가서 강연을 해보니까 ‘사람이 정말 소비를 줄이고도 행복할 수 있는가’, ‘그러한 환경운동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부처님께서 그러한 삶을 몸소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자로 태어나고 풍요로운 생활을 했는데, 오히려 자신의 지위와 호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버리고 수행자의 삶을 선택하셨습니다. 밥은 얻어먹고, 옷은 주워 입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잤지만, 늘 고요하고 행복한 삶을 사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 기간 일부만 그렇게 사신 게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만인의 존경을 받고 심지어 왕의 후원도 받는 입장이셨지만 죽을 때까지 그런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기 전 왕궁에서는 시종을 두고 사셨지만, 출가하신 후에는 시종도 없이 자기 몸은 자기 스스로 관리를 했고, 평생 동안 검소한 삶을 이어가셨습니다.
이미 소비주의에 물들어 있는 현대인들의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붓다의 삶을 보면 검소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사는 건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기후 위기를 생각하고 지속가능한 삶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부처님의 삶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운동이야말로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연기사상에 뿌리를 두고, 붓다의 삶을 모델로 하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붓다의 삶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는다면 기후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저는 환경 실천을 해오고 있는데, 물론 그리 쉬운 길은 아닙니다.” (웃음)
계속해서 남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어떤 환경 실천을 지키기가 가장 어렵나요?
“사실 환경운동이라는 게 직접 실천하지 않으면 거의 무용지물이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실천을 많이 해보고 있는데요. 그중에 안 되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대중교통 이용하기입니다. 이게 잘 안 되어서 주로 자가용을 타고 다닙니다. 혹시 스님께서는 생활 속에서 어떤 게 가장 잘 안 되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비닐 안 쓰기가 제일 어려운 것 같습니다. 농사지을 때는 풀이 너무 많이 올라와서 비닐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어요. 또 시장에서 물건을 사서 올 때 보자기나 장바구니 등 여러 가지를 다 써봤는데, 수분이 있는 물건을 담아서 옮길 때는 비닐만큼 긴요한 게 없었어요. 그러나 정토회는 비닐 안 쓰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직접 해보니까 비닐 사용을 줄일 수는 있지만 완전히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잘 분해되는 비닐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닐처럼 부피가 작으면서 수분을 차단하는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닐 안 쓰기 운동을 하고 있지만 제일 안 되는 것도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환경 정책으로 옮겨 갔습니다. 불교환경연대에서는 정부의 환경 정책을 바꾸기 위한 많은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 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떤 제도가 시행되어야 할까요?
“불교환경연대 역시 정토회의 실천 활동을 모델로 삼아 환경운동을 진행해 왔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제도나 정책으로 환경문제를 빠르게 해결할 수도 있고, 그것이 우선 되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와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기후 위기에 대응해서 취할만한 새로운 제도나 정책 같은 것이 있을까요?”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많은 정책들이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건 에너지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원을 태양에너지와 같은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 우선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독일처럼 대중교통을 활성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차, 자동차, 비행기 중에 기차가 에너지를 제일 적게 소모한다는 걸 아십니까? 버스나 자동차를 움직이는데 들어가는 에너지는 기차의 여섯 배에서 일곱 배 수준입니다. 비행기를 운행하는데 드는 에너지는 기차의 삼십 배에서 사십 배 정도라고 합니다. 독일은 이미 대중교통을 거의 무료화했습니다. 고속철도가 아닌 일반기차의 경우 한 달에 오만 원 정도만 내면 무제한으로 쓸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런 정책을 시행하면 사람들이 가급적 전철이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게 되겠죠. 그리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자동차세를 많이 부과하면서 기름값은 점진적으로 올려나가는 방법도 시행할 수가 있겠죠. 왜냐하면 기름값을 갑자기 올리면 서민들이 고통을 겪게 될 테니까요. 우선 에너지를 적게 쓰는 교통망을 먼저 깔아놓고,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사람들이 비용을 더 부담하는 방향으로 정책들이 계속 개발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소비상한제를 시행해야 합니다. 물론 개인의 재산 소유를 제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들을 비롯하여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소비량은 일반인의 수백 배나 수천 배가 됩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이런 행위는 범죄로 봐야 해요. 여러분들은 이런 걸 부러워하죠? 이건 부러워할 게 아니라 사람을 많이 죽인 살인범보다도 더욱 죄악시해야 할 행태라고 봅니다. 재산의 소유는 제한하지 않더라도 소비는 제한하는 ‘소비상한제’와 같은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저도 지금 여기 여러분들 앞에서 약속하겠습니다. 자가용 열 번 타던 것을 우선 다섯 번으로 줄여보겠습니다.” (박수)
남 교수님과의 대담을 마치고 청중석에 마이크를 넘겼습니다. 누구든지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육식에서 채식으로 바꾸고 싶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쉽지 않다며 어떡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채식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육식이 탄소 배출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채식을 하고 싶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회생활도 잘하고 채식도 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육식을 안 한다고 해서 사회생활이 힘들 이유가 있어요?”
“회식을 거의 고깃집에서 합니다.”
“회식을 고깃집에서 한다면 질문자는 거기서 채소만 먹으면 되잖아요. 제가 젊은 시절에 학원 강사를 잠깐 했습니다. 그때는 학원 강사들이 술을 많이 먹었어요. 강의가 끝나면 저녁에 강사들이 어울려서 술을 먹는 문화가 있었거든요. 술자리를 같이 안 하면 왕따가 되거나, 술자리에 가더라도 술을 안 먹으면 엄청나게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해 낸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술은 안 먹더라도 술값을 내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초반에는 술을 권하지만, 나중에는 술을 안 먹어도 술자리에 저를 항상 데려갑니다. 왜 그럴까요? 술값도 내주고 술에 취한 사람을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주는 일도 해주니까요. 그래서 제 친구들의 부인이나 부모님은 친구가 저랑 있다고 하면 안심했습니다. (웃음)
그리고 육식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정하는 것보다는 가능한 한 먹지 않는 것으로 정하는 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고기가 나오면 안 먹고 버려야 하잖아요? 이때는 질문자가 먹어서 소비하든 바로 쓰레기로 처리하든 환경 측면에서는 다른 점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만들어진 음식은 먹지만, 일부러 구입해서 먹지는 않는다’ 이렇게 관점을 가지는 게 좋아요. 이런 정도의 원칙만 지켜도 육류 소비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육식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은 생태적으로 좋지 않고, 인류에게 식량 위기를 불러옵니다. 콜레스테롤이 쌓여서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저는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데 백 퍼센트 유기농을 하려니까 골병이 들 정도예요. 이번에 고추에 탄저병이 왔는데 백 퍼센트 유기농으로 하려다가 결국 고추를 다 뽑아버리게 되었습니다. 일반 농가에서는 약을 열 번 친다면, 우리는 한 번 치는 정도로 했으면 고추를 어느 정도 살릴 수도 있었겠지만, 유기농을 고집하다가 결국 다 뽑아버렸거든요. 그래서 저는 농사도 저농약으로 해야 친환경 농법이 일반적으로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관점에서 백 퍼센트를 너무 고집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가능하면 고기를 안 사고 안 먹는다는 관점을 갖고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제 경험상 회식 자리에 가서 식사비를 질문자가 내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원칙을 지켜낼 수 있어요. 꼭 그들과 똑같이 해야 어울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원칙을 지키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약속한 한 시간 반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불교환경연대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함께 합창하며 22주년 기념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단체 사진을 함께 촬영한 후 스님은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님을 비롯하여 임원단을 격려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묵묵히 환경 운동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나누고 조계사를 출발하여 다시 정토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2차 만일결사, 1차 천일결사 중 3차 백일기도 입재식을 하고, 오후에는 서울제주 지부 회원의 날 행사를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