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칸 한옥을 짓고, 그 한옥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부자일까, 얼마나 많은 노비가 있어야 하나?
99칸 임청각은 서기 1519년 고성이씨 <이명>이 지었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의문시 했다.
99칸 한옥을 지은 이명의 관직 계급은 형조좌랑. 정6품.
요즘의 계급으로 따지면 공무원 5급, 중앙부처의 계장, 읍면동의 면장/동장, 군인 계급인 대위...
이해가 안 되었다.
이런 계급으로는 ... 99칸 한옥 건물을 지으려면 엄청난 재산이 있어야 하는데?
의문이 나서 계속 추적하니...
이들 선계는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관료집안이며, 부자이며, 노비들이....
치산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고려조의 고성이씨 .....
행촌 이암 → 이강→ 이원 → 이증 → 이명 → ..... ... 석주 이상룡(1858 ~ 1932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 고성 이씨 9세손 이암(1297 ~ 1364년) : 고려조.... '단국세기'를 지었다고 알려짐. '환단고기'
10세손 이강(4남 : 1333~ 1368년) :
11세손 이원(1368 ~ 1429년) : 조선조 세종 때 좌의정. 호 용현...
12세손 이증(6남) : 영산현감이 임청각 지역에 자리잡았다.
13세존 이명(3남): 이조 형조좌랑인 이명이 서기 1515년에 임청각을 지었다.
* 위 '이원'이 왜그렇게 부자가 되었는지는?
- 노비.... ... 조금만 발췌...
1417년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와 찬성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1419년(세종 1)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였고, 1421년 1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1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고, 우의정 정탁(鄭擢)과 함께 도성수축도감도제조가 되어 8도의 정부(丁夫) 32만5000여명을 징발, 1422년 1월부터 두 달에 걸쳐 그때까지 토성으로 되어 있던 도성 성곽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1425년에 등극사(登極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하였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박탈당하고 여산(礪山)에 안치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세조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는 고려 말기부터 문명이 알려져 조선 초기에 국기를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중신이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부귀가 한몸에 모이자 지나친 위세를 부려 사람들의 지탄을 받아, 급기야 공신녹권까지 박탈당하고 고독한 귀양생활을 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용헌집》·《철성연방집 鐵城聯芳集》이 있다. 시호는 양헌(襄憲)이다.
또한, 조선조 역사에서 '이괄'의 난이 나온다.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으로 1624년에 반란을 일으킨 '이괄장군'도 이들의 가계 ......
* 이괄의 난
자료를 계속 검토하자니...
<역사는 강자가 늘 고쳐 쓴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느낀다.
우리가 성군으로 알았던 세종, 청렴한 공직자로 알려진 이황 등의 이면을 들춰보기 시작한다.
임청각...
2016년 문 대선 후보가 방문했고,
2017년 문 대통령이 임청각을 방문했고, 임청각 재건축을 약속했고....
- 2020년 12월 16일.. 임청각 앞을 지나던 중앙선 철로는 영원히 멈췄다.
철로를 철거한 뒤에 임청각을 복원할 예정이란다. 그게 다 돈인데...
설마하니 개인/문중 돈으로 지을 것인가?
경기도 광주시 목동 242-3번지
11세손 이원의 묘 뒷의 전경...
인터넷 지도로 검색하니 엄청남 부자... 주변 건물도....
경기도 성남시청 뒷편, 영장산 뒷편에 있는 곳이다.
임청각의 가계도....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 석주 이상룡(1858 ~ 1932년) 가문..
네티즌 각자가 알아서 더 확인해야 할 듯...
▶'단군세기' 의 저자 행촌 이암의 손자 이원과 세종대왕 (이형모 재외동포신문 발행인,역사연구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10월 3일, 전년에 수문하시중으로 은퇴한 ‘이암’은 ‘단군세기’를 집필하고 이듬해 5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이암의 4남 이강의 외아들인 ‘이원’은 태종 치세에 우의정으로 세자의 스승이 되고, 세종 즉위 다음날 다시 우의정으로 제수되고 그 다음날 세종은 이원을 보내어 종묘에 ‘즉위신고’를 한다.
그런데 이암의 ‘단군세기’에는 ‘3세 단군 가륵 때에 경자 2년(BC2181년)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짓게 하고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림토와 훈민정음의 자모를 비교하면, 훈민정음의 28자모는 가림토 38자모에서 ‘ㄷ,ㅌ’을 제외한 모든 글자가 같은 모양이다. ‘옛 글자’는 가림토인 것이다.
세종 7년에 ‘세종대왕은 평양에 단군사당을 짓게 했다.’ 유교국가의 임금인 세종에게 ‘단군왕검이 국조’라는 확신이 생긴 경위는 무엇일까? 조부 ‘이암’이 집필한 ‘단군세기’를 우의정 이원이 임금에게 바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같은 책에서 ‘가림토’를 보고 훈민정음 연구에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림다와 가림토로 다르게 표현된 까닭 (송호국 선생)
단군세기 - 가림토
태백일사 - 가림다
만약 사서를 조작했다면 한가지로 동일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단군세기나 태백일사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는 물론 신지문자나 가림토가 원시한글 이었다는 증거까지 나온다. 그 이유는 여기서 관과하지 못할 것은 '가림토'의 '土'와 '가림다'의 '多'의 다른 표현이다. 이는 대쪽같고 비교 분석을 좋아하는 십일당 주인 이맥 같은분이 무조건 자기 선조 행촌 이암선생의 단군세기를 배척 하거나 무조건 베꼈을 리가 만무하고 토(土)를 다(多)로 잘못 기록 했을리도 없다.
그러므로 이는 행촌 이암이 참고한 '가림토' 라는 기록 이외에 십일당 주인 이맥이 참고한 '가림다' 라는 기록이 또 있었다는 이야기이며 그렇다면 어느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인데 단적으로 말하면 이는 같은 말이고 여기서 우리 글자의 창제 과정과 우리말을 한문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우리말의 뿌리나 우리말이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을 행촌선생 이암이나 십일당주인 이맥이 연구했을 리가 만무하니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자가 각기 다르게 전해 내려오는 기록들을 그저 그대로 인용했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토'와 '다'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 문자 생성시기, 그리고 우리글이 한자에 밀리는 경위를 추정할수 있고 따라서 단군세기나 태백일사는 물론 환단고기 까지 간혹 가필은 있을망정 위서는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즉 이런 말이 위서가의 작품 이라면 가림다건 가림토건 한 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출처: https://jsdian.tistory.com/3826 [우주포탈]
'한국 국보문학" 카페 <세상사는 이야기 방> 2762번 ...
<임청각>
<이괄의 난>
<단군세기>
<원이 엄마>
등 엄청난 이야기가 있는 가문이다.
단군세기(고려조 서기 1363년)에 이암이 지음
행촌 이암의 3대 저서 가운데 하나.
'단군세기, 태백진혼, 농상집요'
"원이 엄마"
.... 420년 전의 미라 발견....
서기 1586년(병술년) 31세로 일찍 죽은 '이응태(1556~1586년)'의 미라(유골)에서...
머리카락에 묶은 미투리와 한글 편지 발견
- 안동시 택지개발 지역 무덤 이장 중 발견(1999년)
편지를 쓴 사람은 그의 아내<원이 엄마>
'이원'은 바로 위에서 등장하는 인물일까?
* (2011. 5. 어떤 카페에서 발췌).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원이 엄마'의 미투리(짚신)과 노비 매매 문서를 전시.
'마누라와 딸을 노비이것 또한 굉장한 스토로 판다는 문서'가 보존되었다.
이 사진은 진짜가 아닌 모조품?
진짜는... 따로 있다?
사진 속의 거뭇거뭇한 물질은 바로 머리카락이다.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서 엮은 신발....
31살 남편이 일년간 쯤 앓았으며, 남편이 낫기를 기원했으나...
“자내 샹해 날드려 닐오되(당신 언제나 나에게 말하되)
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둘이 머리 희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함께 죽자 하시더니)
엇디하야 나를 두고 자내 몬져 가시노(어찌하여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 이하 생략...
위 사례만 해도 엄청난 스토리가 전개될 터.
* 1586년에 양반가문의 마나님이 쓴 한글 편지.
- 그런데 조선조 양반들은 한글을 쓰지 않고 한자를 썼을까?
나는 욕... 퍼질러대야겠다.
서기 2020년인 지금도 중국-글자인 한자-병에 걸린 것들이 우굴거리는 현실이다!
충남 서해안 벽지 산골마을 태생인 나는 상상도 못하는 역사의 이면이다.
조선조에서 경주최씨란... 관직에 오른 자가 얼마 안 되고, 계급도 그저 그렇다.
우리나라 성씨별 인구 숫자는 순위 6위인데도 관직에 오른 순위로는 아마도 성씨별로 따지면 70번 이후로 밀려날 게다.
찌질이 가문?
조선조에서는 미운 털이 박혔기에...
하나의 예다.
1860년 동학을 창도한 1대 교주 최제우 처형당했고, 제2대 교주 최시형 : 1994년 동학난으로 처형당했고...
충남 청양사람인 최익현(1833 ~ 1906년)은 조선조 고종에게 반항하다가는 일본 대마도에 유배가서 굶어죽을 만큼 미움이나 받고...
내가 존경하는 한 분은 있다.
경주최부자. 12대 만석꾼인 <최준>
나는 대학시절에 이 분을 두 번 뵈었다(경주와 서울에서)
독립자금은 댓던 12대 마지막 부자의 재산은 거덜나고....
대구대학을 운영하다가.. 삼성의 이병철을 거쳐서 ... 지금은 박정희네의 영남대학교의 전신(대구대학 + 청구대학)
경주 법동에 있는 최부자네 고택은 지금은 최부자네 것이 아니다. 박씨네 소유...
* 고작 <경주 법주"라는 술이나 빚어서 그거 팔아서....
서해안 산고라당에 사는 늙은것인 내가 <99칸 한옥>을 짓고, 유지하려면...
엄청난 권력, 재산, 노비 등이 있어야 할 터.
아쉽게도 요즘에는 노비가 없으니 이만 쓸란다.
카페에서 뭐라고 글 쓰기에는 그렇다.
진실은 늘....
첫댓글 좋은 글 보고 갑니다.
99칸 집을 경기도 화성에 있을 때 서신에서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을 운영하기 위해 많은 노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내노비, 외노비로 같이 거주하거나 따로 집을 가지고 농사를 하는 외노비 등 많은 인원이 필요했겠죠. 가진 재화나 능력을 어떻게 사용했나는 소금의 역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깊은 선생님글이 너무 눈을 밝게 해주네요.
좋은 글 향기를 담아갑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서해안 산골마을 태생인 저는...
99칸 집에서 수십 명, 수백 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으면 싶습니다.
노비를 거느린 마님,마나님이야 좋겠지만 그 마님, 마나님을 모셔야 하는 노비는요?
어미와 아비가 노비이면.. 그 자식도 또한 노비로 세습되는 국가...
답답해서 한 번 뒤집어보았습니다.
안동.. 퇴계 이황은 노비가 367명이라고 하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역사는 늘 진실을 감추게 마련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