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소나기
권금주
지난 목요일 칠월 칠석 날 소낙비 쏟아져 내리는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는데 비를 타
고 떠오르는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풍경 하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면, 아침에 멀쩡하게 개인 날이 공부시간 중에 소나기가 내려
서 큰 개울물이 불어납니다.
학교 공부가 끝날 즈음에 이미 가늘어진 빗줄기를 맞으며 어디서 토란잎 하나 받쳐 들
고 십여 리를 걸어서 집으로 오는 길에는 시멘트 둑을 건너야 하는 큰개울이 있습니다.
여기를 건널 때 마다 보를 타고 내려가는 물살이 너무 빠르고 세어서 물속으로 빨려
들 것 같은 두려움에 눈을 꾹 감고 건너뛰던 지금 생각해도 오줌지리도록 아찔했던 기
억입니다.
산하나 넘고 동네 하나 지나서 또 주황색 진흙물을 또 건너야 하는데 무서워서 못 건
너고 엄마 기다리고 있으면, 지나가는 아저씨가 없어서 건너 주던 중간 개여울이 있었
습니다.
비를 맞으며 걸어 걸어오다가 드디어 마중 오던 어머니를 만났을 때, 비에 젖은 생쥐
같은 내 꼴을 보시고 새파랗게 놀라던 엄마모습과 너무 반가워 엄마 품에 꼭 안기어 집-
에 돌아오던 들길엔 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습니다.
행복한 미소를 얼굴 가득 담고 따스한 정담이 오고갔던 그 들길엔 지금도 엄마의 모습
처럼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테지요.
삼십년이 지나 엄마 되어 우리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나도 우산 들고 학교 앞
으로 마중 나갔었지만, 아이들이 이제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비 오는 날이면 택시 타고
오든가 문방구에서 우산 하나 사들고 옵니다.
[풍경 둘]
저는 빗속에 피는 꽃이 그려져요.
어릴 적 뒤뜰 안에 여름이면 잎은 다 녹아 없어지고 꽃대만 올라와 피는 연보랏빛 상
사화는 이름처럼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여 그리움이 한으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
인가 봅니다.
때맞추어 견우와 직녀도 일 년 내내 그리워만 하다가 칠월 칠석 단 하루 만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소나기가 되어 이렇게 쏟아져 내리는가 봅니다.
또 노오란 국화꽃 같은 가세추꽃 나물은 봄에는 나물 무쳐 먹으면 그 향이 독특했지
요 지금쯤 내가 떠났어도 친정집 뒤뜰엔 그 꽃이 노랗게 한창 피어있을 테지요.
그 한옆에 장독대 밑으로 작은 자갈을 깔아놓고 모래 틈으로 진분홍 채송화가 땅위로
낮게 깔리어 피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씨 뿌리지 않아도 해 마다 몇 년을 저절로 피고
지던 꽃들입니다 무궁화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 피는 나팔꽃과 무궁화 꽃의 어울림도
눈에 선합니다.
이런 아련한 풍경들은 아마도 팔월의 여름이 끝나가는 소낙비가 오락가락 하던 날이
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가꿔 놓으시고 돌아가신 마당 넓은 집, 배나무, 분꽃, 화분 서너 개를 바라
보며 아버지를 몹시 그리워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흠치곤 했더랬습니
다.
그 꽃밭 곁에 앉아 작은 계집아이의 치마에 꽃잎을 끊임없이 따서 담아다가 돌에 찧으
며, 병뚜껑에 담아서 소꿉놀이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밤이면 봉숭아꽃잎 따서 백반 넣고 찧어서 손톱에 물들이고 자다보면, 밤새 실로 챙- 21
챙 묶었던 봉숭아꽃도, 잎도 다 떨어져 나갔던 석유등잔불처럼 희미한 그 시절은 소나
기처럼 짧게 지나가 버렸습니다.
[풍경 셋]
또 하나,
비만 오면 편지 쓰던 사람 생각도 납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속으로 '편지를 받겠구나' 하며 맘 들떠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
습니다.
지금도 그 사람은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편지를 쓸까요?
살아가면서 비 오는 날의 이런 풍경들이 또 이어질까요?
그 이후로는 비 오는 여름날의 풍경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지만 지금은 다만 창가에
서서 베란다에 있는 꽃을 바라보며 차 한 잔과 음악이 전부랍니다.
2005/21집
첫댓글 비만 오면 편지 쓰던 사람 생각도 납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속으로 '편지를 받겠구나' 하며 맘 들떠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
습니다.
지금도 그 사람은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편지를 쓸까요?
살아가면서 비 오는 날의 이런 풍경들이 또 이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