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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삶의 토대부터 심성의 근원까지
인간의 모든 것을 뒤흔들었던
중세 서유럽의 흑사병 이야기
교회는 신뢰와 권위를 잃어가고
세속의 기득권은 균열되기 시작했다
중세 봉건사회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여러 팬데믹(세계적 유행병)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흑사병에 관한 이야기. 특히 그 영향력이 가장 파괴적이었다고 알려진 중세 서유럽의 사례(1347/8~1351년)에 주목했다. 책은 크게 종교·심성적 측면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흑사병을 분석한 제1부와 의학사적 관점에서 흑사병을 살펴본 제2부로 구성된다. 저자는 역사시대로 접어든 이후 발생한 첫 번째 팬데믹인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에 관한 논의를 시작으로, 채찍질 고행과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고 인구 급감에 따라 노동시장과 환경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등 흑사병이 뒤바꿔놓은 세상의 풍경과 인간의 일상을 폭넓게 들여다본다. 중세를 지탱하던 교회 권위의 하강과 세속 기득권의 균열 그리고 반복되던 전쟁과 기근 못지않게, 흑사병의 창궐 또한 중세를 파국으로 몰고 간 사태였음을 직시해볼 수 있다. 아울러 흑사병 발생의 원인과 그 예방법 및 치료법을 둘러싼 중세 의학체계의 반응들을 되짚어봄으로써 역병에 대처하는 중세인들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 그리고 엄연한 시대적 한계까지 환기해내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학술기획총서 ‘知의회랑’의 서른아홉 번째 책이다.
👨🏫 저자 소개
이상동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와 동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스털링대학(University of Stirling)에서 「왕실 숭배공간으로서 던펌린수도원의 발전과 변화(The Development of Dunfermline Abbey as a royal centre c. 1070~c. 1420)」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
종교문화사와 정치사를 기반으로 스코틀랜드 중세사에 집중해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전후로 지난 몇 년간 서유럽의 흑사병 연구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앞으로는 잉글랜드 중세사로 영역을 확장해 중세 맥락에서 잉글랜드의 정체성 형성에 대해 탐색해볼 계획이다.
주요 논문으로 「만들어진 컬트: 성 토마스 베켓(St. Thomas Becket) 숭배의식과 ‘베켓성수(Becket’s water)’」, 「민족 상징물의 기원: 스코틀랜드의 민족 아이콘, ‘운명의 돌’의 경우」, 「왕국의 수호성인 만들기: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 성 안드레아의 경우」, 「1347/8년~1351년 1차 흑사병 창궐 원인에 대한 당대 의학계의 인식: 전통적 인식론에서 독(poison) 이론까지」, ‘Recreating the Devotional space of Dunfermline Abbey Between Ca. 1124~1180’, ‘The Miracles and Cult of St Margaret of Scotland’ 등이 있다.
📜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제1부 종교·심성 및 사회·경제적 관점〉
제1장 유사 이래 최초의 팬데믹: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1. 최초의 팬데믹|2. 최초의 페스트 창궐|3.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에 대한 대응
제2장 종교·심성적 영향: 채찍질 고행
1. 1260년의 채찍질 고행|2. 흑사병 창궐 시기의 채찍질 고행
제3장 유대인 학살: 유대인 음모론과 사회적 대응
1. 유대인 독극물 음모론|2. 계층(계급)에 따른 대응
제4장 사회·경제적 변화: 잉글랜드 내 임금 인상에 대한 논의
1. 포스탄 모델|2. 기득권 세력의 대응|3. 임금 상승인가
〈제2부 의학사적 관점〉
제5장 병인론: 흑사병은 페스트인가
1. 페스트 팬데믹|2. 흑사병 병인 논쟁|논의의 확대
제6장 제1차 흑사병 창궐 원인에 대한 당대 의학계의 인식
1. 전통적 인식론|2. 독 이론
제7장 예방법: 14세기 후반~15세기 전반기 서유럽 의학계의 관점에서
1. 전통적 예방법|2. 약물 활용
제8장 치유법: 중세 의학의 관점에서
1. 외과술|2. 약물요법
에필로그
주·참고문헌·찾아보기
총서 ‘知의회랑’을 기획하며
📖 책 속으로
흑사병은 중세 유럽세계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기존 체제와 권위에 균열을 가했으며 당대인의 세계관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단기간에 진행된 급격한 인구 감소가 있다.
--- p.27, 「프롤로그」중에서
교회당국은 채찍질 고행운동이 확산되던 초창기에는 고행자의 신실한 모습에 지지를 보냈으나 점차 위기의식을 느껴갔다. 고행자 무리는 새로운 형태의 신앙조직으로서 교회의 위계와 권위에 균열을 가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로 고행자 무리는 반-성직주의 성향을 지녔다. 고행자들은 성직자의 개입 없이 서로에게 고해성사했다. 고행자 무리 중 한 명에게 채찍질하면서 “신께서 너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니라”라면서 죄를 면해주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또한 고행자 무리의 지도자는 대중을 상대로 설교했다. 고해성사를 비롯해 죄를 사하는 의식과 설교는 오직 성직자의 몫이었다. 이 역할을 고행자 무리가 한다는 것은 교회의 성사(sacraments) 기능을 침해하는 일이었다.
--- p.88~89, 「제2장 종교·심성적 영향: 채찍질 고행」중에서
흑사병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이 초래한 혼란은 사회 소수자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증폭시켰고, 곧 유대인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교회당국과, 비록 초기 단계에서였지만 도시당국이 유대인을 보호하고자 한 바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행위를 선한 의지의 산물로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들이 유대인을 보호하려 했던 건 ‘유대인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선택했던 행동이기 때문이다.
--- p.132, 「제3장 유대인 학살: 유대인 음모론과 사회적 대응」중에서
그런데 노동자의 임금 상승 문제는 더 복잡한 사회관계, 즉 통화의 관점에서도 살펴봐야 한다. 노동자의 임금은 명목임금과 별개로 물가 변동 상황이 반영된 실질임금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명목임금이 높더라도 물가가 높은 상황에서는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그에 따라 실질임금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흑사병이 창궐한 1348년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했지만, 통화량은 이전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즉 1인당 통화량이 증가한 셈이었다.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뒤를 이었다. 화폐가치가 떨어진 상황에선 임금(명목임금)이 상승하더라도 실질임금은 동반 상승하지 않거나 하락하기도 한다. 결국 흑사병 창궐 이후 임금 변화는 노동력 부족에 따른 노동자의 희소성 증가, 그리고 이에 따르는 임금(명목임금)의 상승이라는 단순 논리보다 통화 측면에서 물가와 상관관계가 있는 실질임금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이를 통해서만이 흑사병이 초래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이해를 평면적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 p.167~168, 「제4장 사회·경제적 변화: 잉글랜드 내 임금 인상에 대한 논의」중에서
14세기 중반 이래 창궐했던 흑사병의 병인이 무엇인가는 여전히 논쟁적 사안이다. 흑사병 연구가 과거에 기록된 문헌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과학적 방법론에 따른 병리학 분석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흑사병이 페스트라는 기존 주장에 반기를 든 회의론자들은 확산속도, 사망률, 증상, 면역력, 쥐-벼룩의 서식 등의 차원에서 흑사병과 제3차 (페스트) 팬데믹 당시의 페스트 사이에 차이가 발견되며, 그렇기 때문에 흑사병은 페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에도 한계는 있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달로 개선된 새로운 접근법들이 이들의 주장을 더 무력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2000년 이후 흑사병의 병인 규명에 DNA 분석법이 도입되었고. 이를 통해 흑사병의 병인이 페스트라는 근거들이 확보되었다.
--- p.206, 「제5장 병인론: 흑사병은 페스트인가」중에서
1347년 시칠리아에서 창궐했던 역병은 해가 바뀌면 알프스 이북에서도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다. 대중들은 대부분 그 원인을 신의 분노로 돌렸지만, 의사집단은 의학·과학지식을 총동원해 1348년 역병의 원인을 규명하려 했다. 그들 역시 당대의 패러다임 하에서 역병의 제1원인으로서 신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2차 원인, 즉 자연법칙을 통해서도 역병의 원인을 이해해보려 했다. 파리대학 의학부 교수진을 비롯한 의학계는 이 2차 원인을 다시 보편 원인과 특수·직접 원인으로 구분했다.
--- p.237, 「제6장 제1차 흑사병 창궐 원인에 대한 당대 의학계의 인식」중에서
14세기 말~15세기엔 약물 치료법이 더해졌다. 14세기 후반부터 제기된 독 이론에 의거해, 흑사병 치료에서 독성물질 해독이 우선시되었고, 이에 따라 약물을 통한 중화작용의 효과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15세기에 들어서면 환자 치료 과정에서 안전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위험도가 높은 외과술 대신 배출형 약물이나 중화제(해독제)를 활용하거나 땀내기 요법 같은 약물 치료법이 권장되기 시작한 때가 이 무렵이었다. 그렇다고 당시 의사들 모두가 이성적·합리적·과학적 태도로 의학지식들을 활용해 흑사병을 이해하고 환자 치료에 나선 건 아니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에피스테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므로, 외과술과 약물치료를 시행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주재하는 신에 의지한 치료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민간에서 내려오던 주술적 치료술까지 여기에 보태졌다. 엄연한 시대적 한계였다.
--- p.297, 「제8장 치유법: 중세 의학의 관점에서」중에서
🖋 출판사 서평
이 책의 문제의식
2023년 5월 3일, 세계보건기구(WHO)는 드디어 코로나19 팬데믹의 비상사태 종식을 선언했다. 장장 3년 4개월간 이어진 감내의 시절이었다. 예기치 못한 죽음 앞에서 산 자는 망연했고, 이어나가야 할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팬데믹에 따른 공포와 두려움과 분노는 비참하게도 자기 생존을 위협하는 타자에 대한 배타성만 키워내고 말았다.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했다는 이유로 백인·흑인집단에선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감이 비등했고, 아시아인 사회에선 중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증가했다.
뿐인가. 팬데믹의 와중엔 권력집단 역시 살아남기 위해 더 정치적이 되었다. 철저한 방역만이 살길이라는 쪽과 자연면역력 강화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타협 없이 평행선을 걸으면서, 결국 정치권력이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이익 가운데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방역체계가 결정되곤 했다. 한번 결정하면 후퇴는 없었다. 후퇴는 곧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고, 정치력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방역당국과 정치권력에게 방역체계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옮게 보이는 게 목표였을 뿐.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흑사병 창궐이 초래한 중세의 팬데믹과 21세기의 코로나19 팬데믹은 다르면서도 닮아 있다고 언급한다. 시대 맥락 차이로 구체적 내용이야 다르지만, 팬데믹이 인간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 개인과 권력집단이 이에 대응하는 양상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발원지로서 아시아인(중국인)을 향한 적대감은 독극물 음모론으로 유대인을 흑사병 창궐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중세인들의 심리와 다르지 않으며, 채찍질 고행자들의 종교적 신실함과 진실성 여부와는 별개로 교회의 권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해버렸던 중세 교회당국의 처사는 세상을 더 대립적이고 비관용적으로 내모는 작금의 정권 행태와 겹친다. 중세의 흑사병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현대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재성찰하고,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전망해보려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가던
중세의 가을, 어느 풍경들
그 기운 무르익어 문명/문화는 찬란한 가을빛을 띠고 있었지만(호이징하), 중세 후반기는 긴 전쟁과 반복되는 기근 그리고 흑사병이 야기한 비극들로 시대 이행의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저자는 흑사병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몇몇 파국의 장면들과 인구 급감으로 토대부터 뒤흔들리기 시작했던 중세 사회·경제적 환경 변화의 양상들을 폭넓게 되짚어보고 있다.
____유대인 학살, 희생양을 찾는 사회적 공포
1348년 성지주일(Palm Sunday)인 4월 13일, 오늘날 프랑스 남부 해안에 있는 툴롱(Toulon)에서 유대인 거주지역이 약탈당하고 유대인 40명이 살해당했다. 기독교도를 살해하기 위해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실제 이유는 역병 즉, 흑사병 때문이었지만, 그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린 것이었다. 화근으로 여겨졌던 유대인을 제거함으로써 (사실은 흑사병이 야기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지면 사회 구성원들은 소수자집단을 사회규범과 가치를 위배하는 일탈자, 즉 타자로 만들어 희생양으로 삼곤 한다. 이를 통해 사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성원의 결속을 도모하는 경향이 있다. 유대인 음모론에도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자연스럽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하에서 저자는 서유럽사회에서 흑사병 창궐과 함께 자행된 유대인 학살, 구체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 주목해본다. 특히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음모론의 실체는 무엇이며, 또 이러한 소문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분석한다. 아울러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 계층(급)에 따라 어떤 차이를 드러냈으며, 그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본다.
____채찍질 고행, 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되 교회 권위엔 도전하지 말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단적 위기가 닥쳐오면 개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도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진다. 평상시라면 그렇지 않았을 광적인 상황들이 연출되기도 하는데,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가 바로 그랬다. 다수의 죽음으로 사회 전체가 공포로 내몰렸고, 사람들은 이에 광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곤 했다. 특히 스스로 채찍질하는 고행이 유행해 세상에 널리 퍼졌다.
1348년에도 채찍질 고행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흑사병이 창궐해 큰 피해를 입히자 사람들 사이에서 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속죄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져갔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속죄행위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신께 용서받아야 했다. 결국 집단적인 채찍질 고행이 신께 용서를 비는 일종의 전례의식으로서 절차와 규율에 따라 진행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실 채찍질 고행이 집단행위로 서유럽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60년 이탈리아 페루자에서였다. 당시 널리 신봉되던 종말론적 세계관의 확산에 따른 공포에 영향 받은 것이었다.
저자는 이 공포에 기인하는 두 채찍질 고행운동을 나란히 비교·경주시키면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각 운동의 구체적인 태동배경과 성격, 확산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세력이 확장되면서 세속권력과 교회의 권위를 위협하게 되자 교회당국이 이 활동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이를 금지(이단 규정)하는 조치를 내리게 되는 양상은 유사했다고 본다.
____사회·경제적 토대의 변화, 과연 임금은 상승한 것일까
1348년 잉글랜드에서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당시 전체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감소했다. 인구의 급감은 노동인구의 감소를 의미하기에 사회·경제적 파장 또한 대단했다. 전과 비교해 노동력의 희소성이 증가하고, 노동자의 선택권과 협상력이 커졌다. 노동자는 현재 일터보다 더 나은 조건의 고용주나 작업장을 찾아 이동했다. 임금 인상은 불가피했고, 노동자의 이탈은 거스를 수 없는 사회현상이 되었다.
사회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자산 손실을 촉발하는 것이었고, 하층민에 대한 인신 구속력이 침해됨으로써 통치적 권위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통제가 필요했다. ‘조례’와 ‘법령’을 제정하는 등 여러 방안을 통해 임금 상승을 억제하고, 노동자 이탈을 저지하며, 노동을 강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노동시장에서 효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임금 상승과 관련해서 보면, 법률로 임금 상한선을 제시하고 이를 어기면 처벌하기도 했지만, 실제 노동시장에서는 법 규정을 우회해 노동에 대한 대가가 추가로 지급되곤 했다.
예컨대 화폐임금 이외에 현물로 수당을 지급하고, 계절별 임금을 동일하게 지급하는 방식 등이 그런 사례였다. 사실상 노동자의 임금 상승을 억제할 순 없었다.
저자는 먼저 노동력 감소가 임금 상승을 일으켰다는 ‘포스탄 모델(Postan Model)’을 살펴보고, 흑사병 창궐 이후인 14세기 후반기 노동력 감소가 실제 노동력 시장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또 사회는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아본다. 이어서 포스탄 모델과는 다른 방식으로 임금 상승 문제를 검토한다.
의학사의 관점에서 본 중세 흑사병
흑사병이 당대 의학계에 미친 영향도 컸다. 무엇보다 역병의 원인과 확산에 대한 인식론상의 확대가 눈에 띈다. 흑사병 창궐 이전의 전통적인 의학전통에서는 역병을 ‘미아즈마-체액(체질)론’으로 이해했다. 이에 따르면 역병은 미아즈마(miasma, 나쁜 공기나 사악한 증기) 때문에 발생하며, 사람들에게 ‘선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체액의 구성에 따라 개개인 체질이 달리 형성되고, 결국은 체질마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1348년 역병은 미아즈마-체액(체질)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희생자가 양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해명하기 위해 이른바 ‘독 이론’이 제기되었다. 이는 본래적으로 독성이 있는 물질이 체액(체질)의 특성과 무관하게 인체에 해를 끼친다는 개념으로, 개개인의 체액(체질)에 따라 유입 물질이 유해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미아즈마-체액(체질)론과 차별된다. 여기에 근거해 전과 다른―무차별적―양상을 보이던 1348년 역병은 비로소 새롭게 해명될 수 있었다.
이러한 독 이론을 근거로 흑사병의 예방과 치료에서도 새로운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예방법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6요소’에 토대를 두고 있었지만, 여기에 더해 독 이론을 따르는 약물법이 강조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흑사병은 독성물질이 병인이었기에 이것의 인체 내 활동을 차단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의사들은 이른바 만병통치약으로 유명했던 ‘테리악(theriak)’을 비롯해 하제와 강장제 역할을 하는 여러 약물들을 활용, 독을 제압하거나 체외로 배출시키려 했다. 즉, 이때부터 흑사병 치료에 전통적인 외과술에 더해, 테리악을 포함한 배출형 약물이나 중화제(해독제) 그리고 땀내기 요법과 같은 약물 치료법이 두루 활용되기 시작했다.
흑사병에 대한 의학계의 대응과 인식론의 확장은 세속당국의 의사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흑사병의 발생과 확산과 관련해 당대 의사들은 부패했거나 독성 있는 공기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곤 했는데, 이는 부패와 악취의 온상을 제거해 역병을 예방하려는 일종의 공공위생 관련 규제들의 제정과 강제로 이어졌다. 이러한 대처들이 단기적으로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는가는 의문이지만, 장기적으로 점차 그 효력을 발휘해나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이 과정에서 왕권이나 도시당국도 행정·통치상의 효율성을 확보해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