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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세트
추석이 이십 일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부터 추석 선물세트를 포장할 참으로 아내와 함께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대형 트럭이 도착해 있었다. 부둣가의 보세창고에 보관 중이던 3만6천병의 와인 중, 우선 1만2천병만 통관하여 운송해 온 거였다.
선물세트 포장은 트럭에 실려 있는 와인을 부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터였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지게차를 불렀다. 지게차가 도착할 동안 와인 수량을 확인 차 화물차의 짐칸에 올랐다. 전부 14팔레트이고, 팔레트 별로 종이 박스가 일정한 수량으로 재어져 있다. 13팔레트는 각각 72박스씩이고, 나머지 1팔레트는 64박스였다, 종이 박스에는 750㎖짜리 와인이 12병씩 들었고,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이 각각 반반씩이었다. 어제 관세사사무소를 통해 통관을 의뢰한 수량과 정확히 일치했다.
지게차가 도착하여 창고에 설치해 둔 두 개의 작업대 사이로 와인 팔레트를 부리고 있을 때, 저마다 배송 승합차를 모는 네 명의 배송직원이 속속 도착했다. 오 분쯤 지나자, 경리 직원인 노처녀 미스 황의 흰색 경차가 도착했고, 뒤이어 영업과장들의 아이보리색 지프 두 대가 도착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배송직원들이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듯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들 중 선임에게 선물세트 포장 아르바이트(이하 ‘알바생’) 신청자 25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용지를 건네주면서, 세무서 앞 전철역 3번 출구로 가서 그들을 태워오라고 지시했다.
와인을 다 부리고 난 뒤, 차에 앉아 있는 아내를 데리고 사무실로 올라가 오 과장과 탁 과장을 원탁으로 불렀다. 그러자 미스 황이 커피 다섯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잰걸음으로 다가와 돌렸다.
“자, 서로 인사들 하지. 이 분은 엊그제 책상을 들여놓을 때 언급했던 ‘손달자 과장’이야. 앞으로 그동안 내가 해왔던 무역 업무를 도맡아서 할 거고, 그 전에 오늘부터 열흘 동안은 선물세트 포장 작업을 감독할 거야.”
나는 직원들에게 ‘손달자 과장’이 아내라는 걸 숨긴 채 소개했다. 미스 황은 덤덤한 표정인데 반해, 두 과장은 사뭇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엊그제 무역 업무를 담당할 여성 과장이 출근할거라고 했을 때, 그들은 제 또래인 삼십대 초반의 젊은 여성일거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나는 이태 전에 경기도 부천 외곽 지역에 백 평 남짓한 조립식 건물을 보증금 없이 전액 월세로 얻어서 주류 수입면허를 냈다. 건물 한쪽 끝에 스무 평 남짓 2층을 올려 사무실을 만들었다. 현재 수입하고 있는 주류는 프랑스 와인만 열 품목이고, 판매처로는 40개의 점포를 지닌 P마트와 수도권에 있는 주류 도매점 일곱 군데이다. 거래처별 매출 비율은 P마트가 80%쯤 되고, 도매점이 20%쯤 된다. 그러니까 P마트 매출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영업 과장들과 배송직원들은 회사를 차리기 전에 중견 수입 주류업체에서 함께 근무를 했던 후배들이다. 당시 주 거래처였던 외국계 마트들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줄줄이 철수하는 바람에 사세가 급격히 짜부라지자 사장은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그 통에 영업 직원과 배송직원의 절반인 15명이 한날한시에 잘렸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실망한 나머지 진로를 고심하던 차에, P마트 본사 의류부에서 구매 차장으로 있던 동창생의 권유로 수입 주류 회사를 차려 P마트와 거래를 트게 되었다. 처음 거래를 틀 땐 점포수가 34개였으나, 해마다 증식을 거듭하여 지금은 40개로 늘었다.
전철역에 마중을 나갔던 배송직원들이 돌아왔는데, 출근한 알바생은 모두 스무네 명이었다. 한 명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선임 배송직원한테서 알바생들의 명부를 건네받아 나오지 않은 한 명을 붉은색 사인펜으로 그었다. 명부를 아내에게 건네면서 출근부를 별도로 만들어서 관리하라고 했다.
나는 배송직원들과 알바생들을 데리고 창고로 내려왔다. 알바생 스무네 명을 12명씩 두 개 조로 나누어 작업대 옆에 6명씩 4열 횡대로 나란히 서게 했다. 레드와 화이트 와인을 각각 한 박스씩 작업대 위에 꺼내놓은 뒤, 원산지와 맛과 향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고는 작업대 위에 선물세트 빈 케이스를 펼쳐놓고 천천히 포장 시범을 보였다.
조별로 배송직원을 둘씩 붙였다. 이는 무거운 와인 박스를 계속해서 작업대 위로 들어 올려서 꺼내야 하거니와, 또한 포장이 끝난 선물세트를 카트에 실고 안쪽 가장자리로 옮겨가서 높이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배송 직원들은 다들 몇 번씩 경험을 한 터라, 자신들의 소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내가 출근부 파일을 손에 들고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알바생들을 향해 주목하더니 간단하게 자기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무역 파트에 근무하는 ‘손달자 과장’입니다. 오늘부터 선물세트 포장이 끝날 때까지 여러분과 함께 포장 작업을 할 겁니다. 모쪼록 작업이 끝날 때까지 시종 웃음을 잃지 않고 일 했으면 합니다. 자, 그럼 출석 체크 들어갑니다. 제가 이름을 부르면 네, 하고 손울 들어 주세요. 구아름, 김슬기, 김영선, 나혜경, 박미숙…….”
나는 아내가 출석을 체크하는 모습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내는 미혼일 때, 선물세트 포장 작업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당시 아내는 주류 수입업체 무역 파트에서 나와 함께 근무했다. 그때 아내는 명절 때마다 선물세트를 포장하는 알바생들을 곧잘 관리했다. 타 부서의 직원들도 제 업무가 바쁘지 않을 땐, 너나없이 포장 작업에 매달렸다. 그러나 영업 부서장들은 넥타이를 두른 채 작업장에 나타나 얼굴만 비쳤다가 사라지기 일쑤였다.
회사를 차린 후 지난 설까지 두 번의 명절 선물세트를 준비하면서 선임 배송직원에게 포장 작업 감독을 맡겨 봤는데, 그는 내가 생각했던 만큼 원만하게 일을 처리해 내지 못했다. 그가 잘할 수 있다고 호기를 부려 믿고 맡겼더니 하루하루 실적이 계획량에 못 미쳤을 뿐더러, 부주의로 와인을 깨뜨리는 횟수도 잦았다. 심지어는 라벨이 탈락된 와인이 포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로 인해, 소비자들이 눈에 모를 세운 채, 이 게 프랑스 와인이 맞는지 어떻게 아냐? 며 따지고 드는 바람에 무르춤해 했던 적도 있었다. 암튼, 배송 직원들은 몇 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포장 작업 감독을 맡기기엔 미덥지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지만, 다음 주에 통관할 자금이 부족한 걸 생각하니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내일 통관할 자금은 그럭저럭 준비가 되었지만, 다음 주에 마지막으로 통관할 자금이 부족했다. 지난주부터 대부업체와 상담중이지만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지난 5월말에 신규 거래처인 프랑스의 와이너리에 CIF(cost, insurance, and freight) 조건으로 와인 3만6천병을 주문했다. 그 전까지는 물대를 T/T(telegraphic transfer, 전신환)로만 송금하다가 그때 처음으로 L/C(letter of credit, 신용장)를 개설했다. 물대를 T/T로 미리 송금할 수도 있었지만, 혹여 거액의 물대를 챙긴 후 와인을 선적하지 않으면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신용장을 개설한 거였다. 그 때, 신용장 개설 자금이 모자라 아내가 처가에서 아파트를 담보로 2억을 꿔 왔다. 법인과 나에게는 마땅한 담보물이 없었기에 마지못해 은행에 물대 금액을 예치하고 L/C를 개설한 거였다. 그때 이것저것 더해 모두 2억5천여만 원이 들었다.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만에 통관자금 9천7백여만 원을 마련하느라 동기간을 비롯해 손을 벌릴만한 곳은 전부 찾아다녔지만, 8천만 원밖에 장만하지 못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부족한 통관자금을 구하지 못해 골치를 앓던 나는, 지난주에 지하철역 가판대에 널려 있는 생활정보지를 모조리 수거해왔다. 정보지를 샅샅이 훑어 내리다가 박스광고를 보고 구 실장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기를 대부업체 실장이라고 소개했지만, 아무래도 낌새가 사채업자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나는 그에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후, 와인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부동산 담보물이 없어 썩 마뜩찮아 하더니 법인과 개인 등기부 등본, 인감증명서, 주민등록등본, 그리고 법인 소유의 차량 다섯 대의 등록증을 준비해서 다음 주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는 헤어지기 직전에 대출을 받게 되면 선이자로 한 달 치(20%)를 떼니까, 대출 받을 금액을 정확히 알려달라고 했다.
오늘이 대부업체 구 실장과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이다. 나는 구 실장을 만나기 위해 약속 시각보다 10분 일찍 커피숍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곰 같은 덩치만큼이나 굼뜨게 10분 늦게 도착했다. 그렇지만 언짢은 기색 없이 그가 요구했던 서류가 담긴 노란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덩치와는 달리, 빠른 손놀림으로 서류뭉치를 장장이 넘겨가며 꼼꼼히 살폈다. 잠시 후 그는 건성으로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주에 만났을 때, 준비해오라고 했던 서류는 빠짐없이 챙겨 왔습니다. 다시 한 번 잘 보세요.”
서류뭉치를 뒤적거리는 구 실장의 행동거지가 어딘가 못마땅해 하는 듯해 보여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이렇게 되받았다.
“아니, 일전에 내가 미처 알려주지 못한 게 있어서……. 이번에 통관한다는 와인 3만6천병에 대한 인보이스(invoice, 송장) 사본과 어제 부분 통관했다고 한 와인 1만2천병의 수입필증 사본도 함께 가져와요. 내일 다시 봅시다.”
대머리에 번질번질한 상판, 배불뚝이 구 실장은 제 할 말을 다하곤 어슬렁어슬렁 사라졌다. 만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내 사정이 급해서 만났다지만, 이렇게나 막 대하다니……. 정말 눈꼴시어 못 보겠군. 나는 담배연기로 쓰라린 속을 달래며 비워두었던 단축번호 ‘18번’ 자리에 구 실장의 휴대폰 번호 11자리 숫자를 채워 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로 돌아온 나는 먼저 창고에 들렀다. 대형 선풍기 네 대의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은 양철 지붕에서 쏟아져 내리는 열기 탓에 되레 후텁지근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알바생들은 제 딴에는 손을 바삐 움직이며 속도를 내는 듯했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개중에 손동작이 유난히 굼뜨고 요령부득한 알바생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한눈에 척보니 학생인 듯했다. 몸피는 영락없이 66사이즈였지만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고왔다. 포장 작업을 하는 알바생들 대부분이 초짜들이라 손에 익을 때까지 사날간은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리라. 나는 아내에게 슬쩍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고는 곧장 사무실로 올라왔다.
자리에 앉아 사무실을 휘 둘러보니 미스 황밖에 없었다. 두 과장은 거래처에 간 듯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까 구 실장을 만나러 가기 전에 두 과장을 따로 불러 도매점에 깔린 외상매출금 수금을 독촉했던 터였다.
지난 설 대목에 와인 선물세트를 준비하는 과정에 들어간 각종 비용을 참고로 해서 금번 추석 때 소요될 비용을 뽑던 참에, 문득 지난 설에 P마트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던 행위들이 떠올랐다. 그 때 그들의 가증스러운 수작질에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지난해 추석 때와는 달리 판매촉진비를 두 배로 늘렸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추석 때까지는 한 가지 항목이었던 '전단지 광고비'와 'POP(point of purchase) 광고비‘를 따로 분리시켜 이중으로 청구했다.
P마트에서는 명절 때마다 선물세트 판매촉진의 일환으로 전단지와 POP를 제작했다. 매번 원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전단지에 실어 놓곤 판매촉진비를 청구했다. 또한 보일락 말락 한 크기로 POP를 제작해서 매장마다 상품진열대에 부착했다. 물론 상품의 이미지를 부각시켰기 때문에 광고 효과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정이 너무 일방적이었고, 판촉비 청구액도 지나치리만치 과다했다. 점포 별로 40만 원짜리 세금계산서가 두 장씩이나 발행되었으니 말이다. 지난 설에 점포수가 38개였으니 모두 합치면 판매촉진비 만도 3천4십만 원이었다. 광고래야 고작 전단지에 실린 사진 한 컷과 매장별로 상품진열대에 부착한 자그마한 쇼 카드(show card) 하나가 전부였다. 모르면 몰라도 38개 점포를 다 합쳐 봐야 제작비로 채 십만 원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는 설 대목에 매장에 진열된 선물세트를 판매하는 판매도우미 건이었다. 전년도 추석에는 주류 공급사들은 너나없이 매장별로 제 형편에 맞는 판매도우미를 채용하여 자사 선물세트 위주로 판매했다. 그런데 지난 설에는 P마트의 본사 식품매입부에서 내레이터 모델을 채용하여 판매도우미로 투입했다. 작년 추석 대목에는 대다수의 주류 공급사들이 여대생을 판매도우미로 채용했다. 이는 저렴한 인건비 때문이었다. 여대생을 판매도우미로 쓸 경우 일급이 5~6만 원이면 되지만, 내레이터 모델을 쓰면 일급이 갑절 이상 늘어난다. P마트를 담당하고 있는 오 과장의 말에 의하면, 지난 설에는 P마트 본사 식품매입부 과장이 윗선인 임원의 지시를 받고 이벤트사 대표를 불러 모델을 쓰기로 일괄계약을 했다는 것이다. 설 대목이 지난 후 주류 공급사들은 하나같이 내레이터 모델을 쓰고도 예년에 비해 판매량이 늘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마트를 찾는 고객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브랜드를 찾되 그러나 백화점보다는 싼 값으로 구매를 원하는 고객이고, 다른 하나는 브랜드와는 상관없이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싸게 구매하고자 하는 고객이다. 전자는 으레 마트에 오기 전에 구매할 브랜드를 머릿속에 그리고 온다. 이런 고객들에게는 제아무리 늘씬하고 언변이 뛰어난 내레이터 모델일지라도 노브랜드상품은 씨알도 안 먹힌다. 후자는 주머니가 얕은 고객을 대상으로 홍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굳이 외모가 되고 언변이 뛰어난 판매도우미보다는 차라리 진정성을 가슴 가득 괴고 있는 판매도우미가 제격이다. 사실 마트를 찾는 고객의 유형 중 십중팔구는 후자이다. 이러한 사실을 P마트의 임원이 모를 리 없을 터.
이 게 다가 아니다. 명절 선물세트의 경우, 직매입이 아니고 특정매입이다. 쉽게 말해, 을이 공급한 양대로 대금을 정산하지 않고, 판매된 양만 대금 정산하고 나머지는 전량 반품하는 매입 형태이다. 판매량은 단말기에 찍힌 바코드 기준이다. 문제는 대목기간 동안 매장에서 발생한 도난이나 손실분에 대하여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장 내에는 24시간 동안 감시카메라가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고, 또한 출입구마다 검정색 정장차림을 한 보안 요원들이 저마다 눈에 쌍불을 켠 채, 여차하면 층층이 지키고 선 요원들에게 알릴 참으로 손에 무전기까지 들고 있다, 이토록 보안이 철두철미한데 아무러면 도둑이 제아무리 재주가 비상한들 큼지막한 선물세트를 들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지난 설 대목에 전체 38개 매장에서 발생한 손실액만도 무려 1천만 원에 육박했다.
이와 같은 일로 P마트에 식품류 선물세트를 납품한 업체들 중 나를 위시한 절반 이상이 판매촉진비 청구액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P마트 측에서는 꾸물거리며 늑장을 부리다가 마지못해 금번 추석 때부터 원상 복귀시켰다. 하지만 점포 하나당 40만원씩이니 여전히 높다. 판매도우미 건을 두고도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시끌벅적해지자, 결국 P마트의 임원은 애꿎은 식품매입부 과장에게 책임을 떠넘겨 목을 쳤고. 차후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P마트의 임원과 마주칠 때마다 증오에 찬 눈초리로 노려보는 듯해 은연중에 전신이 오싹해지곤 했다,
“안녕하세요, 구 실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아, 딴 게 아니라 내일 커피숍보다는 커피숍 맞은편 1층에 있는 냉면집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소? 그 집 냉면 맛이 아주 그만인데…….”
그렇잖아도 지난 설에 P마트 본사 식품매입부의 일방적인 행위로 이래저래 5천여만 원 가량을 헛되이 날린 것이 떠올라 가슴이 쓰린 참인데, 능구렁이 같은 구 실장이 거드름을 피웠다. 그의 말에 울컥 부아가 치솟았지만 어찌하겠는가!
“아무렴, 실장님 뜻대로 해야죠 뭐. 하하.”
구 실장은 내 대답이 채 여물기도 전에 전화를 끊은 듯했다. 연신 뚜-뚜- 하는 기계음만 되풀이되었다. 구 실장과 통화중에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마지못해 흘린 헛웃음을 미스 황이 주워듣곤 뭔가 오인한 듯했다,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급여 지급 품의서가 첨부된 결재서류를 책상위에 척 내밀었다. 내일이 월급날이었다. 미스 황은 법인 계좌에 통관자금으로 쓸 4천8백여만 원의 잔고가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급여명세서를 보니 나를 제외한 직원 7명의 급여액이 1천8백만 원이었다. 기실, 나는 직원들 급여는 거래처인 도매점에서 외상매출금을 수금해서 지급하리라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거래처인 도매점 예닐곱 곳에 깔린 미수금이 3천만 원쯤 되었는데, 늦어도 내일까지는 이천만 원을 수금하라고 지난주부터 두 과장을 계속 채근해 왔다.
“통장에 있는 돈은 내일 오전에 통관 비용으로 써야 하니까 손대지 마. 급여는 내일 중으로 입금될 거야. 참, 미스 황? 보세창고에 있는 프랑스 ‘딸보’ 와인 인보이스(Invoice)와 B/L(Bill of Lading)을 관세사사무소에 팩스로 보내 줘. 보낸 후 그쪽 담당자한테 잘 받았냐고 반드시 확인하고.”
내 말이 끝나자, 미스 황은 웃음이 싹 가신 얼굴로 나를 힐끔 쳐다보곤 이내 급여 지급 품의서를 들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조금 전과는 달리 풀이 죽어 보였다. 그녀가 돌아간 뒤, 추석 대목에 P마트에서 선물세트를 판매할 판매도우미들에게 교육시킬 자료를 정리하던 중에 문득 묘한 자부심을 일었다. 비록 상근 직원은 8명에 불과하지만, 십여 일 동안 매장에서 판매도우미로 근무할 비상근 직원이 무려 40명이나 되었으니 웬만한 중견기업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은 때문이었다.
장시간 동안 판매도우미 교육자료 정리에만 골몰한 채 PC 모니터를 끌어안고 있었던 탓일까. 갑작스레 눈알이 따끔거렸다.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팔을 위로 쭉 뻗쳐 기지개를 켜는데 언뜻 벽상 정면에 걸린 커다란 시계가 시선을 붙들었다. 어느새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창고에 갈 참으로 사무실을 나와 철 계단을 내려섰다. 어, 저건 무슨 차? 창고 밖 한켠에 수북이 쌓여 있는 헐어진 종이박스 더미사이로 정체 모를 트럭이 얼핏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종이박스 더미 뒤쪽으로 재게 걸었다. 텁수룩한 구레나룻이 얼굴을 뒤덮고 있어 도무지 나이를 가늠키가 어려운 넝마주이 하나가 창이 긴 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사내는 빠른 손놀림으로 헐어진 종이박스를 쥐어뜯으면서 분해하고 있었다. 사내가 입고 있는 카키색 민소매 티셔츠는 땀에 절어 눅눅했다. 지난 설에는 팔순이 지났을 법한 노부부가 점심나절 때부터 리어카를 끌고 와서 말끔히 수거해 가곤 했는데…….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그분들을 통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새 어디 먼 곳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구레나룻의 사내는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제 하던 일을 재촉하듯 손놀림을 더욱 재우쳤다.
나는 창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채 바삐 움직이는 배송 직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들은 쉴 새 없이 팔레트 위의 박스를 작업대 위로 들어 올려서 와인을 빼내고는 빈 박스를 창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또한 포장이 완료된 선물세트를 카트에 실고 저만치 가장자리로 옮겨가 제 키 높이만큼 쌓아올리기를 반복했다. 다들 힘이 든 모양이었다. 얼굴과 목덜미는 온통 땀투성이고, 티셔츠에도 땀이 배어들어 후줄근했다. 저들은 모두 이십대이고 아직 미혼이다. 시선을 돌렸더니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도 입은 동작이 굼뜬 그러나 눈이 맑고 서글서글한 알바생과 무슨 말을 주고받는 아내가 보였다. 아내 역시 콧잔등에 좁쌀 낟 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작업을 마치려면 아직 1시간쯤 남았다. 나는 창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가지런하게 쌓여 있는 와인 선물세트를 바라보며 눈어림한다. 대략 2천6백 세트쯤 돼 보였다.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초짜들이 포장한 것 치고는 그런대로 만족할 만했다. 나는 돌아서서 사무실로 향했다.
내일 구 실장한테 전해줄 인보인스와 수입필증을 복사해서 사본을 노란 서류봉투에 넣고 있는 참에, 언뜻 서창에서 한 자락의 바람이 건듯 불어왔다. 목덜미에 맺힌 땀을 들이는가 싶더니 그새 동창 밖으로 줄달음쳤다. 서창 너머에 둥실 떠 있는 구름사이로 설핏 기우는 햇살이 비껴들고 있었다.
아내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6시 20분이었다. 아내는 내게로 바짝 다가와 작업을 무사히 마쳤노라고 구두 보고를 했다. 배송 직원들은 저마다 알바생들을 태워 전철역으로 나갔다고 했다. 고생 많았어! 하마터면 자칫 미스 황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말할 뻔했다. 직원들에겐 당분간 부부사이임을 숨기기로 해놓곤 말이다. 아내는 곧장 제 책상에 놓인 PC 앞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자기야, 전화 받어, 자기야, 전화 받어.’ 문득 내 휴대폰에서 요란한 수신음이 울렸다. 발신자 번호를 보니 탁 과장이었다.
“여보세요?”
“아, 탁 과장! 지금 어디야?”
“예, ‘한양주류’입니다.”
“그래, 수금은 얼마나 했어?”
“예, 두 곳 합쳐 내일 오전까지 천만 원을 입금키로 했습니다.”
내일 직원들 월급을 맞추려면 아직도 8백만 원이 부족했다. 오 과장은 수금을 얼마나 했을까. 나는 탁 과장과 통화를 끝낸 후 오 과장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담배를 빼물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가 거진 타들어 갈 무렵, 휴대폰에서 귀에 익은 수신음이 울렸다.
‘자기야 전화 받어!’ 발신자 번호를 확인하니 오 과장이었다. 그는 지금 수금 관계로 도매점 사장과 옥신각신 중이라, 상담이 끝나는 대로 보고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서 창고를 내려다보았다. 헐어진 종이박스로 낭자하게 어질러져 있던 작업장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작업을 마친 뒤 아내가 알바생들에게 정리정돈을 시켰을 게 분명했다. 곧 죽어도 지저분한 건 못 보는 성격이니까. 나는 슬쩍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메모지를 들여다보면서 뭔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배송직원들이 알바생들을 전철역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왔다. 그들은 냉장고에서 캔 음료를 꺼내 마시더니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익살맞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러다가 선임 배송직원이 PC앞에 앉아 뭔가를 작성 중인 아내의 뒷모습을 흘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사장님? 오늘 입사하신 손 과장님 있잖습니까. 일을 아주 잘 하시던데요. 알바생을 다루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고요. 어떤 알바생이 수다를 떨다가 병을 깨뜨리자, 바로 혼찌검을 냈다가도 기분 상하지 않게끔 달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던데요.”
“호! 그랬어?”
나는 짐짓 깜짝 놀라는 시늉과 함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그러나 시큰둥했다. 다만 내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 챈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난 뒤, 나는 아내가 무엇을 작성하나 싶어 살며시 뒤로 가서 어깨너머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작업일보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와인 선물세트 포장 작업 일보
●일자 : OOOO년 O월 OO일.
-금일 선물세트 포장 작업량 : 2,853set,
-파손 와인 품명 및 수량 : 딸보 화이트 와인 1병.
-라벨 탈락 및 찍힘 발견 : 딸보 레드 와인 2병. 딸보 화이트 와인 1병.
○건의 및 특기사항 :
①열흘 내로 작업을 끝내려면 인원 충원이 필요함. 사날 후부터 일이 손에 익더라도 2명 정도 더 충원해야 될 것으로 사료되어 내일부터 다가구주택 아줌마를 데려올까 함.
②유난히 손이 느린데 반해,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고 인상도 수더분한 학생이 있는데, 선물세트 포장보다는 판매도우미가 제격일 듯함, 본인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판매도우미 알바도 해보고 싶다고 했음. 현재 서울 강서구에서 혼자서 자취하고 있고, 서울과 인천, 부천 지역은 어느 매장이든 근무 가능하다고 했음.
③포장지 포장은 다음 주에 반나절쯤 작업을 해본 후 보고 예정. -이상-
‘자기야 전화 받어! 자기야 전화 받어!’ 갑자기 제 뒤에서 휴대폰 수신음이 울리자, 아내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힐끔 뒤돌아보더니 그러나 개의치 않고 방금 작성한 작업일보를 한 장 프린트해서 출입구 쪽에 있는 복사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포켓에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 번호를 보니 오 과장이었다.
“여보세요?”
“오 과장, 상담은 잘 끝났어?”
“예, 사장님. 내일 오전에 ‘수원 리쿼’와 ‘이브닝코리아’, 두 업체에서 9백만 원을 입금키로 했습니다.”
“수고했군, 회사로 돌아올 필요 없이 거기서 바로 퇴근하게.”
내일 거래처에서 1천9백만 원이 입금되면 직원들 급여는 맞춰지는 셈이었다. 사실 나도 속이 탔다.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생을 하는데, 월급을 제때 못 줄까봐 내심 애가 달아 조바심을 쳤다.
“여보?”
퇴근을 하려고 창문을 닫으며 문단속을 하려는 맡에, 등 뒤에서 꽤나 놀란 듯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손에는 어제 통관한 와인의 수입필증이 들려 있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불현듯 아까 내일 대부업체 구 실장한테 건네줄 수입필증을 복사한 후, 원본을 복사기에 그대로 놓아둔 게 떠올랐다.
“지난 5월에 L/C를 개설할 적에 프랑스 딸보 와인 병당 물대가 CIF 조건으로 병당 6.7us$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인보이스를 보니까 병당 3.8us$로 돼 있는데, 어떤 게 맞는 거예요? 그때 L/C를 개설한다면서 물대만 2억5천3백여만 원을 가져갔잖아요. 그때 환율이 1,050원이라고 한 것 같은데…….”
아내는 내 턱밑까지 바싹 다가와 의혹에 찬 눈초리로 따지듯이 물었다. 사실 나는 꼭 치부를 드러내는 것만 같아 아내에게조차 비밀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이 별안간에 발생한 탓에 머쓱해져 핑계를 댈 만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계속 숨기려 들다간 자칫 딴 주머니를 찼다고 오해를 살 듯했다. 성가셨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이참에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세한 경위는 이랬다.
이태 전 P마트와 거래를 튼 직후 남 사장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땐 외모가 감사나워 도무지 인정이라곤 없어 보여 기피했지만, P마트를 드나들면서 교감을 나누다보니 외모와는 달리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수입하여 P마트에 공급하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마흔한 살이었지만, 탈세에 관해서만큼은 걸핏하면 휠체어에 의지한 몸으로 TV에 나오는 대기업 회장들 못지않게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지난 설 대목 이후 나는 남 사장과 단 둘이서 술자리를 가졌다. 그 날 밤, 나는 그에게 P마트와 거래를 튼 이후로 30%의 마진을 붙여서 공급했는데, P마트에서는 40%의 마진을 붙이면서도 판매장려금 조로 매월 공급가의 8%를 납품대금에서 떼다가, 올 초부터는 매월 18%를 떼는 것과, 또한 신규 점포를 개점할 때마다 공급가의 10%를 6개월 동안 납품대금에서 일방적으로 공제한다고 했다. 그리고 판촉 행사로 전체 매장에 대해 두 달에 열흘 꼴로 시음 행사를 하느라 판매도우미 인건비와 시음주 사용량만도 월 평균 1천3백만 원 이상 들어 죽어라 납품을 해봤자 본전은커녕 밑지기 일쑤라고 탄식조로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는 것만 같아 계속 거래를 해야 할지, 이쯤에서 접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답답한 심사를 털어놓았다. 그는 내 말을 듣고 나더니, P마트가 다른 마트에 비해 갑질이 유별나게 심해 불공정거래로 고발도 숱하게 당했지만 눈도 깜짝하지 않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따로 대처하는 방법이 있다면서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그는 P마트와 거래를 하는 주류 수입업체들은 대부분 쉬쉬하면서 관행처럼 절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절세에 관해 얘기하는 동안, 번뜩이는 눈빛으로 연신 주위를 살폈다. 주위를 살피는 그의 눈빛은 양주를 한 병 비운 사람치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형했다. 우리 둘밖에 없는 룸인데도 그는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주위를 살폈다. 그는 자기는 이 사업에 뛰어든 지 십 수년째라고 했다. 그 사이, 타산이 맞지 않아 폐업한 회사도 부지기수라고 했다. 지속적으로 절세를 한 업체는 대부분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업체는 하나같이 아침 이슬처럼 져 갔다고 했다. 또한 절세가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양 자랑삼아 마구 떠벌리고 다닌 치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허덕거리고 있다고 했다.
그 날 밤, 남 사징은 이왕 내친김이라 그런지 절세를 하는 방법에 대해 조목조목 알려주었다. 자기는 홍콩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해 두고 필요시마다 수출업자에게 돈을 송금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위스키의 병당 물대가 만 원이라면, 수출업자는 인보이스에 물대를 오천 원으로 발행하고, 수입업자는 인보이스를 근거로 L/C를 개설하거나, T/T(telegraphic transfer, 전신환)로 물대를 수출업자에게 보낸다. 그리고 수출업자로부터 인도받은 위스키를 통관할 땐 인보이스에 기재된 물대를 근거로 세금을 신고 납부한다. 나머지 미지급 물대 오천 원은 홍콩의 페이퍼 컴퍼니 계좌에서 수출업자에게 송금한다는 거였다.
위스키의 경우, 물대도 물대지만 세금이 엄청나다. 세금은 관세, 주세, 교육세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관세는 물대의 30%, 주세는 물대 + 관세의 72%, 교육세는 주세의 30%이다. 위스키의 병당 물대가 원화로 1만원이라면, 세금은 무려 만 오천여 원이다. 수출업자와 짜고 반값인 오천 원이 기재된 인보인스를 발행하여 만병을 수입한다면, 무려 칠천육백여만 원을 절세하는 셈이다.
그 날 밤 술자리에서 남 사장은 절세를 강조했다. 그렇다고 자기가 절세를 삼시 세끼 밥 먹듯이 자주 하는 것은 아니고, 회사가 문을 닫지 않을 정도로만 한다고 했다.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의 입에서 탈세(脫稅)라는 표현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는 말 한마디에도 그만큼 용의주도했던 거였다. 처음엔 절세라는 표현이 생뚱맞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행여 자기 말을 지나가는 쥐라도 들을세라, 끝까지 반어적인 수사(修辭)로 표현하는 그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P마트와 거래를 튼 이후로 나는 거의 매일같이 강박 수준의 긴장과 초조와 돈에 쫓겨 왔다. 남 사장으로부터 절세에 관한 조언을 들었을 때, 어떤 거대한 기운이 꽉 막힌 체증을 헤쳐 나오기라도 하는 듯 용솟음쳤다.
나는 그가 알려준 여러 가지 방법 중 나에게 맞는 방법을 선택해 지난 2월부터 프랑스의 와인 제조사들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았고, 인보이스를 허위로 발행하는 게 가능하다는 제조사들 중 좋은 조건을 제시한 제조사와 비율을 조율해왔다. 그러다가 지난 5월에야 마침내 6 : 4의 비율로 인보이스를 발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관세청에 신고하는 인보이스에 기재된 물대가 6이고, 탈세용 물대가 4이다. 환율이 1,050원일 때, 병당 6.7us$짜리 와인 3만6천병을 수입하기로 계약하였으니 물대 총액은 241,200us$, 원화로 2억5천3백여만 원이다. 지난 5월에 L/C를 개설하면서 인보이스 상의 물대인 1억4천3백여만 원(136,800us$)을 은행에 예입해 두었고, 탈세를 위한 물대인 1억9백여만 원(104,400us$)은 암달러상에게 us$로 맞바꾸어 외항선원을 통해 와인 제조사에 전달했다.
내 말을 듣고 난 아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며 관행이란 본시 고위 관료나 대기업 회장들한테나 통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소시민 나부랭이들한테는 일종의 탐욕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탈세한 금액이 모두 얼마냐고 물었다.
“이번에 수입한 3만6천병에 대해 대략 2천8백만 원쯤 될 거야.”
아내는 썩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매월 적자에 허덕이는 현실과 처갓집을 담보로 꿔 온 자금 때문인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와인 선물세트 포장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사흘 후에는 1만2천 세트의 포장을 마쳤다. 또한 대부업체 구 실장으로부터 1천7백여만 원이 통장에 입금되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어 보세창고에 남아 있던 와인 1만2천병도 모조리 통관해서 운송해왔다.
열흘 후에는 이윽고 1만8천 개의 선물세트를 포장지 포장까지 끝낸 후 두꺼운 종이박스에 쇼핑백과 함께 열 세트씩 넣어 황 테이프를 쳤다. 또한 P마트 40개 점포의 초도 발주량 8천 세트를 각 점포별로 배송 완료했다. 남아 있는 1만 세트는 대목에 판매가 잘 되는 매장에 집중적으로 공급해서 판매할 참이다. 판매도우미 또한 40명 전원 여대생을 채용하여 교육까지 마쳤다.
매장에 진열된 일반 상품이 일제히 철수되고, 그 자리에 추석 선물세트 상품이 진열되던 날이었다. 낮 동안 낮게 가라앉아 있던 먹구름 떼가 밤이 되자 그예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사나운 기세로 쏟아졌다, 서울 지역의 P마트 매장에 와인 선물세트를 진열한 후 본사 식품매입부에 들렀던 오 과장이 밤늦게 회사로 돌아왔다. 그는 A4 용지 80쪽짜리 추석 선물세트 전단지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전단지에 나와 있는 선물세트 중 주류 코너를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니 한쪽 귀퉁이에 우리 회사의 선물세트도 실려 있었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으로 구성된 선물세트 사진 상단에는 검정색 글씨로 ‘딸보와인세트’라고 표기되어 있었고, 하단에는 ‘39,900원’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엇비슷한 가격대의 타사 와인 선물세트가 나란히 실려 있었다. 페이지를 뒤로 넘겨 다음 장에 나와 있는 와인 선물세트를 건성으로 훑어보던 차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와인이 눈에 띄었다. 명절 선물세트라는 게 케이스도 없고, 포장도 되지 않은 채 질 낮아 보이는 쇼핑백이 전부였다. ‘어째 저런 걸 명절 선물세트라고……’ 나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려는 순간, 언뜻 눈이 확 뒤집힐 만큼 강렬한 문구가 눈에 들어와 아연 소스라쳤다.
나는 눈알을 레드 와인 + 쇼핑백으로 이루어진 선물세트 사진 위아래로 궁굴리면서 진하게 표기된 문구를 재차 확인했다. 사진 상단에는 붉고 진한 글씨로 ‘1+1’이라고 표기되어 있었고, 하단에는 ‘9,990원’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이것은 곧 9,990원짜리 하나를 사면 덤으로 하나를 더 준다는 뜻이다. 죽을 똥을 싸서 기껏 선물세트 포장을 끝내 놓았더니……, 산통을 깨는 것도 유분수지……. 선물세트의 품질과 모양새를 떠나 저렴한 가격대의 선물을 찾는 고객이 대부분인 마트에서 몇 갑절이나 더 비싼 상품이 제대로 팔릴 리 만무하다. 나는 이 뜻밖의 문구에 등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 오 과장? 이, 이리 와봐. 도대체 이게 어, 어떻게 된 거야?”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화를 참다못해 격한 목소리로 불렀더니, 오 과장은 득달같이 달려왔다. 나는 오 과장의 얼굴에 전단지를 집어던지듯이 거칠게 들이대며 고함을 내질렀다.
“왜, 왜 여태 말 안했어? 이게 어, 어떻게 된 건지 말, 말해 보란 말야. 이 새끼야!”
“……”
오 과장은 얼이 빠진 양 아무러한 대답도 없이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추석 선물세트를 준비하느라, 지난 5월부터 사흘이 멀다 하고 P마트 본사 식품매입부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바보가 아닌 이상 내용을 알게 마련이었다.
“빗대지 말고 곧이곧대로 말해 봐.”
내가 노여움을 추스른 척하며 점잖게 말을 하자, 꿈쩍 않고 서 있던 오 과장이 벌겋게 상기된 표정으로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저도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구매 바이어 말로는 P마트가 프랑스의 와이너리에서 직접 수입하여 이번 추석 때부터 PB(private brand) 상품으로 내놓는다고 했어요. 차후론 명절뿐만 아니라, 상시 판매할 거라고도 했어요. 저도 이렇듯 소주보다 싼 가격으로 출시될 줄은 몰랐죠. 출시 가격은 아까 P마트 식품매입부에서 전단지를 보고서야 알았어요. 참, 사장님? 구매바이어 말을 들어보니 본사 임원이 사장님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는 듯 했어요”
그랬군. 이 비열한 새끼. 힘깨나 쓰는 자리에 있단 말이지. 지난 설 때 판매촉진비 청구액이 지나치게 과다해 항의한 걸 가지고 적의를 품고 앙갚음하려 들다니……. 정말 치사하고 배린 놈이로군!
P마트에서 PB상품으로 출시한 와인의 라벨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지난 3월에 인보이스를 이중으로 발행해줄 수 있는 와인 제조사를 찾던 중에 본 와인이었다. 그 당시 제조사 측과 협상과정에서 그들은 병당 3us$에 네고되면, 인보이스는 얼마든지 이중으로 발행해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라벨에 표기된 그림과 글자가 중후한 맛이라곤 없고, 보면 볼수록 난삽하게 느껴져 포기했다가 그만 한 조건을 제시하는 제조사를 찾지 못해 다시 연락을 했을 땐, 인보이스를 두 장(병당 1.5us$ 두 장) 발행하는 조건으로 이미 계약을 마쳤다는 것이다. 계약한 수입업자가 누구냐고 캐묻듯이 물어보았으나 그들은 일절 함구했다. 그때는 조금 아쉽긴 했어도 그다지 궁금증이 일지 않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P마트 측에서 내놓은 와인은 덤 상품까지 포함하면 2병에 9,990원인 셈이다. 제조사에서 나에게 제시한 가격인 병당 3us$에 수입했다면, 세금을 포함한 병당 원가는 4,800원쯤 된다. 여기에서 부대비용, 즉 쇼핑백과 점포별 운송비가 병당 400원 가량 된다. 그러므로 와인 선물세트 원가는 와인 원가에서 부대비용을 더하면 병당 5,200원 가량 되는 셈이다. 탈세를 하지 않았다면, 한 세트를 판매할 때마다 400원 가량 밑지는 장사다.
설령 P마트 측이 인보이스를 반액으로 발행했다는 방증 자료가 있더라도, 그들이 돈을 송금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탈세를 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탈세를 했다는 실마리를 찾기란 여간 어렵지가 않다. 더욱이 P마트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대기업이지 않은가.
나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곤 허공을 향해 울부짖듯 토해낸다. “하청 업체와의 상생 따윈 안중에도 없이 제 배만 채울 탐욕으로 가득 차 계약서도 없는 판매장려금을 허위로 작성하여 납품 대금에서 빼앗듯이 공제하더니, 그도 모자라 기어이 숨통을 막으려 드는구나!” 폭우가 쏟아지는 밤하늘이 부서져 내리기라도 하듯 사방으로 시퍼런 금이 쩍쩍 가더니 ‘쿵 우르릉!’ 갈래갈래 찢기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끝>
첫댓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던 '탈세'를 3인칭 전지적작가시점'으로 바꿔 재조명해 봤어요.
어느 것이 좋을까요?
때는 2010년 대 여름의 막바지이고 장소는 부천시 변두리의 100평 남짓한 조립식 건물.
주제 하나, 갑질이 난무하는 상거래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소시민(을)의 비애.
주제 둘, 상거래상 공정 거래 위반을 일삼는 갑에 대한 비판.
1인칭 시점인 '탈세'와는 주제가 다소 상이함.
사람 사는 이야기 사실적 묘사에 매료 됩니다.
을도 갑이 되기위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나면 후덕한 갑이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하리라
(2015 신춘 문예소설 당선 유력) 저의 예견
과연 니발이 99번째로 존경하옵는 선생님의 평가로군요. 하하
단편소설의 생명은 조직(플롯) 제시(설명과 묘사), 주제의 형상화 정도이고, 부수적으로 작가 개인의 '문체'라고 여기며 소설을 쓰긴 쓰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1년에 1편씩 창작하면서 '문체'를 '업' 시킬 참입니다.
감사합니다, 샛별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