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71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천하의 길지 남연군 묘
남연군 묘의 지세는 한마디로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을 모두 다 갖추었다. 뒤로 가야산 서편 봉우리에 두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 있는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오른쪽으로 옥양봉과 만경봉이 덕산을 거치면서 30리에 걸쳐 용머리에서 멎는 지세가 청룡이 되며, 왼쪽으로 백호 지세가 가사봉ㆍ가영봉을 지나 원화봉으로 이어지는 맥이 금청산 원봉을 감싼 자리다. 이곳은 풍수지리에 문외한일지라도 묘 뒤편 가야산의 능선들이나 묘 앞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덕산 쪽만 바라보아도 명당이라고 느낄 만큼 빼어난 곳임을 알 수 있다. 나라 안 제일의 명당이라 알려진 남연군 묘 건너편 서원산 자락에 보덕사가 있다.
보덕사(報德寺)는 남연군 묘를 쓴 후 아들 고종이 보위에 오르자 보은의 뜻으로 지었으며,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51년 2월에 비구니 수옥이 중창하였고, 1962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으며, 가야사의 옛 절터에서 옮겨온 깨진 석등이 남아 있어 번성했던 가야사의 옛 모습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남연군 묘
남연군 묘는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을 모두 다 갖추었다. 뒤로 가야산 서편 봉우리의 석문봉이나 앞쪽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덕산 등, 지세가 빼어나서 나라 제일의 명당이라 알려졌다. 그 건너편 서원산 자락에 보덕사가 있다.
한편, 지금은 예산군에 소속된 덕산이 현이었을 때 전세(田稅)를 서울로 옮겨갔던 기록이 『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1월에 명령을 내려 3월에 배에 싣는다. 거쳐 가는 물길은 면천 강문포에 이르러 한번 쉬고, 강문포에서 아산 대각포에 이른다. 대각포에서 우평포에 이르러 한번 쉬고, 우평포에서 홍주 율포에 이르러 한번 쉬고, 율포에서 진두포에 이르러 한번 쉬고, 진두포에서 수원 여옹해에 이르러 한번 쉰다. 여옹해에서 도리해에 이르러 한번 쉬고, 도리해에서 남양 팔산해에 이르러 한번 쉬고, 팔산해에서 강화 초지도에 이르러 한번 쉰다. 초지도에서 손돌항에 이르러 한번 쉬고, 손돌항에서 통진 조강에 이르러 한번 쉬고, 오도치포에 이르러 한번 쉬고, 오도치포에서 통진 봉상에 이르러 한번 쉬고, 봉상에서 양천항에 이르러 한번 쉰다. 만약 순풍을 만나면 네댓새면 경강(京江)에 도착한다. 대동과 균세도 이와 같다.
지금의 예산군 대흥면은 조선시대에 대흥군이었다. 본래 백제의 임존성 또는 금주(今州)라고 불리던 고을로 신라의 경덕왕이 임성군(任城群)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대흥으로 고치고 현종 9년에는 홍주에 딸렸다가 명종 2년에 감무가 되며, 조선 태종 7년에 군으로 승격되었고 13년에 다시 현감이 되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봉수산으로, 그 산에 대련사(大蓮寺)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1914년 군ㆍ면 통폐합에 따라 예산군에 딸린 하나의 면이 되고 만 대흥현의 객사는 현재 대흥초등학교로 변했고, 객사에는 견사정(見思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원래 이름은 포정정(布政亭)이었다. 이맹상의 시에 “포정정 동쪽에선 흰 달을 맞이하고, 관어지 북쪽에선 찬 샘물을 끌어왔다”라고 하였던 대흥군의 관아 자리엔 현재 대흥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학교 담벼락에는 영의정 김제의 영세불망비를 비롯해 대흥을 거쳐간 20여 명의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 너머에는 대흥군의 현청인 임성아문이 있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제의 부흥군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임존성이 있다.
임존성(任存城)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제의 복신, 지수신, 흑치상지 등이 당나라 장수 유인궤에게 대항하던 곳이다. 지금의 본 읍 관아 서쪽 13리 지점에 쌓은 석성으로 그 둘레가 5,194척이며 그 안에 우물 세 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이 임존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실려 있다. 이 성에서 공주와 부여가 80리쯤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백제가 수도를 웅진과 사비로 천도한 뒤부터 수도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임존성은 높이 480.9미터의 봉수산이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에워싼 테뫼형 산성으로 일명 봉수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성벽 구조는 내탁외축(內托外築)이며 둘레가 약 2,450미터로, 백제 때 축조된 산성으로는 최대 규모에 이른다. 세계에서 유일한 수정식 성으로, 가장 높은 곳에 우물을 파서 성안에 물을 모아두었다가 적이 공격할 때 물꼬를 터트려 곤경에 빠뜨리도록 특별히 고안되었다. 현재 성문과 수구문 그리고 우물지와 건물지가 남아 있다.
산성의 서쪽 산꼭대기와 동쪽 작은 봉우리로 이어지는 잘록한 허리 부분에는 남북으로 통하는 길이 있으며, 이 통로가 만나는 북벽에 너비 6미터의 1북문지가 있다. 남문지는 조금 서쪽으로 치우쳐서 성 밖으로 갈라지는 언덕과 성벽이 연결되는 지점에 있으며, 산의 주봉에는 약간 넓은 평지가 있어 건물이 있었을 곳으로 여겨지는데, 시계가 확 트여서 전망이 좋다. 또한 남쪽 성벽 안에도 넓은 평지가 지형에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 성은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한산의 건지산성과 함께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백제의 멸망 뒤 주류성을 근거지로 한 사비성 탈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최후의 거점인 이 성에서 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신라군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여 나당 연합군을 괴롭히는 한편,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던 것이다. 백제부흥군은 흑치상지 장군을 중심으로 하여 3만 명쯤의 병력을 거느린 채 이곳 임존성에 진을 쳤다. 7만이 넘는 당나라 군대는 백제군의 용감한 기상에 놀라 일단 물러갔으며, 그 이듬해에 유인궤를 앞세워 다시 공략해왔다.
그 무렵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왕자 풍이 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일어나 백제 군사의 사기는 크게 꺾였으며, 결국 흑치상지는 유인궤에게 투항하였다. 비운의 성 임존성은 그 뒤 후삼국이 쟁투를 벌이던 때에도 결전장이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관할에 있던 임존성을 공격하여 후백제의 장군 형적 등 3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