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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스 4:17-24
17 왕이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그들 동관들과 강 건너편 다른 땅 백성에게 조서를 내리니 일렀으되 너희는 평안할지어다
18 너희가 올린 글을 내 앞에서 낭독시키고
19 명령하여 살펴보니 과연 이 성읍이 예로부터 왕들을 거역하며 그 중에서 항상 패역하고 반역하는 일을 행하였으며
20 옛적에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큰 군왕들이 있어서 강 건너편 모든 땅이 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다 바쳤도다
21 이제 너희는 명령을 전하여 그 사람들에게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22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 하였더라
23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스 4:17-28 / 그러자 아닥사스다왕이 이런 회답을 보냈다. `총독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사마리아 성읍을 비롯하여 유브라데강 서쪽의 전 지역에서 근무하는 총독의 동료 관리들에게 보냅니다. 나는 먼저 그대들의 평안을 빕니다. 18) 그대들이 보낸 글은 정확하게 바사어로 번역하여 내 앞에서 읽게 하였소. 19) 내가 역대 궁중 기록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하였더니 그 성읍은 옛날부터 끊임없이 왕들에게 반역하고 반란자들과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가득 찬 곳으로 입증이 되었소. 20) 일찍이 예루살렘에서는 위대한 왕들이 나타나 유브라데강 서쪽의 전지역을 통치하고 주민들에게서 조공과 세금과 관세를 거두어들이며 부역에 동원한 일도 있었소. 21)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곳 주민들에게 당장 재건 공사를 중단하도록 명령하십시오. 꼭 그 성읍을 재건해야 된다면 내가 다시 분명하게 명령을 내려 보내겠소. 22) 여러분은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이 일을 중단시켜 이 나라에 더 이상 피해가 없도록 하십시오.' 23) 아닥사스다왕의 회답이 도착하자 그 초본이 르훔과 심새와 그들의 동료 관리들에게 낭독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관권과 군사력을 동원하여 유다인들의 성읍재건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24) 예루살렘의 성전 공사도 중단되어 있다가 ㄱ) 다리오 2세의 즉위 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였다. (ㄱ. BC 420년)
아닥사스다 왕은 강 서편의 신복들에게서 온 고발장을 받아들이고, 예루살렘 성전공사를 중지시켰습니다.
왕의 결심(17-22) 여러 고발장이 결국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조서란 판결이란 뜻입니다. 왕이 그들의 고발장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에 대한 편지를 르흠과 심새에게 보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변방의 반란 때문에 신경이 무척 날카로웠습니다. 왕은 그들의 제안에 따라 예루살렘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예로부터 열왕을 거역한 오랜 역사가 있었다는 데 동의합니다. 큰 군왕 다윗과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대에는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영토로 소유하고, 조공, 관세, 통행세를 받았습니다(왕상 4:21, 24). 결국 아닥사스다는 즉시 성곽 공사를 중지하라는 것으로 조서를 끝맺습니다. 왕실의 전통상 한 번 정해진 왕의 정책은 변개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닥사스다는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는 면책 조항을 추가함으로써 약간의 융통성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 조서는 왕의 심경에 변화가 있을 때까지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중단됨(23-24) 르흠과 심새와 동료들의 의도대로 되었습니다. 따라서 왕의 명령을 실천하는 데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급히 달려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권력으로 억제하였습니다. 부분적으로 세워지고 있었던 성벽을 무너뜨리고 불을 질렀습니다(느 1:3, 4). 이들의 억압에 대해 유다인들은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항은 곧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공사가 페르시아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중단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한 일을 하던 중에도 어려운 일이 닥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다음의 일을 기도하는 것이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적용: 유다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예배를 회복하고, 성전을 재건하며, 민족과 하나님의 관계를 재확인하라는 분명한 소명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과 복음에는 적대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수영을 배우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수영코치를 찾아가 “나는 평생 수영을 못 배우나 봅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수영코치는 이 사람에게 물에 들어가 헤엄치라고 한 후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더니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물과 싸우려 하지 말고 물이 당신을 떠받쳐 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다음 힘을 사용해서 헤엄쳐 보세요.” 수영코치 말대로 하니 떠서 헤엄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힘"으로 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주님께 맡겨보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중지된 성전 재건 공사
스 4:17-24 / 푸른교회
본문은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이 사마리아인들이 거짓과 모함으로 올린 고소장을 보고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 재건 공사를 중지하도록 명령한 조서입니다.
<... 그 사람들에게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21절).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24절).
이렇게 하여 결국 16년간이나 성전 재건이 중단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의 계략이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16년 후 마침내는 성전 재건이 재개되어 6년 만에 그 완공을 보게 됩니다. 성벽 재건은 느헤미야가 돌아와 불과 52일 만에 그 재건을 종료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는 일에는 사탄의 훼방이 따릅니다. 그리고 사탄의 그 방해공작이 늘 성공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깐일 뿐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깁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
사실 마귀와의 싸움은 이미 우리의 승리가 보장된 것입니다. 분명 힘겨운 영적 싸움이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굶주린 사자처럼 포효한다 해도 그건 기껏 효과음에 불과합니다. 철장 안에 갇혀 있으므로 실제 우리를 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이 허락하신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담대함으로 주어진 영적 싸움에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때로 우리 인생에는 벅찬 바람이 불어오기도 합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그때 흔히 우리는 동요하기 쉽습니다. 부디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우심과 평화와 사랑과 권능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으로 반드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적용>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인들의 성전 재건을 훼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닥사스다 왕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올린 거짓 고소장을 믿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가 몇 년간 중지되었을까요?
<기도>
주님,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임에도 악한 세력들이 끝까지 그 일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다소 지연되기만 했지 결국 하나님의 뜻은 이뤄졌습니다. 주님, 저희도 마귀의 위협과 훼방에도 불구하고 포기하는 일 없이 주의 일에 더욱 매진하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마지막 시대에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였사오니 늘 근신하여 기도하므로 패하지 않고 반드시 승리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에스라 4:17-24
찬송 205장 / 정읍 하이랑교회
지난 단락에서 언급된 사마리아인들의 고소를 받아들여서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 성벽의 복구 공사를 중지시켰다.(17-23절)
아마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과거의 유대 백성들이 앗수르나 바벨론 제국에
항거한 전례가 있다는 사실이 참작된 듯하며 또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강성함을 염두에 두어
다시는 그와 같은 번영을 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성벽 재건 중단 사건은 느헤미야가 3차 포로귀환을 주도하여 성벽 재건을 추진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느1:1-3)
한편 24절은 23절까지의 성벽 재건과는 관련이 없는 1-5절까지 있었던 성전 재건 방해 사건의 결과를 소개한다.
즉 성전 재건이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적어도 16년 이상 중단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이로써 유대 백성들을 회복시키사 다윗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삼하17:16)이 다시금 무너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후 다리오왕 제 2년, 즉 주전 520년에 이르러 공사가 재개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신실히 지키심이 재삼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성전 재건이 중단된 이유를 사마리아인들의 방해와 같은 외부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본서와는 달리 학개 선지자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유대 백성들의 나태해진 신앙 때문이라고 질책하고 있다.(학1:1-11)
이처럼 학개 선지자는 비록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공작이 성공하여 성전 재건이 중단되기는 했을지라도 유대 백성들이 바사의 왕에게 적극적으로 탄원하거나 여타의 시도를 하지도 않은 채 최소한 16년 이상을 판벽(板壁)한 집에서(학1:4) 허송세월하고 있었던 것을 성전 재건 지연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다.
이에 우리는 자신의 처해 있는 상황과 여건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영위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명에 충성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자포자기 하거나 허송세월만 하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역경 속에서 오히려 더 큰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성도의 저력이다.
20절) 「옛적에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큰 군왕들이 있어서 강 건너편 모든 땅이 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다 바쳤도다」
아닥사스다 왕이 이스라엘이 옛적에는 강대국이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큰 군왕’ 이란 일차적으로 다윗과 솔로몬을 가리킨다. 다윗과 솔로몬 시절 이스라엘은 애굽강에서부터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며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거둬들였다.
그와 같은 강대국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했던 말씀의 성취요(신28:1-13) 그리고 충성스러운 다윗으로 인해 하나님께 얻은 영광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영광과 축복은 ‘엣적’ 일이 되고 말았다.
스룹바벨 당시 이스라엘은 ‘죽은 나라’나 다름없었다.
왕도 없고, 군대도 없고, 백성들의 수효도 적었으며, 바사 제국의 한 변방이었을 뿐이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주신 선민의 축복을 스스로 유지하지 못하고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복 주신 하나님 대신 우상들을 섬기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의 본분을 망각한 채 탐심과 음행과 온갖 죄악으로 행했기 때문이다.(사 11:4-6, 10-31)
하나님께 은혜받는 일은 매우 귀중한 축복이다. 그러나 그 축복을 유지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들의 삶의 불행과 행복이 그 일로 결정된다.
성경에서 불행하게 된 사람들을 보면 축복과 은혜를 받지 못하여 불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 받은 복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스스로 상실했기에 불행해졌다.
사울 왕도 받은 복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고, 솔로몬도 스스로 타락했다.
가룟 유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복을 받고서도 그 은혜를 스스로 저버렸기에 결국 자살을 택하는 비극적 인생이 되었다.
‘받는 것’ 만큼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선택받은 은혜도 중요하지만 그 선택받은 은혜를 저 천성에 들어갈 때까지 지키는 일이 우리들의 관건(關鍵)이다.
잠언서 기자는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잠16:17)고 했고 시편 1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길과 그 행위를 피한다고 교훈한다.(시1:1)
하나님께 은혜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그 은혜를 보전하는 참 성도는 흔치 않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잘 보전하여 옛날의 신앙 생활을 회고하며 한숨짓는 사람들이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과거보다 오늘이, 또 오늘보다 장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과 의와 진리를 잘 보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4:7-8)
에스라 4:17-24
* 권력으로
1. 아 옛날이여(20)
20절을 보라.
“옛적에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큰 군왕들이 있어서 강 건너편 모든 땅이 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다 바쳤도다”
아닥사스다 왕이 조사해 보니 이스라엘도 한 때는 잘 나가는 민족이었다. 큰 군왕들이 있어 주변 나라들에게서 세금을 받았었다. 여기서 말하는 ‘큰 군왕들’은 다윗과 솔로몬이다. 이들이 왕으로 있을 때 이스라엘은 가장 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른 지금 이스라엘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
우리의 신앙이 이러면 안 된다. 옛날에는 좋았으나 지금은 형편없는 신앙이면 안 된다. 옛날보다 지금이 더 좋은 신앙이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2장 1절 이하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잃어버린 교회였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이 더 좋을 수 있길 바란다.
2. 권력으로(23~24)
23절을 보라.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이 때 성전공사가 중단된 시기는 B.C. 535년이다.
24절을 보면,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다리오 왕 제이년은 B.C. 520년이다.
그럼 몇 년 동안 성전 공사가 중단되었단 말인가? 대략 15년 정도 기간 동안 성전재건 작업이 중단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력’이라는 단어이다.
정치적 권력이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신앙과 종교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예배당과 건축과 관련된 내용 뿐 만 아니라 예배나 기도나 교육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몇 년 저 코로나 시대에 권력이 어떻게 교회의 예배와 말씀에 영향을 미쳤는지 경험했다. 비참한 시절이었다. 앞으로 또 그런 날이 오지 말란 법 없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세워져 교회의 예배를 중지시키는 일이 또 있을 것이다.
다니엘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기도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지금 다시 교회와 성도들은 준비해야 한다.
다시 ‘그 때처럼’ 예배와 말씀이 중단되어야 하는 시기가 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의 신앙은 세워져야 하는지... 고민하며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간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