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국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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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역사
에스토니아는 덴마크와 독일,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 등 지역 강국에 의한 피지배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수도 탈린(Tallinn)은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도시 중 하나로서, 특히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에스티 공화국
Eesti Vabariik
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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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이전
현재 에스토니아 지역은 BC 8000년경 거주한 수렵어로인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나 BC 3000년경 동부에서 이주한 빗살무늬토기 사용 종족(Finno-Ugric)이 정착하여, 에스토니아인의 조상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154년 아랍 탐험가 알-이드리시(al-Idrisi)의 ‘지구에 대한 묘사(Description of Earth)’에 의해 최초로 문명권에 소개되었다. 13세기 초 독일과 덴마크 등이 주도한 발틱해 선교원정대(crusade)가 진출하기 전까지 에스토니아 토착민들은 지역공동체 단위로 생활했다.
중세(1227~1558)
1201년 리가(Riga)에 발틱해 선교 활동 기지를 확보한 독일 브레멘 주교 알베르트(Albert) 세력이 덴마크와 연합하여, 1208년부터 에스토니아 지역에 대한 진출을 추진하였다. 1219년 덴마크가 에스토니아 북부 지역에 진출하여 덴마크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탈린(Tallinn)을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1227년 사렘마(Saaremma)섬 전투에서 토착 세력이 독일-덴마크 연합 세력에 완패함으로써 북부 지역은 덴마크, 여타 지역은 독일 주교단과 독일계의 리보니아(Livonia) 기사단이 분할 점령하였으며, 에스토니아인들은 봉건 영주의 농노로 전락했다.
1343년~1345년간 발생한 에스토니아인들의 대규모 봉기가 진압된 후 덴마크가 에스토니아 북부 지역을 독일 기사단에 매각함으로써 에스토니아는 16세기 중반까지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3세기 중반 이후 독일 상인들이 이주, 정착하면서 탈린, 타르투(Tartu), 파르누(Parnu), 빌리안디(Viljandi) 등이 한자도시 동맹의 회원이 되었으며, 1520년대에는 종교개혁 운동이 확산되었다.
스웨덴 지배기(1558~1710)
러시아의 세력 확장으로 시작된 리보니아 전쟁(Livonian War, 1558~1583) 결과로 에스토니아 중동부는 덴마크에, 북부는 스웨덴에, 남부는 폴란드에 분할 지배되었다. 리보니아 전쟁에 뒤이어 발발한 스웨덴-폴란드 전쟁(1600~1629)에서 스웨덴이 승리하여, 1629년 아르트마르크 평화 조약(Altmark Peace Treaty)이 체결되었고 이에 따라 에스토니아는 1710년까지 80여 년간 스웨덴에 복속된다. 스웨덴 지배 기간 중 오늘날 북부 에스토니아 지역은 탈린이 주도(州都)가 되는 에스토니아(Estonia) 주와 남부 에스토니아 지역은 리가(Riga)가 주도가 되는 라트비아(Latvia) 주로 편성되어 1917년까지 이 행정 구역을 유지했다.
1632년 타르투 대학을 설립하고, 농민 초등학교 제도를 도입했다. 또 이 시기에는 에스토니아어 기도문을 간행하는 등 문예가 크게 발전했다.
제정 러시아 지배기(1721~1918)
18세기 초 러시아의 피에르(Peter) 대제가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폴란드, 덴마크와 연합하여 스웨덴에 대항하여 일으킨 북방전쟁(the Great Northern War, 1700~1721) 결과로, 에스토니아는 1710년 스웨덴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에스토니아는 1721년에 체결된 우사카우풍키(Uusikaupunki) 평화조약에 의해 러시아에 합병된다.
리보니아 전쟁 및 북방전쟁으로 파괴된 도시가 재건되고 많은 건축물이 건축되었으며 인구도 증가했다. 피터 대제가 서유럽 문명 수용 차원에서 에스토니아 내 독일계의 특권적 지위를 용인함으로써 독일계 문화가 크게 번성하였다. 또 1816년~1819년 개혁 조치로 농노제가 폐지됨으로써 에스토니아인들은 농노적 지위에서 해방되었으며 에스토니아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상승에 따라 19세기 중반 이후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민족자각(National Awakening) 움직임이 확산된다.
특히, 1857년 요한 볼데마르 얀센(Johann Voldemar Jansen)이 타르투에서 최초의 에스토니아어 주간 신문인 「빠르누 우체부(Parnu Postimees)」를 발간한 데 이어 1865년 최초의 극단인 ‘바네무이네(Vanemuine)’가 설립되었으며, 1869년에는 타르투에서 최초의 에스토니아 노래 축제(all-Estonian Song Festival)가 개최되어 민족의식이 점차 고조되었다.
독립공화국 시기1918(~1939)
1917년 3월 에스토니아인의 요구로 에스토니아 주와 리보니아(Livonia) 주의 북부 지역 및 세인트 상트 페테르스베르그(St. Petersberg) 주의 일부로 속했던 나르바(Narva)가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통합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붕괴되고 새로 수립된 볼세비키 정권이 독일군에 밀려 퇴각하던 1918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는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곧이어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독일의 1차 대전 패전으로 1918년 11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8년 11월 28일부터 시작된 에스토니아를 다시 장악하기 위한 러시아군의 공세를 에스토니아는 독립전쟁을 일으켜 막아냈고,
1920년 2월 2일 러시아와 타르투(Tartu)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립을 승인 받아 1940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1939년 8월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Molotov · Ribbentrop Pact, 몰로토프 · 리벤트로프 조약)의 비밀협정에 따라, 에스토니는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묵인되었으며, 러시아의 압력으로 1939년 9월 28일 상호지원협정이 체결되었고, 같은 해 10월 중순 러시아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소련 지배기(1940~1991)
1940년 6월 18일 대규모의 소련군이 에스토니아에 진주하였다. 1940년 8월 6일 에스토니아는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가 정착되었다. 1941년 6월 14일에는 발트 3국에서 대규모의 시베리아 추방이 시행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의 공격으로 에스토니아는 오스트란트(Ostland)의 일부가 되었으며, 억압 체제하의 수용소에서 5,500여 명이 사망했다.
에스토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산업의 45%, 철도의 40%가 파괴되었으며 인구의 약 20%인 20만여 명이 희생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1940년~1944년간 8만여 명이 서방으로 피신했다. 1944년 소련 공군의 공격으로 나르바(Narva)가 피해를 입고 탈린(Tallinn) 주거지의 약 30% 이상이 파괴되었다. 1944년 9월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재점령하였으며, 국경 지역의 에스토니아령 나르바와 페체리(Petseri) 지역이 소련에 편입되고 독일 점령 당시 반(反)소련 인사들이 대규모로 검거되었다.
1946년~1948년 지방에서 소위 ‘포레스트 브레트렌(Forest Brethren)’이라는 반(反)소련 게릴라 활동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1949년 3월 약 2만 명이 시베리아로 이송된 후인 1950년대 초반 반(反)소련 저항운동은 약화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공산당이 가장 중요한 정치 조직이 되었으나 순수 에스토니아인의 당원 비율은 1941년 90%에서 1952년 48%로 오히려 감소했다. 스탈린 사망 이후 에스토니아는 핀란드와의 교류가 재개되어, 1960년대에는 핀란드 TV 방송 청취가 가능했다. 에스토니아는 핀란드 방송 청취를 통해 여타 소련 점령국과는 달리 서방국가들의 동향과 문화에 대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으며, 이는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당시 에스토니아가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
1985년 소련의 개혁 개방 정책 추진을 계기로 독립운동이 태동했고,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 공화국 최고위원회(Supreme Council)가 주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198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 조약(Molotov·Ribbentrop Pact,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협정의 무효를 주장하는 발트 3국의 시위를 통해 독립 의지를 세계에 공표했다. 1991년 8월 발생한 소련 쿠데타로 소련 정국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같은 해 8월 20일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은 이를 승인하였다.
에스토니아 정치
1. 에스토니아의 정치제도
1) 대통령
2) 의회
3) 정부 내각
4) 사법제도
5) 기타 주요 헌법기관
6) 지방행정 조직
7) 선거제도
2. 에스토니아의 국내 정세
1) 에스토니아의 1990년대
2) 에스토니아의 2000년 이후
에스토니아 경제
에스토니아는 1991년 구(舊)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10% 이상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기록하다가, 대외 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국가로서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2010년부터 빠르게 회복하여, 현재 5%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전 세계에서 IT 인프라가 가장 잘 구축된 나라 중 하나로 IT산업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며, 탈린항 개발 등 물류 산업과 관광 산업을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빠른 경제 성장으로 인한 민간소비 및 투자의 지속적 증가로 경기 과열을 억제하기 위해 긴축재정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국가 중 재정적으로 가장 건전한 국가 중 하나이다.
거시경제
에스토니아는 1991년 독립 이전 소련 영향권 국가 중 경제적으로 번영한 국가군으로 분류되었으나, 독립 후 1991년~1994년 중 경제 규모가 약 25% 축소되었다. 한편, 에스토니아 정부는 1991년 중반 독립 선포 이전에 이미 자유 시장 경제 정책을 도입을 추진하였고, 1991년 11월 도매가격 자유화와 1992년 보조금 지원 철폐, 사유화 등 포괄적인 경제 개혁을 실시했다. 특히, 대외 교역의 경제 개방화 수준이 높아 농산물 등 일부 품목의 경우 무관세였다.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과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 가입 이후 오히려 관세가 부과되었다.
1992년 6월 통화개혁으로 자국 통화로 크룬(kroon, EEK)을 도입하여 독일 마르크화(DM)에 연동하였는데 8크룬이 1마르크가 되면서, 1992년 한때 인플레이션율이 1,076%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구(舊)공산권 국가들에게 나타난 고질적 높은 인플레이션을 에스토니아는 성공적으로 억제하였다.
통관 무역을 비롯한 신규 형태의 서비스 산업이 점차 증가하고, 목자재 등 전통 산업이 회생하면서 에스토니아의 경제가 회복되었다. 2000년 경기가 회복된 이후 주요 교역국인 스웨덴, 핀란드의 경제 호황에 힘입어 높은 성장세를 지속 유지하고 있다.
공산권 붕괴 이후 발트 지역의 수려한 경관과 저렴한 여행 경비로 지역 관광 사업이 부흥하여, 1993년~2000년 기간 중 관광 산업이 연간 15% 성장하면서 주요 외화 수입원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2004년 5월 유럽연합 가입 이후 핀란드, 스웨덴, 독일 등 유럽연합 회원국 시민들에 의한 면세품 관광 붐이 점차 감소하였다.
독립 후 과감한 무역자유화 조치와 투자 급증 등으로 무역수지 적자가 계속 확대되었으며, 1997년 무역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 대비 32%로 최대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7년 러시아 금융 위기 이후 경제 활동이 둔화되면서 무역적자도 감소세로 돌아섰다.
1994년 이후 경상수지가 적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1997년 수출 호조로 국제수지가 국내총생산의 11.4%에서 1999년~2001년 6% 미만 수준으로 하락하기도 하였으나 최근 2006년에는 14.9%로 증가했다. 에스토니아는 여행수지 및 운송 서비스 부문에서 강세를 보이면서 서비스 수지에서는 흑자를 보이고 있으나, 무역수지 적자 폭이 커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적극적인 규제 철폐 조치로 에스토니아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분류되는 등 투자 환경이 좋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외교역
구(舊)소련 공산경제권 당시에는 여타 발트 제국과 마찬가지로 에스토니아는 소련 일변도의 교역 흐름이었다. 1991년 기준 에스토니아 전 교역 중 수출입의 95%, 수입의 85%가 러시아와의 교역이었다. 그러나 1991년 독립 후 무역 다변화 추진했다. 최대 무역 상대국인 핀란드를 비롯하여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회원국과의 교역이 2005년 한때) 전체 무역량의 75% 이상을 차지했다.
에스토니아는 인구 134만 명으로 국내 시장이 작고, 무역 규모가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보다 커 대외 무역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이다. 중국 등 제3국과의 무역이 증가하고, 러시아산 원유의 송유국으로서 수출 비중이 증가하면서 2006년 전체 수출의 65%를 차지했던 유럽연합 편중 교역 현상이 다소 감소하고, 교역국 수도 증가하고 있다. 한편, 2007년 4월 소련군 동상 철거 논란 이후 러시아와 정치적 관계가 악화되면서 대(對)러시아 교역에 부정적 영향이 미쳤다.
주요 수출국은 핀란드로 전체 수출의 18%를 차지하고 있으며 스웨덴은 12%이다. 에스토니아의 수출은 핀란드, 스웨덴, 라트비아, 러시아 등 북구 국가에 집중되고 있으며 주요 수출품은 기계 장비, 원목, 의류, 식품 등이며, 수입품도 기계장비, 화학제품, 의류, 식품, 운송 장비 등으로 유사하다.
에스토니아는 핀란드 및 스웨덴 휴대폰 제조업체의 하청 업무를 수행하는 업체들이 집중된 관계로 부품을 수입하여 완제품을 조립 제조한 후 이들 국가에 다시 수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구 국가들과의 교역이 활발하다. 원목 가공 및 금속 제품 등의 분야에서도 하청 산업이 점차 발달하고 있다. 특히 식품류의 경우 러시아 등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국가군이 주요 수출시장이다.
에스토니아는 개인용 컴퓨터 중 82%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고, 인터넷 뱅킹 이용 비율이 72%,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납세 비율이 76% 등 인터넷 보급 및 사용 측면에서 유럽 전체 최상위권 IT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다.
유로존 가입
에스토니아는 1999년 1월 유로화 도입 이후 자국 통화를 독일 마르크화에서 유로화로 전환 연동하였다. 또,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가입 직후인 2004년 6월 리투아니아 및 슬로베니아와 함께 신환율조정메커니즘(ERM II, European Exchange Rate Mechanism II)에 가입하여, 2007년 유로존 가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수렴 기준 중 인플레이션율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는 유로존 가입 조건으로 재정 적자와 금리, 환율, 인플레이션 등 일정한 경제 기준을 충족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특히 인플레이션율은 최근 12개월간 회원국 최저 3개국 평균의 1.5%를 초과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당시 에스토니아의 인플레이션은 4.6%를 기록, 같은 기간 중 인플레이션 기준 상한선 3%을 초과하였다. 에스토니아는 2007년 이후 유로존 가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2010년 마스트리히트 수렴 기준인 재정적자, 환율, 금리, 인플레이션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고 유로존에 가입하였다. 2011년 1월부터 유로화 사용을 시작했다.
에스토나아 외교
에스토니아는 1991년 독립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및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가입 등 서구 편입 정책을 최우선 외교 과제로 설정하여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2004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 및 유럽연합에 가입했으며, 2010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에 가입했고 2011년에 유로존에 가입했다. 한편, 자국 내 러시아인의 지위 문제와 소련군 동상 이전 등 민감한 사안으로 인해 러시아와 긴장 관계가 간헐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탈냉전 후 서구 편입
에스토니아도 여타 발트 국가와 마찬가지로 1991년 독립 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와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가입을 최대 외교 정책 과제로 설정하였다.
에스토니아의 국방 예산은 연간 2억 달러 규모로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의 2% 수준이다. 자력으로는 공군 전력을 운영하는데 한계가 있어 북대서양조약기구 전력이 발트 지역 영공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탈린(Tallinn)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 협력 기관인 ‘북대서양조약기구 사이버방어 센터(NATO Cyber Defence Center)’가 설립되어 있다.
에스토니아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1997년 초 회원국 가입을 추천한 소위 ‘룩셈부르크 그룹’이라고 불리는 동구 5개국 중 유일한 구소련 국가였다. 2002년 12월 코펜하겐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신규 가입국을 최종 확정될 때까지 제1순위 후보국으로 분류되었다. 유럽연합 가입 후 회원국 간의 법인세 등 조세 정책 조화 등에 유보 입장을 보이면서 리투아니아 및 라트비아 등과 함께 유럽연합의 통합 심화에 회의적인 국가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중반 프랑스 및 네덜란드에서 부결된 유럽연합 헌법조약을 비준하는 등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여러 정책 중 유럽연합 공동외교안보 정책과 관련하여 에스토니아의 입장은 유럽연합의 외교 정책 수단 및 조정 기능은 향상되어야 하나 유럽 안보의 핵심은 범대서양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연합과 미국 간의 협력 관계 강화가 최우선적 고려 사항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리스본 전략 목표 달성과 관련해서는 성장과 고용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각 회원국이 보다 노려할 것을 요구하였고, ‘에스토니아인의 성공 2014(Estonian Success 2014)’ 등을 추진 중이다. 유럽연합 확대와 관련해서는 확대 관련 기준 및 원칙 준수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유럽연합 인접 지역 정책과 관련해서는 유럽연합 접경국으로서 접경 지역 안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민주화 지원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또, 조속한 유럽통화연맹(EMU, European Monetary Union) 가입을 추진 중이다.
에스토니아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8개국과 함께 2007년 12월 21일부터 셍겐협정(Schengen agreement)이 확대 적용됨으로써 협약 가입국 간 국경 검문검색이 점차적으로 철폐되어 출입국이 간소화되었다.
에스토니아의 유럽연합 회원국 가입 과정
· 1992년 5월 유럽연합과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 체결
· 1994년 7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발트 3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 체결
· 1995년 6월 유럽연합 준회원국 지위 협정(Association Agreement) 체결
· 1997년 12월 룩셈부르크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베니아, 사이프러스와 함께 제1차 가입 협상 대상국으로 분류
· 2002년 12월 코펜하겐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여타 중·동구 국가들과 함께 가입 협상 완료
· 2003년 4월 16일 유럽연합 가입 조약에 서명하고 같은 해 9월 14일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 가입을 확정
· 2004년 5월 1일 여타 중·동구 9개국과 함께 유럽연합 정식 가입
러시아와의 관계
1) 국적법 개정 문제
에스토니아는 1994년 8월 31일 에스토니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의 철수로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간 정치 참여에 제한을 받아온 전체 인구의 약 20~30%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계에 대한 시민권 부여 문제 등 불안 요인이 상존하며, 구(舊)소련의 불법 행위에 대한 사과 요구 등으로 수시로 외교적 마찰이 발생했다. 특히, 소련 점령기 소련의 러시아화 정책으로 인해 자국 내의 러시아인 비중이 비교적 높은 편인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와 유사한 형태의 국적법을 도입하여, 당초 자국 국적 취득 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러시아와 외교 분쟁을 초래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국제적 압력에 의해 국적법 내용 중 차별적 조항을 개정하였으나 러시아는 여전히 미흡한 것으로 비판하였고, 에스토니아산 상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2배로 인상하는 보복성 관세를 부과하였다. 이는 나중에 유럽연합 가입 이후에야 정상화되었다. 또한 에스토니아는 국어법을 제정하여, 일부 직업의 경우 에스토니아어를 필수로 요구함으로써 러시아어 구사 시민들의 노동시장 접근이 제한되는 등의 문제가 야기되었다.
2) 국경 조약 등 양국 간의 현안
2005년 5월 에스토니아-소련 양국 간 합의한 국경 조약을 에스토니아 의회가 비준하는 과정에서 1940년~1991년 자국의 피점령 사실을 조약에 추가로 명시하면서 소련이 이에 반발하여, 조약 서명을 철회했다. 또, 2007년 3월 총선 이후 출범한 신정부가 소련군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소련 정부가 반발하는 등 양국 간의 긴장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핀란드와의 관계
에스토니아는 역사 및 문화적으로 핀란드와 스웨덴 등 북구 국가들과 유대의식을 가지고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2005년에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의 북구전투대(EU Nordic Battle Group)에 가입했다. 특히 핀란드와의 관계는 에스토니아 외교에 있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며, 양국 간의 북유럽 국가와 발트 국가 간 최초의 전력망인 에스트링크(Estlink) 전력 라인을 운용하고 있다. 또, 핵연료 개발과 발트해 수역 환경 보존 문제 등 제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현재 핀란드에는 27,500여 명의 에스토니아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핀란드 내에는 에스토니아 언어교육원이 수립되어 있다.
기타 외교활동
에스토니아는 국제평화와 안보에 기여한다는 차원에서 국제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개발 원조 등에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국제평화유지 활동으로 이라크에 32명, 아프가니스탄에 13명이 파견하였으며,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코소보 등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개발 원조는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에 민주주의 확산을 위해 비정부기구(NGO, Non-Governmental Organization)를 중심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편, 에스토니아는 제한된 예산으로 인해 재외 공관 증설에 어려움이 있으나 최근 텔아비브에 공관을 신설한 것을 비롯해 카이로 및 뉴델리에도 공관 신설을 검토 중이다. 에스토니아는 몰디브, 스웨덴에 이어 전 세계 3번째로 사이버 대사관을 개설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정보통신 산업에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사이버 대사관 개설 비용은 약 6,000유로였다.
참고로, 에스토니아는 러시아, 칠레, 이스라엘, 슬로베니아 등 4개국과 함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가입 협상 대상국으로서 개별적인 가입 심사와 관련하여, 사무국 및 회원국들 간의 협의가 진행되었으며 2010년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에스토나아 국방
에스토니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와 긴밀한 협력을 통한 자체 방위 능력 향상을 국방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다.
국방 예산은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의 약 2%인데 이는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의 평균에 해당된다. 병력 규모는 정규군이 약 4,000명으로 육군이 3,400명, 해군이 360명, 공군이 240명이다. 이외에도 약 8,000명으로 구성된 방위동맹(Defence League)이 결성되어 있으며, 이는 1917년 민병대 형식으로 조직된 군사단체로서 1940년 소련 점령 이후 해체되었으나 1991년 독립 이후 재조직되었다.
에스토니아 성인 남성은 18~27세 사이 8~11개월간의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데, 방위군, 국경수비대, 긴급구조대에서 복무 가능하다. 일반적인 병역 의무는 8개월이지만 하사관, 예비역 장교후보생, 해군, IT 또는 통신 분야 특수 훈련 희망자들은 11개월을 복무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16~24개월간의 대체 근무가 가능하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 에스토니아는 1991년 10월 17일 수교를 맺은 후 양국은 여러 가지 협정을 체결하고 발효시켰다. 2001년 7월 20일 양국 간에 문화교육학술협력협정이 발효되었으며, 2001년 8월 18일 사증면제협정이 발효되었다. 또, 2010년 5월 25일에는 이중과세회피와 탈세방지를 위한 협약이 발효되었다.
2010년 1월 에스토니아 외교장관이 최초로 방한하는 등 양국 간의 협력 관계가 지속적으로 강화·발전되고 있다. 양국 간 교역 및
투자 규모는 크지 않으나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 발효 등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 핀에어 서울-헬싱키 직항로 개설 등으로 최근 문화 및 관광 교류가 증가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Tallinn)은 2011년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되었으며, 현재 다양한 문화 행사를 개최 중이다.
에스토니아는 발트 3국 중 북한과 수교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 우리의 대북 정책 및 외교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북한의 수교 제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비민주적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양국간의 교역
2010년 기준 한국과 에스토니아 간의 통상 현황은 수출이 6,300만 달러로 주요 수출 품목은 고무제품, 무선통신기기, 금속공작기계, 영상기기 등이다. 수입은 4,900만 달러로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제품, 목재류, 주단조품, 레일 및 철구조물 등이다.
영사, 교민
2010년 현재 에스토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재외동포는 10여 명이다. 그 외 구소련계 고려인이 약 200명 거주하고 있다. 2008년 기준 에스토니아를 방문한 한국 국민은 717명이며, 2010년 기준 한국을 방문한 에스토니아인은 759명이다.
한국과 에스토니아 문화 홍보 활동
1) 한국 강좌 개설
에스토니아는 한국학 강좌를 개설했다. 2000년 이래 한국 대사관이나 국제교류재단의 지원으로 탈린 사범대학교(Tallinn Pedagogical University) 내에 한국어 강좌를 개설했다. 2003년에는 탈린 사범대에서 한국어-에스토니아어 사전을 발간했다. 우리 정부의 장학생 초청 사업은 총 3명으로 1995년에 1명, 1997년에 2명을 초청했다. 차세대 지도자 초청 사업으로 2005년에는 총 2명을 초청했다.
2) 최근 문화 교류 현황
· 2004년 12월: 탈린(Tallinn) 국제영화제(Black Night Film Festival)에서 김기덕 감독의 ‘빈집’이 최우수 감독상 등 수상.
· 2005년 6월 22일~7월 16일: 한지 미술 전시회.
· 2005년 9월 28일: 전통가곡 공연단 정가악회 방문 공연.
· 2006년 1월 25일: 전통음악공연단 구음회 방문 공연.
· 2006년 10월 14일: 수교 15주년 기념 문화 행사로 탈린 드라마 극장에서 나우(NOW) 무용단 방문 공연.
· 2007년 7월 12일~13일: 에스토니아에서 개최된 ‘발티카(Baltica) 2007 민속 축제’ 개막식에 우리 공연단 서도소리, 잔치마당, 유주희 무용단 등이 참여. 축제 개막식에서 약 15분간 펼쳐진 우리 풍물단체 ‘잔치마당’의 사물놀이 공연은 특히 참가단체들 중 가장 큰 호응을 받으면서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
· 고려인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1997년 설립되었으며 올가 김(Olga Kim)을 단장으로 하는 아리랑 무용단이 전통무용단으로 활동, 각종 문화행사에 참가.
3) 연수생 초청 사업
· 한국국제협력단(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주관 외교관 초청, 연 1~2명 규모.
· 산업연수생 초청: 수출 진흥, TV 프로그램, 행정 발전, 광물 탐사, 한국어, 경제기획 정책, 국가 표준, 증권, 중소기업, 시장경제, 조세, 에너지 절약, 산업 개발, 산업 구조 조정, 과학기술 정책 등 제 분야에 총 25명 이상 초청.
· 한국어 전문가 파견 사업: 1993~1994년 국제 경제, 중소기업 정책 분야 각 1명.
· 무상 원조: 1995년 소나타 5대를 에스토니아 외교부의 의전용으로 기증.
에스토니아의 노래하는 혁명
‘노래하는 혁명’은 발트 제국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세계노래대전 중 가장 유서가 깊은 축제이다. 이 축제는 체제 변혁기 국가 화합을 도모하는 행사로써 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기여했다. 소위 ‘세계노래대전’은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에서 4~5년을 주기로 전세계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해외동포와 국내 전 지역의 사람들이 수도에서 모여 일주일간 노래의 향연을 벌이는 축제이다. 1869년 에스토니아 타르투(Tartu)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에스토니아 국내외에 거주하고 있는 에스토니아 후손들이 모여 민속의상을 입고 민요와 현대 합창곡을 부르며 국가 화합을 도모하는 행사로서, 특히 마지막 피날레 합창단이 유명하다.
축제가 시작된 시기는 러시아 점령기로서 에스토니아 민족의 독립운동이 막 시작된 무렵이다. 소련 점령기에는 에스토니아 국민들의 연대 의식과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서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소련의 압박이 심할 당시에도 폭력이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로 대응하였기 때문에 ‘노래하는 혁명(Singing Revolution)’이라고 명명되었다. 1989년 8월 23일에는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지나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에 이르는 길이 600㎞, 약 200만 명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거대한 인간띠를 형성하고,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부르고, 자유의 열망을 외치는 등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는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으며, 발트 3국은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 중이다.
발트 민속음악
노래하는 혁명은 오늘날 발트 3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각국에서 개최된다. 3국 민요는 대체로 화려한 기교가 없는 단조로운 곡조로 노래가 유사하다. 3국 모두 전국 각 지방과 도시, 학교, 단체에서 민속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보급하는 아마추어 민속음악 그룹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발트인들은 자신들의 민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각별하다.
민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집대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팝 음악가들이 민속음악 모티브를 활용한 리믹스곡 등으로 활용하는 등 일상생활 속에도 깊이 침투해 있다. 발트 민족의 민속음악은 오랜 세월 동안 비교적 보전이 잘 되어 내려오고 있으며 한국의 엑스포 등 세계 축제와 박람회 등에 초청되어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연구 및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소련군 동상 이전 논란
2007년 초 총선에서 승리한 개혁당 등 집권여당이 수도 탈린(Tallinn) 도심에 위치한 구시대의 유물인 구(舊)소련군 동상에 대한 에스토니아인들의 정서를 감안하여, 동상을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에스토니아 국내 거주 러시아인들이 반발하여, 러시아와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소련국 동상 이전 사건의 발단과 경과
2007년 3월 총선 당시 개혁당 및 조국연합공화연대당은 민족주의적 성향의 에스토니아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하여, 수도 중심부에서 소련군 동상 이전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총선에서 친(親)러시아계 정당이 대부분 부진하고 개혁당 등 우익 성향의 정당들이 승리하면서 2007년 4월 출범한 에스토니아 신정부가 수도 탈린 중심부에 위치한 구(舊)소련군 동상을 국군묘지로 이전키로 결정했다.
시내 국군묘지로의 이전을 위해 동상과 함께 매장되어 있던 유해 발굴 작업 중 러시아계 주민 약 1,500명이 4월 27일~28일 동상 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강행했다. 2007년 4월 26일 에스토니아 정부가 동상 주변을 봉쇄하자, 약 1,000여 명의 러시아계 시민들이 신정부의 결정에 항의하여 탈린 중심부에 운집했다. 이에 대해 정부가 동상 접근을 금지하자, 시위대는 탈린 시내의 상가를 파괴하고 담배, 주류 등 상품을 약탈하는 등 소요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계 시위자 1명이 흉기로 피살되고, 경찰과 시민 등 총 150여 명이 부상을 입게 된다. 시위대 중 수백 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120만 유로에 상당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4월 27일 새벽 비밀 장소로 동상 이전을 강행하였다. 소련군 동상은 1944년 독일의 점령 상태에 있던 탈린을 소련군이 탈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47년 건립된 전승기념 동상으로, 에스토니아인들에게는 자국의 소련 강제병합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부정적 인식이 팽배했다. 반면, 에스토니아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은 매년 5월 9일 전승기념일에 동상 앞에서 기념식을 거행했으며, 동상을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물로 간주하였다. 동상 앞은 러시아계 주민들의 축제 장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에스토니아 주민들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민족 간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남아 있었다.
소련군 동상 이전 사건의 여파
러시아의 상원은 소련군 동상 철거 계획과 관련 푸틴 대통령에게 에스토니아와의 외교 관계 단절을 주장하였고, 러시아 극우주의자들은 에스토니아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또, 러시아 주재 에스토니아 대사관 및 외교관에 대해 위협을 가하는 등 양국 간에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에스토니아는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에 가입한 후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방위 협력을 맺고 안보를 의존함으로써 러시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기조를 유지했다. 이 사태로 양국 간의 관계는 다소 소원해졌다. 또한 에스토니아 전체 국민 중 25%를 차지하는 러시아계 민족들의 불만이 누적될 경우 유사사태 재발 가능성이 잔존해 있다.
당시 에스토니아 주요 정부기관 등에 대한 사이버 테러가 개시되었다. 이에 대해 에스토니아 정부는 금번 발생한 조직적 사이버 공격은 소련군 동상 철거에 불만을 가진 러시아 측이 에스토니아 정부의 네트워크를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자행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