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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참 좋은 삶의 꼴>
오늘은 '참 좋은 삶의 꼴'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누구나 참된 삶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참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평생 과제입니다.
수도자를 흔히 무엇을 하기 위해(to do), 무엇을 지니기 위해(to have)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to be) 수도원에 왔다고 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부과된 위대한 평생과제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에 대한 평가가 생각납니다.
"그는 가톨릭인 이전에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교인 이전에 종교인이었고,
종교인 이전에 사람이었다."
탐구 여정의 정점에 사람입니다.
보편인(universal man)으로서 참된 사람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가톨릭적일수록 보편인의 참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어디선가 읽은, 가끔 인용했던 구절도 생각납니다.
"사람 못된 게 중 되고,
중 못된 게 수좌되고,
수좌 못된 게 부처된다."
역시 사람을 정점에 두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 삶의 자리가 사람이 되기 위한 구도처이자 수행처입니다.
누가 참된 사람이며 참 좋은 삶의 꼴은 무엇입니까?
첫째, 주님을 찾는 삶입니다.
무엇을 찾느냐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래야 안주하지 않습니다.
찾을 때 정주(定住)요 찾지 않으면 안주(安住)입니다.
끊임없이 바다 향해 흐르는 강처럼 깨어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은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 하느님입니다.
하여 수도자를 일컬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깨어 하느님을 찾을 때 하느님을 만나 말씀을 듣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저 여기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주님을 찾았기에 깨어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엘리 스승의 조언에 따라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 참 좋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깨어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요한은 물론 그의 제자들 역시 깨어 주님을 찾았기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은 주님을 보는 순간 환호했고 두 제자는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진정 주님을 찾을 때 무욕의 집착없는 훌륭한 인격의 스승입니다.
엘리와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엘리는 어린 사무엘을, 요한은 두 제자를 유일한 스승이신 주님께 안내했습니다.
엘리와 요한처럼, 진정 참 스승이신 주님을 찾을 때 무욕의 겸손한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입니다.
어디에 머무르냐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주님을 찾아 발견했으면 이어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위로와 치유요 자기의 발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만난 요한의 두 제자의 질문이 참 적절합니다.
"라삐, 어디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주님이 묵고 계신 곳에서 주님의 삶을 보고 배우고 싶은 열망을 반영합니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용어가 '머무르다(그리스어 menein, 영어 remain)'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스승을, 부모를 그대로 보고 배우는 제자요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보고 배울 유일한 분은 주님이십니다.
보이는 스승이나 친구, 선배, 동료들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또 배우게 됩니다.
하여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하기도 합니다.
아니 우리 삶의 자리 모두가 바로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요 그 스승은 주님이십니다.
"와서 보아라."
마치 불가의 스승과 제자간의 선문답 같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초대에 응해 와서 보면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바오로를 통해 주님의 말씀도 듣습니다.
바로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올바른 처신(處身)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 늘 머물렀던 성인들처럼 성령의 성전인 거룩한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사무엘 역시 주님안에 머무르면서 얼마나 잘 배웠는지 다음 구절에서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안에 머물러 배울 때 주님은 우리가 한 말 역시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필요한, 생명과 빛을 주는 사랑의 말만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님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았으면 주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진리를 나눌 때 비로소 기쁨은 배가되고 진리도 확실히 깨달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한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에서 그날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이 얼마나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지 그 반응을 보면 담박 드러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안드레아는 즉시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주님을 알렸고, 예수님께 안내했습니다.
주님은 시몬을 눈여겨 보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자기를 발견한 두 제자와 시몬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참 나의 발견이요 참 나를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 복음 선포의 절박성이 있습니다.
평생 살아도 주님을 모르기에 자기를 모르고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이 없이는 아무리 '나는 누구인가?'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늘 연중 제2주일,
우리에게 참 좋은 삶의 꼴을 지닌 참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1.주님을 찾으십시오.
2.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3.주님을 선포하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찾아 성체성사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시편 23,5 참조)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교구청에 근무하는 직원으로부터 자신의 예전 직장에서 있었던 재미있었던 일을 하나 들었습니다.
서울의 어느 회사를 막 다니기 시작한 어느 날,
윗 상사가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남영주차장’에 전화를 걸라면서 번호를 가르쳐 주더랍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서 “남영주 차장님 부탁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자꾸만 “누구요?”만을 외치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영주 차장님’이 아니라 ‘남영 주차장’에 전화를 걸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지요.
이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모릅니다.
예전 국어시간에 들었던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라는 문장이 생각나면서 ‘띄어쓰기’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가방에 들어가시는 것일까요?)
어쩌면 주님께 대한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내가 어떻게 주님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주님의 모습으로 보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많은 사이비 종교와 이단이 끊이지 않고 생겨나는 것이지요.
주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은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냥 무조건 주님께서 다 해주실 것이라는 생각,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주님을 내 중심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사무엘이 보였던 자세입니다.
즉,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생활 안에서 계속 해야 합니다.
자신의 말을 하는 데 익숙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 더 익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왜 당신을 찾아왔는지 모르겠습니까?
눈치 없는 저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당신을 찾아온 제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당신을 신뢰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지요.
무엇을 찾는지를 명확하게 스스로 알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참으로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아는 나중에 베드로를 찾아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께 배우고자 하는 갈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냥 거리에서 하느님의 중요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닌 당신의 숙소에서 깊이 있게 듣고 싶다는 배움에 대한 열망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묵을 숙소를 가리키지 않고 대신 “와서 보라.”라고 하십니다.
직접 따라와서 봐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대화들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의 중요한 말씀들을 듣기 위한 우리의 정성과 열망은 어떠했나요?
또한 직접 “와서 보라.”면서 우리 스스로의 노력을 바라시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그냥 저절로 좋은 일이란 좋은 일은 다 알아서 내게 이루어지길 바랐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듣고 실천하려는 노력보다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충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들으려는 노력도 부족했고, 알려는 정성도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들을 반성하면서
이제까지의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때 내 몸이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환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인천교구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그분과 '함께' 묵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고 말하자,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사람에게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라고 되묻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 다음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증언하는 말을 듣고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것은,
'하느님의 어린양'에게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보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을 버리고 예수님에게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요한이 능동적으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넘겨 드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엇을 찾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추구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라는 두 제자의 말은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다는 뜻이고,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입니다.
"와서 보아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가 되고 싶다는 두 사람의 청을 받아들이시는 말씀입니다.
("제자가 되겠다고 확실하게 결정하기 전에 먼저 체험해 보아라."가 아니고,
"제자가 되고 싶다면 와서 나와 함께 살아라."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묵을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미리 확인해 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묵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라는 말은 "묵으시는 곳에 도착해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라고 기록한 것은
그 일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데,
'오후 네 시'가 뭔가를 상징하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원문에는 '제10시'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10'은 완전함, 완성, 충만함 등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안드레아를 제자로 부르신 것으로 기록했지만,
요한복음서 저자는 안드레아가 부르심을 받기도 전에 먼저 제자가 되고 싶다고 예수님께 청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안드레아가 따라간 일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정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그 일들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인지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일은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제자들 쪽에서도 원했던 일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두 번이나 사용된 '함께' 라는 말은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을 하다가 예수님께서 사시는 곳에 도착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이 말은 지상에서 고생만 하다가 죽은 다음에나 하느님 나라에서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삶을 미리 사는 생활'입니다.
온전히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다면, 그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묵으면서 무엇을 했는지 전혀 이야기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또는 어떤 '일'을 했는지...?
무엇을 했든지 간에 두 제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는 요한의 증언을 믿은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묵은 다음에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확신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됩니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는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났소."인데,
이 말은, "우리는 어제 '예수' 라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였소." 라는 뜻입니다.
"와서 보아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 제자를 당신의 '삶'으로 초대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안드레아가 시몬에게 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한 것도 시몬을 '그 삶으로' 초대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사람들을 '그 삶으로', 즉 "예수님과 함께 사는 하느님 나라의 삶으로" 초대하는 일입니다.
안드레아가 시몬에게 한 말에는 이런 뜻도 들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보니 정말 좋더라. 형도 함께 가자."
'정말 좋다.'는 말은 복음을 전할 때에 대단히 중요한, 기본적인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그렇게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이름을 '케파(베드로)'로 바꿔 주신 것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음을 나타냅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주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사람은 태어나는 것일까요,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낳은 정이 더 클까요, 기른 정이 더 클까요?
낳아놓고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 낳느니만 못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국민남동생 유승호가 아역으로 나와서 큰 감동을 주었던 <집으로>엔
누구와 함께 머무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젊은 엄마가 허리가 90도로 꺾인 가난하고 말도 못하는 시골 할머니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고 갑니다.
아이는 너무나 버릇이 없이 커서 가지고 온 게임기만 두드립니다.
할머니 곁에는 가기도 싫습니다.
할머니가 손으로 찢어 밥 위에 얹어준 김치를 밥 째 퍼서 다시 할머니 밥그릇에 던지듯 옮겨버립니다.
켄터키 치킨이 먹고 싶다고 사진을 보여줬는데 백숙을 끓여오는 할머니와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게임기 배터리가 다 닳자 자고 있는 할머니 은비녀를 훔쳐 가게에 갑니다.
그러나 아저씨에게 혼나고 그냥 돌아옵니다.
아이는 숟가락으로 머리를 동여맨 할머니를 만납니다.
조금은 할머니가 좋아지기 시작해서 이번에는 할머니와 함께 장에 갑니다.
그러나 길거리에 앉아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 옆에는 있기가 창피합니다.
할머니는 번 돈으로 손자의 신발도 사 주고 자장면도 사 줍니다.
물론 할머니는 물만 마십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남은 돈으로는 초코파이 하나를 사 주시는 할머니.
그러나 여전히 할머니와 같은 버스를 타고 오기가 싫어서 할머니가 내미는 짐도 뿌리치고 자기 혼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머니.
그리고 매우 오래 기다린 끝에 버스 먼지 뒤로 이마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굽히고 걸어오는 할머니를 발견합니다.
아이는 할머니 보따리를 받고 그 안에 자신의 초코파이를 넣어줍니다.
그 동네에 아이가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아이와 만나기 위해 할머니에게 머리를 깎아달라고 했는데 스타일 구기시는 할머니.
그 아이와 선물을 교환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잔뜩 끌개에 싣고 인형과 맞바꾸어 돌아옵니다.
할머니가 넣어주신 건전지도 없는 게임기 봉투에는 관심도 없이.
그러나 아이가 돌아오는 길에 끌개를 타고 장난치다가 무릎도 팔꿈치도 까지 피가 납니다.
그리고 아파하며 거추장스러웠던 게임기 봉투를 열어봅니다.
게임기와 함께 있는 2천원 지폐.
그 앞에는 걱정돼 나오신 할머니가 산길을 걸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아파서 눈물이 나는 건지 죄송해서 눈물이 나는 건지 아이는 크게 소리를 내어 웁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온 편지, 다소 올라오라는 편지를 건네고 아이는 할머니를 걱정하며 어머니를 향해 떠납니다.
아이가 짧은 시간이지만 할머니와 함께 머무르지 않았다면 평생을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느끼지 못하고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야 상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이 고통 받고 죽어가도 나는 아프지 않은 냉혈인이 됩니다.
결국 힘든 시간이지만 억지로라도 함께 있으면 사람은 더 사랑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도 따듯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보좌 때 휴가를 떠나 한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저녁마다 퇴근하고 그 집으로 저를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낮에는 제 할 일 하고 저녁에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쫓아오는 요한의 두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랍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원하는 것이 주님께서 묵고 계신 곳입니다.
그리고 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고 합니다.
오후 4시에 어디에 묵고 있는지를 물어본다는 것은 차도 없던 시대이기 때문에 그분과 밤을 지새우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반가우셨겠습니까?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과 머물기를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그분의 것이 나에게 옮겨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듯한 난로 옆에 있는데 차가워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를 뜨겁게 하고 싶다면 불 옆에 오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주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찾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바로 성당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당 붉은 불이 들어와 있는 감실엔 언제나 떠나시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앞에서 30분만 참고 앉아있으면 마음의 평화가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솟구칩니다.
피곤하면 졸기도 하지만 그분 앞에서 조는 것은 몸과 마음을 얼마나 가볍게 하는지요.
믿음의 열매가 저절로 맺힙니다.
그분에게서 아직도 피와 물이 나오는데 피는 죄를 용서하고 물은 성령님으로써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해 줍니다.
감실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묵고 계신 그분 현존 자체입니다.
물론 성경말씀 안에 머무를 때도 마찬가지고 또 가난하고 힘없지만 마음이 따듯한 사람들과 함께 할 때도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분과 머물고 싶은 마음은 우리만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더 바라시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 대통령 중에 가장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대통령은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79세)일 것입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버는 모든 것을 서민 주택 사업에 기부하거나 사회 복지 사업에 환원하였고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작은 농장, 87년 형 하늘색 폭스바겐 비틀, 트랙터 두 대, 그리고 개 한 마리가 전부입니다.
요즘 올라온 소식을 보니 헤랄드 아코스타라고 하는 한 주민이 공장에 출근했다가
신분증 기한이 만료돼 불볕더위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한 관용차가 서더니 자신을 집까지 태워줬는데 그 차 안에는 대통령과 영부인, 그리고 그들의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힘없이 걸어가는 자신을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태워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아코스타를 집까지 태워주고 자신이 가려던 곳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그분도 우리와 머무시고 싶으십니다.
당신 차에 타고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세상일에 바빠서 그분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바란다면 그분께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머무시는 곳이 어딥니까?”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자녀들이 부모님 앞에서 싸우는 모습이 나오는데
남일 같지 않으면서도 부모님 앞에서는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형제들은 소원해지게 됩니다.
핏줄이란 것이 강한 면도 있지만 또한 아주 강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매우 힘들어 할 때 자녀들이 찾아와서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눈물을 흘립니다.
할아버지는 말은 못하지만 ‘나 아프니까, 그냥 저리 가!’라고 하듯이 손짓으로 그만 좀 하라고 합니다.
평소에 함께 있어 주지 않았으면서 마지막에 와서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할아버지는 98년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마지막에 그래봐야 어쩌겠습니까?
이젠 반가운 것보다는 서운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조차 힘이 듭니다.
우리 마지막 순간이 결코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한과 안드레아는 그분과 머물줄 알았기에
하룻밤에 그분을 그리스도로 완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분께 시간을 내어드립시다.
그러면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소명의 삶>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예수님을 ‘눈여겨본 것’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뭔가를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성서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에 관한 두 가지 전통적 표상이 나온다.
하나는 파스카 때에 잡는 어린양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해방을 상징한다(탈출 12,1-28).
다른 하나는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어린양처럼 희생하여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는 ‘주님의 고난 받는 종’이다(이사 53,1-5).
요한은 이 두 가지 표상을 통해 예수님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을 상기시켜준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과 관계있는 존재가 되도록 이끌고
그분이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실 사랑의 주님임을 알려준 것이다.
여기서도 요한은 하느님의 계시를 전달해주는 도구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요한이 예수님을 거듭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하자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다’(1,37).
‘따르다’는 말은 제자직과 관련된 말인데, 스승에게서 배우고 그의 길을 똑같이 걷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하였다(1,38).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실은 너희들이 따르려고 하는 내가 누구이며, 따라야 하는 삶이 과연 어떤 삶인지 아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아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요한이 전해준 계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스승님’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생명의 빵” (요한 6,48)이시고
“세상의 빛” (8,12)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 (14,6)이신 예수님이요, 그분의 삶의 자리이다.
자, 예수님을 따라갔던 요한의 두 제자의 태도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자.
우리 각자는 세례를 받고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수많은 영성강의를 듣고 나름대로 선행도 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닮고 똑같이 걸어야 할 그분의 삶이 다른 이들의 죄와 십자가를 대신 지고 죽어야 하는
‘하느님의 어린양’, ‘주님의 고난받는 종’의 길임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
그분의 정체성에 맞는 삶을 과연 얼마나 철저히 살아내고 있는가?
혹시 내 취향에 맞고 내 뜻대로 길들여진 신자라는 옷을 입고 지탄받지 않을 정도에서 그저 안일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문제는 그저 적당히 따라가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적당주의’나 ‘안일함’이다.
영성생활, 곧 하느님을 따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이제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라는 지점은 없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은 늘 ‘지금보다 더’가 있을 뿐이다.
'지금보다 더' 철저히 예수님을 추종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지금보다 더' 열정을 가지고 투신하며,
말씀을 '더' 경청하며,
'지금보다 더'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단순한 ‘스승’으로 오해하지 않고
‘참 메시아’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참 제자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셨다.
그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지내고 나서야(1,39)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다(1,41).
요한복음에는 성부와 성자, 성자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의 영속성을 나타내기 위해 ‘메네인’(μενειν)라는 동사가 자주 나온다.
이 동사는 ‘어떤 것 안에 머무르다’라는 뜻과 ‘누구와 함께 친밀하게 일치하다’ 등의 뜻이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머문 것은 단지 같은 공간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면서 깊은 친밀감 속에 존재적 일치를 이루었다는 얘기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본성과 깊은 일치를 이루도록 ‘와서 보아라’ 하고 초대하고 계신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시고 그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리신다.
곧 하느님께서 이름을 부르신 것은 우리의 인격 전체를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몸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듯 ‘영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 아니라 ‘성령의 궁전’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자신의 몸과, 그 몸으로 날마다 행하는 모든 것을 드림으로써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도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아무 것도 남겨두지 말라”고 권고한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생각과 고정관념, 선입견, 내 중심적인 사고방식, 가슴보다는 머리에 의존하는 자세, 몸에 익은 습관 등을 버리고,
기도 안에서 영적 감수성을 키워나감으로써 일상의 매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응답이 되어야 할 것이다.
-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장
* 서공석 세례자 요한 신부님의 묵상글 *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세 개의 다른 복음서들이 면저 기록되어 신앙인들이 이미 읽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그 세 개의 복음서들에서 주제들을 택하여 명상하고,
그 내용을 그 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식인 이야기 양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라고 고백하였다는 이야기와
안드레아와 베드로가 그 고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인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 복음서는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에 주목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증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성전에서 피 흘려 바쳐지는 희생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 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서(9,22)에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해지며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죽임 당한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성전에서 속죄의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과 같은 예수님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요한의 증언을 소개하고,
그 증언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곳(15,5)에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안에 머무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안에 머무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같은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처럼,
그대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입니다.”
(15,9-10)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은 그분이 보여준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그분이 실천한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여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머문 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보여준 사랑을 실천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라는 호칭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당신이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국권(國權)을 회복해주고, 세상 만방을 다스리게 해 주는 왕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어느 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먹이자,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6,14)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서 당신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다.” (6,15)고 말합니다.
예수는 사람들의 염원을 이루어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 독립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노력하여 성취할 일입니다.
흥부전에서 제비가 흥부에게 박씨를 갖다 주었습니다.
지극히 가난했던 흥부는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대박이 터져,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흥부의 꿈을 제비가 이루어 주었습니다.
예수는 그 제비와 같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주는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예수 시대 혁명당원이라는 이스라엘의 분파가 기대하던 하느님도 그런 분이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주는 하느님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정성을 바치면, 재물도 생기고 출세도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사람이 잘 되는 수단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는 ‘하느님의 어린 양’입니다.
당신은 죄가 없으면서 사람들을 위해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어 피를 흘린 분입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은 그분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고, 그 사랑을 자기 주변에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랑 안에 살고 계신지를 보고 제자도 같은 사랑 안에 머물렀더니,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들이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몸소 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어 피를 흘린 메시아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같은 실천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으며 삽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생명을 위해 기여하고 죽어갑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지 못하는 생명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삽니다.
그렇게 유아독존(唯我獨尊)하는 생명은 볼품없는 자기 모습 하나 남기고 허무로 사라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의 순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신앙은 하느님 생명의 순리를 살라고 권합니다.
그 순리를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내어주는 몸’이라는 성찬에 참여하고,
스스로를 내어주는 순리를 실천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자기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소인(小人)의 근성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대의(大義)를 실현하는 삶의 운동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보며’ 그의 이름을 바꿔놓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세례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 태어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분을 ‘하느님의 어린 양’, 곧 그분의 죽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이 한 실천들을 우리도 행하면서 가능한 일입니다.
곧 이웃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면서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분이 실천한 대의를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그 실천 안에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메시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실천을 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 부산교구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와서 보아라>
감곡 출신 새 사제의 첫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영적, 물적으로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제를 위해서 끊임없는 기도를 부탁드리며
매괴성모순례지성당이 여러분의 기도와 성모님의 전구로 성소의 못자리로써의 명맥을 잘 이어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제를 통하여 구원의 신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달되기를 소망하며 축하와 사랑을 드립니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묵었습니다.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며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고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하시며 그 마음을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함께 머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보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만족하게 되고 그것을 넘어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묵음으로써 예수님의 삶을 보고 느끼며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묵으니 그의 모든 것을 얻게 되고
얻은 것이 복된 것이니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동생 안드레아는 형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하고 형을 예수님께로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눈여겨보시고 “너는 케파(베드로)라고 불릴 것이다.”.하시며 당신이 베드로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실지 예고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이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분께서 몸소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 기쁨이어야 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확신한다면 혼자만 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전해야 할 소명이 주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와서 보아라’ 하시며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와서 보시오’ 할 수 있는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간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1고린 6,15) 물으시며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1고린 6,20)하고 권고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니 그 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품의를 지킨다는 것은 불륜을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1요한6,18).
그것은 지켜야 할 도리에 충실하다는 것이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결국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5)
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앞산을 보려고 앞산에 오르면 앞산을 옳게 보지 못한답니다.
역시 뒷산을 보려고 뒷산에 올라도 뒷산을 옳게 보지 못합니다.
결국은 앞산을 옳게 보려면 뒷산에 올라서 봐야 하고 뒷산을 옳게 보려면 앞산에 올라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한 발 물러서서 보아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옳게 보려면 내 눈으로 보지 말고 이웃의 눈으로 봐야 하고,
특히 믿는 이들은 주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주님의 사람인가를 옳게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과연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손과 발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지요?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내 생각만 가지고 내편에 서서, 내 이익을 따져서는 결코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볼 것을 제대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과 하루를 묵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하루를 보내고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음을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든, 성체 조배를 통해서든
기도 안에서, 이웃 안에서 주님과 함께 묵으십시오!
그리고 내 삶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는 떳떳함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와서 보아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제 내가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하겠습니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와서 보아라’ 하는 부끄러움 속에 다시 일어서는 한 주간의 시작이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능동적인 기질을 가진 안드레아는 예수님께 단도직입으로 대화를 텄고 그분과 함께 묵게 되었다.
예수님과 공유했던 시간이 그에게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복음서에는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며 시각까지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이분이야말로 메시아시다!’는 고백까지는 적어도 빛과 어둠을 가로지르는 질곡이 있었을 것이다.
주님을 만나는 여정은 탐험과도 같다.
이끌림만 있을 뿐 정체가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현장 체험으로 세계의 몇몇 그리스도인 공동체 마을에 갔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공동체의 사립문을 들어서자 아직도 복음을 해석 없이 따르고 사는 노아의 후예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고백하는 신앙은 무엇이었으며,
사제로서 선포한 것들은 정말 나의 믿음이었는가?
달은 어디에서 보아도 같은 달이지만
창틈으로 보는 모습과 마당에 나와서 보는 모습, 그리고 동산에 올라가 보는 모습은 같지 않다.
깊숙이 들어가는 탐험에는 특별한 세계가 있다.
수도자나 사제의 성소를 바라보는 것도 그와 같다.
전해 듣는 것과, 직접 성소 모임에 참여하는 것과,
들어가 살면서 체험하는 것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주님을 만나는 데는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붙잡혀 끌려가는 현상이 나타나거든 몸을 맡겨야 한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성소자는 성소에 뜻을 둔 이들을 벗 삼아 함께 어울리려 대화하고 토론하며 생활과 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유유상종의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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