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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와 스가랴의 예언
스 5:1-5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3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스 5:1-5 / [성전 공사를 다시 시작하다] 성전재건 공사가 중단되었을 동안에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바사에서 돌아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는 동족들에게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격려하며 성전재건을 촉구하였다. 2) 그러자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마침내 공사를 다시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일을 지원해 주었다. 3) 그러자 유브라데강 서쪽 지방의 총독 닷드내가 자기의 부관 스달보스내를 비롯하여 총독부의 관료 전원을 대동하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내려와 유다인들에게 위협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누가 너희에게 이 신전을 재건하고 이 건물을 완성하라고 허가를 내주었느냐?' 4) 우리는 고레스왕의 허락을 받은 일과 우리의 사정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이 건물을 짓는 책임자들의 명단을 요구하였다. 5)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 장로들을 지켜 주셨으므로 총독부의 관리들은 당장 성전 공사를 중단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다리오왕에게 조회하는 편지를 보내고 회신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바벨론으로부터 포로귀환 후 유다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전 건축에 대한 열정도 식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1)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 생활, 이로 인하여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과의 단절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용서하시고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귀환을 통해서 원하셨던 뜻은 이스라엘의 신앙 회복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증표와 같은 사역이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민들도 성전 건축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며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외부적으로 막거나 방해하는 세력이 없음에도 16년 동안이나 성전 건축을 미뤄놓았습니다(학 1:2). 하나님의 시간이 다시금 멈춰진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십니다. 자신의 뜻을 역사 속에서 친히 나타내셔서 하나님 자신의 위치를 이들에게 확인시키십니다. 이를 통해 잠자던 이스라엘을 깨우십니다. 이는 예언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위기를 맞아 멸망 앞에 놓인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매 시대마다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2-5)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는 예언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들의 예언은 자기 안위만을 위하여 살았기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잠들어 있었던 이스라엘을 깨웠습니다. 운동력 있는 예언의 말씀은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깨워 16년이나 멈춰있었던 성전 건축을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선지자들도 이들과 함께 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백성들을 관리하던 유다의 장로들도 하나의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동참했습니다.
적용: 하나님께 신앙을 지켜나가는데 있어서 고난과 환난의 때보다 주변에 방해가 없고 오히려 신앙 생활하는데 자유하고 평안할 때가 더 어렵지는 않으십니까?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가 어느 날 길을 가고 있을 때 한 거지가 길을 막으며 구걸을 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는 미안해하며 거지에게 말했습니다. “미안하구려. 형제여, 안타깝게도 지금 내겐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자 거지가 허리를 구부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누구신지는 모르나, 당신은 제게 돈 이상의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저를 형제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하고 따뜻한 말은 상대방의 영혼까지 부유하게 해줍니다.- 박재천(시인)
< 설 교 >
모든 문제 위에 계신 하나님
스 5:1-5 / 피영민목사
서 론
유다백성들이 고레스 칙령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때는 주전 538년입니다. 그리고 2년 후인 주전 536년에 예물을 모아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이 방해를 시작합니다. 이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자기들이 믿는 이방신도 섬기는 종교혼합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함께 협력해서 성전을 짓자고 요청했지만 지도자들이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방해가 시작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약 16년 동안이나 성전건축이 중단되었습니다. 에스라 4장 마지막 절에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전 역사가 그쳐서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이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페르시아는 고레스가 첫 왕이고 몇 명의 왕을 거친 후 다리우스라고도 불리는 다리오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전 521년에 즉위했기 때문에 다리오 왕 제 이년이라 함은 주전 520년을 의미합니다. 주전 536년에 성전건축이 중단되어 16년이 흘러 주전 520년이 되었습니다.
1. 16년 동안 백성들의 상태
그러면 성전건축이 중단되었던 16년 동안에 유다백성들의 상태는 어떠했느냐? 그들의 상태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었습니다.
좋은 면은 하나님께 단을 쌓고 희생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전에는 안하던 단을 쌓고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피가 있어야 된다며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나아가는 번제를 실시했습니다. 명하신대로 조석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모든 거룩한 절기를 다 지켰습니다. 이내용이 에스라 3장 3절로 5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인 신앙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본구원은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두 가지 국면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하나는 기본구원이요 또 하나는 건설구원입니다.
기본구원은 천국 갈 것이냐 지옥 갈 것이냐를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은 기본구원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본구원의 터 위에 건설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건설할 때에 바울이 말하기를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건설한 사람은 나중에 하나님이 공력을 불로시험해도 살아나기 때문에 상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풀이나 짚이나 나무 등으로 건설한 사람은 공력을 테스트 할 때에 다 타버리기 때문에 뭔가 했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상을 못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건설구원은 천국에 가서 상급이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해 주는 것인데 우리는 기본구원의 터 위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설해 나가야 건설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면류관을 쓰는 것은 건설구원으로 결정됩니다. 많은 것을 건설한 사람은 면류관을 받고 조금 건설한 사람은 개털 모자를 받고 아무것도 건설한 것이 없는 사람은 그냥 맨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먼저 예수 믿어 천국가고 지옥가지 않는다는 기본구원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생활은 기본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본구원이란 터를 닦는 것이요 그 위에 건설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천국에 가서도 큰 상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쁜 면은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적극적인 신앙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건설구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예수 믿어 기본구원은 받은 사람 인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그 기본구원의 터 위에 지금 무엇을 건설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기본구원은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6년 동안 그들의 문제는 건설구원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을 통해서 감동을 주어 “너희는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런 건설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중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아무런 상이 없고 고통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움을 뚫고 나가서 건설을 할 만한 적극적인 신앙이 부족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신앙은 있었어도 어려움을 뚫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헌신하는 적극적인 신앙이 부족했습니다. 기본구원은 받았으나 건설구원에서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밖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핍박이 왔고 안으로도 여러 가지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당시에 유다백성들이 겪은 국내적인 문제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먼저 핍절과 가난이 왔습니다. 학개 1장 6절에 “너희가 많이 뿌릴찌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찌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찌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사람마다 만족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자연재해가 극심했습니다. 학개 1장 10절로 11절에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한재는 가뭄입니다. 한재를 불러 농사가 해마다 흉년이 들고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갖가지 재앙이 들이닥쳤습니다. 학개 2장 15절로 17절에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석 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 뿐이었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집에다 먹을 것을 잔뜩 쌓아놓고 나중에 먹으려보니 다 곰팡이가 나버려 못 먹게 되었으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또 집에 크게 농사를 지어서 다 쌓아놓았더니 폭풍우가 와서 농작물이 모두 날아가 버렸으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푹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습니다.
이처럼 가난과 자연재해와 재앙이 국내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신앙생활의 실패가 삶을 곤고하게 했다는 한 가지입니다. 기본구원으로 만족하고 건설구원을 이루지 아니한 것이 그들에게 이런 국내적인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을 지으라고 하나님이 바벨론에서 해방시켜 고토로 돌아가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건만 그들은 여호와의 전은 짓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집을 먼저 짓는 이기주의에 빠졌습니다. 학개 1장 9절에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은 기초만 놔놓고 하나도 짓지 아니하고 자기 집을 짓는 데는 빨랐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가 “너희는 몸만 고토로 돌아왔지 마음은 아직 돌아오지 아니했다.”라며 유다백성들을 책망했습니다.스가랴 1장 3절에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라는 것이 두 번 겹쳐 나오면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성전건축을 완성할 만큼 마음이 담긴 적극적인 신앙을 갖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마음을 얹어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왕 예수 믿으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믿어야 됩니다. 마음을 얹혀서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얹혀서 믿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이렇게 마음을 얹은 신앙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핍박이요 내적으로는 핍절이라고 하는 이중고를 겪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문제들 위에서 여전히 통치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신 분이지 아래계신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많아도 위에 계신 분입니다. 이사야 6장 1절에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사도바울도 에베소서 4장 6절에 보니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over everything) 계십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십니다.하나님은 원수의 핍박보다도 경제적인 핍절보다도 우리의 연약함보다도 위에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온갖 어려운 문제에 눌려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나보다 위에 계시고 내 문제보다 위에 계셔서 나를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내 아버지시다.”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내 모든 문제위에 계십니다.
2. 문제 해결의 세 가지 방식
하나님이 위에 계셔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데 에스라 5장에서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3가지 패턴(pattern)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말씀과의 새로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둘이 상면하는 것(meet)이 아니고 부닥친다(encounter)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부닥치는 것입니다. 에스라 5장 1절에 하나님이 학개와 스가랴 두 명의 선지자를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사람들에게 예언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예언(預言)”은 미래 일을 말한다는 뜻인데 “예(預)”자에는 맡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개와 스가랴가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증거했는데 두 선지자는 각각 성격도 사역도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많은 유다백성들과 한 편이 되어서 도와주었습니다. 2절에 보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하여 돕더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가정이 잘되려면 아내와 남편이 한편이 되어야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갈라져 서로 다른 편이 되면 안됩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기가 죽어 들어왔는데 “당신 평소에 하는 행동을 보니 내가 그럴 줄 알았다.”며 구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기를 꺾으면 남편은 밖에서도 당했는데 안에 와서도 또 당하는 이중고를 겪어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기가 죽어 들어오면 “여보, 사람이 살다가 그만한 일도 있는 것이지 뭘 그렇게 슬퍼하세요?”라고 위로하며 한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용기를 얻고 다시 재기할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성도님들이 제 편이 되어주실 때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제 반대편에 서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면 좌절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같은 편이 되시고 교회에서도 목회자와 구역식구들과 같은 편이 되어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같은 편이 되어 그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 가운데 아직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선지자들이 “아니다. 지을 때는 벌써 지났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늦었다고 할 때가 그 때가 바로 맞는 때다.”라며 격려합니다. 또 성전 짓는 일보다 자기 집 짓는 일에 빠른 사람에게 가서 “너희가 하는 짓이 지금 바르냐? 너희 소위를 살펴봐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너희가 너희 가정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가하냐?”라며 꾸짖습니다.
또 연세 드신 어르신 중에는 새로 짓는 성전이 옛날 솔로몬 성전에 비해 너무나 작고 초라하다고 탄식하고 불평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 적극적인 말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기력이 쇠하다보니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의식적으로라도 자꾸 적극적인 말을 하셔야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과거의 솔로몬 성전은 영화로운데 지금 이것이 무엇이냐며 탄식하고 불평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선지자가 “그런 말씀하지 마시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클 것입니다. 그리고 만국의 보배 되신 그리스도가 이 성전에 서실 것입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더 중요하지 그곳의 크고 작음이 뭐가 중요합니까? 이 성전에 여호와가 함께 하십니다.”라며 격려합니다.
또 가난과 자연재해와 재앙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너희가 성전 짓기를 시작만 하면 그날부터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그러니 좌절하지 말고 성전 짓기를 시작하라. 그러면 그날부터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기 싫은데 누가 떠밀어서 억지로 해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성전 지을 힘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스가랴가 4장 6절 후반으로 7절 전반에서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성신이 함께하면 이 일은 된다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과의 새로운 만남을 갖게 되자 백성들 사이에서 새로운 태도가 일어났습니다.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지말자”라고 하다가 “하자”라고 하는 새로운 에너지가 일어났습니다. 과거에는 “안된다”고 하다가 “될 것 같다”는 새로운 에너지가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감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5년 만에 성전건축이 완공되었고 주전 515년에 완공된 이 성전을 가리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솔로몬 성전이 제1성전이요 스룹바벨 성전이 제2성전이요 이것을 나중에 헤롯대왕이 고쳐서 헤롯 성전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제3성전이 되었습니다. 이 헤롯성전에 그리스도 예수, 만국의 보배가 서신 줄로 믿습니다.
인류역사의 새 시대는 언제나 하나님의 종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일어났습니다. 캄캄한 구약시대에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자 사람들이 “우리는 지금까지 이처럼 말씀하신 분을 만나뵙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신약시대가 시작되고 인류역사는 BC와 AD가 갈리는 위대한 전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증거할 때도 사람들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그들로 인해 새시대가 일어났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자 어두운 중세기가 끝나고 종교개혁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바른 하나님 말씀이라며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과학과 경제도 발전시켜 근대기도 오고 현대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청교도가 신대륙으로 가서 미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청교도의 2대, 3대, 4대로 가면서 그들의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이신론(deism)에 빠졌습니다. 그때 미국에서 일어난 조나단 에드워즈와 영국에서 건너간 조지 휫필드가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고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깨어서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에 새시대가 일어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종들을 일으켜 새로운 말씀으로 인류와 만나게 하심으로 일어나게 된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개인의 인생에도 하나님 말씀과의 새로운 만남은 소망과 빛을 줍니다.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은 어찌하여 이렇게 정체(stagnation)되어 지루한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과 새롭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10분만 성경 읽고 10분만 기도해도 인생이 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올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과의 새로운 만남이 우리의 심령에 부흥을 일으키는 첫 번째 원동력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새로운 헌신이 있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가 일어나서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기본구원 받았다고 만족하지 말고 건설구원을 이루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일하던 것도 모두다 중단하고 좌절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육신적 피곤과 질병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피곤한 분은 쉬시고 병이 있으신 분은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료를 받고 약도 먹고 치료받아 건강을 회복하십시오. 기도와 함께 의사의 진료도 받아야 합니다. 병원에 간다고 그것이 불신앙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사들을 일으켜 세워주셔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이상적이고 큰 목표를 세웠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절망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능력에 맞게 차곡차곡 세워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비판과 중상모략이 너무 심해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요즈음 인터넷에 악플을 띠어 연예인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공격당하는 당사자가 그런 글을 자꾸 보게 되면 깊은 좌절감과 우울증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플을 띠워 남을 비방하는 사람은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16세의 어린 나이에 목회를 시작해 시골에 가서 400명으로 부흥시켰습니다. 그러자 18세에 영국 런던의 New Park Street라는 침례교회로부터 담임목사청빙이 왔습니다. 당시 그 교회는 예배당은 천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인데 약 50명의 노인들만 교회에 나와 앞에서 예배드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스펄젼이 이곳에서 2년 동안 설교해 5천명으로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엇습니다.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였는데 스펄젼은 침례교도였습니다. 그래서 국교도들이 공격했습니다. “그는 잠시 떴다가 사라지는 혜성이다. 그는 사기꾼이다.”라는 등 온갖 중상모략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도 때로는 심한 우울증을 겪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믿는 사람의 배반으로 인하여 좌절감과 환멸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한대로 응답받지 못한 경우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좌절감과 우울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좌절감과 절망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종종 잘못된 도피처를 찾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십니다. 어떤 사람은 술로는 부족해 마약도 먹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불륜관계에 빠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도박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해봐야 그나마 남은 것마저 잃게 되어 좌절감만 더 깊어질 뿐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잘못된 도피처이므로 그리로 가지 마십시오.
우리는 문제가 다가올 때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새로운 헌신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면 새로운 기쁨이 옵니다. 교회에 와서 빗자루를 들고 예배당을 쓸고 설거지를 해보십시오. 그리고 찬양대에 들어가 찬양으로 봉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력보다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면 기쁨이 솟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매우 심한 우울증에 걸려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문제를 무려 2시간동안이나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2시간 동안 얘기를 듣고 난 목사님이 “당신은 주님을 위해 무슨 사역을 하십니까(What kind of ministry do you do for your Lord)?”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왜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하느냐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당신은 주님을 위해 무슨 사역을 하십니까?”라고 다시 물어 이 부인이 의아해 했습니다. 그때서야 목사님이 “저라도 당신처럼 자신의 문제만 붙들고 하루 종일 생각하고 고민하면 벌써 우울증에 걸려 죽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문제는 너무 자기중심적인(self-focused) 것이니 이제 당신 문제는 놔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보다 불행하고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한번이라도 봉사해 보십시오.”라며 돌려보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좌절감과 우울증 원인의 상당부분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 그리고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십시오. 그러면 우울증과 어두움은 물러가고 빛이 와서 기쁨이 샘솟게 됩니다. 그리고 자꾸 에너지가 생기고 새로운 태도가 생겨나서 재앙은 물러가고 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이 성전을 짓지 않고 있을 때는 온갖 문제가 있었지만 돌을 놓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는 사라지고 복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문제만 갖고 고민하지 마시고 주의 일에 헌신하십시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고 큰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원수의 공격에 정직하고 겸손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맞섬이 있었습니다. 성도는 원수가 공격해올 때 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야 됩니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수많은 세력이 있습니다. 타종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안의 이단들도 기독교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과 만나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원수들이 다시 일어나서 방해합니다. 에스라 5장 3절에 “그 때에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가 다 나아와 저희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건축허가를 내어 줬는지 이름을 대라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유다백성들은 피하지 않고 조목조목 정확하고 겸손하게 답변합니다. 사탄과 대적할 때는 성질낼 필요 없이 조목조목 겸손하게 답변하면 되는 것입니다. 에스라 5장 11절로 16절이 유다백성들의 답변내용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서 지금 세상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짓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정치적인 일이 아니라 종교적인 일이다. 과거 여기에 솔로몬 성전이라는 위대한 성전이 있었는데 우리 조상들이 죄를 지어 바벨론에 포로 되어 끌려가 70년 동안 고생하다가 하나님이 때가 되어서 우리를 여기에 다시 돌아오게 하셨다. 페르시아의 새 왕이 된 고레스가 조서를 내려 이 전을 건축하게 했다. 그리고 과거에 느브갓네살이 빼앗아간 성전 그릇들을 모두 스룹바벨에게 주어 성전을 건축하고 거기에 두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건축허가는 고레스가 내어줬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이 말을 듣고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 페르시아 왕 다리오에게 이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하는데 사실인지 알아달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다리오왕도 자기보다 18년 먼저 있던 왕이 한 일이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가를 뒤져보니 유다백성들의 말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총독들에게 유다백성들을 도와주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결국 성전이 완공이 된 줄로 믿습니다.
원수가 공격해올 때 하나님의 방법은 원수를 피하지 말고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 후반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많은 문제가 여러분을 공격해 와도 정직하고 진실한 말로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거짓은 다 물러가고 마귀는 고개를 흔들다가 다 떠나가 버리게 되어있습니다. 원수의 공격에 기죽어 눌리지 마시고 신앙으로 대적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에스라 5장 5절에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 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그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전건축을 완성하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이 돌아보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기본구원을 받은 유다백성들은 건설구원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건설구원은 본문에서 세 가지로 이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새롭게 만나고, 하나님의 일에 새롭게 헌신되고, 그리고 원수의 공격을 당당히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건설구원을 이루면 문제는 해결 받고 다시 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학개 2장 19절 후반에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건설구원을 시작한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부터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받고 다시 시작되는 성전 짓는 역사
에스라 5:1-2
앞서 1장 말씀을 통해서 고레스 왕 2년에 (주전 535년) 성전 건축하려 올라오게 하셨고 4장에 아하수에로 왕 때에 (주전 529년) 대적자 사마리아 사람들로 인하여 방해받다가 아닥사스다 왕 때에 (주전 522년) 멈춰졌습니다. 그러나 5장에 다리오 왕 때에 (주전 520년) 다시 시작되어 성전 완공은 20년 만에 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한번 타락하면 그 세월은 오래가고 고생하다가 늦게 서야 탕자처럼 아버지집에 양식을 받아 먹게 하시려 다시 돌아오게 하사 회복케 하시는 것입니다. 눅15:17-
오늘은 다리오 왕 2년 후에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앞선 학개와 스가랴 같은 선지를 통해 주신 말씀을 양식으로 받으면 무너졌던 성전을 다시 짓게 되고 드디어 완공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1절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학개는 ‘쾌락’이라는 뜻입니다. (학 1:1) 육신적 세상적인 쾌락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쾌락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신령한 기쁨이 없습니다. 학개 선지는 말씀을 아구까지 채우게 하신 자로 성전 건축이 멈춰졌을 때 애가 탄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그에게 말씀을 주어 성전을 다시 짓도록 책망 격려하게 하셨습니다. 학 1:2-
지금도 영적 양식을 받아 자라난 자들은 자기 몸을 성전 삼고 날마다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면서 거룩 생활하지 않는 택자들을 보면 예레미야처럼 심히 안타까워 기도합니다.
잇도는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손자 스가랴는 ‘하나님은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스가랴서 1:1에 말씀이 임했다고 하셨는데 주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달은 할아버지를 통해 스가랴도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신령한 기쁨으로 살아가는 학개와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진 스가랴에게 성전 건축을 중지하고 있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을 깨달은 자라면 그 사랑이 내 속에 역사하기 때문에 육신의 피곤함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적은 사랑도 국경을 초월하고 죽음도 불사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달았다면 날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님처럼 새벽을 깨우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막1:35-
성전을 짓는 역사가 그쳐졌을 때 학개와 스가랴는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성전 짓는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성전 건축이 중단된 것은 하나님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슥3:6-
말씀이 깨달아져 기쁨과 감사가 항상 있는 것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때에 말씀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성전 짓는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에 고린도교회와 갈라디아 교회도 성전 건축이 멈추어져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고전3:16-
하나님께서는 왜 대적자들로 인하여 성전 건축을 중지하게 하셨습니까? 앞선 자들은 기쁨과 감사로 하고 있는데 족장들의 후손들은 또 내 열심과 내 충성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새벽을 내가 깨우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잠깐 쉬어’ 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새벽을 깨웠다고 교만하게 말하지 못하게 하심입니다. 날마다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는 새벽을 깨우는 것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역사를 맛본 다윗 같은 자들만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34:8-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학개와 스가랴 선지는 자기 기분과 감정에 이끌려 말씀을 나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꺽고 온전히 엎드려 주신 대로 받아서 그대로 증거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종이라면 에스겔처럼 오로지 자기가 받아 먹은대로 그때 그때마다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만 할 것입니다. 겔3:1-
그런데 강단에서 인기 목사되려고 하는 자들로 인해 귀가 가려워 듣기 좋은 설교만 쏟아져 나오는 현실이요 그것을 좋다하는 어리석은 교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먼저 자기에게 주신 말씀을 양식으로 받아서 그말씀대로 이루신 역사가 있는 분들이 자기에게 이루신 그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리고 현재에 자기 자신도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앞으로 이루실 그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예언으로 사도 바울로 예언하기를 특별히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고전14:1-
그 증거되는 말씀대로 또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한 나를 통하여 말씀을 받는 자들에게 앞으로 첫째 부활을 얻게 하시려 이루실 일이 예언인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통해서 성전을 짓는 역사가 다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복된 첫째 부활을 얻게 하시는 계시록을 읽지도 않고 양식으로 받지도 못했으면서 예언한다고 하는 자들은 거짓말하는 무당과 같은 자로 점치는 자들과 같습니다. 많은 목사들과 세상적으로 유명하고 똑똑하여도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모르니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계21:7-
2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스알디엘은 ‘빚지다’란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에 지식적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주사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나?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고전9:16) 그것은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불러서 그 복음이 믿어지게 하시고 사도로 세워서 일하게 하사 하늘의 귀한 영광을 얻게 하시니 그 크신 사랑에 빚진 자라 한 것이요 나에게 주실 그영광이 믿어졌으니 한가롭게 자신의 평안과 안일을 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가도 가지 아니하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한 영혼, 한 영혼을 만나게 하시고 나를 통해 복음이 믿어지게 하시기를 그리고 양식을 받고 자라기를 더 자라나서 영광의 일군되기를 구한 것입니다. 복음(福音)은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사랑의 빚을 진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롬1:14-
스룹바벨은 ‘바벨론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서에도 유다 사람들을 바벨론 사람으로 만들려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스룹바벨은 비록 바벨론 왕이 이름을 지었지만 그 뜻대로 살지 않고 유다 자손으로 영광 받을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사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되기 전에 요한의 아들 시몬은 육적으로 육의 아버지를 통해서 났으나 이름을 바꿔주사 베드로가 되게 하시는데 먼저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성령으로 고백하게 하시고 기어코 그 믿음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마16:16-
오늘 나는 육신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대로만 살고 있습니까? 부르시고 복음이 믿어지게 하시고 진리로 자라게 하사 영광의 직분을 주신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그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맡기신 일이 다를뿐입니다. 스룹바벨은 슥 3:8, 6:12에 여호와의 종으로 나타내주셨습니다. 삼위일체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성전 짓는 역사에 쓰시기 위해서 그때에 유다의 총독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아는 ‘여호와가 구원하심’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여호와가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호세아도 뜻이 같습니다. 오늘도 삼위일체의 역사 안에 사는 자들이 너무나 적습니다. 내가 무엇이나 열심해서 무엇이나 다 잘하려고 하는 자들은 삼위일체의 역사 안에 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성전 건축이 잠시 멈추어졌을 때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하나님이여 왕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는데 왜 멈추게 하셨습니까? 도우사 다시 건축하게 하옵소서’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도하는 것 보면 잘못된 기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전5:2-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하여 돕더니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복음을 누구보다 먼저 받고 살림 받아 진리의 양식을 누구보다 먼저 채운 자들로 앞서 가는 자들입니다. 신천지에서는 이만희를 앞선자, 이긴자, 선지자, 보혜사라고 좋은 말은 다 갖다 부쳤습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이단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고 미혹을 받습니다. 자칭 유대인 (계2:9) 선지자 자칭 사도들이라 하는 자들은 사단이 그 속에 역사하는 자들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계2:2-
앞선 자들은 자기 몸을 성전 삼고 이제 다른 사람이 성전 짓는 것을 돕고 있는데 아직도 예배당 건물이 성전인 줄 알고 영적 성전을 전혀 짓지 않고 주저앉아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육신은 밥을 먹지 않으면 일어날 기력이 없듯이 영의 양식을 받지 않으면 영광길을 한 걸음도 갈 수 없습니다. 오늘도 내게 필요한 양식으로 받게 하시려 아버지 집에 나오게 하신 것이요 받은 그 말씀이 내 안에 있어 주신 하루도 그 말씀의 힘으로 달려갈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나오게 하셨으니 앞서 가야 하는데 항상 뒤쳐지니 나중 될 수밖에 없는데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날마다 내 몸을 성전 삼고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나를 통해 한 생명이라도 살리시옵소서! 내게 보이신 그 첫째 부활을 반드시 얻게 하옵소서! 하면 반드시 도우시는 역사가 있는데 세상에 치우쳐 살아가면서 도와달라 하나 도우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히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