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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금 나는 깨어있다 원문보기 글쓴이: 등대빛
만병통치(萬病通治)의 달인, 최영단
● 인정상관(仁正上觀. 1887-1954)의 유일한 제자로서 최영단이란 여자 분이 있었다. 그 ‘神人’에 의해 길러지다시피 한 인물로 그 신인의 사후에 그 영(靈)으로부터 도력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한번 쳐다만 보아도 병이 낫는다’는 신유력(神癒力)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데 한때 하루에도 수만 명의 환자가 정읍의 그녀에게 몰려드는 큰 소동이 빚어져 신문에 보도되고, 1962년과 1979년 군사정변 주체들에 의해 제재가 가해지기도 했다.
● 1954.12.23일(음) 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 선화 후, 본주(本主)게서 천상에서 황금 가마를 타고 내려 오셨는데, 인정상관(仁正上觀)님을 잡으려고 하면 잡힐듯 말듯 하던 중에 신통력을 얻었다. 그 후, 아픈 사람을 쳐다만 봐도 병이 낫고 만지기만 해도 완치되었다. 소문이 퍼져 환자들이 수백 수천명씩 몰려들었다.
● 최영단 여사의 본업은 치병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맥을 잇는 공사”를 하셨다고 한다. 2004년에 귀천하였다.
● 최영단 선생은 두 가지 능력이 뛰어났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기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능력이다.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뛰어나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1979년 초부터 신문, 방송, 주간지등에 요란스럽게 오르내리던 정읍의 만병통치의 여인! 얼굴만 처다보아도 낫는다고 해서 정읍시 입양면 시골에 하루에도 수십대의 전세버스가 드나들고 경찰에서는 교통순경까지 동원하여 진땀을 빼고 몰려드는 인파에 시달리다 못해 만병통치 도사 여인을 즉심에 넘긴 일이 있다. 그것도 안되니까 마침내 여인은 부산 친척집으로 피신하여 해운대 극동호텔에 몰래 숨었지만 아침에 문을 열고 보니 환자들이 수천명 모여들어 법썩을 떠는 바람에 또 도망치다시피 피신하는 등 그야말로 인파에 쫓겨다녔던 ‘쳐다만 보아도 병을 고친다’는 만병통치 여도사였다.
● 최영단 여사의 병 고치는 방법은 의외로 너무 간단하여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손으로 액션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안찰이나 안수를 하는 것도 아닌 다만 환자를 쳐다 보고 몇마디 말을 건넨 후에 가보라면 그것이 끝이라는 것이다. 최여인과의 대화가 끝나고 나면 환자는 병이 낫는다는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 최영단 여사는 신비스러운 치병 행각으로 인하여 경찰서 유치장 신세도 두어번 진 일도 있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에는 전국 각처에서 매일 1천명씩 인파가 몰려드는 바람에 철도 당국은 간이역인 천원역까지 특별 열차를 연결할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이르자 경찰에서는 미신 조장의 우려가 있다고 하여 1963년 3월 최여인을 사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협의로 구속했으나 공소 유지가 안되어 무혐의로 풀려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 “착하게 열심히 자기일 잘하는 것에만 신경 쓰라. (거창하게 무슨 道를 닦는다든지. 말세론 등에 신경쓰지 말라!) 세상 일은 어른들이 다 알아서 잘 되게 하실 것이다.”
● “중국 땅 잘 지키고 있어. 그게 다 우리 땅인데 곧 우리가 찾을 거야. 중국 땅의 한 가운데로 바다가 생기는데, 네가 살고 있는 땅은 걱정 없어. 세상의 온갖 불빛이 자취를 감추게 되며 추위도 함께 온다. 성냥 다섯갑이 다할 때까지 불을 켰지만 안 된다. 그 일주일이 지나면 새로운 세상의 기운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차츰 서로의 마음까지도 알게 되고, 자신의 병은 눈으로 보며 고치게 된다.” [포톤벨트' (대원 출판사)에서 말하는 우리의 태양계가 photon belt에 들어간다는 내용과 흡사하다. 4일 정도는 온통 암흑이며, 3-4일 정도는 하루 종일 빛이며, 새로운 플레이아데스의 광자대에 돌입한다는 내용과 비슷하다.]
● "하늘로부터 엄청 큰 세계 지도가 묘 앞에 펼쳐지는데, 한자로 적힌 지도에서 일본 땅을 살펴보니 바닷물에 씻겨 일본 남양 군도 (南洋群島, 괌.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까지 흘러 떠내려 가더라"
● 마음 바루는 의원 공부 = 호흡은 단전에 미치도록 가늘고 길게 종용(從容)히 한다. 마음은 단전에 부착(付着)한다. 앉아 있을 때나 또 걸을 때에나 항상 허리를 꼿꼿이 하고 아랫배를 자연스럽게 한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마음(心火)’이 땅으로 내려가고 ‘땅의 정성(腎水)’이 하늘로 올라가는 천지상교(天地相交), 즉 땅 하늘의 이치인 것이다.
● 본주(本主. 1995년, 정신세계사)와 맥(貊.정신세계사.1987년)이란 책이 절판되었는데, 그 이유는 박문기(최영단 아들)씨가 없던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곤 했고, 그래서 한영자 어른이 야단을 치셨다고 한다. 그 후, 책이 절판되었다고 한다. 한영자 어른은 본주(本主)께서 사시던 양택지(정읍 입암면)에 거주하시며, ‘본주 대경전’을 소장하고 계신 분이다.
신인(神人) 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
● 1887년 03월 19일, 경상도 하동읍 화심리 437번지 의령 여씨 집안에 12개월된 여자 아기가 탄생하였다. 그 아기의 모친 이(李)씨 부인은 남편(의령 여씨)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가 기도를 하곤 했는데, 남편(의령 여씨)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에 아이가 잉태되어 12개월만에 아이를 낳았다. 아기를 낳을 즈음에 낯모르는 여인 둘이 찾아와서 이 아기의 탄생을 도왔다고 한다. 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이 탄생한 배경이다.
● 경북 영천시 신령면 왕산리로 이사하여 살았으며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성년으로 성장한 후, 전북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 목주 작은 방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 때 본주(本主)께서 본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옆구리에 끼시며 ‘눈을 감으세요’ 하는 순간 바람 소리가 세차게 들리며 한동안 나는 것 같더니 ‘눈 뜨세요’ 하여 주위를 살피니, ‘정읍 대흥리’ 라고 하였다. 이 때 축지(縮地)법을 쓰셨다.
● 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은 전북의 정읍에서 해방의 시점과 국가의 대전란(6·25)을 예고하는 등 신이한(神異)한 예지력과 도력을 보이고 생을 마쳤다. 인정상관'께서는 '공사(公事)'라는 형태로 자신의 도력을 행사하였는데, '공사(公事)'란 어떤 상징물의 조작을 통해 그 상징과 대응하는 실제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신적 행위를 말한다. 인정상관이 행하셨던 공사의 내용 중 가장 큰 공사는 장차 한민족이 세계 문명의 종주국이 된다는 것인데, 현재 서구의 문명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가치관으로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도리(道理)’와 ‘효(孝)’사상을 통해 달성한다는 것이다. 때가 되면, 세상이 ‘사람의 도리’에 의해 지배되고 ‘한민족 사람의 말이 세계 만민을 움직이는 말이 된다’고 한다.
● 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은 종교(宗敎) 단체 자체를 부정하였다. 본주(本主)에게서 답을 얻어야 한다. 그녀는 전북의 정읍에서 조선 해방(1945)의 시점과 한국 전쟁(1950)을 예고하는 등 신이(神異)한 예지력과 도력을 보이고 생을 마쳤다. 그녀는 ‘공사(公事)’라는 형태로 자신의 도력(道力)을 행사하였는데, ‘공사(公事)’란 어떤 상징물의 조작을 통해 그 상징과 대응하는 실제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신이한 행위를 말한다.
● 본주(本主)가 행하셨던 공사의 내용 중 가장 큰 공사는 장차 한민족(韓民族)이 세계 문명의 종주국이 된다는 것인데, 현재 서구의 문명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가치관으로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예의(禮義) 도덕(道德)’과 ‘효행(孝行) 박애(博愛)’ 사상을 통해 달성한다는 것이다. 때가 되면, 세상이 ‘사람의 도리(道理)’에 의해 지배되고 ‘한민족(韓民族)이 사용하는 한국어(韓國語)가 세계 만민을 움직이는 말이 된다’고 한다.
● 그녀는 스스로 종교 조직을 형성하는 것을 일체 금자하였는데, 그의 사상을 집약해서 표현하면 “종교(宗敎)를 갖지 마라! 자신이 곧 미륵(彌勒)이다” '기존 종교를 거부하고 토속의 고유 정신과 고유 생활 문화를 지키는 것'이었다. 김동규씨는 인정상관을 자주 뵙고 가르침을 구했다고 한다. 그의 얘기에 의하면, 본주(本主)께서는 길에서 10cm 정도 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고 한다.
● 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님의 묘소를 물으니, "전주에서 출발하여 금산사 입구 삼거리 조금 못 가서 산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고, 모악산 쪽으로 쭉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그곳에 여처자 본주(本主)님의 묘소가 있다"는 동네 어르신의 설명이다.
● 본주(本主)께서 운명하시던 날(1954.12.23)부터 금산리 일대의 우물이란 우물이 다 말라 바닥이 드러났는데 다만 한군데 샘만이 마르지 않고 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것은 인정상관댁 앞 배밭에 있는 우물이었다. 이런 기현상은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어 그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인근의 마을 주민들까지 다 그 물을 길어다 먹고 살 수가 있었다. 한데 그 샘이 바로 옛날에 인정상관이 '생명수'라 이르고 다시 손볼 것을 명하여 보수해둔 그 샘이어서 사람들은 새삼 그 어른의 유덕에 고개를 숙였다.
● 1950년 02월 19일(음), ‘대한민국에서 3개월 후면 전쟁이 나니, 관원들은 직장을 그만 두고 피신하라는 경세 광고문을 전남 장성군 북일면 지서 공고판에 써 붙이다가 국가보안법 유언비어 유포죄로 일행이 체포되어 본주(本主)외 11명이 연행되었다. 장성 경찰서 취조시에 ’무슨 도(道)를 믿냐?‘고 물으니, 선도(仙道)라 하시고, 도주(道主)가 누구냐고 물으니 증산(甑山)! 다시 물으니 강증산(姜甑山)이라고 답변하시었으며, 구속된지 49일만에 석방 되시고 일부는 6.25 사변이 일어난 후 석방되었다.
● 증산(甑山) 상제님 생존 제자 박공우(朴公又) 선생의 부인 말에 의하면, ‘어느날 수련을 하니 본주(本主) 인정상관님이 보이는데 천상의 관세음 보살로 보이시며, 금빛 찬찬한 가운데 어머어마하게 보였다. 생존시에는 초라한 모습으로 계시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는데 그렇게 무서운 어른인줄 몰랐다.’ 라고 했다.
● 배(裵)씨 여인은 태을주(太乙呪)를 암송하던 중에 별천지(別天地)를 보았다. 마침내 주송 수련을 몰래 열심히 하게 되었다. 새벽이면 몰래 청수를 올리고 앞으로 살아갈 길을 염원하며 태을주 주문을 일념으로 외웠다. 그 후로 그가 청수를 올리고 주문을 외면, 사람의 골절과 오장육부가 그의 눈에 선히 보였다. 또 하얀 옷을 입은 동녀가 약을 가르쳐 주었고 붉은 옷을 입은 동자는 침 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살아갈 길을 염원하며 주문을 읽다가 뜻하지 않은 의술(醫術)을 영계(靈界)에서 배우고 보니 이를 어찌해야 할지 배 여인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배 여인은 달리 하소연할 곳도 없어 인정상관을 찾아가 여쭈어 보고자 하였다. 한데 인정상관을 만나 막 인사를 하려고 하니 인정상관이 속을 다 들여다보듯이 바라보며 말하였다. “신(神)에게 부림당하는 사술(邪術)을 행하지는 말아! 그게 비록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라 해도 뒤가 안 좋은 법이야."
● "말과 행동은 천지(天地)에서 보고 있으니 깊이 생각하고 말을 아껴야 하며, 호언하고 실행치 않으면 죄가 된다. 애 쓴 것 몰라 준다고 한탄해서는 안 돼. 애쓰면 애 쓴 만큼 덕이 되고 복이 된다. 너희들은 몰라도 신명(神明)은 알어! 도(道) 닦는다고 조용한 곳에 길들여지면 음지(陰地) 식물이 되어서 햇빛을 보면 시들해 져! 참다운 수행을 할려면 생활 속에서 궁구하고 마음을 바루고 덕행을 해야 해!"
● “신명이 들판에 나락 모(茅) 서 있듯 많고 많아. 사람의 행동 하나 하나 관찰하고 있는 신명이 있으니 좋은 일 많이 해!” “신명 대접할 때에 골고루 한다고 적게 올리지 말고 한 두가지라도 많이 올려야 한다.”
● “남한테 얼마간의 손해를 입었어도 탓하지 말고 인자하게 하라! 겸손하고, 의리있고, 성실하게 마음을 비우고, 남을 공경하면 하늘도 감탄 하느니라.”
● 앞으로 병이 많이 나겠지. 사람이 많이 죽겠지. 부지런히 설치어라. 너희가 가는 집은 너희 얼굴만 보아도 살고, 너희 말만 들어도 산다.
● 남이 잘 못하는 말이라도 잘 들으면 복이 되니, 마음 잘 먹어.
● 가정에도 아버지가 할 일이 있고 어머니가 할 일이 있고 자녀들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효행을 실천하면 성공해.
● 돈이란 벌 때는 벌고 쓸 때는 서야 해. 꼭 쓸 때 안 쓰면 도적 맞어.
● 부부로 짝지어 사는 사람을 탐하고 정을 통하면 안 돼. 큰 벌을 받어.
● 눈 앞의 이익만 생각하면 큰 일을 못하고 벌 받어.
돈 있으면서 옳은 일을 하는데 안 쓰면 신명이 노해.
● 영원한 선경 세계로 나갈 수 있도록 바라며 전생의 업보를 벗어 나는 것이 마음 닦는 길이다.
● 남한테 약간의 손해를 입었어도 탓하지 않으면 그것이 적덕이 돼.
● 땅 속 토왕 일을 잘 알아야 잘 사는 것이다.
● 살아있는 나무를 함부로 끊으면 못 써.
● 인의예지(仁義禮智) 알아야 해. 마음이 반듯하고 의로우면 하늘이 좋아해.
● 남을 해롭게 하면 나도 해롭고, 남을 잘되게 하면 나도 잘 된다.
●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바람 분다고 춥다고 불평하면 신명이 싫어한다.
● 물 한방울 곡식 한알이라도 천지(天地)에서 주는 것이니 아끼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해.
● 땅 하늘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땅 하늘이 정말 무서워!
● 땅을 해롭게 하면 못하게 해. 땅 위에 사는 모든 것을 해롭게 하면 못 써.
● 고기는 물 속 고기가 고기이지, 땅 위에 사는 것은 고기가 아니다.
● ‘선한 사람은 못 살고 악한 사람은 잘 사니 왜 그러지요?’ 라고 물으니, ‘전생에 잘 닦은 사람이 잘 살고 못 닦은 사람은 못 사는 것이여!’ 하시니라.
● 오락은 좋으나 돈을 걸고 내기를 하면 안 돼. 노름판을 하면 안 돼. 큰 벌을 받어.
● 부부가 합심하고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고 마음을 선량하게 하고 봉사하며 덕을 쌓는 것이 도(道) 닦는 길이다.
● 생활이 어렵고 몸이 아프다고 괴로워서 울고 원망하면 복(福)을 차는 것이야. 그럴 때면 하늘이 그대를 필요로 함인 줄 알고 남에게 의탁하려 하지 말고 마음을 잘 닦아야 해.
● 재물을 즐기면 탐심이 생기고 부정한 신명이 들어서 희롱하며 일을 망치게 되니, 마음을 붙잡고 감사한 마음으로 수행에 열중해야 해.
● 하늘이 할 일이 있고, 땅이 할 일이 있고, 사람이 할 일이 있고, 신명이 할 일이 있으니 서로 그 책임을 다하면 천지가 바르게 된다.
● 남의 재앙을 이롭게 생각하면 안 되고 자기의 재앙도 막지를 못해. 남의 허물을 숨겨 주면 환란(患亂)과 재앙을 막을 수 있어.
● 노력 없이 성공을 바라고 때만 기다리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어.
● 신명에게 잘 보여야 그것이 씨가 되고, 싹이 나서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된다.
● 그 분의 생애는 1887.03.19-1954.12.23(음력)이다.
http://blog.daum.net/dosu92/17453244
구한말의 강일순(姜一淳, 1871.9 . 19 ~ 1909 . 6 . 24 음력)
인정상관 余씨(仁正上觀. 1887.3.19-1954.12.23일 음력)
최영단 젊었을때 사진
최영단 할머니 ( - 2004년)
井邑,농부사학자 朴文基씨 소설 `本主' 출간
기사입력 1995-07-25 00:00
(井邑=聯合) 朴喜敞기자= 농부사학자 農樵 朴文基씨(47.井邑시 笠岩면)가 우리민족 상고사를 정리한 `貊耳' `大東夷'에 이어 최근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정책으로 폐교된 普天敎의 발상지 井邑시 笠岩면을 무대로한 자서전적 소설 `本主"를 펴냈다.
4×6판 상하 각권 3백쪽 분량의 本主는 조선조말 국운 쇠퇴기와 일제를 거쳐 70년대 초까지 `마음 바루는(바로세우는) 의원공부'를 내세워 땅.하늘의 운수大道를 외친 실제인물 `仁正上觀' 余씨(여.1887-1955)의 출생, 구도의 땅인 井邑시 입암면 정착, 배분성(작고.저자의 외할머니), 최영단(70.저자의 어머니)과의 만남, 그리고 余씨의 행장 등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저자는 仁井上觀으로 불린 余씨가 세인들 사이에는 잊혀졌으나 민족 전래의 신앙대상인 九天上帝가 우리민족 본래의 모습인 `맥이'의 모습으로 태어나 조선조 말의 국운을 지탱하는 민심의 기둥이었다고 소개.
저자는 당시 보천교의 교주 車경석의 土主(地母)에 비견해 余씨를 本主로 보고 余씨 주변의 裵씨와 최영단여사를 통해 신명계를 펼친 실존 인물로 그의 놀라운 예지력과 천지 판도를 바꾸는 도력에 힘입어 추종하는 무리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다만 余씨는 추종하는 문도들이 교명짓기를 청하자 `敎徵敎"로 하라는 충고를 할정도로 도덕만을 말했을 뿐 종교를 만들지 않은 도덕 실천 지상주의로 일관했다고 주장.
특히 저자는 余씨의 생애가 `우리가 케케 묵었다고 배척하고 세련되지 못했다고 멸시하는 토속정신과 생활방식 속에 천지를 꿰뚫는 묘리가 있고 미래세계의 해답이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지난 62년과 79년 `쳐다만 보아도 병이 낫는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저자의 모친 崔영단여사도 本主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을 닦고 바루는(바르게 하는)의원공부의 수련 결과였다고.
끝으로 저자는 "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맥이' `맥' 또는 막는다는 뜻의 `막이'란 신명계를 동원, 병을 물리치고 길흉을 바꾸었다" 며 "우리 본정신의 요체를 바로 보아 세계 만민이 우리 민족고유의 도리를 추종하는 세상을 구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자 朴씨는 선대의 독특한 교육관에 따라 신식교육을 전혀 받지않고 전통한학만 공부한 뒤 전통방식대로 살면서 역사서를 저술했으며 최근에는 전래 토종 볍씨인 `다마금'을 발굴, 재배 공급하기도 한 사학자이자 농사꾼이다.
기사원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1997
경향신문 | 김석종 선임기자 | 입력 2011.10.12 21:06
농부 박문기(63·캐리커처)는 전북 정읍시 입암면 진등마을에 산다. 국립공원 내장산에서 이어지는 삼신산 자락이다. 삼만평이나 되는 그의 광활한 들판은 지금 황금색 벼이삭의 물결로 출렁거린다.
평생 고향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토종 농사꾼'이다. 유기농이니, 무공해 친환경 농법이니 하는 말이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그저 하늘과 땅의 절기와 순환에 맞춰 거름을 내고, 써레질을 하는 전래 농법, 전통 방식대로 씨 뿌리고 거뒀다. 그는 "사람과 뭇생명이 먹는 농산물에 농약 같은 독을 뿌리는 것은 천지만물에 죄짓는 짓"이라고 했다.
그의 농업은 '뿌리 깊은' 민족의 첫 농사, 조선상고사와 깊이 연결돼 있다. < 맥이 > < 대동이 > < 본주 > < 숟가락 > 등 상고사 관련 연구서와 역사소설을 아홉권이나 펴낸 '들판(재야)'의 역사학자다. 얼마 전에는 우리 문자의 뿌리와 역사를 밝히는 < 정음선생 > 을 펴냈다. 개천절과 한글날을 지나며 그를 만난 이유다.
농장 맨꼭대기, 삼신산 기슭에는 환인과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조선 등 개천 이래 '동이족' 역대 창업주 신위를 모신 '온조우(溫祖宇)'가 서 있다. 북서쪽 백두산을 향하고 있는 전통 한옥이다. 한때 이곳에 민족 상고사를 가르치는 '동이학교'를 열었다. 일제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겠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좀더 새로운 '창업'을 위해 쉬고 있다.
소위 신식 교육은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다. 대신 어릴 적부터 동네 유학자들에게 '문자'(한학)를 배웠다. 강증산과 탄허 스님의 고향답게 정읍 입암에는 뛰어난 스승들이 많았다. 어머니 최영단도 그의 스승이었다. 그는 특별한 환경에서 공부하면서 모든 문자에는 세상 이치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말 그대로 문리(文理)가 트이더란다. "기운을 뜻하는 기(氣)자, 정신을 뜻하는 정(精)자에는 쌀 미(米)자가 들어있다. 사람의 기운이나 정신이 모두 쌀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문자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그의 관심을 맥(貊)과 동이(東夷) 등 민족 상고사까지 끌어올렸다. 우리 옛 민족인 동이는 중원을 주름잡던 거대 세력이었다. 대륙을 호령하며 말 달리고 큰 활(大+弓=夷)을 쏘던 대동이 민족사는 장엄하고 통쾌했다.
그에게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한자(漢字)'에 대한 '파격적'인 인식이다. "한자는 중국에서 차용한 외래문자가 아니라 우리 동이족 고유의 문자다. 세종께서 지으신 '훈민정음'은 백성들이 문자를 천지자연의 바른 소리(정음)로 읽도록 하기 위해 만든 국민교과서다."
일단 일반의 통념과 기존 학계의 정설을 뒤집을 만큼 도발적이고 흥미롭다. 그는 한자가 우리글이라는 근거로 옛 조선의 문화풍속을 내세웠다. 집 가(家)자에 돼지 시(豕)자가 들어간 것은 집안에서 돼지를 키웠던 우리 민족의 풍습에서 유래했다. 아직도 전라도와 제주도에 풍습이 남아있다. 논 답(畓)자도 중국에는 없다. 세상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먼저 시작한 콩, 쌀, 숟가락 문화는 많은 한자에 그대로 남아있다.
문자의 뜻과 입모양, 발음도 한자가 우리글임을 방증한다. 호흡(呼吸)의 경우 우리 발음으로는 날숨과 들숨의 느낌이 분명하다. 중국인들은 '흐쓰'라고 발음해 소리가 다 밖으로 나가버린다. 사람의 입이 하나가 되는 모습인 합(合)은 '허'로, 출입(出入)은 '츄로'로 모두 입이 열린다. 일자일음(一字一音) 원칙에도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투수(投手)는 네 소리인 '터우서우'로 공을 던지는 느낌이 없다. 주은래(周恩來)는 다섯 소리인 '저우언라이'라고 읽는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무엇인가. 그는 훈민정음 어디에도 한자, 한글이라는 말은 없다고 대답했다. 본래 언문(諺文)은 문자의 발음을 바르게 표기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훈민정음 서문을 '우리나라 문자말의 음절이 중국에서는 달라 문자로서는 서로 시원하게 통하지 아니할세라'라고 풀이한다. 한글학자들이 '문자'를 '한자'로, '중국에 달라'를 '중국과 달라'라고 잘못 해석하면서 훈민정음의 뜻이 왜곡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 말이든 발음대로 다 표기할 수 있는 가장 과학적 우리 문자에서 말글(한글)과 글말(한자)은 새의 양 날개, 수레의 양 바퀴와 같다고 했다.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두 문자는 상호보완의 관계였다. 따라서 말글과 글말을 함께 써야 완벽하게 말하고, 그 뜻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한쪽 날개, 한쪽 바퀴를 버린 한글전용정책과 한자원음주의 때문에 대다수의 국민이 문자맹인이 되었다고 탄식했다. 사실 그의 주장을 귀담아 들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요즘들어 몇몇 동조하는 학자가 있다는 게 위안이다.
그는 "오늘날 농사는 농약의, 역사는 왜곡의, 문자는 무지의 '맹독'에 깊이 중독돼 있다"고 말했다. 천자문 등 요즘의 한자 교육 열기를 보면서 우리 문자와 함께 민족혼의 생명력이 되살아나길 바라고 있다. 올 가을 추수를 마치면 문자가 만들어진 원리인 우리 풍속을 토대로 한문을 쉽게 익힐 수 있는 < 정음천자문 > 을 쓸 계획이다. 농사가 제일 중요한 직분이라고 말하는 그는 늘 '밥숟가락이 부끄럽지 않게'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
< 김석종 선임기자 >
기사원문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newsview?newsid=20111012210617539
[책소개] 본주
◆ 책소개
일제 침략에서부터 6·25 직후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출현해 불가사의한 신력으로 국운을 돌려놓고 사라졌다는 기이한 실존 인물의 개인사를 당시의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완성한 책. 한국 상고사에 대한 독특한 주장을 펼쳐 온 농부 사학자 박문기씨의 세 번째 저서.
◆ 지은이
박문기
◆ 목차
머리말
신인(神人)
탄강기(誕降記)
화인기(化人記)
구도기(求道記)
덕유린(德有隣)
보천교와 정읍
정읍으로 가는 신인
*배분성
영단과의 만남
최처자와 혼인
성문(成門)
이씨 부인의 죽음
영단의 생육
독립자금사건
영욕의 보천교
태극무늬 담뱃대
여기언(如其言)
영단의 혼인
국수 반뭉치
행록(行錄)·1
병술년(단기 4279년, 서기 1946년)
정해년(단기 4280년, 서기 1947년)
무자년(단기 4281년, 서기 1948년)
기축년(단기 4282년, 서기 1949년)
경인년(단기 4283년, 서기 1950년)
부록. 사진자료
행록(行錄)·2
신묘년(단기 4284년, 서기 1951년)
임진년(단기 4285년, 서기 1952년)
계사년(단기 4286년, 서기 1953년)
갑오년(단기 4287년, 서기 1954년)
유덕(遺德)
상여소리
단곡댁(丹谷宅)
신통력
선량무사(善良無事)
새옷을 입은 사람
최영단의 신유(神癒)
인산인해
옥동자(獄童子)와 방우 여인
덕해(德解)
좌담
본주 탄강을 생각함
내응과 인정세계
사람으로 돌아가라
◆ 감상
처음엔 본주가 실존 인물을 기록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뿐놈이란 것을 "나 뿐인 놈"으로 해석해 놓은 것을 보고 감탄했다.
세상에 기인들이 참 많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능력이 있어도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차라리 그런 능력이 없는게 낮다는 생각도 다시 해본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말도 안되는 차별적인 내용도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고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http://blog.naver.com/tspace7?Redirect=Log&logNo=40011532747
인정상관 수련법-삼태극 문양 변지훈님 작품
1. 공부란 무엇인가?
1) 공부의 목적
2) 공부의 연원
3) 공부의 내용
2. 공부의 배경
1) 인간의 본질
2) 몸의 구조
3) 마음의 작용
4) 기초기술
- 惺惺(성성)법
- 寂寂(적적)법
- 隨然호흡법
3. 공부의 방법
1) 본성의 구현
2) 능력의 향상
- 인지능력의 향상
- 실행능력의 향상
築基(축기), 孕胎(잉태), 養胎(양태), 出身(출신), 乳抱(유포), 分身(분신)
4. 이전공부와 이후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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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부란 무엇인가?
1) 공부의 목적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잘 살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는 내적으로 인간성이 완벽하게 구현되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하면 외적으로 아무리 많은 능력과 조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잘 살수는 없다. 둘째는 외적으로 인간적 자연적 환경에 정확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당위가 제대로 실천되어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비록 다른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하더라도 잘 살수 없으며, 또한 본성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인간관계가 올바르고 조화롭게 이루어졌다하더라도 자연적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잘 살 수 없다.
[처음으로]
2) 공부의 연원
사람이 처음 생겨났을 때에는 모두가 大人(대인)이었다. 대인은 내적으로 인간성이 완벽하게 구현된 사람이며 배우지 않아도 외적으로 당면한 일에 정확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즉, 대인은 大德(대덕), 大慧(대혜), 大力(대력)을 갖춘 사람으로서 神人合一(신인합일)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어떤 연유로 인하여 점차 부족한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런 사람은 내적으로 인간성이 부족하였고 외적으로 당면한 일에 정확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 많은 문제점이 일어나게 되었으므로 그 부족한 사람을 대인으로 회복시켜야할 필요가 생겼다. 그때부터 부족한 사람이 대인으로 회복하기 위해 행하는 공부란 것이 있게 된 것이다.
3) 공부의 내용
공부는 크게 두 측면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인간 본래의 본성을 구현하는 것이며, 하나는 외부적인 환경에 정확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인간 본래의 본성이 구현되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베푸는 것이 있게 되는데 이 베푸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 덕은 본성의 확충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본성의 확충은 인간의 도덕적인 당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능력의 향상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인지능력의 향상이고 다른 하나는 실행능력의 향상이다. 인지능력향상은 사람의 인지기능자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실행능력향상은 기존의 몸보다도 뛰어난 성능을 갖는 새로운 몸(三元體)을 만들므로써 이루어진다.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구현하여 큰 덕을 쌓은 것을 大德(대덕)이라 하고 인지능력이 극대화된 것을 大慧(대혜)라 하고 실행능력이 극대화된 것을 大力(대력)이라고 한다. 이를 다 갖추면 神人合一(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내용이 [三一神誥삼일신고]에 있다. - ...神在無上一位, 有大德大慧大力, ...自性求子... -
이 德(덕), 慧(혜), 力(력)을 쌓는 공부의 세 과목이 아주 고대에는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 부분씩 강조되어 세개의 가르침으로 나뉘었으니 그것이 지금의 儒家(유가)와 佛家(불가)와 仙家(선가)이다. 儒家(유가)는 德(덕)을 중시하였고 佛家(불가)는 慧(혜)를 중시하였고 仙家(선가)는 力(력)을 중시하였다. 최고운 선생께서 말씀하신 고대에 있었다는 三家(삼가)를 회통하는 우리 고유의 玄妙之道(현묘지도)는 德(덕), 慧(혜), 力(력)의 세 과목이 융합되어 있었던 [三一神誥삼일신고]의 이 가르침을 말한다. 이 德(덕), 慧(혜), 力(력) 세 과목의 본질을 살펴보면 德(덕)은 인간의 본성을 구현한 것이요 慧(혜)와 力(력)은 능력이다. 물론 세 과목이 모두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의 측면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중심이 되는 體(체)는 德(덕)이요 慧(혜)와 力(력)은 用(용)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뉘어진 가르침 중 儒家(유가)는 우리 본래의 가르침의 중심인 것이다.
대야발 선생께서 지으신 [檀奇古史단기고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신하나 사신의 물음에 대답하신 역대 단군들의 말씀은 하나같이 儒家(유가)의 시각이다. 그 이유는 지금의 儒家(유가)가 원래 우리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儒家를 夏族의 사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의 역사가 특히 고대사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래 우리가 살았던 곳이 지금의 중국 땅이었고 나중에 그곳에서 밀려서 이곳으로 왔던 역사적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2. 공부의 배경
1) 인간의 본질
인간은 천지가 만물을 生(생)하는 마음을 본성으로 삼아 태어난 존재로서 만물 가운데 靈長(영장)이며, 또한 천지를 완성시키고 만사를 주재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원래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원래 사회적인 존재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단순히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사이 또는 인간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 놓여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관계가 원활히 유지될 때 비로소 인간으로써의 완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관계성을 대표하는 것이 五倫(오륜)이다. 이 오륜 가운데 인간관계의 근본 출발은 혈연관계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이 혈연관계에서부터 바른 인간성을 길러 다른 사람 및 사물에까지 미루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孝(효)를 강조해 왔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관계에서 이러한 관계를 원만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근본은 상대에 대한 사랑과 배려와 더불어 이를 사리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근거하여 실천하는데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은 이를 실행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자기의 私慾(사욕)에 끌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욕에 끌려가지 않고 公心(공심)을 실현하는 것이 공부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다. 私慾(사욕)은 形氣之私(형기지사)에서 파생되는 욕구이다. 形氣(형기)는 태어날 때 입는 형상과 기운이고 私(사)는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는 것이다.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形氣(형기)를 사사롭게 여기므로써 私慾(사욕)이 파생되는 것이다.
2) 몸의 구조
사람의 몸은 三體(삼체)의 구조로 되어있다. 三體(삼체)는 心體(심체), 氣體(기체), 身體(신체) 이다. 이것은 기능을 중시하여 분류한 것이다. 만일 구성원소를 중시하여 분류하면 身體(신체)를 精體(정체)와 肉體(육체)로 더욱 세분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四體(사체)로 구분되게 되는데 그 四體(사체)는 구성원소를 중시하여 神體(신체), 氣體(기체), 精體(정체), 肉體(육체)로 불리어 진다. 그 중 神體(신체), 氣體(기체), 精體(정체)를 합하여 三元體(삼원체)라 한다.
心體(심체)는 의식작용을 하는 부분으로서 神(신)이라는 자재로 만들어져 있고 신을 소모하며 작동되는 조직체이다. 그런데 이 心體(심체)는 識神(식신)과 本神(본신)의 이중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氣體(기체)는 천지의 기와 상호작용하는 부분으로서 氣(기)라는 자재로 만들어져 있고 기를 소모하며 작동되는 조직체이다. 身體(신체)는 精(정)이라는 자재로 만들어진 정체와 육으로 만들어진 육체를 합하여 이르는 말이다. 身體(신체)는 心體(심체)와 氣體(기체)가 의지하여 거처하는 곳이다. 이 삼체가 겹겹이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작동한다. 물질외에 이 三體(삼체)의 원자재가 되는 精氣神(정기신)을 三元(삼원)이라고 한다. 삼원은 피를 精製(정제)하여 만들어진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그것을 정제하면 피가 된다. 피를 정제하면 精(정)이 된다. 정을 정제하면 氣(기)가 된다. 기를 정제하면 神(신)이 된다.
3) 마음의 작용
보통사람의 경우 의식이라 함은 識神(식신)을 말한다. 식신의 의식작용은 覺知(각지)작용과 感動(감동)작용으로 나누어진다. 覺知(각지)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는" 의식작용이다. 이 각지하는 마음을 照心(조심), 道心(도심), 心君(심군)이라 하며 이것이 인지기능자이다. 感動(감동)은 외물에 感(감)하여 動(동)하는 의식작용이다. 이 감하여 동하는 마음을 動心(동심), 人心(인심)이라 한다. 보고, 듣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려하는 등의 생겨서 움직이다가 없어지는 生滅心(생멸심)이 모두 動心(동심)이다. 本神(본신)이란 사람의 몸 즉, 心體(심체)와 氣體(기체)와 身體(신체)를 만드는 자이며, 육체가 소멸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 本神(본신)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 따라서 본신은 그러한 수많은 환생을 통하여 습득된 방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그와 달리 識神(식신)은 入胎(입태)된 이후부터 본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태어난 이후 우리의 의식작용을 주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識神(식신)은 본신과 달리 그가 생겨난 이후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4) 기초기술
- 惺惺(성성)법
惺惺(성성)은 인지기능자인 照心(조심) ( = 心君 )이 "깨어있는 상태" 또는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이다. 그 알아차리는 정도는 뚜렷할 수도 있고 희미할 수도 있다. 보통사람의 일상생활에서는 흐릿하게 알아차리고 있다가 사이사이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하면서도 그것을 선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며 또 그 사이사이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말한다. 이 照心(조심)을 뚜렷하게 또 계속하여 깨어있게 함으로써 照心(조심)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성성법이다. 성성공부를 하려면 맨 처음 필요한 것이 照心(조심)이 깨어있는 상태를 몸으로 체득하여 알아야 한다. 그것은 깨어있지 못한 상태와 대비하여 그 차이를 분명히 체감하면 체득이 된다. 이를 위한 간단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이것을 체득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아주 없는 상태와 분명히 있는 상태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체감하는 것이다. 그 차이를 여러 번 체감하면 체득된다.
방을 약간 어둡게 하여 몰입하기 쉽게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재미있는 영화를 본다. 한창 몰입되어 있을 때 보조자가 불을 켜든지 소리를 내든지 하여 그 몰입상태를 갑자기 깬다. 그러면 몰입에서 깨어나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이때 바로 직전의 몰입하여 “모르는” 상태와 비교하여 차이점을 감지한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의 차이이다. 이것을 체득될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하면 된다. 몰두하여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알아차리는 상태"로 되었을 때 그 "알아차리는 상태"를 직전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와 비교하여 그 차이를 감득하는 것이 요점이다. 알아차리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몰두하기 쉬운 것을 이용하는 데, 대개 사람이 무엇에 몰두하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쉬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든 무어든 그 사람이 쉬이 몰두하는 것을 택하여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꼭 그러한 특정한 매개체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그 사람이 무엇에 몰두하여 있을 때 깨워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또한 보조자 없이 스스로가 언제라도 막 알아차리는 상태로 돌아왔을 때 직전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가 그렇지 못한 상태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체득하였으면 비로소 照心(조심)의 능력을 강화하는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는 희미하지 않고 뚜렷하게 알아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아차리는 상태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각각의 효용이 있다. 뚜렷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照心(조심)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이고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지구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다 갖추어져야 照心(조심)의 능력이 효율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照心(조심)이 깨어있는 상태를 분명히 체득하고 있지 않다면 알아차리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공부능률에 차이가 생긴다. 심한 경우 거의 공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대상이 알아차리기도 쉽고 그 알아차리는 상태도 잘 유지되는 것이 있는 반면 알아차리기도 어렵고 그 알아차리는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를 본다고 하자. 처음에는 "動心(동심)이 그 물체를 보고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그 알아차리는 照心(조심)은 어디로 가버리고 동심만 물체를 쳐다보고 있게 된다. 즉, "動心(동심)이 그 물체를 보고있는" 상태는 유지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없는 상태이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면 그 보는 동심조차도 어디로 가버리고 맨 눈만 멍하니 물체를 마주하고 있게 된다. 이에 비하여 궁금하여 알고 싶은 어떤 한 가지 의문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면 비교적 알아차리는 것을 뚜렷하고 오래 유지할 수 있다. 照心(조심)이 깨어있는 상태를 분명히 체득하고 있다면 그 상태를 뚜렷하게 유지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으므로 대상은 어떤 것이든 별로 상관이 없다.
일상 생활에서는 일의 처리를 위하여 生滅心(생멸심)이 사용될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照心(조심)이 뚜렷이 깨어 있을 수 있다면 그 생멸심의 생멸중에도 照心(조심)의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간단없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 또한 照心(조심)을 유지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照心(조심)의 힘이 강화되면 그러한 생멸심조차도 세세히 照觀(조관)할 수 있으므로 그 생멸심의 선악을 변별하여 그 생멸심을 선으로 향하게 하고 악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어서 덕을 닦는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된다. 이것을 省察(성찰)이라고 한다. 照心(조심)이 照觀(조관)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이 되는 動心(동심)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은 照心(조심)은 惺惺(성성)하고 動心(동심)은 寂寂(적적)한 상태이므로 이러한 상태를 惺惺寂寂(성성적적)이라한다. 照觀(조관)의 대상을 照心(조심) 자신으로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를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이다. 이것을 回光反照(회광반조)라 한다.
照心(조심)의 능력이 어떤 정도이상으로 강화되면 肉身(육신)의 인지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인지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肉眼(육안)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肉耳(육이)가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本神(본신)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즉, 本神(본신)이 나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이니 父母未生前(부모미생전)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인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된 선입관 등을 소멸시킬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形氣(형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자기가 하나의 독립된 개체이며 그것이 자기의 사유물이라고 잘못 인지하여 그것을 사사롭게 여겼던 形氣之私(형기지사)가 있다. 만일 그것을 살펴본다면 그 형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독립된 개체가 아니며 더구나 자기의 사유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사사로움은 자연히 소멸되게 된다. 그리하여 公心(공심)을 회복하게 되며 형기지사로부터 파생되었던 사욕도 근본적으로 소멸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아무리 인지능력이 강화되었다하더라도 그러한 점을 실제로 살피지 않는다면 그 형기지사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능력을 어디에 쓸 것인가가 더 중요하며 그것은 그의 가치관에 따르는 것이므로 어떤 가치관을 갖느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 된다.
- 寂寂(적적)법
動心(동심)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寂寂(적적)이라 한다. 動心(동심)을 사용하여 일을 하다가 일이 끝나고 그 動心(동심)이 소멸되어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寂寂(적적)상태이다. 만일 惺惺(성성)의 상태를 분명히 체득하여 照心(조심)이 동심의 동태를 照觀(조관)할 수 있다면 寂寂(적적)의 상태가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 수 있고 동심의 생멸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게 되지는 않으므로 寂寂(적적)상태를 구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요령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 요령은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한 종류는 의식을 이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한 종류는 호흡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적적의 상태에 놓여지면 심신의 모든 기능이 깊은 휴식을 취하게 되고 많은 양의 三元(삼원)이 응결하여 經絡(경락)에 모여들게 된다. 이 현상은 三元(삼원)의 정제효율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즉 三元(삼원)의 정제량이 많아지게 된다. 왜냐하면 정제는 三元(삼원)의 휘발과 응결을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정제량이 많지 않은 것은 휘발은 많이 되지만 응결되는 양이 적었기 때문이다.
- 隨然호흡법
호흡은 本神(본신)의 관장하에 쉬임없이 실행된다. 이것은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실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몸에 비정상이 생겼을 때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 하는 특수한 호흡이다. 그것은 한숨과 흐느낌이다. 本神(본신)이 사용하는 이 특수한 호흡법을 의식적으로 잘 활용하면 생명력을 강화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호흡은 심신의 침잠을 유도하는 좋은 방법이 되며 그 침잠의 결과 삼원의 정제량이 많아져서 삼원의 보유량을 늘일 수 있다. 그리하여 三元의 최대 보유량을 확보하는 데에도 이 호흡법을 사용할 수가 있다. 호흡법에는 많은 종류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이러한 호흡법을 편의상 "隨然호흡법"이라 하기로 한다. 한숨은 가슴에 火氣(화기)가 찰 때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나온다. 한숨을 쉬고 나면 가슴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가슴의 火氣(화기)가 좀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잘 활용하면 이 한숨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心火(심화)와 관련된 고혈압, 당뇨 등과 火痰(화담)이 관련된 여러 질병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사람이 살다보면 속을 끓일 일이 많이 생긴다. 속을 끓이면 火氣(화기)가 치솟게 되는데 이 火氣(화기)는 水氣(수기)를 말리며 痰(담)을 생기게 하는 무서운 것이다. 水氣(수기)가 마르는 것은 곳 생명력이 줄어드는 것이고 痰(담)이 생기는 것은 곳 병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한숨이 효과가 있다.
남이 보는데서 한숨을 쉬는 것은 우리 풍습에서 매우 꺼리는 것이므로 남이 보지 않는 혼자만의 장소에서 한숨을 쉬면 될 것이다. 한숨을 쉬면 가슴속에서 무언가 내려가는 느낌이 들며 속이 시원해진다. 그러면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또 한숨을 쉬면 마음이 더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렇게 여러 번 연속하여 한숨을 쉬면 마음이 매우 차분히 가라앉고 편안한 상태가 된다. 매일 하루에 한두 번 이렇게 하면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매우 효과가 있다.
연속하여 한숨을 쉴 때 어떤 때는 시원하지 않고 오히려 불편할 때가 있다. 그것은 한숨을 잘못 쉬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 흐느끼면 그 상태가 해소된다. 아이들에게서 이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아이가 심하게 울고서 그 울음이 어느 정도 그쳐지면 그 때 흐느낌이 나온다. 흐느낌은 외호흡과 내호흡의 조화가 깨어졌을 때 그것을 맞추기 위하여 실행되는 것이다. 내외호흡의 조화가 깨어지면 기의 수급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묘한 이치가 있다. 무엇인가 하면 내호흡과 외호흡의 일치정도가 내호흡의 활성도에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 호흡이 일치한 상태가 계속되면 내호흡의 활성도가 점차 낮아진다는 것이다. 내호흡의 활성도가 낮아진다는 것은 심신의 활동이 줄어들어 점점 침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심신의 활동이 거의 없는 깊은 침잠상태에 이르게 된다.
두 호흡을 아주 일치시킨 상태로 계속 호흡하면 내호흡의 활성도가 낮아져 점차 내호흡량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외호흡량도 같이 줄어든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내외호흡을 거의 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자연적인 상태이며 호흡을 의도적으로 참는 것이 아니므로 이 숨쉬지 않는 상태를 3,40 분씩이나 오래 유지하더라도 생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음식을 먹으면 이것이 소화 흡수되어 영양소가 되는데 이를 精製(정제)하여 피를 만든다. 피를 정제하여 精(정)을 만든다. 精(정)을 정제하여 氣(기)를 만든다. 氣(기)를 정제하여 神(신)을 만든다. 이 과정들은 항상 실행되지만 몸이 침잠상태에 있을 때 정제하는 양이 더 많아진다. 이 침잠상태는 일종의 휴식상태로서 잠을 자는 것도 이것의 한 종류이다. 그러므로 낮에 움직일 때 보다 밤에 잘 때 정제량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좀더 깊은 침잠상태를 만들면 그만큼 더 정제량을 늘일 수 있다. 침잠상태를 유도하는 데에는 옛부터 수많은 방법들이 동원되어 왔다.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그 중의 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호흡법의 일종인데 몸의 자연적인 상태를 따라가는 것이므로 아무 위험성이 없는 것이 제일 큰 장점이다. 그리고 잘못하게 되면 불편한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으므로 호흡을 잘못하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장치의 성격도 있다. 지구에서 산소는 생명체와는 매우 특별한 관계가 있다. 공기중의 산소는 외기로부터 폐로 들어가 몸속에 흡수되어 산화되고 그 산화된 결과물인 이산화탄소가 폐로 이동되어 다시 외기로 나간다. 내호흡은 폐에서 산소를 취하는 것에서부터 세포에서 산화되고 이산화탄소를 폐에서 배출하는 것까지의 과정을 담당하며 그 본질적 성격은 "요구"이다. 산소가 들어와야한다고 "요구"하고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어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외호흡은 이 "요구"에 응답하여 "지원"해주는 것뿐이다.
이 호흡법의 어려움은 내호흡을 아는 것이다. 내호흡을 안다는 것은 앞서 말한 그 "요구"를 느끼는 것이다. 한숨을 푸-욱 쉬면 무언가 수-욱 "내려가는 것"이 가슴속에서 느껴진다. 이것이 내호흡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호흡의 거동"인데 그냥 "내호흡"으로 줄여서 말한다. 한숨을 계속 쉬어보면 그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한숨을 쉴 때 숨을 내쉬기 전에 들여 쉰다. 즉, 크게 들여 쉬었다가 푸-욱 내쉬게 된다. 그런데 들여 쉴 때는 무언가 "올라가는 것"이 가슴속에서 느껴진다. 이것은 내어 쉴 때 느꼈던 바로 그 내호흡이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요구의 방향이다. 올라가는 방향은 들여 쉬어달라는 요구이고 내려가는 방향은 내쉬어달라는 요구이다. 그 요구에 따라가면 제대로 숨을 쉰 것이고 그 요구에 맞추지 못하면 숨을 잘못 쉰 것이다. 숨을 잘 쉬면 편안하고 숨을 잘못 쉬면 불편하다. 그 편하고 불편한 것을 잘 느껴서 호흡을 인도해주는 표지로 삼아야 한다.
이제 내호흡을 알았으니 이 호흡을 할 수 있다. 아침 저녁으로 한시간 정도씩 하는 것이 좋다. 반듯하게 앉아서 하는 것이 좋은데 굳이 결가부좌를 할 필요는 없다. 눈은 감아도 좋고 떠도 좋다. 활원운동을 한 다음 이어서 이 호흡을 하면 호흡이 더 잘 될 것이다. 침잠후에는 몸의 활동량을 서서히 늘여야 한다. 이때 활원운동으로 몸을 풀어주면 더욱 좋다. 내호흡이 올라가면 그것을 따라서 들여 쉰다. 올라갔다가 방향을 전환하여 내려가면 그것을 따라 내어 쉰다. 이렇게 계속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내호흡이 올라가므로 거기에 따라 숨을 들여 쉬는데 전환점에 이르러 방향을 아래로 바꾸어 내려가지 않고 위로 향한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리되면 호흡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은 지원이 부족하여 요구가 충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요령은 요구에 대한 부족을 채워주기 위해 강력하게 지원하는 것이다. 즉, 짧고 강하게 들여 쉬는 것이다. 그리하면 요구가 충족되어 내호흡의 방향이 바뀐다. 만일 한번으로 안되면 두번, 세번, 네번 그렇게 해준다. 대개 그 정도면 요구가 충족된다. 요구가 충족되면 내호흡의 방향이 바뀌어 내려가게 되고 그러면 그것을 따라 내어쉬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속하여 수 차례 짧고 강하게 들여 쉬는 것이 흐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내호흡과 외호흡의 조화가 깨어졌을 때 조정하는 기술인데 사실은 어린아이도 이것을 알고 있다. 어린아이가 울음을 그치면서 흐느끼는 것은 누구나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태어난 후 識神(식신)이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本神(본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외호흡의 조화가 깨어졌을 때 그것을 조정하기 위해 本神(본신)이 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환점의 위치는 本神(본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즉 識神(식신)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몸의 상태에 의해 저절로 결정되는 것이지 識神(식신)이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성들여 호흡을 해보면 어렴풋하지만 내호흡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올라갔다가 방향을 바꾸어 내려간다. 주-욱 내려가서 아랫배 어디 정도에 가면 또 방향을 바꾸어 올라간다. 이러한 거동이 연속하여 느껴지는 것이다. 외호흡은 이 내호흡의 거동에 간발의 차이를 두고 계속하여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래에서도 위에서와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가 있다. 내호흡이 내려갈 때 숨을 내쉬는데 전환점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어 올라가지 않고 방향을 아래로 둔 채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것도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원이 부족하여 요구가 충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단지 방향만 반대일 뿐이다. 이 문제의 해결 요령 역시 위에서와 같이 강력하게 지원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반대로 짧고 강하게 내어 쉰다. 그리하면 요구가 충족되어 내호흡의 방향이 위로 바뀐다. 만일 한번으로 안되면 두번, 세번, 네번 그렇게 해준다. 대개 그 정도면 요구가 충족된다. 요구가 충족되면 내호흡의 방향이 바뀌어 올라가게 되고 그러면 그것을 따라 들여쉬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전환점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어 움직이지 않는다. 이곳이 하단전의 위치이다.
내호흡이 방향전환을 하지 않을 때 방향전환을 유도하는 방법이 한가지 더 있다. 그것은 止息이다. 외호흡을 멈추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내호흡이 슬며시 방향을 바꾸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외호흡도 따라서 움직이면 된다. 이 방법은 침잠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인데 너무 긴 시간동안 내호흡이 움직이지 않으면 더 이상 이방법을 사용하기 곤란하다. 이 두 가지 요령은 외호흡을 이용하여 내호흡을 조종하는 기술인데 기본적으로는 외호흡이 내호흡을 따라가야 하지만 경우에 따라 이렇게 외호흡으로 내호흡을 조종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호흡을 조종하는 기술은 방향전환시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호흡의 전체 움직임중 어디에서나 사용될 수 있다.
외호흡이 내호흡을 앞서가도 안되지만 뒤쳐져서 간격이 커도 안 된다. 뒤 따라 가되 간발의 차이로 거의 같이 움직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 오르락내리락 계속하면 되는 것이다. 이때 하부 전환점에서 상부 전환점까지의 내호흡의 상승높이가 바로 내호흡이 요구하는 외호흡의 호흡량이다. 이렇게 계속하면 하부 전환점은 그 위치가 아랫배에 그대로 있는데 상부 전환점은 조금씩 내려간다. 즉 그 요구량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 호흡을 계속 유지하면 결국 내호흡의 상승높이가 영(0)에 이르게 된다. 즉 상승하지 않고 방향만 위로 - 아래로 천천히 바뀔 뿐이다. 이때 호흡요구량은 없고 따라서 외호흡은 없다. 이때가 가장 깊이 침잠된 상태이며, 적적의 상태이며, 삼원의 정제량이 가장 많은 상태이다. 이 상태의 호흡이 胎息(태식)이다. 호흡을 할 때 호흡량의 크고 적은 것에 관심을 두면 안 된다. 중요한 점은 호흡량이 크든 적든 내외호흡의 일치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호흡량이 크더라도 일치상태를 잘 유지하면 자연의 이치에 의해 점차 호흡량이 줄어드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호흡량이 크든 적든 내외호흡의 일치상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 입에 침이 고이고 몸이 노곤해지는 것이 느껴지는데 이것은 水氣가 상승하고 火氣가 하강하는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호흡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깊은 침잠의 상태에 있다가 평상의 상태로 돌아오면 심신의 상태가 굉장히 상쾌해졌다는 것을 느끼는데 이것은 심신의 모든 기관이 휴식을 취한 점과 三元이 다량으로 정제되어 보유량이 많아진 점 때문이다. 수연호흡법은 원래 몸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의식적으로 하려하면 그렇게 쉽게 금방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수연호흡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그 절차대로 숙달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
1 단계 : 1 단계의 목표는 내호흡을 아는 것이다. 한숨을 내어쉬면 가슴께에서 무언가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있는데 이것이 내호흡의 거동이다. 아하! 이게 내호흡이구나. 라고 미세하지만 분명히 체득될 때까지 한숨을 쉬어보야 한다.
2 단계 : 2 단계의 목표는 상부전환점에서의 호흡의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숨을 내어쉬기 전에 먼저 한숨을 들여쉬게 되는데 이때 가슴께에서 무언가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 있다. 이것이 한숨을 내어쉴 때 내려가는 느낌이 있었던 바로 그 내호흡이다. 한숨을 들여쉴 때 내호흡이 올라가는데 그 내호흡이 방향을 전환하여 내려가면 외호흡이 이 내호흡을 따라 내어쉬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내호흡이 시원하게 내려가면서 외호흡도 편안하게 내쉬게 되며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않게 된다. 이것은 내호흡이 먼저 움직이고 외호흡이 그를 따라 움직인 것으로 호흡이 제대로 잘 된 것이다. 이렇게 호흡이 잘되면 느낌이 매우 편안하다. 만일 내호흡이 방향전환을 하여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외호흡이 먼저 움직여 내쉬게 되면 이것은 호흡을 잘못한 것이다. 호흡을 잘못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편하고 불편한 것을 감지하여 호흡의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다. 분명히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해보아야 한다.
3 단계 : 3 단계의 목표는 내호흡의 상부전환점에서의 방향전환이 잘 되지 않을 때 그 방향전환을 유도하는 요령을 숙달하는 것이다. 방향전환이 잘되지 않는 이유는 요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요구를 충족시켜주면 내호흡이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이때 이 요구를 적극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요령이 흐느끼는 것이다.(본문참조) 상부전화점에서의 방향전환이 잘 되지 않을 때 능숙하게 요령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숙달시켜야 한다.
3 단계까지의 숙달만으로도 상당히 깊이 침잠할 수 있다. 그 침잠되었을 때의 평안함을 향유해보는 것은 심적 고통이 있는 사람에게 훌륭한 치료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단계 : 4 단계의 목표는 내호흡의 거동을 하부전환점에서도 감지하는 것이다. 심신이 침잠되면 상부전환점에서만 감지되던 내호흡이 하부전환점 근처에서도 감지된다. 호흡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되었다 하더라도 할 때마다 모두 그렇게 깊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잘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잘 되지 않기도 한다. 열번 호흡에 들어갔을 때 서너번 정도 감지 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된다.
5 단계 : 5 단계의 목표는 내호흡의 하부전환점에서의 방향전환이 잘 되지 않을 때 그 방향전환을 유도하는 요령을 숙달하는 것이다. 이때 적극적으로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흐느끼는 것의 반대로 짧고 강하게 내어쉬는 것이다.(본문참조) 또 한 가지 요령으로는 止息이 있다. 이것은 숨을 멈추고 조용히 내호흡의 움직임을 조관하는 것이다. 조관하고 있으면 슬며시 내호흡이 방향을 바꾸어 움직이게 된다. 이 방법은 호흡의 활성도를 올리지 않으려는 것으로 침잠이 어느정도 되어 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6 단계 : 6 단계의 목표는 내호흡의 전체 경로상에서의 거동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신이 얼마나 침잠되었느냐에 좌우된다. 중요한 점은 침잠에 이르기 위해서 외호흡을 줄이려는 의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은 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체의 의도를 가지면 안된다. 오직 외호흡은 내호흡을 간발의 차이를 두고 충실히 따라가기만 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요령이다. 내호흡의 전체 경로상에서 일순간의 빈틈없이 계속하여 내호흡의 거동을 감지하고 있으면서 그것에 간발의 차이를 두고 외호흡이 따라가는 것 이것뿐이다. 그 결과 점차 내호흡의 요구량이 줄어들고 나중에는 내호흡의 요구량이 없어진다.
지금까지 설명한 수연호흡법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숨과 흐느낌은 겉으로 보기에는 각각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보면 그 작용은 같다. 그것은 내호흡을 확실히 앞세워서 호흡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그 결과 호흡을 가라앉게 하는 것이다. 호흡이 가라앉으면 마음도 가라앉게 된다. 이러한 내부적인 작용의 시각에서 보면 한숨은 한 번 길게 하는 흐느낌이며, 흐느낌은 여러 번 짧게 하는 한숨일 뿐이다. 한숨이라는 이름은 호흡량을 크게 하여 숨을 쉬기때문에 붙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호흡량은 중요한 점이 아니며 호흡의 질서 - 내호흡을 앞세우는 것 - 이 중요한 점이다. 숨을 크게 쉬는 이유는 단지 요구를 충족시켜 내호흡을 앞세우기 위한 것일 뿐이다. 흐느낌도 단지 요구를 충족시켜 내호흡을 앞세우기 위한 것일 뿐이다. 수연호흡법은 이러한 한숨을 계속하는 것이다. 즉 계속하여 내호흡을 앞세움으로써 호흡의 질서를 바로잡아 가는 것이다. 내호흡이 앞서게 되면 호흡의 질서가 바로서게 되고 질서가 바로서면 호흡이 가라앉게 된다. 호흡이 가라앉으면 마음도 가라앉게 되고 점차 호흡량도 줄어들게 된다.
여기까지는 상부전환점에서의 호흡법이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침잠을 얻을 수 있다. 이 상부전환점에서의 호흡을 충분히 익히고 그 침잠과 편안함을 마음껏 향유하면 된다. 좀더 깊이 침잠하고자하면 그 침잠을 바탕으로 하부전환점도 감지하여서 상하부의 두 점환점 모두를 아우르는 호흡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속에서 호흡량 즉, 하부전환점으로부터 상부전환점까지의 높이가 점차 낮아져서 나중에는 그 높이가 영(0)에 이르게 된다.
3. 공부의 방법
1) 본성의 구현
본성을 구현하여 덕을 쌓는 공부는 天理(천리)를 보존하고 人慾(인욕)을 막음으로써 公心(공심)을 실현하는 데에 있으며 이는 도덕적 당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도덕적 당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다 갖추는 것이 효율적이다. 하나는 안에서 마음을 정밀하게 살펴 밖으로 중도(中道) - 적중하는 것. 정확하게 대응 하는 것. - 를 잡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밖에서 우리의 행동을 禮(예)로써 제약하여 우리의 행동이 법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함으로써 안으로 점점 우리의 마음이 안정되어 천리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내외의 두 가지 측면을 다 아우르는 공부가 敬(경)이다. 心君(심군= 照心)을 항상 惺惺(성성)하게 유지하는 常惺惺(상성성), 動心(동심)을 그 일어나는 기미에서부터 선악을 살펴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省察(성찰), 動心(동심)을 한 가지에 專一(전일)하여 다른 곳으로 움직여가지 않게 하는 主一無適(주일무적), 그리고 禮(예)에 따라 몸가짐을 반듯하고 엄숙하게 가지는 整齊嚴肅(정제엄숙) 등이 敬(경)을 구성하는 세부방법이다. 이 중에서 常惺惺, 省察, 主一無適은 내면을 바로잡아 외면으로 드러나게 하는 공부방법이며, 整祭嚴肅은 외면을 다스림으로써 내면을 바로잡는 공부방법이다.
禮(예)는 외면을 다스림으로써 내면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 나아가 예의 실천은 공부의 완성이전에도 우리의 행위를 천리에 맞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禮(예)는 사람의 情(정)에 근본하여 그것을 節文(절문)함으로써 잘못을 미연에 막아주는 것이다. 예는 인간의 심성이 타락하고 지혜가 어두워지자 형식적인 규범을 통해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형식적인 규범으로써의 예의 유래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있다. 인간이 만약 본래의 완전함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면 외면적인 규범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禮(예)는 만사가 도리에 합치되게 해주는 도구이며 이로써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예는 인간의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바깥을 꾸며 내면을 깨우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에게 당위의 규범으로 제시된 예는 단순히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는 굴레가 아니라 인간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예는 인간의 본성인 仁(인)의 덕을 근본으로 樂(악)과 더불어 인간사이의 조화를 이루며 천리를 실현하게 해주는 것이다.
禮(예)실천의 근본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으로서 상대에 대한 존중, 배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천리에 근본하지 않으면 예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는 단순히 사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기준(宜)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天理(천리)에 근거하여 인간의 마땅한 행위의 기준으로서 제시된 예의 규범은 현실적으로 공부가 완성되지 못한 인간들의 삶에서 나타나게 되는 많은 문제점들을 미연에 막아줄 수 있는 효용을 갖는다는 점에서 예는 공부가 완성되지 않은 자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부족한 자라 하더라도 이 예의 실천을 통해 나의 사욕이 극복되어지고 公心(공심)이 실현되면 공부의 목표인 大德(대덕)의 경지에 점차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본성을 회복하는 敬(경)공부가 또 다른 용어로 표현된 것이 "操心(조심)"이라는 말이다. 操心(조심)은 잡을 操(조), 마음 心(심). 무슨 마음을 잡는다는 말인가? 잡히는 마음은 心君(심군)이다. 操心(조심)은 이 心君(심군)이 없어지도록 버려두지 - 放心(방심) - 말고 잡아서 살아 있게 하라는 말이다. 즉, 惺惺(성성)하라는 말이다. 요즈음은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는 분위기이지만 필자의 어렸을 때만 하여도 "조심하라"는 말이 일상에서 많이 쓰였다. 이는 우리 조상들께서 敬(경)공부를 일상에서 늘 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일상의 언어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2) 능력의 향상
- 인지능력의 향상
인지능력향상은 인지기능자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인지기능자의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것이 인지기능자인지를 정확하게 체득해야 한다. 인지기능자는 "알아차리는 자"로서 照心(조심)이다. 照心(조심)은 識神(식신)의 일부로서 神(신)이라는 자재로써 만들어진 조직체이다. 이것의 능력이 강화된다는 것은 이것을 개선하여 성능한계를 계속 높여가서 그 성능을 극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 개선하는 방법이 "照心(조심)의 惺惺(성성)"이다. 照心(조심)은 神(신)이라는 원료를 소모하며 작동하므로 최고 성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원료인 神(신)을 충분히 공급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照心(조심)이 아닌 動心(동심)이 신을 소모하는 낭비를 줄여야 한다. 또한 인지기능이 고도화, 정밀화할수록 인지를 방해하는 잡음신호를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動心(동심)의 寂寂(적적)"이다. 寂寂(적적)은 또한 三元(삼원)의 정제량을 늘이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惺惺(성성)하면서 동시에 寂寂(적적)한 것은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다하더라도 照心(조심)을 강화하는 주 요소는 어디까지나 惺惺(성성)이지 寂寂(적적)은 아니다. 照心(조심)이 성성하거나 아니한 경우, 動心(동심)이 적적하거나 아니한 경우, 이 둘씩의 경우가 조합되면 모두 네 가지의 마음의 상태가 있게 된다. 이 중에서 惺惺(성성)寂寂(적적)인 상태를 유지하다가 적적은 계속되지만 성성은 하지 않는 상태로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을 落空(낙공)이라 한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공부에 손해가 크므로 주의해야 한다. 惺惺(성성)寂寂(적적)을 오래 하면 照心(조심)의 성능이 개선되어 인지능력이 점차 강화된다. 識神(식신)의 인지능력이 극대화되면 현재의 자신(識神)을 만든 本神(본신)을 인지하게 되고 이 本神을 통하여 本神(본신)이 아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 이것을 大慧(대혜)라 한다. 이렇게 되면 누구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眞身(진신)을 만들 수 있게 된다.
- 실행능력의 향상
먼저 인지능력을 강화하여 識神(식신)이 本神(본신)을 인지하고 협조체제를 구축한 다음 본신의 능력으로 실행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새로운 몸을 만든다. 실행능력향상은 기존의 三元體(삼원체)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능을 갖는 새로운 三元體(삼원체)를 만듦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인지능력만을 극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 모든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지기능을 갖는 神體(신체)뿐만 아니라 氣體(기체)와 精體(정체)도 모두 극대화된 성능을 갖는 새로운 三元體(삼원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 극대화된 성능을 갖는 三元體(삼원체)를 眞身(진신)이라 한다. 그 과정은 그 새로운 몸이 삼원체이므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새로운 아이가 孕胎(잉태)되고, 養胎(양태)되어 태어나서 강건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일단 하나의 진신이 만들어 지면 추가로 삼원을 확보하는대로 새로운 진신을 계속 만들수 있으므로 매우 많은 숫자의 진신을 만들게 된다. 그 진신 하나하나가 보통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는데 그러한 진신의 숫자가 많으므로 그 결과 그가 갖는 엄청난 실행능력을 大力(대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새로운 몸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와 능력은 본신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신은 새로운 몸을 만들고자하는 뜻이 없기 때문에 그 뜻을 가지고 있는 식신이 본신과 결합하여 본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이 일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래서 식신의 인지능력을 극대화 하여 본신을 알고 본신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 공부는 다음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본신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식신이 본신과 통하여 스스로 알게 된다. 그래야 그것을 바탕으로 올바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고 남에게 들어 알게 된 지식으로는 전혀 바른 결과를 얻을 수 없고 오히려 몸만 다치기 쉽다.
築基(축기)
축기는 새로운 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三元(삼원)의 최대 보유량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삼원의 최대 보유량이 확보되면 三光(삼광) - 精光(정광), 氣光(기광), 神光(신광) - 이 뜬다. 이것이 後光(후광) 또는 光背(광배)이다. 축기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작업은 採藥(채약)과 精製(정제)이다. 채약은 精(정)이 발동할 때 흩어지기 전에 채취하는 것을 말한다. 정이 발동하는 그 때를 活子時(활자시)라고 한다. 三元(삼원)의 정제는 九轉(구전) - 휘발과 응결을 아홉 번 반복하는 것. - 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위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원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제효율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 대개 기운의 經絡流周(경락유주)를 동반한 호흡법을 사용한다.
孕胎(잉태)
삼원(三元)의 최대량이 확보되었으면 자기 몸 안에 있는 離(이)중의 음과 坎(감)중의 양을 결합하여 道胎(도태)를 형성한다. 이는 마치 육신의 태아가 형성되는 것과 같이 三元(삼원)을 자재로 형성된 태아이다.
養胎(양태)
도태는 중단전에 두고 키운다. 키우는 과정은 육신을 뱃속에서 키우는 것과 동일하게 열 달이 소요된다. 단지 차이는 몸의 구성자재가 肉(육=물질)을 제외한 三元(삼원)이라는 것뿐이다. 축기과정에서 삼원의 최대량을 확보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도태를 충분히 키우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다량의 三元(삼원)을 추가로 확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띠를 잡아먹어야 한다. 띠는 짐승의 기운으로서 태어날 때 사람의 삼원체와 함께 같은 몸에 거주한다. 이 과정이 생사를 가르는 어려운 고비이다. 만일 이때 오히려 띠에게 잡혀 먹히게 되면 본신과 함께 그의 삼원체 전체가 소멸되므로 결국 그 육신이 죽게 되며 환생의 본체인 본신이 없어졌으므로 환생도 없게 된다. 이는 진정한 종말이다.
出身(출신)
양태가 다 되면 눈이 오는 것처럼 하늘에서 꽃송이가 떨어진다. - 天花亂墜(천화난추), 우담바라. - 그러면 도태를 상단전에 올려 붉은 뱀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붉은 뱀이 인당을 뚫고 들어와 - 赤巳鑽入(적사찬입) - 출신준비를 마치면 天門(천문)으로 도태를 출신시킨다.
乳抱(유포)
어린 眞身(진신)은 멀리 보내지 말고 육신 가까이에 두고 키워야 한다. 대략 삼 년 정도 키우면 육신과 같은 크기로 자라는데 그 때에는 멀리 보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眞身(진신)은 보통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分身(분신)
다 자란 眞身(진신)은 삼원이 확보되는 대로 자기와 똑같은 수천 수만의 分身(분신)을 키워낼 수 있으며 그들을 모두 동원하면 보통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을 大力(대력)이라 한다.
4. 이전공부와 이후공부
당위를 실천하여 덕을 닦는 공부는 이전공부나 이후공부나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능력을 키우는 공부는 그 이치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전공부로서는 더 이상 공부가 되지 않게 되었다. 이치가 바뀐 첫번째 것은 몸밖의 음양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전의 공부는 자기 몸 안의 음양을 활용하여 인지능력을 강화하고 자기 몸안의 음양을 결합하여 도태를 만들었으므로 자기 홀로 공부할 수 있었고 또 삼원의 허비를 막기 위해 이성을 멀리하여 독신으로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몸밖의 음양 즉, 다른 사람의 음양이 필요하므로 남자는 여자의 음이 있어야 하고 여자는 남자의 양이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공부를 하려면 남녀가 결혼을 해야만 하며 이전처럼 독신으로는 공부가 되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결혼이라는 것은 남녀의 육체적 접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기운을 나의 기운처럼 사용할 수 있는 기운의 연결관계가 형성되어야함을 말한다. 즉, 결혼을 하면 남녀의 기체가 윤기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치가 바뀐 두번째 것은 식신의 개입없이 본신이 바로 진신을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는 식신의 인지기능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본신과 협조하여 본신의 능력으로 진신을 만들므로써 다른 모든 기능도 극대화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이후공부는 이와는 달리 식신의 개입 없이 본신이 곧바로 진신을 만들므로써 모든 기능을 극대화시켜서 그것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식신을 본신과 결합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본신의 이 작업과정에 식신이 인지하여 들여다 보거나 개입하면 만들어지는 진신이 불량품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識神(식신)의 개입이 전혀 필요 없으며 개입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식신의 입장에서는 능력 공부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우리(식신)가 해야 할 것은 당위를 실천하여 덕을 닦는 공부이다.
보셧다시피 인정상관님이 알려주신 수련법을 통해 만들어진 양신이나정통선도에서 말하는 양신은, 여러개로 분화시켜서 나툴 수 있다는걸 알수있습니다. 옛날 중국에서 명상수련 하시는 스님과 선도수련을 하시는 분이서로 내기를 하셧는대, 앉아서 멀리 떨어진 꽃을 꺽어오는 내기였다고합니다. 결국 스님의 음신은 꽃을 따오지 못했지만, 선도수련자의 양신은
꽃을 따왔다고 하는 고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한인정상관님이 보여주신 각종이적을 보면 양신은 분명 나름대로의 물리적영향력을 발휘할수 있다는걸 알수 있습니다.한낱 잡귀도 염이 강하면, 폴터카이스트 라는 물리적영향력을 발휘하는데양신은 그런게 없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도화재의 양신이 현실구상력도 없고, 호환성도 없는건 허상의 빛(도계의 빛)
으로 양신을 만들고 키우기 때문입니다, 허상의 빛으로 만든 양신이고 그 양신으로 가는 세계이니 현실구상력이 있을 리가 없으며, 호환성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도화재의 양신이 현실구상력과 호환성이 있을려면더 이상 허상의 빛으로 양신을 키우지 말고, 집적 수련해서 만든 진기로여의주를 닦든가 양신을 키워야할 것입니다..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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