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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ṅkappa(思惟)는 不定心所이다. - 논리(바른 사유) // 비논리(삿된 사유) 모두 포함한다.
思惟 : 1.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
2. 철학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 <*論理 - 판단 - 結論>
* 初禪에서의 尋伺란?
[ daharassa hi, thapati, kumārassa mandassa uttānaseyyakassa saṅkappotipi na hoti,
kuto pana pāpakaṃ saṅkappaṃ saṅkappissati, aññatra vikūjitamattā !
목수여,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 뒤척이지도 못하고 반듯하게 누워만 있는 갓난아이에게는
사유라는 [개념도] 없이 단지 부루퉁할 뿐인데179) 어떻게 나쁜 사유를 하겠는가?
179) “'사유(saṅkappa)'라고 하셨다. 그들에게는 그릇된 사유라거나 혹은 바른 사유라는 구별이 없다. '단지 부루퉁할 뿐(vikūjita-matta)'이라는 것은 단지 울거나 방긋거릴 뿐이다. 갓난아이들의 마음은 과거를 대상으로 하여(atīt-ārammaṇa) 일어난다. 지옥(niraya)에서 왔으면 지옥의 괴로움을 생각하면서 울고, 천상세계(deva-loka)에서 왔으면 방긋거린다. 그렇게 하는 것도 오염원이 함께한 마음(kilesa-sahagata-citta)으로 한다.”(MA.iii. 268)]
*vikūjita - vikūjati:[vi + kūj + a] chirps; warbles; coos; sings.*옹알이?
“katame ca, thapati, akusalā saṅkappā?
kāmasaṅkappo, byāpādasaṅkappo, vihiṃsāsaṅkappo —
ime vuccanti, thapati, akusalā saṅkappā.
목수여, 무엇이 해로운 사유인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 악의에 대한 사유, 해코지에 대한 사유이다.187)
목수여, 이를 일러 해로운 사유라 한다.
187)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는 여덟 가지 탐욕이 함께한 마음과 함께 생긴 것 (aṭṭha-lobha-sahagata-citta-sahajātā)이고, 나머지 두 가지 사유는 두 가지 불만족이 함께한 마음 (domanassa-sahagata-citta-dvaya)과 함께 생긴 것이다.” (MA.iii.270)
여덟 가지 탐욕이 함께한 마음 혹은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들(lobha-mūla-cittāni)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제1장 §4를, 불만족이 냄에 뿌리박은 마음(dosa-mūla-cittāni) 두 가지는 제1장 §5를 참조할 것.
“ime ca, thapati, akusalā saṅkappā kiṃsamuṭṭhānā? samuṭṭhānampi nesaṃ vuttaṃ.
‘saññāsamuṭṭhānā’tissa vacanīyaṃ. katamā saññā?
saññāpi hi bahū anekavidhā nānappakārakā.
kāmasaññā, byāpādasaññā, vihiṃsāsaññā — itosamuṭṭhānā akusalā saṅkappā.
목수여, 이 해로운 사유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들의 일어남도 설했나니 인식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어떠한 인식인가?
인식은 다양하고 여러 종류이고 여러 형태인데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 악의에 대한 인식, 해코지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것에서 해로운 사유가 일어난다.
“ime ca, thapati, akusalā saṅkappā kuhiṃ aparisesā nirujjhanti? nirodhopi nesaṃ vutto.
idha, thapati, bhikkhu vivicceva kāmehi ... pe ...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etthete akusalā saṅkappā aparisesā nirujjhanti.
목수여, 그러면 어디서 이 해로운 사유는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그들의 소멸도 설했다.
목수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28]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서 이 해로운 사유는 남김없이 소멸한다.188)
188) “여기서 '초선(paṭhama jhāna)'은 불환과의 초선이다. 불환과를 얻었을 때 해로운 사유들(akusala-saṅkappā)이 남김없이(aparisesā) 소멸하기 때문이다.” (MA.iii.270)
“kathaṃ paṭipanno ca, thapati, akusalānaṃ saṅkappānaṃ nirodhāya paṭipanno hoti?
idha, thapati, bhikkhu an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anuppādāya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pahānāya ... pe ...
an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uppādāya ... pe ...
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ṭhitiyā asammosāy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evaṃ paṭipanno kho, thapati, akusalānaṃ saṅkappānaṃ nirodhāya paṭipanno hoti.
목수여, 어떻게 도를 닦을 때 해로운 사유를 소멸하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인가?
목수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쁘고 해로운 법들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열의를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나쁘고 해로운 법들은 제거하기 위해
열의를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열의를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은 지속하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 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닦기 위해 열의를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목수여, 이렇게 도를 닦을 때 해로운 사유를 소멸하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다.”189)
189) “여기서는 불환도까지 닦는 것을 해로운 사유들을 소멸하기 위해 도닦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환과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소멸했다고 한다.” (MA.iii.270)
“katame ca, thapati, kusalā saṅkappā?
nekkhammasaṅkappo, abyāpādasaṅkappo, avihiṃsāsaṅkappo —
ime vuccanti, thapati, kusalā saṅkappā.
“목수여, 무엇이 유익한 사유인가?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이다.
목수여, 이를 일러 유익한 사유라 한다.
“ime ca, thapati, kusalā saṅkappā kiṃsamuṭṭhānā? samuṭṭhānampi nesaṃ vuttaṃ.
‘saññāsamuṭṭhānā’tissa vacanīyaṃ. katamā saññā? saññāpi hi bahū anekavidhā nānappakārakā.
nekkhammasaññā, abyāpādasaññā, avihiṃsāsaññā — itosamuṭṭhānā kusalā saṅkappā.
목수여, 이 유익한 사유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들의 일어남도 설했나니 인식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어떠한 인식인가?
인식은 다양하고 여러 가지이고 여러 형태인데
출리(出離)에 대한 인식, 악의 없음에 대한 인식, 해코지 않음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것에서 유익한 사유가 일어난다.
“ime ca, thapati, kusalā saṅkappā kuhiṃ aparisesā nirujjhanti? nirodhopi nesaṃ vutto.
idha, thapati, bhikkhu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 pe ...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etthete kusalā saṅkappā aparisesā nirujjhanti.
목수여, 그러면 어디서 이 유익한 사유는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그들의 소멸도 설했다.
목수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서 이 유익한 사유는 남김없이 소멸한다. 190)
190) “이것은 아라한과의 경지(arahatta-phale bhumma)를 말한다. 아라한과의 제2선에 이르러 유익한 사유들이 남김없이 소멸하기 때문이다.”(MA.iii.270)
“kathaṃ paṭipanno ca, thapati, kusalānaṃ saṅkappānaṃ nirodhāya paṭipanno hoti?
idha, thapati, bhikkhu an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anuppādāya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pahānāya ... pe ...
an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uppādāya ... pe ...
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ṭhitiyā asammosāy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evaṃ paṭipanno kho, thapati, kusalānaṃ saṅkappānaṃ nirodhāya paṭipanno hoti.
목수여, 어떻게 도를 닦을 때 유익한 사유를 소멸하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인가?
목수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쁘고 해로운 법들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열의를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나쁘고 해로운 법들은 제거하기 위해
열의를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열의를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은 지속하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 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닦기 위해 열의를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목수여, 이렇게 도를 닦을 때 유익한 사유를 소멸하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다.]
[ “tatra, bhikkhave, sammādiṭṭhi pubbaṅgamā hoti.
kathañ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pubbaṅgamā hoti?
micchāsaṅkappaṃ ‘micchāsaṅkappo’ti pajānāti, sammāsaṅkappaṃ ‘sammāsaṅkappo’ti pajānāti,
sāssa hoti sammādiṭṭhi.
비구들이여, 거기서 바른 견해가 먼저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바른 견해가 먼저 오는가?
그는 그릇된 사유를 그릇된 사유라고 꿰뚫어 알고, 바른 사유를 바른 사유라고 꿰뚫어 안다.105)
이것이 그의 바른 견해이다.”
105) “'그릇된 사유를 그릇된 사유라고 꿰뚫어 안다(micchāsaṅkappaṃ micchāsaṅkappo ti pajānāti).'고 하셨다. 그릇된 사유를 그릇된 사유라고 아는 것은 그릇된 사유 그 자체가 바로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특징(lakkhaṇa)을 통찰하여 [그릇된 사유를] 대상(ārammaṇa) 으로 삼아서 꿰뚫어 아는 것이다. '바른 사유(sammā-saṅkappa)'는 통찰하는 역할(kicca)을 통해서 [바른 사유를 얻은 것을] 미혹하지 않아서 꿰뚫어 아는 것이다. 다음의 바른 말 등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MA.iv.132)
“katamo ca, bhikkhave, micchāsaṅkappo?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그릇된 사유인가?
kāmasaṅkappo, byāpādasaṅkappo, vihiṃsāsaṅkappo — ayaṃ, bhikkhave, micchāsaṅkappo.
감각적 욕망을 사유하고 악의를 사유하고 해코지를 사유하는 것이 그릇된 사유이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saṅkappo?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바른 사유인가?
sammāsaṅkappaṃpahaṃ, bhikkhave, dvāyaṃ vadāmi —
atthi, bhikkhave, sammāsaṅkappo sāsavo puññabhāgiyo upadhivepakko;
atthi, bhikkhave, sammāsaṅkappo ariyo anāsavo lokuttaro maggaṅgo.
비구들이여, 나는 바른 사유도 두 가지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사유가 있고,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사유가 있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saṅkappo sāsavo puññabhāgiyo upadhivepakko?
nekkhammasaṅkappo, abyāpādasaṅkappo, avihiṃsāsaṅkappo —
‘ayaṃ, bhikkhave, sammāsaṅkappo sāsavo puññabhāgiyo upadhivepakko’”.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사유인가?
비구들이여,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106)가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사유이다.”
106) 이것이 니까야에 나타나는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에 대한 정의이다.(본서 「진리의 분석 경」(M141 §25 참조)
“katamo ca, bhikkhave, sammāsaṅkappo ariyo anāsavo lokuttaro maggaṅgo?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사유인가?
yo kho, bhikkhave, ariyacittassa anāsavacittassa ariyamaggasamaṅgino ariyamaggaṃ bhāvayato
takko vitakko saṅkappo appanā byappanā cetaso abhiniropanā vacīsaṅkhāro —
ayaṃ, bhikkhave, sammāsaṅkappo ariyo anāsavo lokuttaro maggaṅgo.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사유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마음을 가졌고 번뇌 없는 마음을 가졌으며
성스러운 도를 구족하여 성스러운 도를 닦는 자가 있으니,
그의 사색, 생각, 사유, 전념, [마음의] 고정, 마음의 지향, 말의 작용[口行]107) -
이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사유이다.”
107) '사색, 생각, 사유, 전념, [마음의] 고정, 마음의 지향, 말의 작용[口行]은 각각 takka, vitakka, saṅkappa, appanā, vyappanā, cetaso abhiniropanā, vācā-saṅkhāra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사유는 [일으킨] 생각[尋, vitakka]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일으킨 생각은 네 가지 禪의 정형구에서 초선을 구성하는 요소로 나타나고 있다.(본서 제1권 「두려움과 공포 경」 (M4) §23 등) 그리고 이것은 말의 작용[口行]과 동의어로 나타난다. 본서 제2권 「교리문답의 짧은 경」 (M44) §15를 참조하기 바란다.
so micchāsaṅkappassa pahānāya vāyamati, sammāsaṅkappassa upasampadāya,
svāssa hoti sammāvāyāmo.
그릇된 사유를 버리고 바른 사유를 구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의 바른 정진이다.
so sato micchāsaṅkappaṃ pajahati, sato sammāsaṅkappaṃ upasampajja viharati;
sāssa hoti sammāsati.
그는 마음챙겨 그릇된 사유를 버리고, 마음챙겨 바른 사유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의 바른 마음챙김이다.
itiyime tayo dhammā sammāsaṅkappaṃ anuparidhāvanti anuparivattanti,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 sammāvāyāmo, sammāsati.
이처럼 이 세 가지 법이 바른 사유를 따르고 에워싸나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이다.]
paripuṇṇasaṅkappo : 경에 정형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 teva , mahārāja, rūpā ekaccassa manāpā honti, teva rūpā ekaccassa amanāpā honti.
yehi ca yo rūpehi attamano hoti paripuṇṇasaṅkappo,
so tehi rūpehi aññaṃ rūpaṃ uttaritaraṃ vā paṇītataraṃ vā na pattheti.
te tassa rūpā paramā honti. te tassa rūpā anuttarā honti.
대왕이여, 형색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떤 형색들을 즐거워하여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더 높고 더 수승한 다른 형색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 형색들은 최상의 것이고 그에게 그 형색들은 위없는 것입니다.]
* paripuṇṇasaṅkappo :
(마음에 드는 것이고 즐거운 것이므로 획득하고 싶다는 '의도적') 생각<판단>에 의한 성취.
이때의 saṅkappa<thought,intention,purpose,plan>를 흔히 '의도[intention]'로 번역들 한다.
우리말 용례는 <밥 생각을 한다.> 혹은 <그녀 생각을 한다.>와 상응한다.
그 결과 밥을 먹거나, 그녀와 결혼하게 되면 paripuṇṇasaṅkappa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생각한 것을 이루었다.>
앞으로 진행될 것에 대한 예측하는 판단이 saṅkappa라면
반면에 동의어로 알려진 vitakka는
이미 경험한 것을 떠올려 논리적 판단을 추구하는 생각(尋)으로 생각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삿된 사유: 잘못 끼워 맞추다(꿰맞추다),
바른 사유: 경험한 것들을<念 - 相 - 想>
종합하여 합리적으로 review, 反芻, 吟味, 整理, 재편집함. (⇒마음으로 받아들이다./適用하다.)
尋求伺察의 尋: 찾다, 캐묻다.
(舊譯) 覺觀: 각은 사물(事物)을 추리(推理)하는 마음의 조잡한 작용이고,
관은 미세한 작용이란 뜻이 {사전}적 정의이다.
* 思惟 - 尋伺(覺觀)는 不定心所이나 바르게 작동하면 모두 慧蘊에 속한다.
正思惟는 팔정도의 2번째 지분(慧蘊)이고
尋伺는 팔정도의 8번째 지분인 正定의 첫 번째 선정에 나타나는 心所이다.
* 판단 미스매칭
[ “apariyositasaṅkappo, vicikiccho kathaṃkathī.
vicariṃ dīghamaddhānaṃ, anvesanto tathāgataṃ.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의심과 의문을 품고
오랜 세월 동안 저는
여래를 찾으면서 방랑하였습니다.
497) 원문은 apariyosita-saṃkappo인데 ‘완결되지 않은 사유를 가지고'라고 직역할 수 있다.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aniṭṭhita-manoratho)" (DA.iii.740)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복주서에서는 그 목적을 “수승한 존재의 성취와 열반의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것”(DAȚ.ii.349)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yassu maññāmi samaṇe, pavivittavihārino.
ambuddhā iti maññāno, gacchāmi te upāsituṃ.
제가 생각하기에
외딴 처소에 머무는 사문들을
깨달은 분들이라고 여기면서
그들을 섬기러 저는 갔었습니다.]
[ “kimārammaṇā, samiddhi, purisassa saṅkappavitakkā uppajjantī”ti?
“nāmarūpārammaṇā, bhante”ti.
“사밋디여,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사람에게 사유가 일어나는가?”
“존자시여, 정신과 물질[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眼耳鼻舌身口意
[ “rūpadhātuṃ, bhikkhave, paṭicca uppajjati rūpasaññā,
rūpasaññaṃ paṭicca uppajjati rūpasaṅkappo,
rūpasaṅkappaṃ paṭicca uppajjati rūpacchando,
rūpacchandaṃ paṭicca uppajjati rūpapariḷāho,
rūpapariḷāhaṃ paṭicca uppajjati rūpapariyesanā
비구들이여, 형색의 요소를 반연하여 형색의 인식이 일어나고
형색의 인식을 반연하여 형색의 사유가 일어나고
형색의 사유를 반연하여 형색의 열의가 일어나고
형색의 열의를 반연하여 형색의 열기가 일어나고
형색의 열기를 반연하여 형색의 추구가 일어난다.]
[ dhammadhātuṃ paṭicca uppajjati dhammasaññā,
dhammasaññaṃ paṭicca uppajjati dhammasaṅkappo,
dhammasaṅkappaṃ paṭicca uppajjati dhammasamphasso,
dhammasamphassaṃ paṭicca uppajjati dhammasamphassajā vedanā,
dhammasamphassajaṃ vedanaṃ paṭicca uppajjati dhammacchando,
dhammacchandaṃ paṭicca uppajjati dhammapariḷāho,
dhammapariḷāhaṃ paṭicca uppajjati dhammapariyesanā,
dhammapariyesanaṃ paṭicca uppajjati dhammalābho .
…
법의 요소를 반연하여 법의 인식이 일어나고 법의 인식을 반연하여 법의 사유가 일어나고
법의 사유를 반연하여 법의 감각접촉이 일어나고 법의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법의 느낌이 일어나고
법의 느낌을 반연하여 법의 열의가 일어나고 법의 열의를 반연하여 법의 열기가 일어나고
법의 열기를 반연하여 법의 추구가 일어나고 법의 추구를 반연하여 법의 획득이 일어난다.]
[ kāmadhātuṃ, bhikkhave, paṭicca uppajjati kāmasaññā,
kāmasaññ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saṅkappo, kāmasaṅkapp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cchando,
kāmacchand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pariḷāho, kāmapariḷāh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pariyesanā.
kāmapariyesanaṃ, bhikkhave, pariyesamāno assutavā puthujjano tīhi ṭhānehi micchā paṭipajjati —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감각적 욕망의 요소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을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의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의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기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기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추구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몸과 말과 마음의 세 가지로 그릇된 도를 닦는다.]
[ nekkhammadhātuṃ, bhikkhave, paṭicca uppajjati nekkhammasaññā,
nekkhammasaññaṃ paṭicca uppajjati nekkhammasaṅkappo,
nekkhammasaṅkappaṃ paṭicca uppajjati nekkhammacchando,
nekkhammacchandaṃ paṭicca uppajjati nekkhammapariḷāho,
nekkhammapariḷāhaṃ paṭicca uppajjati nekkhammapariyesanā;
nekkhammapariyesanaṃ, bhikkhave, pariyesamāno sutavā ariyasāvako
tīhi ṭhānehi sammā paṭipajjati —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출리의 요소를 반연하여 출리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고,
출리에 대한 인식을 반연하여 출리에 대한 사유가 일어나고,
출리에 대한 사유를 반연하여 출리에 대한 열의가 일어나고,
출리에 대한 열의를 반연하여 출리에 대한 열기가 일어나고,
출리에 대한 열기를 반연하여 출리에 대한 추구가 일어나고,
출리를 추구하면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몸과 말과 마음의 세 가지로 바른 도를 닦는다.]
paṭisaṅkhā - saṅkappa
計算 - 판단
[ idha, bhikkhave, bhikkhu paṭisaṅkhā yoniso
uppannaṃ kāmavitakkaṃ nādhivāseti pajahati vinodeti byantīkaroti anabhāvaṃ gameti,
uppannaṃ byāpādavitakkaṃ ... pe ...
uppannaṃ vihiṃsāvitakkaṃ ... pe ...
uppannuppanne pāpake akusale dhamme nādhivāseti
pajahati vinodeti byantīkaroti anabhāvaṃ gameti.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지혜롭게 숙고하여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지혜롭게 숙고하여 이미 일어난 악의에 찬 생각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지혜롭게 숙고하여 이미 일어난 해코지하려는 생각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지혜롭게 숙고하여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삿되고 해로운 법들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 ‘attabyābādhāya saṃvattatī’tipi me, bhikkhave, paṭisañcikkhato abbhatthaṃ gacchati;
‘parabyābādhāya saṃvattatī’tipi me, bhikkhave, paṭisañcikkhato abbhatthaṃ gacchati;
‘ubhayabyābādhāya saṃvattatī’tipi me, bhikkhave, paṭisañcikkhato abbhatthaṃ gacchati;
‘paññānirodhiko vighātapakkhiko anibbānasaṃvattaniko’tipi me, bhikkhave, paṭisañcikkhato
abbhatthaṃ gacchati.
so kho ahaṃ, bhikkhave, uppannuppannaṃ kāmavitakkaṃ pajahameva
vinodameva byantameva naṃ akāsiṃ.
비구들이여, '이것은 참으로 나 자신을 고통에 빠트린다.'라고 숙고했을 때 그것은 사라졌다.
'이것은 참으로 다른 사람을 고통에 빠트린다.'라고 숙고했을 때 그것은 사라졌다.
'이것은 둘 다를 고통에 빠트린다.'라고 숙고했을 때 그것은 사라졌다.
'이것은 통찰지를 소멸 시키고 곤혹스럽게 하고 열반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라고 숙고했을 때
그것은 사라졌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는 감각적 욕망과 관련된 사유가 일어날 때마다
반드시 그것을 버렸고 제거했고 없앴다.]
[ “aguttaṃ cakkhusotasmiṃ, indriyesu asaṃvutaṃ.
makkhikānupatissanti, saṅkappā rāganissitā.
“kaṭuviyakato bhikkhu, āmagandhe avassuto.
ārakā hoti nibbānā, vighātasseva bhāgavā.
“gāme vā yadi vāraññe, aladdhā samathamattano .
pareti bālo dummedho, makkhikāhi purakkhato.
“ye ca sīlena sampannā, paññāyūpasameratā.
upasantā sukhaṃ senti, nāsayitvāna makkhikā”ti.
눈과 귀 보호하지 않고 감각기능들 제어하지 않는 자에게
욕망을 의지하는 나쁜 생각이라는 파리 떼가 몰려드나니
더러움을 만들어 비린내를 풍기는 비구는
열반으로부터 멀리 있고 오직 괴로움을 겪으리.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한 그는 마을에서건 숲에서건
마음의 고요함을 얻지 못하고 파리들만 앞세우고 다니네.
그러나 계를 구족하고 통찰지와 고요함을 즐기는 자들
그들은 파리를 모두 없애버리고 평화와 행복을 누리네.]
[ so yaṃ vitakkaṃ ākaṅkhati vitakketuṃ taṃ vitakkaṃ vitakketi,
yaṃ vitakkaṃ nākaṅkhati vitakketuṃ na taṃ vitakkaṃ vitakketi;
yaṃ saṅkappaṃ ākaṅkhati saṅkappetuṃ taṃ saṅkappaṃ saṅkappeti,
yaṃ saṅkappaṃ nākaṅkhati saṅkappetuṃ na taṃ saṅkappaṃ saṅkappeti.
iti cetovasippatto hoti vitakkapathe.
그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는 생각은 무엇이건 그러한 생각을 일으킨다.
그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이건 그러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는 사유는 무엇이건 그러한 사유를 일으킨다.
그는 자신이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 사유는 무엇이건 그러한 사유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생각 일으킴에 대해서 마음의 자유자재를 얻는다.]
[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ne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
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n”ti.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감각적 욕망이 아니로다.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그냥 그렇게 머물 뿐이어라.
슬기로운 자들은 그것에 대한 의욕을 길들이노라.]
[ “kathañca, bhikkhave, bhikkhu anāvilasaṅkappo hoti?
idha, bhikkhave, bhikkhuno kāmasaṅkappo pahīno hoti, byāpādasaṅkappo pahīno hoti,
vihiṃsāsaṅkappo pahīno hoti.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anāvilasaṅkappo h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사유가 투명한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를 제거한다.
악의에 대한 사유를 제거한다. 해코지에 대한 사유를 제거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의 사유가 투명하다.]
[ “tayo akusalasaṅkappā — kāmasaṅkappo, byāpādasaṅkappo, vihiṃsāsaṅkappo.
“tayo kusalasaṅkappā — nekkhammasaṅkappo, abyāpādasaṅkappo, avihiṃsāsaṅkappo.
(7) 세 가지 해로운 사유(思惟, saṅkappa) -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 악의에 대한 사유, 해코지에 대한 사유
(8) 세 가지 유익한 사유 -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
[ idha, bhikkhave, bhikkhuno cakkhunā rūpaṃ disvā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sarasaṅkappā saṃyojaniyā.
tañce bhikkhu adhivāseti nappajahati na vinodeti na byantīkaroti na anabhāvaṃ gameti,
veditabbametaṃ, bhikkhave, bhikkhunā —
‘parihāyāmi kusalehi dhammehi’. parihānañhetaṃ vuttaṃ bhagavatāti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쇠퇴하는 법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눈으로 형색을 본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난다.
만일 비구가 그런 것들을 인정해 버리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장 내지 않고
존재하지 않게 하지 않으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쇠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puna caparaṃ, bhikkhave, bhikkhuno manasā dhammaṃ viññāya nuppajjanti
pāpakā akusalā dhammā sarasaṅkappā saṃyojaniyā.
veditabbametaṃ, bhikkhave, bhikkhunā — ‘abhibhūtametaṃ āyatanaṃ’.
abhibhāyatanañhetaṃ vuttaṃ bhagavatāti.
imāni vuccanti, bhikkhave, cha abhibhāyatanānī”ti.
… 마노로 법을 안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지배의 경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 tamenaṃ upadhipahānāya paṭipannaṃ upadhipaṭinissaggāya
upadhipaṭisaṃyuttā sarasaṅkappā samudācaranti.
그가 재생의 근거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을 때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이 그를 압도한다.
so te adhivāseti, nappajahati, na vinodeti, na byantīkaroti, na anabhāvaṃ gameti.
그는 그들을 품고 있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
imaṃ kho ahaṃ, udāyi, puggalaṃ ‘saṃyutto’ti vadāmi no ‘visaṃyutto’.
우다이여, 나는 이런 사람을 속박되었다고 하지 속박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다.]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ye me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eyyu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세속에 대한 나의 기억과 사유를 모두 제거하리라.'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 tassa evaṃ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ye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anti.
그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마침내 저 세속에 얽힌169) 재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170)이 사라진다.
169) “'세속에 얽힌(gehasitā)'이란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의지한 것(pañca-kāma-guṇa-nissitā)을 말한다.”(MA.iv.144)
170) '재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은 sara-saṅkappā를 옮긴 것인데 이것은 sara와 saṅkappā의 복합어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sara는 빠르게 달린다(dhāvanti)는 뜻으로 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dhāvana-saṅkappā)을 말한다. (MA.iv.144)
“'생각들(saṅkappā)'이라고 하셨다. 어떠한 것이든 그 모든 나쁜 생각(micchā-saṅkappā)과 악의와 해코지하려는 생각 등도(byāpāda-vihiṃsā-saṅkappādayo pi) 모두 감각적 욕망에 바탕을 둔 것(kāma-guṇa-sitā)이라고 알아야 한다.”(MAȚ.ii.77)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그런 생각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은 안으로 확립되고 고요해지고 하나에 고정되어 삼매에 든다.
evaṃ, bhikkhave, bhikkhu kāyagatāsatiṃ bhāveti.
비구들이여, 바로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다.]
[ micchāsaṅkappo sammāsaṅkappo]
[ kāmasaṅkappa nekkhammasaṅkappa]
첫댓글
경문에 의한 추측(思惟)은 본문과 같고
더 이상의 尋伺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주변에 팔정도를 수행하시는 분들에게
혹시 바른 삼매를 증득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初禪에서의 尋伺란?]
여쭈어 보실 기회가 있으면
그 내용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 해서 {아비담마 길라잡이} 206쪽을 찾아보니
[산스끄리뜨 tarka는 '논리적인 생각'을 뜻하며 이런 논리적인 생각이 바른 것이면
그것을 아누마나(anumāna, 추론지 *比量,推論)라고 인명에서는 부른다.]
“katame ca, thapati, kusalā saṅkappā?
nekkhammasaṅkappo, abyāpādasaṅkappo, avihiṃsāsaṅkappo —
ime vuccanti, thapati, kusalā saṅkappā.
“목수여, 무엇이 유익한 사유인가?
(★내외입처를 알음알이할때 좋거나 싫다는 느낌의 감각적 욕망에서)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
(★산란하지않음의 수행 주제에 대한 성내고 거부하는 바의)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믿음이나 <죽음> 표상이 부족한 바의)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이다.
목수여, 이를 일러 유익한 사유(思惟)라 한다.
------
수행주제(감각접촉에서 집법즉멸법)에 대한
생각을 일으켜 마음을 향하고 해보고 또 그 일으킨 생각을 지속적으로 고찰[尋伺]에 진행하는 목적은 산란하지 않은 상태로서 수행주제에 마음이 일치되게 하는 바이고 그때 삐띠와 수카가 경험됩니다.
그때에
수행주제에 방해되는 불선법들이 떨쳐버리게 되지요.
(봄봄님이나 도반님들에게
www.facebook.com/mindsati 에서 수행주제의 공부에 동참해보세요.)
근데
여기 경문도 sara를 기억에, sati를 마음챙김에!!!
//악의 없음/不害//.......는
아마 생명을 가진 이른바 존재들에 대한 태도이지 싶습니다.
{경전 이해의 길}(Netti)에서는 saṅkappo를 '의향'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네이버} 意向 [마음이 향하는 바. 또는 무엇을 하려는 생각.]
界(相-念) -> 想 -> 思惟(尋伺) -> [觸-受] -> 欲(chanda) -> 熱 -> 求 -> 得
언어적 표현(발설, 글을 씀)을 하기 전
먼저 이른바 '생각(saṅkappa)'이라는 것을 한다고 합니다.
물론 자신의 의견(주장)을 발설함에
어떠한 경우에도 '너는 잘못되었다.' 혹은 '나의 주장이 맞다.'라는
이른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어서
'내 논에 물대기' 식의 '의향意向'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주장을 발설하기 전
(틀리고 맞고는 둘째 치고) 자기 나름의 논리적(사실은 비논리적이라도)인
근거를 가지고 발설을 한다고 한다면
그 '생각(saṅkappa)'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려는 意向' 이 전에
나름의 논리(logic)가 없을 수 없다고 한다면
'생각(saṅkappa)'은 '논리論理적 판단'이라는 의미로 생각(판단)됩니다.
하다못해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도
건강에 좋지 못하다는 이성적 판단을
이거라도 마시면 기분은 좋아지거나 나쁜 기분이 완화되리라는 비이성적 논리가 승리하여
이런 (불선한) 행위를 하게 되지 싶습니다.
그래서 '생각(saṅkappa)'은 不定심소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意向 [마음이 향하는 바. 또는 무엇을 하려는 생각.]은
위 단계에서 欲(chanda)과 상응한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욕계세상에 태어났으면
(慾)界(相-念) -> 想 -> 思惟(尋伺)까지는 이미 자동으로 작동하지 싶고
그럼에도 수행한다는 것은 [欲(chanda)을 길들이는] 것.
欲(chanda) 단계를 넘어서면 .... 일상적인 범부?
@봄봄 그렇게 경문만 보시지말고요. 영아들의 행동을 살펴보세요.
Ktv 슈돌이 나오는 첫돌이후 애들을 보시면 마음이 향하게 하는 위딲까 이나, 신.구.심 行들 중에 몸행동身과 말口의 형성들의 우선 관계가 엿보입니다.
흔히 수행은 영유아 아동기를 지나 성인기에 든 사람들이 행하는 거죠
즉, 십수년 이상 살아가다가 훈습된 사람이나
세속의 지식에 고착된 業이나
영유아의 감관에 비해서 오염된 사람들의 건성 건성한 감각기능根에 대해서,
그 오염이나 業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것이고
이들의 청정함이 止觀이고 念處 수행 이랍니다.
즉, 일으킨 생각이란 것이
살다가 훈습된 오염에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자동적으로 내가 생각을 일으킨다고 착각(분별 識)에 빠진거죠.
이런 위딱까와 위짜라는 觸이 주던 느낌과 인식을 토대로 해서
일어나 머물다 사라지는 바의 인식에 향하게[의향] 하는 위딱까가 내면에 알려질 정도로 수행주제(호흡이 닿는 相, 까시나, 걷을때 닿는 相)에 정진을 해야 한답니다.
흔히, 그것들을
감관의 단속이라기도 하고, 훈습이 주던 분별識(domanasa, somanasa)의 알음알이에 열망하지않는다는
청정한 sati이라기도 하죠.
@붓다명상mindsati 붇다께서 하신 경문은 무시하고
애들을 잘 관찰하라는 말은 깡^^ 무시합니다.
//이런 위딱까와 위짜라는 觸이 주던 느낌과 인식을 토대로 해서//....와
[no phassanānattaṃ paṭicca uppajjati saṅkappanānattaṃ,]
[界(相-念) -> 想 -> 思惟(尋伺) -> [觸-受] -> 欲(chanda) -> 熱 -> 求 -> 得]....의 경문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의 대화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응답이 없더라도..... _()_
@봄봄 //위딱까와 위짜라는 觸이 주던 느낌과 인식을 토대로 해서//는
5부 니까야(초불이 번역한 4부 니까야가 아님!)의 소부 논서 경장의 <빠띠삼비다막가>의 경문 내용입니다.
초기불교에 관심을 한다면 모름지기 5부 니까야(숫타니파타, 빠띠삼비다막가)도 같이 읽어보세요.
없으시면 추천 해드릴까요?
@붓다명상mindsati
참~ ^^
5부 니까야 운운할 것도 없고
앞서 올린 심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 “cakkhuñcāvuso,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yaṃ vedeti taṃ sañjānāti, yaṃ sañjānāti taṃ vitakketi,
yaṃ vitakketi taṃ papañceti,
yaṃ papañceti tatonidānaṃ purisaṃ papañcasaññāsaṅkhā samudācaranti
atītānāgatapaccuppannesu cakkhuviññeyyesu rūpesu.
도반들이여,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觸]입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있습니다.
느낀 것을 인식하고 인식한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사량 분별하고
사량 분별한 것을 원인으로 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눈으로 알아지는 형색들에 대해 사량 분별이 함께한 인식의 더미가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봄봄
또한 이른바 66법에서
6내입처-6외입처-6식신-6촉신--------이어서 6수신....그리고
6想-6사-6애---------- 그리고 6심- 6사(즉 심사)에서의 심사와
계-想-사유(심사)-로 이어지는 흐름은 차원이 아예 다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의견을 피력할 수도 있지만
봄봄이 본 카페에서 최근에 여러 의견을 올려 보아도
님도 마찮가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대부분 이해를 못하는지 관심이 없는지는 몰라도
아직 이런 대화는 시기 상조라고 생각됩니다.
혹시라도 가능하실 것 같으면
봄봄이 올린 [이상한 그림]이라고 명명한 그림 보시고 이해되시면
콜 사인 보내십시요.
그러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직은 시기 상조이지 싶은데...
@봄봄
하기사 .......
66의 흐름에서 나타나는 심사와
초선에서 나타나는 심사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이런 대화는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66이 욕계애지연기라는 주장은 알아 듣기라고 할까?
1. 오해
2. 착각
3. 양심불량
아니다......
기본적으로 말귀를 ..... ㅠ
5부 니까야의 그 용도부터 먼저 공부하세요. 그 다음에 觸으로부터 受와 想에 정립을 하세요, 그리고 난후에사 身과 心의 行을 경험하세요.
그러면 尋과 伺를 제대로 알리다.
딱 4부의 아함경 수준에 머문 자에게는 더 이상 5부 니까야와 그 경험담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니까야는 5부 이죠~~ ^_^
봄봄님의 //
1. 오해
2. 착각
3. 양심불량
아니다......
기본적으로 말귀를 ..... ㅠ
// 과 같은 지나친 언사의 내용은 공공장소에서 비방 명예훼손 등에 해당하는 범죄 신고의 대상이 될 수가 있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