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부산일보/오늘을 여는 詩』2023.08.22. -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서는 꽃향기가 난다. 그런 사랑의 사람이 부재하게 될 때, 외로움은 존재론적 고독이 된다. 천지가 공허한 심연이 된다. 그래서 시인 조지훈은 잃어버린 사랑을, 꽃과 같기만 했던 사랑의 실체를 ‘민들레꽃’으로 소환한다. 현신(現身)해서야 겨우 풀리는 가슴의 멍울!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화자가 생전에 하지 못했던 말일 것이다. 그 말은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미처 해주지 못했던 말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민들레꽃’은 때늦은 회한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의 흔들림이다. 서로 마음의 상처에 ‘위로’가 될 수 있게 ‘맑은 눈을 들어 지켜보자’는 약속의 증표다. ‘아득한 거리’를 넘어 찾아올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이런 신비를 재현할 수 있다.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