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에세이
고샅의 풀을 뽑는 이여
/이시백
전철 안의 풍경은 손전화를 들여다보는 이들로 가득하다. 정보통신의 첨단을 사는 국민답게 저마다 꺼내 든 손전화의 화면을 들여 다보는 눈길은 자못 심중하고 골뜰하다. 눈이 마주치면 대뜸 '뭘 보냐'고 따지고 드는 풍정으로 미루어 남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한산하게 비어 마주칠 눈길이 적은 전철에서도 그 안의 풍경이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때문은 아닌 듯싶다.
쉴 새 없이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에 댓글을 주고받으면서도 막상 바로 곁의 사람과는 대화가 사라진다. 친한 사람들끼리 여러 명이 한자리에 앉아 있어도 제각기 손전화를 들여다보는 게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댓글마저 귀찮아서, 그림이나 사진만 주고받는 인스타그램이 인기라 한다.
이제는 전철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가슴마저 설렌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온종일 손전화를 거울 들여다보듯 하고 눈과 귀로도 모자라 손가락들까지 그것에 붙들려 지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글을 쓰는 이들이 있고, 그 글들을 모아 외동딸 비단신 꿔매듯 스무 해 동안이나 책으로 묶어온 이들이 있으며, 그 책을 손에 쥐고 읽는 이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비장한 거룩함마저 느끼게 한다. 이제 사람은 손전화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생각마저 기계에 맡기려 한다. 기억과 기록을 넘어, 사유하고 판단하는 것마저 인공지능에게 떠넘기려는 시점에서 과연 글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야기를 좋아하는 증조부께서 안마을에서 신작로 길갓집으로 옮겨 살았던 새말은, 고모와 고모할머니의 세 집이 모여 살았다. 네 장독, 내 부엌 따 질 것 없이 한 집처럼 지내다가 고모할머님이 아들을 따라 서울로 떠났다. 얼마지 않아 고모네도 건넛마을로 이사를 가면서 새말은 쓸쓸해졌다. 겨울 방마다 사랑채에 모여 성냥개비 내기 화투를 치며. 웃음꽃을 피우던 집들은 식은 채처럼 시서늘해졌다.
오가는 발길이 끊기며 세 집을 있던 고샅은 풀이 수북이 자랐다. 조모께서 새벽부터 일어나 고살에 엎드려 풀들을 뽑았다. 조부께서는 허리도 편치 않으신 분이 호미를 빼앗으며 말렸지만 조모께서는 날이 밝기 무섭게 여전히 고샅에 엎드려 지냈다. 착살맞게 뿌리를 박은 질경이를 마디진 손가락으로 뽑느라 이마에 땀이 송송 밴 조모는 곁에서 지켜보는 내게 말했다 "길에 풀이 덮이면 그 집은 망하는 거여."
길이 없는 이들도 있다. 초원에 외따로 홀어져 이리저리 바람 따라 떠돌며 사는 몽골의 유목민들에게는 정해진 길이 없다. 풀과 물을 찾아 한 해에도 여남은 번이나 가축 떼를 몰고 다니는 이들은 흩어져야 사는 고립을 운명으로 삼았다. 그런 유목민들에게 이웃은 멀고, 오가는 발길에 밟혀 생겨날 길도 따로 있지 않았다.
올여름 몽골의 항가이산을 넘다가 외딴 게르 한 채가 눈에 띄었다 사방을 들러보아도 연이은 산들로 둘러싸여 인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후미진 골짝 에 홀로 들어않은 게르의 주인이 궁금했다. 그에게도 이름이 있을까. 세상은 그를 알고 있을까. 산중의 어느 골짝에서 태어나 그 어름의 어딘가에 묻힐 그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그이에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
유목민은 글이 없었다. 있다 해도 알지 못했다. 이는 초원 제국을 경영한 칭기즈칸도 마찬가지였다. 까막눈의 유목민들은 돌로 자신의 존재를 표시하였다. 돌 위에 돌을 세워 인적을 남겼으니, 이는 바미얀을 공략하는 중에 사랑하는 손자 무투겐을 잃은 칭기즈칸이 분노하여 돌 위에 돌을 남기지 말라' 일렀다는 풍설과 잇닿아 있다.
글을 모르던 유목민들은 그렇게 돌 위에 돌을 쌓아 사람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검은 판석에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새겼다. 테비쉬울이나 알타이산맥 근처의 바양울기의 암각화에는 사슴을 사냥하고, 사랑을 나누고, 죽음에 이르는 한 인간의 일대기가 온전히 담겨져 있었다.
바람에 날아온 풀씨가 한철 꽃을 피우고 초원의 짧은 여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던 그 삶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애써 그것을 판석에 새겨 넣을 의지가 있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돌에는 삶뿐이 아니라 사후의 세계도 새겨졌다. 사슴돌이라 불리는 선돌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하늘로 실어 나른다고 믿었던 사슴을 새겼으니 생사를 잇는 장대한 서사가 담겨진 것이다.
외따로 떨어져 사는 유목민이 돌판에 새긴 그림들은 누군가 보기를 기대 하기 어렵고, 대개는 돌무지에 덮여 사라질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석을 끌어안고 각진 돌을 쥔 손에 힘을 주어 한 뜸 한 뜸 새기던 그 삶의 주인을 생각하면, 그 음각의 흔적들이 외치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내가 여기 있다!"
왜 사람은 글을 쓰는가. 사람은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마주할 때면, 몽골고원의 판석에 새겨진 암각화를 생각한다. 그것은 양털 한 줌만도 못하며, 부재한 사람의 쓸모없는 흔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실용'이라는 저울로는 잴 수 없는,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와, 부재한 것들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긴 겨울밤, 사랑방에 모여 화투를 치며 이리저리 오가는 동안 알이 벗겨진 성냥개비를 무엇에 쓰겠는가. 그러나 그 쓸모없는 성냥개비가 밝혀주던 마실의 즐거움은 환전될 수 없는 온기를 지녔으니, 바위에 그 외로운 삶을 새기던 유목민의 심경도 그리 즐거웠을 것이다.
글과 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산의 풀을 뽑던 조모가 떠오른다. 글이란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던 고샅이며, 문학이야말로 찾는 이가 없어도 바위에 힘을 주어 새기뎐 어느 유목민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잠시 손전화를 내려놓고, 심종의 고샅에 수북하게 자란 풀을 뽑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