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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
스 5:6-17
6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인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라
7 그 글에 일렀으되 다리오 왕은 평안하옵소서
8 왕께 아뢰옵나이다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본즉 성전을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서 형통하옵기에
9 우리가 그 장로들에게 물어보기를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 하고
10 우리가 또 그 우두머리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고자 하여 그들의 이름을 물은즉
11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12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13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
14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금, 은 그릇을 옮겨다가 바벨론 신당에 두었던 것을 고레스 왕이 그 신당에서 꺼내어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내주고
15 일러 말하되 너는 이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 하매
16 이에 이 세스바살이 이르러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지대를 놓았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사오니
17 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
스 5:6-17 / [다리오에게 보낸 총독의 편지] 총독 닷드내가 자기의 부관 스달보스내를 비롯하여 총독부의 관리 전체와 유브라데강 서쪽에 사는 아바삭 족속과 함께 다리오왕에게 편지를 써서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7) 그 보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리오 폐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8) 폐하께 알려 드릴 일이 있어서 이 글을 올립니다. 요즘 저희가 유다 지방으로 순찰차 내려갔다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신전이 재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 주민들은 네모진 돌을 굴려다가 벽을 쌓고 벽 안에는 널빤지를 입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일하기 때문에 공사가 아주 빠르게 진척되고 있습니다. 9) 저희는 그 공사의 책임을 맡은 장로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 신전을 재건하고 이 건물을 완성하라고 허가를 내주었느냐?' 10) 저희는 폐하께 그 공사의 책임자들을 알려 드리기 위하여 그 장로들의 이름도 물었습니다. 11) 그러자 그 장로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오. 우리가 지금 재건하는 이 성전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왕이었던 솔로몬이 건축을 시작해서 완공한 다음 수백 년 동안 내려오던 건물이오. 12)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노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 주셨소. 그러자 바벨론 왕이 이 성전을 허물어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어 갔소. 13) 그러나 고레스가 바벨론에서 왕이 되자 새로 바사 제국을 건설하고 그 첫해에 벌써 하나님의 이 성전을 재건하도록 명령을 내려 주었소. 14) 그뿐만이 아니라 고레스왕은 금그릇과 은그릇들도 바벨론의 신전에서 다시 꺼내다 주었는데, 그것들은 옛날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약탈해다가 그곳에 가져다 두었던 성전의 기구들이오. 고레스왕은 세스바살이라는 사람을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고 성전 기구들을 모두 그에게 넘겨 주었소. 15) 그때에 고레스왕은 세스바살에게 그 기구들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 다시 두라고 하시며, 그 성전이 본래의 제자리에 재건되도록 감독하라고 명령하였소. 16) 그리하여 세스바살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성전 기초를 다시 놓았소.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성전 공사는 계속되고 있으나 건물은 아직 완성하지 못하였소.' 17) 그러므로 이제 폐하께서 이 일을 조사해 보는 것이 옳다고 여기신다면 고레스왕이 실제로 예루살렘의 이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령을 내린 일이 있었는지 궁중의 서고에 조사를 시켜 알아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폐하의 결정을 저희들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성전 재건의 적법성을 당시 총독 닷드내와 동관 스달보스내 등 아바삭 사람들이 다리오 왕에게 물은 내용입니다. 이들은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라(6-10, 17) 성전 재건을 막으려는 자와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는 두 부류의 상반된 주장이 충돌합니다. 이에 유대 백성의 주장대로 바벨론 왕 고레스가 성전을 재건토록 조서를 내린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려 합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바벨론의 문서 보관 창고에서 확인하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성전 재건에 관한 다리오 왕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묻습니다. 언뜻 보면 이 관원들의 행동이 성전 재건을 막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전 재건을 막아 갈등을 빚고 있는 사마리아 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서 갈등을 종식시키는 하나님의 성과입니다. 결과적으로 성전 재건의 적법성이 드러나고 막힘없이 성전 재건에 힘쓸 수 있도록 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11) 포로기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복의 시작을 성전 재건으로 삼으셨습니다. 회복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아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입니다. 고난의 여정 이후 이들은 다시금 자신들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에서부터 하나님의 회복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11-16) 유다 백성들은 먼저 저어졌던 성전이 무너지고 자신들의 성전을 다시 짓게 된 이유를 고백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노엽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이스라엘은 주어진 나라를 잃고 성전이 파괴된 쓰라린 과거가 있습니다. 이는 고난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켜서 다시 살리려는 목적의 고난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때가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이고, 하나님의 회복의 때입니다. 성전 재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의 약속을 이루시는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멈추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명을 이어 나아가야 합니다.
적용: 지금 고난의 과정 속에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의 회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라는 메시지는 아닐까요?
젊은 여자가 책 한 권 들고 읽으려 했으나 너무 재미없고 딱딱해 곧 포기해 버렸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한 청년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바로 전에 읽으려던 책의 저자였습니다. 그때서야 그녀는 그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하여 드디어 독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그 책을 그토록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그 작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면 성경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책이 됩니다. 성경말씀에 대한 관심이 어쩌면 우리의 주님에 대한 관심의 척도인지도 모릅니다.
< 설 교 >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스 5:6~17 / 주사랑교회 최정도목사
오늘 본문은 페르시아 관리들이 유대 사람을 조사하고 그것을 다리오 왕에게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이 관리들은 이전의 관리들과 달리 정직한 관리들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조사하여 다리오왕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관리들이 보낸 조서 초안입니다. 이 보고서에는 성전 건축하는 유대인에게 누구의 명령으로 성전을 건축하느냐 그리고 그 우두머리는 누구이느냐 라고 묻습니다. 이에 귀환자들이 대답하는 것이 자신들의 영적신분을 먼저 밝힙니다.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고합니다. 신앙적 신분을 이야기하고 그것에 긍지가 가득함을 보여줍니다.(11절)
옛날에 큰 왕이 건축한 성전이 무너지고 자신들이 다시 건축하고 있다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긍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 당시의 신론을 무시하고 오직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온 우주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이야기 합니다. 하늘은 우주의 가장 높은 곳, 땅은 우주의 가장 낮은곳 여기 모두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종입니다.(골1장)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의 성도들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이 긍지가 되고 자부심이 되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예수님의 종임을 기억하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사라지지만 우리가 주의 종이며 주의 사람인 것이 자부심과 긍지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이 천지의 주재이신 분의 종입니다 하며 역사적 사실들을 이야기 합니다.(12절~13절)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넘겨져 성전이 파괴되고 자신들의 조상이 바벨론으로 끌려 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이것은 전쟁에 져서 억울하게 끌려가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은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조상들이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느브갓네살의 손에 넘겨서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왕 고레스가 아니라 바벨론왕 고레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점령할 때 페르시아왕을 바벨론왕이라고 이야기 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레스왕 원년에 하나님의 섭리로 자신들이 돌아올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느브갓네살로 유대 민족을 때리게 하고 고레스를 통해 위로하고 있음을 이야기 하며 모든것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 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천지의 하나님의 종으로 지금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계획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세상의 방정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종의 신분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왜 유대 백성이 징계를 당했을까요? 왜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이 종의 신분을 넘어 다른 우상들을 섬기는 다른 신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 처럼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종입니다. 두 신분을 기억하며 예수님 처럼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좁은길, 자기부인을 날마다 실천하며 주의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이유는 바벨론에 의해 망한 이 백성 이 민족을 언급하며 언약의 백성이라 지칭합니다. 하지만 이 일을 계획하시는 분 하나님은 오직 언약의 백성에게 주목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이 세상의 부, 권력, 명예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만 보이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 덕분에 이집트 왕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대단한 권세자 바로가 네 나이가 몇이냐 라고 묻자 제 나이 130 이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바로는 야곱을 애처롭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시선은 야곱에게서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을 통해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이 탄생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때론 초라하고 부족한 우리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귀히 여기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14절~15절, 역사적 이야기를 또 합니다. 고레스왕의 칙령에 의해 성전 재건축이 이루어짐을 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그 자리에 성전을 재건축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을 다윗이 설계하고 솔로몬이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교만(인구조사)으로 하나님이 징계를 하셨는데 이때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자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었습니다. 이것은 죄의 문제가 이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번제를 드림으로 해결되었고 이곳이 성전 부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산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기에 성전이 세워진 것이며 이 성전은 예수님을 예표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여 우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과 구약을 통한 우리의 미래를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종된 신분으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좁을 길을 걷는 그 자리에 복과 기쁨이 있음을 우리가 기억하며 그길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을 아는 사람들로 이세상에 연연하며 살면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스 5:6-17 / 푸른교회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반드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바벨론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다인들의 간절한 염원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바람은 성전 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재건을 위한 기초를 놓던 날 그들은 찬양과 대성통곡으로 벅찬 감격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스러운 사역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요하고도 조직적인 방해로 무려 16년이나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누구도 감히 막을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역사하시므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업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일이 이번에는 아름다운 성공을 거둡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의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요?
① 형통케 하셨습니다(6-8절).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본즉 성전을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 형통하옵기에>(8절).
하나님은 형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너진 신앙을 다시 쌓는 일은 고되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면 누구나 신앙을 재건하는 일이 가능함을 믿어야 합니다.
② 불신앙을 깨닫게 하셨습니다(9-12절).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애시당초 왜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손에 넘기시며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11-12절).
③ 이방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13-17절).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13절).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시대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역사하사 사람을 움직이시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모든 게 형통합니다.
부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므로 만사를 형통케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적용>
-당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1절에 나오는 <천지의 하나님>이란 무슨 뜻일까요?
-바벨론 왕 고레스가 <가서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15절)고 명령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기도>
주님,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의 감동이 할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악한 사람, 악한 세력들의 방해로 16년간이나 중단됐던 성전 재건 사업이 하나님의 역사로 다시 재개되어 결국은 성공한 예를 보면서 오늘 저희도 많은 깨달음을 얻게 해주시옵소서. 사람을 붙잡고 설득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 온전히 이뤄지게 해주시옵소서.
에스라 5:6-17
하이랑교회 / 찬송 210장
오늘 말씀은 앞서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촉구에 따라 성전 재건 공사를 다시 시작한 유대 백성들의 행위에 대한 적법성을 바사 제국의 다리오 왕에게 문의했던 총독 닷드내의 편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스4:8-16에 이미 언급된 바 있는 아닥사스다 시대의 사마리아인들의 고소장과 비교할 때 닷드내의 편지는 유대 백성들의 주장과 사마리아인들의 질시(嫉視) 사이에서 공정성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즉 닷드내는 유대 백성들이 주장하는 대로 고레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토록 조서를 내린 사실이 있는지 바벨론의 문서 보관소에서 확인을 해 주도록 요청함과 아울러 성전 재건에 관한 다리오 왕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 문의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총독 닷드내의 편지 속에는 유대 백성들의 신앙 고백이 간접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즉 유대 백성들은 성전 재건 공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닷드내에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다.(11절)
그리고 오래 전에 건축된 바 있는 성전을 다시 한번 자신들이 재건할 수밖에 없게 된 까닭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말미암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이러한 유대 백성들의 고백은 성전의 파괴와 70년간에 걸친 포로 생활을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겸손히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울러 이제 창조주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든지 성전 재건을 완수해야 될 사명을 갖고 있다는 신앙적 결의를 드러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언제·누구 앞에서든지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고백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벧전3:15)
특히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님이시며 다만 우리는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어야만 된다.(고후4:5, 골4:12)
만약 세상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시인하면 장차 하나님 앞에서 주님 역시 우리를 시인하실 것이다.
그러나 혹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도 부인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된다.(눅 12:8-9)
이와 더불어 본문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는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는 자세를 지녀야 마땅함을 교훈받을 수 있다.
비록 총독 닷드내가 성전 재건 공사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했어도 사마리아인들의 뇌물에 매수되어 거짓 고소장에 서명한 자들(스 4:5-10)과는 달리 유대 백성들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본국에 보고하는 공정성을 보였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권세를 지닌 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를 구현하기 위해 힘써야만 한다.
6절)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인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라」
본문에 나타난 닷드내의 보고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아무런 사심없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분명 사마리아인들의 보고를 받고 성전 재건 공사 현장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매수되어 성전 재건 공사를 방해한 이전의 관리들이나 훗날 성벽 재건 공사와 관련하여 왕에게 악의적인 보고서를 올렸던 르훔과 심새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모든 일을 원칙에 따라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처리하였다. 그는 공직자로서 충성스런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직무에 충성스런 그의 태도만은 분명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불의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은 선의 절대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도덕적으로도 모두 불의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본래 그들 가운데 심어두신 양심이 있다.
그래서 그 양심으로 그들 역시도 불완전하나마 나름대로 선을 행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기도 한다. 아니 비록 하나님을 섬기는 선은 행하지 못한다 해도 세상적으로 보면 대단히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행하지 못할 선을 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보다 세상적으로는 더 의로운 삶을 살아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자들도 있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닷드내처럼 자기 일에 충성스런 사람들도 많다.
우리는 불신자들이라고 해서 그들을 무조건 멸시하고 배척해서는 안된다. 불신자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면 기꺼이 배워야 한다. 불신자들의 선한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시며 사람들로 우리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마5:13-16)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모습은 당연히 의로워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인들의 윤리 의식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매우 인색하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는 소위 가라지 성도들이 사회에서 비난받을 만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비판하여 볼 때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큼 모범적인 삶을 살지 못한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의 인정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깨끗하고 정직하며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호크마주석
스 5:6-17
아바삭 사람 - 이 단어는 애굽 땅의 엘레판틴에서 발굴된 파피루스 문서에서 유사한 형태로서 발견되며, 그 의미는 `고하는 자'(Fensham) 혹은 `조사하는 자'(Meyer)등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의 `아바삭 사람'은 페르시아 관원들의 구체적 직함이지 어떤부족의 이름이 아니다(4:9 주석 참조).
=====5:7
그 글 -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 건축이 합법적인 것인지의 여부를 질문하기 위한보고서를 가리킨다. 그런 이 원문에는 본 문구 뒤에 `그들이 보낸'이라는 말이 있다.
만안(萬安) 하옵소서 (쉘라마 콜라) - 문자적으로 `모든 평화' 란 뜻으로, 예컨대`하나님께서 당신의(왕의) 주권을 언제나 지켜주시길 기원합니다'와 같은 인사말의 약자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Joseph Blenkinsopp). 아무튼 이와 같은 평강을 기원하는 인사법은 고대 중근동 사회이서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었다.
=====5:8
아시게(예다) - 이것은 체험적이리만치 확실한 `인식' 혹은 `인지'를 뜻하는 동사이다(호 6:3 주제 강해, `야다(* )의 개념' 참조). 우리가...가서 -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유다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관련하여 관리로서의 공무 집행을 위한 것이었다.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전 -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즉 (1) `지극히 크신'을 예루살렘 성전의 엄청난 규모를 형용하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지극히큰 전'으로 해석해야 한다는견해(Fensham).
(2) `지극히 크신'을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려는 것으로 보고 한글 개역처럼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Williamson,Kidner, Schultz) 등 두 가지이다. 그러나 첫째, 피정복국의 종교를 존중하는 것이 페르시아 정부의일관된 식민지 정책이었으며 둘째, 원문상 형용사 `지극히 크신'이 단어 `하나님' 바로 뒤에 있으며 셋째, 건축 중이던 성전이 그 규모에 있어서 그리 대단하지 못했다(3:12)는 점 등에서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보다 더 타당성이 있다.
전을 큰 돌로 세우며 - 여기의 `큰 돌'(* , 에벤 겔랄)에 대해서는 (1)`큰'이라는 형용사를 `구르다'의 의미가 있는 어근 `갈랄'(* )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굴려야만 성전 재건 공사장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무거운 돌'이라고 하는견해(Grosheide, Davidson), (2) `큰'이라는 형용사를 아카디아어 `갈랄루'에서 파생된 `겔랄'(* )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고 원초적인 건축이 아닌, 재건에 유용한`조그만 돌' 혹은 `자갈'이라고 하는 견해(Fensham), (3) 형용사 `큰'을 어근 `갈랄'(* )에서 온 것으로 보고 또한 문맥적 상황을 감안하여 `잘 다어진 돌'이라고 하는 견해(Williamson)등 세가지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첫째, 옛 솔로몬성전을 목격했던 노인들이 실망을 할만큼 새 성전의 규모는 작았으며(3:12) 둘째, 비록 재건(再建)이기는 하지만 조그만 돌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셋째, 본 문구 뒤에 나오는`나무'가 완전히 가공된 재료임을 가리키는 등, 본 문맥상의 흐름에서 볼 때 위의 견해들 중 세 번째의 것이 가장 적절한 듯하다. 한편 `세우며'는 2절의 `건축하기를'과동일한 단어로서, 다만 `집을 짓다'를 의미하는 일반적 건축 용어이다.
벽에 나무를 얹고 - 이것은 대개의 경우 (1) 건축물의 내외벽에 미장용 판자를 붙이는 것(Rudolph). (2) 지진 등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할 목적으로 벽과 벽 중간 중간에나무를 대는 것(Thompson, Kidner, Schultz, Williamson)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위의 것들 중 두 번째 견해가, 고대 중근동에서 위와 같은 건축 방식이 지극히 보편적 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다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5:9
누가...명하여 - 이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5:10
두목(頭目)의 이름...물은즉 - 성전 재건의 합법성 여부를 확인키 위한 기본적 조처이다(4절).
=====5:11
천지의 하나님의 종 -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천지의 하나님'이라고 칭한 것은 페르시아 왕 다리오에게는 친근감 있게 들렸을 것이다(Fensham). 왜냐하면 페르시아의 황실은 `하늘의 신' 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한 신'으로 여겨지는 `오르무즈드'(Ormuzd)를 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칭호를 사용한 것은 타협적 의미이기 보다는 오혀려 도전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갈다. 12절을 통해 미루어 보더라도,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 사건은 하나님의 무력(無力) 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 행사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Kidner). 따라서 `천지의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재건 사업은 다른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방해를 받거나 중지되서는 안됨을 강력히 시사해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Schultz).
오랜 옛적에 건축되었던 - 솔로몬 성전은 B.C. 966년에 착공되어(왕상 6:1) 7년 후인 B.C. 959년 가을에 완성되었었다(왕상 6:38). 따라서 제2성전이 건축되던 그 시기를 약 B.C. 518년 경으로 본다면 솔로몬 성전이 완공된 것은 그때부터 약 20여 년전이 되는 셈이다.
이스라엘의 큰 왕 -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의 탁월한 업적 때문에 그에게 `큰'(* , 라브)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했음이 분명하다(4:10).
완전히(* , 쉬클레) - 원문에는 본절의 맨 뒷부분에 놓여 있으며, 이는문자적으로 `마쳤다'의 뜻을 가진다.
=====5:12
우리 열조 - 문자적으로 `우리의 조상들'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 여기의 이 문구는 1:2에서 고레스가 여호와를 지칭키 위해서 사용했던 `하늘의 신'과 동일하다. 다만 1:2의 것은 히브리어로 본절의 것은 아람어로 기록됐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같이 하나님을 지칭한 것은11절에서 `천지의 하나님'이라고 한 까닭과 동일하다(11절 주석참조).
격노케 하였으므로(* , 하르기주) - `흥분하다' 혹은 `요동하다'의 뜻이있는 동사 `레가즈'의 사역형으로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했던 사실을 가리킨다(왕하 24:20).
갈대아 사람 - `갈대아' 는 남부 아라비아 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황무한 지역에 살던 반(半) 유목민들 혹은 그 지역 그리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발흥했던 신 바벨론 제국(Neo-Babylonian Empire, B.C. 626-539)을 모두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서북부에 살았던 아람족과는 구별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 여기의 `바벨론'은 국가로서의 `갈대아'와 동격이다. 한편`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조를 세웠던 `나보폴라살'(B.C. 626-605)의 아들로서, 당시 왕위에 있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갈그미스에서의 애굽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쟁취함(B.C. 605)과 동시에 애굽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지중해 인근의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B.C. 605년과 598년에 유다를 공격하여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B.C. 586년 에는(실제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은 B.C. 588년부터 시작되었다)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다. 한편 그 이름의 뜻은 `나부(바벨론의 신)가 계승권을 지키신다'(Dougals)이다.
손에 붙이시매 - 이것은 유다 왕국의 멸망이 철저히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결과였음을 분명히 시사해주는 말이다. 한편 `붙이시매'(* , 예하브)는 `주다'의 뜻을 가진다.
이 전을 헐며 - 이에 대해서는 왕하 25:9과 대하 36:19을 참조하라.
백성을...바벨론으로 옮겼더니 - 바벨론왕은 네 번에 걸쳐서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잡아 갔었다. 첫 번째로 B.C. 605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하여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의 일부를 사로잡아 갔다(단 1:1-5). 두 번째 바벨론 유수는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을 배신한 것이 핑계가 되었으며, 이때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포함하여 용사 7천명 및 기술자 1천명, 그리고 다수의 귀인들을 붙잡아 갔다(왕하 24:10-17).또한 세 번째 바벨론 유수 사건은 시드기야 왕의 배신 때문에 일어났으며 이때에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비천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갔었다(왕하 25:8). 그리고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유다 총독 그다랴를 살해했을 때(B.C 582년) 또 한차례 유다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렘 52:30).
=====5:13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元年) - `고레스'를 `바벨론 왕'이라고 한 것은, 페르시아 스스로가 자신들을 바벨론의 합법적이고, 정통적인 계승자로 자처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자연스럽다. 근래에 발견된 고레스의 조서는 고레스가 자신에 대해서 `나는세상의 왕, 위대한 왕, 합법적인 왕, 바벨론의 왕, 쉐르와 아카드의 왕, (세상의) 네가장자리의 왕 고레스이다'라고 언급했었음을 보여준다(Pritchard). 특별히 여기서 유다 사람들이 고레스를 `바벨론 왕'이라고 언급한 까닭은, 성전 재건을 허락한 고레스를 느부갓네살과 직접 연결 지우려고 한 의도 때문이었다(Fensham).
이 같은 의도는 결국 느부갓네살이나 고레스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였으므로성전의 파괴가 필연적이었듯이 성전의 재건도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강력히 암시하려는 궁극적 목표와 연결된다.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하게 하고 - 이것은 구체적으로 고레스 왕이 (1)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팔레스틴으로 귀환을 허락한 것, (2) 성전 재건의비용에 쓸 수 있도륵 바벨론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물을 주도록 한 것(1:4)을 가리킨다.
=====5:14
본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1:7, 8 주석을 참조하라.
=====5:15
본절에서는 성전 기명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시 반환된 사실에 대해서 다뤄지고 있다. 이는 유다 민족의 성전 기명이 다른 민족의 신당에 보관되는 것은 유다 민족에게 있어서 엄청난 수치였으나, 이제 그 종교적 수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에 본절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1:7 주석 참조). 실로 이 같은 종교적 수치의 모면은 다른 나라에 강제로 끌려가서 사는 정치적 수치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본처(* , 아트레) - 문자적으로 `그것의 위치'를 의미하는 본 단어는 구체적으로는 솔로몬 성전이 위치했던 바로 그 장소를 가리킨다.
아울러 이는 성소의 재건이 반드시 원래 세워졌던 장소에서 이뤄졌던 중근동의 풍습을 염두에 둔 말이다(Gall-ing).
=====5:16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 여기서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행위로 인한 재건 사업의 중지(4:1-5)에 대해서 언급지 아니한 까닭은, 여기서는다만 그 당시 진행 중이던 성전 재건 사업이 고레스의 허락에 의해 이뤄지고 있으며그래서 그 허락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공사는 합법적임을 부각시킬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때' 는 `세스바살'이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성전 지대(址臺)를 놓는등 건축 사업을 시작한 때를 말한다. 또한 `건축하여 오다'(* , 미트베네)는 `건축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베나'(* )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미완료적 진행형, 즉 `건축해 오고 있는 중이다'로 번역함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16여년이라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성전 재건은 중지, 방치된 상태였다.
=====5:17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 문자적으로는 `왕에게 좋으시거든' 의 뜻이다. 즉, `왕이 판단컨대 좋게 느껴지거든'의 의미(7:18; 에 1:19)를 지닌다. 바벨론에서 왕의 국고에 조사하사 - `국고' (* , 베이트 긴자야)는 `모으다', `덮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게나즈'(* )에서 파생된 단어와 `집'의 의미를 갖는 단어가 합해진 말이다.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문서 보관소'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 특히 고레스의 조서 사본이 바벨론에 있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던 까닭은, 페르시아 왕들이 바벨론 왕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과 결코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고레스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 태도를 취했으며 그리고 다른 종교의 파괴된 신전들을 다시 짓도록 명령했던 사실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토판이 근래에 발견된 곳도 옛 바벨론의 고토(故土) 라삽(Rassam)이었다(Fensham).
이 일에 대하여 - 이것은 다리오 왕이 성전 재건 공사를 계속 진행시킬 것인지의 여부의 문제를 가리킨다. 기쁘신 뜻(* , 레아우트) - `생각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레아'(*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결정' 혹은 `의향'등의 뜻을 갖는다.
보이소서(* , 이쉴라흐) - `문서 혹은 사람을 보내다' 의 의미를 갖는 동사 `쉘라흐'(* )의 사역형 미완료 시제로 결국 이것은 닷드내가 자신의 직무와 관련하여 자신이 보낸 보고서에 대한 왕의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불만을 왕의 답신을 통해서 잠잠케 하려는 닷드내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호의적 태도가 엿보인다.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되는 과정을 그린 대목(3-6장)에서, 지금까지는 성전 재건을 위해 기초 작업을 한 장면(3장)과 뜻하지 않은 방해자들의 훼방으로 인해 재건 사역이 중단된 사실(4장)을 언급했다. 이에 이어지는 장면은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재개 되어 완공된 후 하나님께 봉헌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대목이다. 그러한 내용의 진행 과정에서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증거하는 본장의 성전 완공 기사(5:1-6:18)의 서막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담고 있는 본장은
(1) 선지자의 출현이라는 상서로운 조짐(1, 2절),
(2) 뜻하지 않은 사마리아 총독의 호의(3-10, 18절), 그리고 백성들의 현명한 답변이라는 긍정적 조짐(11-16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앞장에서 언급되었던 성전 재건에 대한 위기의 분위기를 걷어내고 본장을 통해 재건 공사에 대한 긍정적 분위기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장에는 본서의 다른 장들과는 달리 특별히 성전 재건에 관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본서 저자즌 이 같은 사실을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중 한 가지는 바로 전술(前述)되었던 내용, 즉 하나님께서 성전 재건공사를 촉구하시 위해 당신의 뜻과 의지를 선포할 선지자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이다(1절).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장로들을 돌아 보셔서 재건 공사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것이다(5절). 또한 이와 더불어 세 번째로는 재건 현장을 방문한 페르시아의 총독 일행에 함께하셔서 그들이 성전 재건 사역에 대해 호의적인 인상을 갖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리오 1세(B.C. 522-485)에게 상소를 올릴 때 긍정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게끔 하였던 것이다(17절). 본서 저자는 이 같은 사실을 암시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본장을 통해 강조함으로 성전 재건 공사가 하나님의 섭리하에서 다시 시작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성전 재건 공사가 성전의 지대를 놓은 직 후, 즉 B.C. 537년에 중단되었다고 한다면, 재건 공사가 중단된 기간은 약 16년간으로 볼 수 있다(4:24). 이같은 성전 공사가 오랫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사마라아 사람들의 페르시아 정부에 대한 로비 활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성전 공사가 중단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일 뿐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유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내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공사가 오랫동안 중단된 또 다른 이유 중에는 백성들의 영적 나태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게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심으로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할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서 저자는 앞 장에서 성전 재건 사업에 대한 역사성의 진위 여부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고레스의 조서 내용을 요락(1:2-4)힘과 더불어 다닥사스 왕에게 올릴 상소의 초본을 첨가해 방해 사실의 역사성을 확증했었다(4:11-16). 이 뿐만 아니라 6:2-5에서도 고레스 1세가 내린 조서의 내용을 언급해 본서 내용의 역사성과 진실성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본장에서도 본서 저자는 다리오 1세(B.C. 522-485)에게 보낸 상소의 초본을 기록해 본장 내용의 사실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본장에서 (1) 하나님께서는 약한 상황까지도 하늘 나라 건설에 이용하시며(롬 8:28; 빌 1:12), (2) 어느 한 시점에서 볼 때 실패한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 신자들에게는 실패란 존재하지 않음(창 50:20)을 깨닫게 된다.
1. 선지자의 출현(5:1-2)
본장에 나타난 세 가지 상서로운 조짐들 가운데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본문은 성전 재건 공사를 위해 선지자들이 출현하는 대목이다. 즉, 본문은 성전 재건 공사의 재개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학개와 스가랴를 보내심으로 공사의 재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본문은 (1) 학개와 스가랴가 출현해 예언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구절(1절)과, (2)그 예언에 감동을 받아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는 것을 기술한 구절(2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본문을 통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과 충고로 공사가 시작되었음을 간단히 요약해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상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항상 어려운 시기에 출현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을 질책하거나 권면함으로써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위기의 상황으로부터 구출하곤 하였다. 물론 선지자의 출현으로 이스라엘의 위기 상황이 항상 해소되지만은 않았다. 심지어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는 자신의 활동 기간 중,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벧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모습을 목도해야만 했다(렘 39: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회복되리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신실하게 선포했다는 점에서, 그의 사역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지를 선포하는 선지자의 출현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견케 해주는 상서로운 조짐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학개와 스가랴의 출현은 매우 뜻 깊은 것이 아닐 수 없다.
학개와 스가랴는 그 당시 성전 건축이 지지 부진한 이유를 분명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이유가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라기 보다는 백성들의 신앙적 나태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즉, 그 당시에 백성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공작을 핑계로 하여, 하나님의 사업보다는 자신들의 개인적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그 같은 태도가 당신의 뜻과 상충됨을, 기근과 흉년이라는 현상을 통해 알리셨다(학 1:10, 11). 하지만 백성들은 영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그러한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 당시 백성들은 자신들의 성전 건축보다 개인적 사업에만 전념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러한 인간적 판단에 따라, 성전건축의 중단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전이 신속히 완공되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간과해 버리고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인해 당시 백성들의 영적 무지를 그대로 놔둘 경우, 백성들 스스로에게 심각한 재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지 못함으로 더욱 깊은 영적인 침체에 빠져 버리게 되며, 또한 중앙 성소를 갖지 못함으로 그들의 신앙적 통일성도 깨져 버리고 말 것이 틀림없었다.
이 같은 백성들에게 선지자 두 사람의 출현은 그야말로 시의(時宜)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성전 건축의 당위성을 알리셨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그 말씀에 감동되어 자신들의 신앙적 나태를 회개하고 신앙의 깊은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예언의 말씀은 다니엘이 그의 마지막 경고를 선포하던 때(단 10:1),
즉 '고레스 2세 3년부터'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던 예언의 선포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때 학개 선지자가 예언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격려하고 경성시킨 것은 적어도 3주간 지속된 듯하다(학 1:15). 왜냐하면 백성들은 이때 영적인 깨달음을 얻어 신앙의 열심을 되찾아 일을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본 단락에서 (1) 어떤 상황에서 환경의 조건보다는 일의 당위성(當爲性)이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보다 중요한 요소이며(삼상 24:4-7; 행 21:10-14), (2) 신자들이 신앙적 침체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어서 영적 지도자들의 도움은 필수적임(행 21:28-31)을 깨닫게 된다.
* 성전 건축 재개 당시 페르시아의 정치 형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권면을 쉽사리 받아들여서 그동안 중단됐던 성전공사를 재개한 데는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즉,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 건축을 재개해도 될 것으로 판단하게 할 만한 어떤 상황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이유는 그 당시 페르시아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대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고레스 2세(B.C. 539-529)가 죽자 그의 왕권은 그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에게 양위도었다. 그런데 그 캄비세스는 자신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애굽 정복에 주력하다가 페르시아로의 구환 중 죽고 말았다. 그때 페르시아의 왕좌(王座)가 빈틈을 타서, 가우마타라는 인물이 캄비세스 2세의 동생 수메르디스로 자처하며 왕권을 찬탈하였다. 이때부터 페르시아는 내란에 버금가는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이 같은 혼란 상태를 부분적으로나마 평정한 사람이 바로 다리오 1세였다. 고레스 2세의 칠촌 조카이며(4장 강해, '페르시아 왕들' 참조), 또한 사위이기도 한 다리오는 가우마타를 처단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고레스 가문의 먼 인척이며, 사위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는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일 이후에 반란이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리오 집권 2년 동안은 그야말로 현재 왕이 언제 살해도고, 다시 어떤 사람이 왕위에 오를지를 알 수 없는 혼미 정국 그 자체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페르시아 정부는 유다 땅과 같은 먼 곳의 정복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선지자들의 권면을 받아들여서 성전 재건 사업을 다시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이 같은 정치적 환경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선지자들의 예언적 권면이 없었을 경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 뻔하다. 그러기에 위리는, 세상 역사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페르시아에 정치적 혼란을 조장하셨고, 여기에 더하여 시기적절하게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백성들을 신안의 잠에서 깨우셨다고 결론을 져야만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같이 안하셨다면 성전 재건은 중단된 채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자신들의 종교적 일체성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
2. 사마리아 총독의 호의(5:3-10, 17)
앞 단락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출현한 사실을 성전 재건의 성공을 예견하게 해 주는 상서로운 조짐으로 기록한 보서 저자는, 여기서 사마리아 총독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사실을 또 다른 상서로운 조짐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사마리아 총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 공사의 합법성 여부를 묻는 모습(3절), (2) 사마리아 총독이 페르시아 정부에 성전 건축의 합법성 여부를 조회하고 거기에 대한 답신이 올 때까지 성전 건축을 방임하는 모습(4-10, 17)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성전 재건 사업에 동참케 해달라는 요청을 묵살당한(4:1-3) 그들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코 호의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페르시아 정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을 꾀한다고 참소하여 그 공사를 중단시키게끔 하였다.
그러나 본 단락에서는 사마리아 총독의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결코 악의적이지 않은 듯할. 이러한 사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해서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올린 글과 본문에 언급된 상소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이전에 사마리아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보낸 상소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편견과 적의가 가득찬 내용을 담고 있었다(4:12-16).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조서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편파적인 감정을 배제하려 했고 욕설과 편견도 없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총독 일행이 올린 글 가운데는 유다사람들의 말이 약 반 이상 할애되었다.
그런데 왕에게 올린 총독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주요 항목들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즉, (1) 총독과 자신의 일행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불평과 원망에 대한 진상 조사를 위해 사명을 수행하였다. (2) 자신들이 보기에는 성전 재건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9절), (3) 자신들은 공사 현장에 가서 사업의 인가 통지서와 건축자들의 명단을 요구하였다(10절), (4) 왕은 성전 재건 공사에 대해 고레스의 조서를 살피고 객관적으로 확증을 내려 왕 자신의 의지를 결정하여 주기를 원한다(17절). 이 같은 항목들을 보서 저자는 본문에서 언급해 성전 재건에 대한 경과 사항과 당시 총독과 왕이 담당했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총독과 그 일행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전재건 사업을 위해 역사하시고 사용하셨는지를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본 단락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을 목도하게 된다. 이 같은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있었기에 성전 재건의 성공적인 완료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사마리아 총독의 호의는 성전 건축의 성공적 마무리를 확신케 해주는 상서로운 조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본 단락에서 (1) 하나님께서는 수고하며 애쓰는 자들에게 축복을 주시며(창 26:12; 살후 3:8), (2) 세상의 모든 것, 특히 권세자들까지도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들의 유익을 위한 도구들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롬 13:3,4)을 깨닫게 된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명한 답변(5:11-16)
앞단락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총독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악의적 태도를 갖지 않았음을 말한 본서 저자가 여기서는 백성들이 사마리아 총독의 질문에 대해서 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총독에게는 좋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은 (1) 성전과 관계된 역사를 간략히 언급한 전반부(11절), (2)바벨론으로 잡혀갔던 치욕적인 과거를 설명하는 중반부(12절), 그리고 (3)성전 재건을 위해 취해졌던 조처들을 나열한 후반부(13-16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본문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이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고백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답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들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 대한 인식을 정확히 했다는 것이다(11절) : 그들은 자신들을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라고 대답했다(빌 3:20). 그리고 이와 더불어 '다리오 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11절)이라고 표현함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분명히 고백했다. 사실 모든 인생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종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히 택하신 자들이었다(사 1:2-4). 그러기에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더불어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시 147;6; 밸전 5:6).
둘째, 자신들이 멸망당한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2절) : 그들은 자신들의 멸망이 죄 때문이었음을 시인하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도 특별히 자신들의 그러한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격노하셔서 심판을 당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참신앙인이 아니면 갖기 어려운 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패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 같은 신앙적 측면 이외에, 그들의 답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즉 셋째로 그것은, 그들이 역사적 진실을 가감없이 그대로 밝혔다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 정부에 거짓 보고를 하지 않게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현명한 대답으로 인하여 성전 재건 공사를 중단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저자가 여기서 보여 주는 백성들의 답변 모습은 그야말로 성전재건 공사의 성공을 확신케 해주는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본 단락에서 (1)신자들은 항상 세상에 대해서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마 10:32,33; 눅 12:8,9; 벧전 3:15), (2)우리의 신앙 고백은 언제나 하나님의 의와 계시,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섭리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