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학보사라는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정치인들의 수구성을 부모들의 보수성을 욕하지만...저는 느낍니다. 나도 그들과 다른 것이 없는걸....
전 그저 북유럽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척 이야기하곤 합니다. '야, 이거봐라. 난 이런 생각도 한다'
가슴으로 쓰는 기자? 나에겐 웃긴 소리입니다.
언제나 중간에서 똑똑한척만 하고 문제점만 어떻하면 더 고차원적으로 표현할까 궁리합니다. 해결책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채. 억압받는 현장을 가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
학보사에서 활동을 열심히 하시던 어떤 선배가 저희에게 '너희는 기자정신이 없다'며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현장에 나가지 않고 쉽게 기사를 쓰는것을 비판한 선배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70~80년대 선배들이 공장에 위장취업하고 야학을 결성했던 것처럼 할 수있냐고 시대는 변했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와 비교한 선배들.그들도 다른게 없지 않았냐고. 정치권, 벤쳐 등에서 추태를 보였던게 안보이냐고. 그들의 머릿속 행동에는 파시즘이 있었다고.
그러나 제가 생각했던 것에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삶과 죽음이 왔다갔다 했던 시기였고 그랬기에 처절했고 모든 것을 바칠수 있었고 많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파시즘적 요소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나는 필연적으로 70~80년대 학번의 선배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있을 자격이 있을까요? 그들은 강합니다. 그들은 자기 모순을 철저히 겪었으며...그들은 실천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전 얼마만큼 고민했고 실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은 부끄러움입니다.
그냥 저의 이런 모습이 부끄러워져서 이 글을 올렸습니다.
70~80년대와는 시대가 다르다는 말. 그말로 선배들의 행동과 다른 저에게 면죄부를 씌어줄 수 있을까요?
학보사를 나간 선배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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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시점에서 과거의 이야기는 이야기라 치고
훌륭하신 선배님들이지만..
왜 부끄러우시죠.
요즘 학생운동은 정말 지지도 못받고 냉대속에 있져.
저도 민중가요패에 잠깐 어설프게 나마 관심이 있었지만
스스로 그안에서 답을 못얻어서 나왔답니다.
학생운동에 대한 비판이라면
현시대는 상당히 자유로워졌으며
이념의 양극 이데올로기가 사라졌다는점.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추워진 탄압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선진국에서도 볼수있다는 점.
나는 아니다..속해있지 않다는 의식.
학생운동을 하는 부류는 매우 가난하거나
매우 부유해서 앞길 걱정이 없다는점..
때론 가식이나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는 점.
사안의 진실을 너무 한쪽에서 바라보고 과장한다는점.
등등 어설프게나마 느낀점입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오늘도 토익공부나 cpa,사시,취직시험에
날을 새며 열심히 앞길 걱정하기에
어쩌면 신념굳은 그네들의 외침을 공허하게 흘려 버린답니다.
저또한 그렇구요.
그렇게 교묘하게 몰아가는 현 사회조류에서 벗어나는게
참으로 두려더군여..
신념이 확고하신 분이라면 막연하게 운만 띄우지 마시고
님의 목소리를 들려주시기를 ..물론 많은 비판이 있을수도 있지만
--------------------- [원본 메세지] ---------------------
나의 대학시절
김 동 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사회학)
서울대 입구 버스 주차장에서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
두근 거린다. 한국 최고 대학의 지적 권위에 가슴 설레어서 그런 것이 아
니다. 본부 쪽에서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노래부르며 내려오고, 그들
을 막으려 전경들이 왼쪽 순환도로에서, 그리고 뒷편 관악파출소 쪽에서
몰려오는 환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최루탄 터지는 소리
가 들리는 듯하고, 여기 저기서 학생들이 뛰어가는 모습이 나타나 당장
나도 지금 어느 쪽으론가 뛰어 가야할 것 같은 불안감과 공포심을 갖는
다. 학생회관 2층을 올라갈 때도, 인문대학 1동 앞이나 중앙 도서관 통로
의 매점 옆을 지날 때도 나는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노랫소리가, 외
침이, 군화발자국 소리가,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내 귀에 생생하게 들려
온다. 서울대의 이미지는 오늘의 나에게 이렇게 새겨져 있다.
2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내가 서울대 교문을 들어설 때마다 이러한 착
각을 갖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22년전 1977년 가을 내가 신입생이었던
시절에 가졌던 체험이 내게 너무나 진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
다. 교육계열(당시는 계열별 모집이어서 2학년 때 학과로 배정받았음)에
입학하여 지리나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 정도만 갖고 있었으며 고
시공부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 정도만 갖고 있었지 어떤 구체적
인 미래에 대한 포부도 뚜렷한 꿈도 갖지 않았던 나는 그저 대학이 가져
다준 '자유'를 만끽하는 촌뜨기 학생에 불과하였다. 낙성대 입구로 내려
가 개천(지금은 도로가 되어 있는 당시 서울대 후문 쪽 남부순환도로 뒷
도로가 복개하기 이전의 개천이었음) 옆 술집에서 술마시고, 기숙사 같
은 방 동료인 K군(현재 전북대 교수)따라 가끔 미팅하러가고 시간 나면
소설책이나 잡지책 들을 뒤척이는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해
가을 10월 7일 있었던 사회학과의 심포지엄 사건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
을 주었다. 그날 나는 26동 강의실에서 개최된 심포지엄에 참가하지 않았
고, 밖에서 구경하고 있었지만 강의실 안에 있던 동료, 선배들이 모두 관
악경찰서에 연행되었으며 그것은 유신의 고삐가 가장 심했던 75년 이후
관악에서 터진 큰 데모 사건이었다. 국내 신문에서는 단 한 줄도 보도되
지 않았지만 외국 잡지에서는 이 사건을 크게 다룰 정도로 유신의 암흑기
를 밝힌 학생 항거의 출발점이었다. 나는 억압과 항거라는 정치적 현실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엄청난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학교가 문을 닫자 기숙사에 있었던 나는 짐을 싸서 낙향하였다. 나는 대
학원 시절을 포함하여 도합 3년 반을 기숙사에서 살았으며, 무려 4번을
학기 중에 짐을 싸서 때로는 택시를 잡아타고 때로는 책 박스를 어께에
지고서 후문 쪽을 내려왔는데, 그해의 낙향은 그 테이프를 끊는 사건이었
으며, 순진했던 나는 장차 나에게 그러한 일이 닥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서울에 기거할 곳이 없어서 집으로 내려간 나는 집 옆의 농막에
내 방을 만들고, 딱히 만날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군불을 지피고서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한국 자본주의, 지식인 문제, 철학, 역사 등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보름이 지나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연다는 통보가 왔
다. 무거운 책 보따리를 지고서 중앙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학
교가 문을 열었을 때 이미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선배 학생들
이 항의하는 당시의 정치사회 현실이 왜 문제인지를 어렴풋하게 의식하
기 시작하였고,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11월 11
일 또다시 데모가 터졌을 때 나는 구경꾼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막연
하기는 했지만 뭔가 몸짓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기숙사에 가방
을 갔다두고 고교동창 J와 시위대열에 합류하였다. 열심히 돌을 던지고
노래를 부르던 와중에 우리가 있던 무리들이 고립되었다. 나는 J와 사복
형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멀리서 학우들이 쳐다보는 것을 뒤로하고 우
리 몇은 인문대 2동 앞에서 본부까지 개처럼 끌려갔다. 본부 1층에는 이
미 많은 동료들이 잡혀 와 있었다. 우리는 닭장차에 실려 사당동으로 갔
다(당시 관악경찰서는 현재 사당동의 방배경찰서가 있는 자리였음)
큰 강당에 100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북쪽 창으로는 남산의 방
송탑과 반포아파트가 보였고, 남쪽 창으로는 관악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직 사당동과 방배동에 집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이전이라 주변에는 새
롭게 지은 단독 주택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강당 중앙에는 박정희 대통령
의 사진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위엄을 갖고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경찰의 준수사항과 강령들이 적혀 있었다. 잠시 후 고릴라처
럼 생긴 늙은 형사가 들어와서 자신은 4.19때부터 학생들 취조해온 이 분
야의 백전노장이니 거짓말을 하는 등 허튼 수작하면 혼날 줄 알라고 엄포
를 놓았다. 한 사람씩 호명되었고, 우리는 '하늘같이 높은' 형사들 앞에
서 그날의 가담 경위를 취조받았다. J와 나는 단순 가담자이고, 지난 번
10월 7일 사건 때 잡혀간 친구들도 하루밤만 자고 훈방되었으니 내일이
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깨어지고
말았다. 하루를 지나고 또 하루를 지나도, 취조만 반복될 뿐 나간다는 소
문은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밤이 되면 서울의 거리를 휘황찬란했고,
아침이 되면 자동차 경적소리와 출근 길 종종걸음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 바쁜 도시의 일상들은 나와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
다. 나는 왜 여기에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을 뒤씹으며 관악산
과 회색 빛 집들만 쳐다보았다.
결국 우리는 관악경찰서에서 일주일간 조사를 받고 나왔다. 그러나 우리
를 기다리는 것은 대학 당국의 청천벽력과 같은 징계조치였다. 지난 번
10월 7일 잡혀가서 하루밤 자고 나왔던 학생들은 재범으로 분류되어 무조
건 제명처분이 내려졌으며, 11월 11일 처음 잡혀간 학생들은 모두가 무기
정착 처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징계
였다. 처벌은 형식적으로는 대학 당국이 내린 것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박정권이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1학년 학생들을 대학에서 영원히 추방
하는 제명 조치가 내린 것은 유신의 고삐가 가장 심하게 조였으며 대항세
력이 가장 위축되었던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결국 나는
기숙사에서 추방당했다. 이번에는 이불을 포함한 모든 살림살이를 싸서
한달 만에 또다시 시골 집으로 내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서울대는 '나의 학교'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원해서 들어온 대학에서
그 대학의 직원과 교수들이 보는 앞에서 형사들에게 끌려갔으며, 그 대학
의 건물에서 2시간 동안이나 감금되었고, 그 대학 당국으로부터 신입생으
로는 엄청난 처벌인 무기정학을 당했다. 당시 관악서에 연행되었던 200여
명의 동료 중에서 나와 같은 1학년 학생 수십여명이 제명과 무기정학을
당했다. 더러는 자신의 제명 사실을 숨기고서 다시 공부하여 이듬해 다
른 대학에 입학하였고, 더러는 군대에 끌려갔다(80년 '민주화의 봄' 당
시 제명된 학생들의 복학 건이 제기되었을 때, 서울대에서 제명되고 타교
에 입학했던 학생들의 학교 선택 문제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정도로 화
제거리가 된 적도 있다). 나와 함께 무기정학을 당했던 J는 군대에 가게
되었지만 나이가 어렸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또다시 시골 집
으로 내려갔다. 18살에 불과했던 청년이, 아직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고,
대학이 무엇인지 모르며, 정치가 무엇인지 몰랐던 풋내기 학생이 그러한
엄청난 처벌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웠다. 박정희 정권의 말기적 광
기는 이렇듯 한 철없는 대학생을 짓이겨 놓았다.
대학에 들어갔다고 자랑스러워했던 부모님은 무슨 연고인지 1년도 안
되어 짐싸서 집으로 내러온 아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이상스럽게 비칠까
조심스러워 했다. 집안의 '희망'은 집안의 '골치덩어리'로 변했다. 나는
내가 왜 그러한 일을 당했는지 알기 위해 본격적으로 독서를 하기 시작하
였다. 물론 당시 나는 어떤 써클에도 들어가기 이전이라 학습을 체계적으
로 지도해줄 선배도 없었지만, 나는 한국근대사, 농촌현실, 지식인 문
제, 철학 등의 분야에 걸쳐 다양한 독서를 하였으며 생각들을 노트에 정
리하였다.
춥고 긴 겨울이 지났다. 봄 아지랑이가 시골 논두렁에 피어오르는 2월이
되어도 학교에서 오라는 통보는 없었다. 단과대 행정실을 찾아가서 물어
도, 직원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므로 모르겠다고 답변하였다. 나는 더 이
상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시골 마을에 있을 수 없었다. 급기야 나는
이불과 책을 싸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서 봉천 6동 근처에 하숙을 잡
고, 하숙비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우
연이 필연이 되는 것일까?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
는 그 하숙집의 인연으로 인해 본격적인 운동권 학생이 되어버린 것이
다. 그 하숙집은 바로 그전 해 사회학과 심포지엄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
간 S형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숙집 옆방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루되어 군대에 끌려갔다가 복학을 한 C형( 현재 D대 지리학과 교수)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C 형 동료였던 운동권 선배들이(내 기억으로는 부산
대 교수를 하는 C형 등이 주로 찾아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주 들락날락
거려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나는 내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
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J형이 하숙생으로 들어왔다(결
국 J형은 지난 20년 동안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연구, 활동하게 된
선배, 동료가 되었다). 그리고 가을에는 L(현재 디지털 조선일보 근무)
과 한방을 쓰게 되었다. 이들에 둘러싸인 나는 운동권의 문화에 더욱 깊
숙이 빠져들어갔으며( 말하자면 선배 잘못 만나서 본격적으로 물이든 케
이스라고나 할까! ). 이들의 권유로 학생운동 써클인 S회에 들어갔다. 내
가 스스로 선택해서 덫을 찾아간 결과가 되었다.
이후의 나의 모든 생활은 S회를 빼고서는 말할 수 없다. 78년 2학기에 나
는 복학이 되었고, 남은 1학년 2학기를 78학번들과 같이 다녔다. 학번도
새롭게 배정받았다. 당시는 데모나 운동에 연루된 학생이 80년대에 비해
서는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학생운동이 거의 음모적으로 진행되던 시절이
었으며, 그 전 해 나와 같이 제명, 정학 처분을 받은 학생들이 거의 학교
를 떠났기 때문에 학생들 중에서 내가 왜 복학을 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
은 거의 없었다. 나는 대학의 정규적인 코스에 거의 흥미를 갖지 않았
다. 이듬해 지리과로 들어갔지만, 학과 공부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
다. S회에서 진행하였던 사회과학 공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료 선배들
과의 만남과 토론이 나의 모든 것이었다.
나는 선배들이 마련해준 커리큘럼을 따라 내 하숙집방, 친구들의 자취방
을 전전하면서 학습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경제사, 변증법과 서양철학사,
사상사, 지식인론, 서양 자본주의 발전사, 한국학생운동사, 중국혁명사
등이 주요 학습 테마였고, 당시로서는 최초의 사회과학 서점이었다고 생
각되는 광화문의 민중서적, 신림 4거리의 광장서적( 현 교육부 장관 이해
찬씨가 운영하였음)을 기웃거리면서 운동권 학생들을 겨냥해서 불법으로
찍어냈던 프레이리([페다고지]), 휴버만, 스위지([자본주의 발전의 이
론]), 맥토프([제국주의의 시대]), 하버마스([이성적인 사회를 위하
여]), 루카치([역사와 계급의식]), 카아([러시아 혁명사])의 책을 사모으
기 시작하였다. 청계천 책방을 기웃거리면서 빛바랜 사상계 잡지와 [씨알
의 소리], 구간 [창작과 비평]와 [대화], [지성] 등을 사모았다. 그리고
마르크스 저작의 불어판을 구하기 위해 서강대의 개가식 로욜라 도서관
을 기웃거렸다( 이 사실은 당시 서울의 극소수의 학생들에게만 알려져 있
었은데, 모르긴 해도 당시 서강대 학생들조차 그것을 거의 모르고 있었
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말로 된 사회과학 서적이 거의 없던 터라( 당
시 사회과학 출판사로서는 창작과 비평사, 청사, 광민사 등이 있었을 따
름인데, 1979년 한길사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출간됨으로써 사회과
학 서적이 본격적으로 출간되었다), 외국 서적을 구해볼 수밖에 없었고,
일본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서가 학습의 주요 교재였다.
나는 현실참여파 문인들의 시와 소설, 문학평론을 탐독하였으며, 점차 우
리의 민족문제 분단상황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으며, 민중의 삶과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는 지식인의 사명감을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당시
운동진영의 학생들에게 유행했던 바 60년대, 70년대 초반까지의 낭만주의
적인 학생운동을 어떻게 청산하여야 할 것인가, 학생운동의 임무는 무엇
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나름대로 학생운동사를 정리하여
후배들과의 모임에서 발제를 하기도 했다. 차인석 교수의 [사회철학연
습] 강의에서 배운 지식사회학 이론을 토대로 하여, "후진국의 지식
인"에 대한 100매 정도의 기말 레포트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의 운동진영의 일부 동료들에 비해 나의 학습 수준은 보잘것이 없었다.
일부 뛰어난 친구, 선배들은 이미 자본주의 발전 이론, 한국 노동운동
론, 철학, 한국근대사 분야에서 상당히 많은 서적을 섭렵하여 높은 식견
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미 대학의 정규과정을 완전히 무시할 정도의 학
생 지식인이 되어 있었다. 당시의 대학신문은 '우리'의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생각들은 거의 공개적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 때
의 생활을 증언해 주는 한 장의 사진도 내게 남아있지 않다. 약간의 노트
나 서류들도 학부시절 무려 14번의 이사를 다니는 동안 거의 소실되었다
그 와중에 주변의 몇 몇 선배들이 감옥으로 갔다. 나는 S회를 대표하여
서울대의 몇 학회들의 연합모임(실질적으로 학내 데모를 주도하는 지하
조직체) 에 몇 번 참석하였다. 그러나 S회의 직계 선배들은 주로 학외 활
동(교회나 야학 등)에 중점을 두고 있었던 관계로 학내의 입지는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서울대 내의 이른바 '큰 가문'( 학내 학생운동을 실질
적으로 주도하는 몇 학회들)이 그러한 모임을 주도하였고, 같은 뿌리를
가진 형제 학회인 Y 회가 우리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우리는 학생운동의 중심부에서 비켜가게 되었다. 그러나 고학년이 되면
서 나도 장차 어떤 형태로 감옥을 가고 학교에서 제명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후의 생활을
지탱할 수 있을까의 문제를 둘러싸고 고민이 시작되었다.
79년 2학기가 되자 정치권과 학교의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김영삼 제명파동으로 정치권에서도 반유신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으며,
박정권에 대한 저항적인 학생운동이 보다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75,
76학번 선배들 중 일부는 삐라사건이나 데모 모의 사건 등으로 감옥으로
갔다. 학생들의 외로운 싸움으로만 시종하였던 반유신 투쟁의 물결이 서
울을 비롯한 도시 지역으로 확산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10월에 들
어서자 대구에서 부산에서, 그리고 마산에서도 학생 시민 연합시위가 발
생하였다. 그해 10월 26일은 서울대의 축제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 과에
서는 답사를 출발하였으나 학과 일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던 나는 그냥 기
숙사에서 잠을 청하였다. 새벽 6시 경 운동이나 하려고 츄리닝을 주어입
고 수위실에 내려갔는데 라디오 소리가 크게 들렸다. '박정희 유고'를 알
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박정희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나는 3층의
내방으로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내방과 옆방의 후배들을 모두 깨웠
다. "해방이다", "제2의 해방이다", "박정희가 죽었다", "박정희가 죽었
다"........
학교는 또 문을 닫았다. 우리는 또 짐을 쌌다. 그러나 10.26 이후에 싸
는 짐은 그 전의 것과 달리 기분이 좋았으며 낙성대 길을 내려오는 발걸
음도 가벼웠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들어갔던
선배들이 하나 둘 출소하였다. 그러나 이들 선배들과 만나면서 점차 우리
의 기대가 성급한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두환이 TV에 박정
희 내란음모 사건 관련 수사본부장으로 자주 출현하면서 민주화의 기대
는 점차 실망으로 변해갔다. 권력은 박정희 일파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12월 12일 한남동의 총성을 들었다.
전두환 구테타는 기정 사실로 확인되었다. 일부 출소한 선배들은 민주화
의 물결을 뒤로 돌리려는 전두환 일파에게 저항하기 위해 '명동 위장결
혼 사건'이라는 것을 모의하여 우리를 참석토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출옥
한 선배들과 학생인 우리들과의 생각에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이들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우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그해 2학기를 한겨울에 마친 후 우리는 그래도 기
대에 찬 겨울과 이듬해 새 학기를 맞이하였다. 곧이어 전두환의 중앙정보
부장 서리 역할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4월이 되면서 이제 그전의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학생
회가 조직되었다. 이 학생회를 중심으로 군사통치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무렵 사대 쪽 친구들과 같이 활동을 하기 시작하
였다. 사대에서 4.19 심포지엄을 한번 준비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그 모
임을 주도하였다. 학과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세미나를 조직하였다.
4.19 심포지엄을 준비한 이유는 80년 '민주화의 봄'이 4.19의 불발 민주
혁명의 재판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었다. 즉 4.19가
5.16으로 귀결되었듯이 10. 26도 결국 군부세력의 재집권으로 귀결될 가
능성이 높았다고 보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국면에서 무엇을 해
야하는가, 어떻게 하면 군부세력의 재집권을 막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의
식을 갖고서 그 심포지엄을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4월말 이후의 정치 정세와 학내의 분위기는 우리가 책과 자료나
보면서 심포지엄을 준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전의 날이 다가오
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는 전면투쟁론과 점진적 투쟁론이 대립되었다.
나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였다. 전두환이 계엄을 선포하고 집권을 하면,
그것을 막아낼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민들
은 군부독재의 재등장에 항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3김의 등장
에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전면투쟁만이 대안이라는 주장은 위험해
보였다. 민주화가 실패하고 운동이 패배하면 그 휴유증은 상당히 오래
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학생과 군부의 대결은 이제 물러설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5
월 14일 "계엄해제", "이원집정부제 반대"를 외치는 5,000여명의 시위대
는 서울대 아크로 폴리스를 가득 메웠다. 내가 입학한 이후 가장 많은 학
생들이 모인 것 같았다. 의대 학생들이 흰옷을 입고 도착하였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학교에서 신림동, 영등포를 거쳐 광화문으로 시위대의 물결
은 이어졌다. 그렇게 먼 거리를 행진하였는데 다리가 아픈 줄 몰랐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는 3 만 여명의 학생이 집결하였다. 시위대와 경
찰의 각축과 숨바꼭질이 시청, 종로 부근에서 계속되었다. 7시 반이 넘어
서야 시위대는 해산하고 나는 파김치가 되어 하숙집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 서울역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몸이 아파
다음날 서울역에 나갈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초조하게 라디오와
TV에 귀를 기울였는데, 10만 여명이 모인 서울역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5
월 15일은 데모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태풍 속의 고요였다고나 할
까. 17일 저녁 나는 친척집에서 계엄의 전국확대 뉴스를 들었다. 전두환
이 구테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황급히 하숙집의 책과 짐을 정리하고 집
을 나왔다. 만약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이
미 연락이 되어 있었다.
5월 18일 서울은 침묵에 들어갔다. 우리는 서울역으로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군인들이 투입된 서울시의 경계는 삼엄하였다. 그러나 한명 두
명, 낮익은 얼굴들이 서울역 앞에서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즈음 영등포
에서도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곳의 사정이 궁금하였다. 이 무렵 남
영동 쪽에서 집결하기로 되어 있던 시위대가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
울역 앞에 백 여명 모였던 우리들도 노래를 부르며 집결하기 시작하였
다. 그러나 도처에 포진하던 살기 띤 군인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뛰어 달
려들어왔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갈월동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잡히면 초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시위대는 5분도 안
되어 흩어지고, 나는 결국 도망자가 되었다. 당시 나는 새롭게 구성된 학
생회에 이름을 걸고는 있었지만 5월 시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
지 않았기 때문에 별일 없으리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도 걱정되어 약간
의 옷가지와 책을 챙겨서 봉천동 산꼭대기(현재 봉천동 고개 우측 재개
발 아파트를 짓고 있는 곳) 사대 친구들이 얻어놓은 자취방으로 갔다. 그
곳에서는 낮익은 얼굴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광주의
대 참극 소식을 들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 광주에서 발생하였다. 광주는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고 하고, 들리는 소문에는 서울의 몇 광주 출신 친
구들이 광주에 싸우러 내려간다고도 했다. 우리도 광주로 가야되지 않는
가 하는 고뇌스러운 토론이 있었다.
다음날 S 회의 선후배들이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 광주의 대 참극을 알리
는 삭제된 동아일보 기사가 실린 삐라와 군인들의 광주 만행을 알리는 삐
라를 입수하였다. 우리는 앞으로의 행동계획 등을 이야기하다가 한 묶음
씩의 삐라를 들고 그 집을 나왔다. 더러는 버스간에 더러는 길거리에 '광
주'의 삐라가 뿌려졌다. 나는 친구들이 욕할 것을 염두에 두면서도 뿌리
다 남은 삐라를 하숙집 마당에서 몰래 태웠다. 서울역에서의 서슬 시퍼
런 군인들의 행동을 직접 겪었을 뿐더러, 광주사태의 모든 경과와 잡혀
간 사람들이 당한 이야기를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당시의 시점에서는 그
것을 보관하거나 뿌리다가 잡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 같은 불안
이 엄습하였기 때문이다. 6월 13일 단성사 앞에서 예정된 시위도 거의 불
발로 끝났다. 이제 그 국면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우리는 그
해 여름 도망 다니는 선배들이 숨어있던 강원도의 깊은 산골짜기를 찾아
가 그 해 여름을 보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 것
인지 고민하면서 그해 여름이 지나갔다.
나는 거의 매일 악몽을 꾸었다. 당시의 내 일기책은 암담한 현실에 대한
비탄, 학생운동에 대한 무력감, 시민들의 낮은 정치의식에 대한 한탄들
로 채워져 있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인지
뭔지가 수 없이 많은 법들을 통과시키고, 칼라 TV가 도입되고 통금이 해
제되고 세상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지만, 그해 5월에 겪었던 분
노와 좌절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광주에서의 엄청난 살육은 민주화
에 대한 우리 학생들의 기대가 얼마나 소박하고 순진한 것이었는지 깨우
쳐준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공부는 해서 무엇하는가"라고 자
괴, 자책하면서 봉천 8동 반지하 자취방에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 내가
온전한 정신으로 신문을 읽고 TV를 보기 시작한 것은 1년 정도가 지난 81
년 들어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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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상
Re:Re:님 무슨말이 하고픈고저..괜한시비라 생각마시고
한가로운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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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7.1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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