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남은 경자년
모레면 쥐띠 경자년이 저문다. 그 쥐꼬리 그림자를 밟아 신축년 소가 뚜벅뚜벅 걸어올 테다. 새해는 코로나19가 속 시원하게 소멸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내가 교단생활을 마감하는 해이기도 하다. 교직 입문이 늦기도 했지만 출생신고 등재가 늦어 교직 말년은 덤으로 붙은 시간이었다. 이태 전 거제로 건너와 창원으로 복귀할 마음은 내지 못하고 남은 삼 년을 다 채우게 된다.
얼떨결에 거제 연초 와실에 둥지를 틀어 한 해를 보내고 신학기를 맞을 준비를 하던 지난 이월이었다. 조금씩 번져가던 코로나가 대구 경북에서 급속히 확산되면서 각 급 학교는 개학이 미루어지다 사상 초유 원격수업으로 전환된 온라인 개학을 맞았다. 개학이 미루어지고 있을 때 창원 집에서 걸어가는 산행을 느긋하게 다녔다. 코로나 감염이 우려되어 대중교통 이용을 자제했다.
그 무렵 집에서 멀지 않은 용추계곡으로 들어가 이른 봄에 피어난 야생화 탐방으로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그런 속에 주말에 창원으로 돌아가면 혼자서나 벗과 함께 근교 산행을 나서 산나물을 뜯어와 찬거리로 삼고 돌복숭을 따 와 담금주를 담아놓기고 했다. 여름 숲으로는 영지버섯을 찾아 나섰다. 코로나 감염을 피하려는 몸짓은 곡예사 줄타기처럼 아슬아슬 위기감을 느껴야했다.
사월에 온라인 개학에 이어 오월이 되어 고3부터 등교가 시작되어 1.2학년은 1주일씩 번갈아 학교로 왔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광복절 무렵 열흘 간 짧은 방학에 들었다. 장마가 오던 유월 중순 내가 교정 앞뜰 자투리와 뒤뜰 절개지 비탈에 심어둔 봉숭아는 잎줄기를 불려 꽃이 피려는 즈음이었다. 팔월 하순 2학기가 시작되자 알록달록 핀 봉숭아꽃으로 교정은 꽃 대궐을 이루었다.
2학기는 전 학년 동시 등교로 시작될 예정이었는데 광복절 광화문 집회 여파로 코로나가 재확산된 변수가 생겼다. 수능이 코앞인 고3은 매일 등교하나 다른 학년은 격주 등교를 해야 했다. 지나간 봄날에 코로나 감염 우려로 창원으로 돌아가지 않은 주말은 앵산이나 국사봉을 누비면서 채집했던 두릅은 동료들에게 나누고, 자생 곰취는 몇 끼 쌈으로 싸 반찬과 곡차 안주로 삼았다.
수능을 앞둔 가을에도 몇 차례 주말은 거제에 고립되다시피 갇혀 지냈다. 계룡산이나 가라산을 오르기고 하고 망산에도 올랐다. 한려해상 다도해 섬들이 점점이 뜬 쪽빛 바다를 구경했다. 매물도 유람선이 뜨는 저구항에서는 누룩내음이 나는 명품 곡차도 음미해 봤다. 하청면에 딸린 칠천도 수야방도를 찾아 낙조를 완상하고 이른 새벽 외포로 나가 대구 경매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수능 이후 거제는 대형 조선소로부터 코로나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 번졌다. 목욕탕과 스크린골프장으로 퍼져 인근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도 감염되었다. 구월 초 우리 학교 처녀 총각 둘이 청첩장을 돌려놓고 코로나로 두 달 미루어 십이월에 예식을 올렸다. 이후 다른 한 총각은 관내 중학교 처녀와 결혼을 앞두었는데 하필 예식 전날에 신부가 2주간 자가 격리되어 식이 취소되었다.
거제로 근무지를 바꾸고 보니 주중에는 와실에서 머문다. 몸이 성치 않은 아내가 몇 가지 챙겨준 찬으로 아침저녁 끼니는 혼자서 그럭저럭 때우고 지낸다. 내가 대충 끓여보는 찌개는 곡차 안주용이다. 좁은 외실에서는 새벽녘 잠을 깨면 노트북으로 몇 줄을 글을 남기기도 한다. 날마다 이른 아침 연사 들녘을 둘러 학교로 들어서면 동료들 가운데 언제나 내가 제일 먼저 출근했다.
학교 가서 하루 시작은 업무용 노트북으로 뉴스를 검색하고는 글쓰기다. 이십여 년 째 생활 속에 남겨가는 글은 일기를 쓰듯이 한다. 올해는 교단 생애 처음으로 원격수업과 엊그제는 재택근무까지 해봤다. 작년에 남긴 글은 ‘연초에 튼 둥지’를 표제로 정했다. 묵은해를 이틀 남겨 놓은 경자년은 372꼭지에 워드 11포인트로 599쪽에 이른다. ‘섬에서 섬으로’라는 표제어를 뽑아보았다. 20.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