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74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큰 바닷가에 임한 해미의 읍성
해미면 산수리에 있는 안흥정(安興亭)은 고려 문종 때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송나라 사신을 맞아들이고 보내던 곳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현 동쪽 11리 지점에 있다. 고려 문종 31년에 나주도 제고사 태부소경 이당감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고만도(高彎島)의 정자는 수로가 약간 막혀 있어 정박이 불편하오니, 청하건대 홍주(洪州) 관하 정해현 땅에 한 정자를 창건하여 맞이하고 보내는 장소로 삼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제서를 내려 그 말을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고,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나라 중간에 있는 목장지로서 옛날에 객관이 있었는데, 안흥정이라 일컬었다”라는 글이 실려 있다. 해미면 반양리의 구해미라는 마을은 옛날 정해현의 현청이 있었던 곳이다.
불과 몇 년 전에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사통팔달의 고장이 된 해미의 형승을 두고 정충기는 『동헌기』에서 “땅이 큰 바닷가에 임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 해미에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해미읍성이 있다. 이 성은 음식 축제로 소문난 순천의 낙안읍성과 성밟기 풍속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고창의 모양성과 더불어 옛 모습을 거의 제대로 갖춘 성이다.
해미읍성태종 14년(1413)에 병마절도사가 옮겨오면서 이곳에 성이 필요하게 되자, 성종 원년에 이 성을 착공하여 성종 22년에 성벽이 완성되었다.
해미면 한가운데에 있는 해미읍성으로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옮긴 것은 태종 14년(1413)이었다. 병마절도사가 옮겨오면서 이곳에 성이 필요하게 되자 성종 원년에 성을 착공하여 성종 22년에 성벽이 완성되었다. 그 뒤 효종 2년에 청주로 병영을 옮기면서 해미영이 설치되었다. 해미영은 충청도의 다섯 개 영 중 하나로 호서좌영이라고도 불렸다. 청주로 병마절도사영이 옮겨가기 전까지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해미읍성에 임진왜란 때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열 달 정도 근무를 했고, 숙종 때는 온양에 있던 충청도 좌영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다산 정약용이 열흘에 걸쳐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해미현의 염조포 부근에 안희산 봉수가 있어서 서산의 북산 봉수를 받았고, 면천의 창택산 봉수와 연결되었다.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다고 하여 ‘탱자나무 성’이라고도 하던 해미읍성을 두고 서거정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백마가 힘차게 세류영(細柳營)에서 우는데 중요한 땅 웅장한 번진(藩鎭)의 절도사가 장성(長城)을 이루었네. 늦가을 하늘 높이 세워진 큰 기의 그림자가 한가롭게 보이고, 진종일 투호하는 소리마저 자세히 들려온다. 아낙네의 소라 같은 쪽진 머리가 떠오르는 듯 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바다는 고래 물결로 동하지 아니하고 맑고 깨끗하다. 서녘 바람이 한없이 불어제쳐 얇은 솜옷을 펄럭이니, 먼 길손 만 리 타향의 외로운 정을 견디기 어렵다.
해미읍성을 둘러싼 가야산의 맑고 고요한 모습과 규율이 엄격한 군대의 주둔지를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은 둘레가 6,630척이고 높이가 13척인 옹성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이 성안에 행정 관청과 학교를 비롯한 민가 160여 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성 밖으로 옮겨져, 사람이 살고 있는 전남의 낙안읍성과 달리 죽은 성이 되고 말았다.
해미읍성에서 1866년인 병인양요 이후 천주교인 1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천주교인들은 해미영으로 끌려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지금도 서 있는 호야나무에 묶여 고문을 당하고 목을 매단 채 죽기도 하였는데 그때 김대건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