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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스 6:13-18
13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15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16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17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에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18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
스 6:13-18 / [완성된 성전재건] 그런 다음부터는 유브라데강 서쪽의 총독 닷드내와 그의 부관 스달보스내와 총독부의 관리들이 모두 왕의 명령을 엄수하였다. 14) 유다인들은 이제 안심하고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또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유다인들을 격려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공사가 더욱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바사 왕 고레스가 조서를 내렸으며 아닥사스다와 다리오의 조서를 좇아 성전 공사가 완성되었다. 15) 성전 공사가 끝난 날은 ㄱ) 다리오왕 6년 12월 3일이었다. (ㄱ. BC 515년 3월 중순경에 해당된다) 16) 마침내 성전재건이 완성되자, 온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포로생활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이 모두 재건된 성전을 봉헌하며 크게 기뻐하였다. 17) 그들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바친 제물은 수소 100마리, 숫양 200마리, 어린 양 400마리 외에도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제물로 숫염소 열두 마리를 바쳤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지파 수대로 바친 제물이었다. 18) 그들은 이제 성전에서 일할 사람들도 다시 세워 놓았는데, 제사장들은 제사장들끼리 반을 편성하고 레위 사람들은 그들끼리 조를 편성해서 일을 맡겼다. 이 모든 일은 모세의 율법에 규정된 대로 처리하였다.
성전 건축을 명령했던 고레스 왕의 조서가 발견되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다리오 왕의 새로운 조서가 내려지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방해가 없이 성전 건축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일을 진행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공사를 다시 시작한지 4년 만인 다리오 왕 6년에 성전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봉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전이 완공됨(13-15)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한 바사의 관리들은 총독 닷드내를 위시하여 스달보스내와 아바삭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성전 건축을 위해 다리오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으며 이것을 통해 성전 건축을 허락한 고레스 왕의 조서를 찾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새로운 조서도 내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바사의 관리들은 신속하게 왕의 조서를 준행하였습니다. 이에 유대 장로들이 다시 건축에 참여하였고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을 따라 성전 건축이 형통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드디어 다리오 왕 제 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다리오 왕 제 육년은 주전 516년이며 아달월은 유대인들의 종교력으로 한해의 마지막인 12월에 해당합니다.
성전을 봉헌함(16-18) 새 성전이 완공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을 행하였습니다. 새로운 성전의 완공은 언약 백성으로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봉헌식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중심과 개인의 마음과 생활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이 때 드려지는 제물은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 어린 양 400마리와 숫염소 12마리였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성전 봉헌식에 참여한 귀환민들은 대부분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된 옛 남 왕국 유다 백성이었지만 본래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온전한 공동체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표현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12지파의 수를 따라 속죄제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워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적용: 삶 가운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모든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렸을 때와 그렇지 못했을 때의 모습을 찾아 나눠보시고 우선순위를 잘 정하시길 바랍니다.
보화는 길거리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고 깊은 광맥을 찾아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보화도 깊은 곳에 있는데 그 깊은 곳이 바로 ‘고난’입니다. 역사의 진리와 교훈이 발견된 때도 민족이 고난을 당한 때였다. 영국의 저술가 C.S.루이스는 말했습니다. “평안할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속삭이시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보내시는 것이다. 고난은 '인간의 잠든 감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큰소리'이다.”
< 설 교 >
전을 필역케 하신 하나님
스 6:13-15 / 피영민목사
서 론
바벨론에 포로 되었던 유다백성들이 3차에 걸쳐 돌아왔습니다. 1차는 주전 538년에 지도자 스룹바벨이 성전건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2차는 주전 458년에 지도자 에스라가 율법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3차는 주전 444년에 지도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건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라 1장으로 6장은 1차 귀환한 사람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완공한 스토리입니다. 주전 538년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다백성들은 2년 뒤인 주전 536년에 성전건축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좌절되어 16년 동안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유다백성들은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16년 동안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기근과 자연재해가 임했고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조금의 진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하자 유다백성들이 새로운 용기를 얻어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었고 새로운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으로 각성되고 부흥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의 에너지는 말씀에서 나옵니다. 사상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아무 사상이 없으면 나올 아무 에너지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단의 모든 궤계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쓰시는 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받자 새로운 믿음과 태도가 일어나서 다시 성전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페르시아의 닷드내와 스달보내스 두 총독이 다시 시비를 걸고 나왔습니다. 이들이 유다백성들에게 누가 너희에게 성전건축을 허가해 주었는지 이름을 대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유다백성들은 고레스 왕이 허가를 내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고레스 왕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당시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다리오 왕에게 “유다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고레스 왕에게 허락을 받았다하니 폐하께서는 이것을 조사하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 조서를 받은 다리오 왕은 옛날 문서들이 쌓여있는 서적 곳간(archives)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1. 다리오왕의 조서
드디어 “메대도 악메다 궁”에서 한 두루마리를 얻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레스칙령으로 내용은 에스라 1장과 동일합니다. “유다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해라. 또 모든 경비는 페르시아 왕실에서 내도록해라. 그리고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성전의 기명들을 모두 그 본처로 돌려놓을 것이라”는 내용의 고레스칙령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자기보다 28년 선왕인 고레스가 정당한 절차를 걸쳐 제정하고 공포한 법을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다리오 왕의 조서를 공포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총독들은 성전건축의 역사를 막지 말라.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너희 동료 강 서편 아바삭 사람들은 성전 건축하는데 얼쩡거리지 말라. 그리고 그 성전건축에 필요한 돈은 너희들이 너희 동네에서 거둔 세금으로 경비를 충당하게 하라. 이 명령을 변개하는 자는 그 집을 거름무더기로 만들 것이니라”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근거해서 조서를 정확하게 발표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유다백성들로 하여금 나와 내 왕자들의 생명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라”고 다리오 왕이 조서를 발표한 것입니다.
에스라 5장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 6장에서는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총독도 사마리아 사람도 유다백성도 왕도 똑같았습니다. 이처럼 외적인 환경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으나 성전건축을 위한 상황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최악은 최선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여러분 삶 가운데 최악의 상황이 있으시면 최선으로 바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런 변화의 원인들
에스라 5장의 최악상황이 6장에서 최선이 된 4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 중 두 가지는 인간적인 원인이고 다른 두 가지는 영적인 원인입니다. 먼저 두 가지 인간적인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다리오왕의 품성이 좋았습니다. 백성들을 속이고 억누르고 죽이고 핍박하고 착취해서 자기 자신과 가문과 추종자만의 유익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독재자입니다. 그러나 다리오왕은 독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의롭고 자비로운 통치자였습니다. 소수민족의 신앙을 존중해주는 점잖은 통치자였습니다. 다리오왕의 조서 내용이 분명하고 단호하며 자비롭습니다. 에스라 6장 12절 후반에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찌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성격을 50%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쓴 글을 보면 더 많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리오왕의 조서를 보게 되면 그가 얼마나 분명하고 권위 있으며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겸손한 부탁까지도 아울러 주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통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통치자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좋은 성품을 가진 지도자들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그가 비록 불교신자나 유교신자, 혹은 이슬람 신자라 해도 그의 성품이 좋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품만 좋아도 교만하지 않고 하늘의 하나님께 겸손하고 소수 민족의 종교도 인정해 줍니다. 기독교의 신앙도 인정해줘서 복음의 문도 열어주고 선교의 문도 열어주게 됩니다. 통치자들은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성품만 좋아도 하나님의 교회에 간접적인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성품을 가진 지도자들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북한에도 중국에도 인도에도 미국에도 좋은 성품을 가진 지도자가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두 번째 인간적인 요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혜롭고 겸손한 것입니다.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매우 거만한 자세로 유다백성들에게 누구에게 건축허가를 받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 때에 유다백성들이 교만하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라 5장 11절로 17절에 그들이 대답한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종이라고 하는데 건방지다고 시비 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정치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정치에 아무런 해도 끼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의 일을 믿는 대로 하겠다는데 싸울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들의 후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죄인이라고 무릎꿇고 나오는데 전쟁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런데 70년이 지나자 하나님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를 보내주고 건축허가를 내주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지혜로운 대답을 하자 총독들의 분노가 사그라졌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성질을 내며 왔으나 유다백성들의 지혜롭고 겸손한 대답을 듣고 그러냐며 점잖게 돌아갔고 다리오왕의 마음도 움직인 것입니다.
잠언 15장 1절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과격한 사람들은 대화를 해도 싸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순한 대답만 해도 사람들이 분노하고 왔다가도 분노를 쉰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밖에서 화가 나는 일을 당해가지고 집에 와서 짜증을 부려도 아내가 유순하게 “여보, 김치찌개 끓여 놨으니 이것 잡수시고 화 좀 푸세요.”라고 하면 남편의 화가 풀리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집에 들어와서 짜증을 부린다고 같이 화를 내면 결국 서로 싸움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격한 말을 하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공식적인 회의를 할 때도 과격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데 목소리만 크게 말하면 사람들이 상종을 안합니다. 그러나 조용하게 말해도 논리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말하면 사람들이 굴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하나님 백성들처럼 언제나 조리 있고 유순한 대답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최악의 상황이 최선으로 바뀌게 된 인간적인 원인 두 가지는 다리오왕의 좋은 성품과 하나님 백성들의 지혜롭고 겸손한 대답이었습니다.
두 가지 영적인 원인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잠언 21장 1절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리오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왕이 조사하도록 마음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고레스왕의 칙령도 찾아내게 한 것입니다. 에스라 6장 2절에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칙령이 있는 것을 알게 하셔서 찾아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던 것입니다.
선교지의 교회가 때로 불신자 정치가들의 손에 생명이 걸리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공산권 국가에서는 이러한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그 곳 정치가들의 마음이 조금 변하면 교회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하나님의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불신자일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면 교회는 보호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지역에도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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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성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말씀을 성실하게 증거했습니다. 그 말씀은 다리오왕이 들은 것도 총독들이 들은 것도 아니라 유다백성들이 들은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크리스천들은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큰소리치는데 그렇다고 무슨 사회가 변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밝으면 저절로 밝아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소금으로서 맛을 잃지 아니하면 세상은 부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어두워지고 소금이 맛을 잃으면 이 세상은 저절로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 세상이 어두운 이유를 세상 사람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라며 비판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어둡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싸우면 세상이 싸웁니다. 교회가 어두우면 세상이 어둡습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요나 한 사람이 불순종하면 배가 풍랑을 맞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밝아야 됩니다. 우리 한국 사회에 어두움이 있다면 그것은 불신자의 책임이 아니라 신자가 빛을 환하게 비취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심지어는 목사님이라고 해도 어두운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먼저 밝아져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고 말씀을 사랑해서 우리 영혼이 밝아지고 우리 안에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면 세상은 저절로 밝아지고 정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3. 변화의 결과는 성전의 필역
이렇게 변화가 일어나자 5년 만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에스라 6장 15절에 “다리오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다리오왕은 주전 521년에 즉위했으므로 다리오왕 육년은 주전 515년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필역하고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열왕기상 8장 5절에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어마어마하게 큰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거행할 때 양과 소가 몇 마리인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스룹바벨 성전 봉헌식 때는 제물로 드린 짐승의 숫자가 정확히 나올 정도로 성전도 봉헌식도 초라했습니다. 에스라 6장 17절에 “하나님의 전 봉헌식을 행할 때에 수소 일백과 수양 이백과 어린 양 사백을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수염소 열 둘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17절 후반의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수염소 열둘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를 주목해서봐야 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지파는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인데 이 두 지파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대표해서 수염소 열 둘을 놓고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5만 명에 가까운 그들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의 대표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신앙을 가진 남은자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열 지파는 불신앙으로 떨어져버렸고, 두 지파 가운데서도 98%는 바벨론에 남아있고 2%만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바로 신앙의 남은자입니다. 19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10장 21절에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남은자는 돌아오리라(The Remnant will come back)”는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세상이 아무리 악이 득세하고 악한 자들이 횡행하고 거짓이 이기는 것 같아도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다수가 넓은 길로 가더라도 우리는 좁은 길로 가야됩니다. 좁은 길, 좁은 문이 영생 길이요 생명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로 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는 자만이 남은자가 되는 것입니다.
580년 후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고 잃어버린 양들을 찾도록 하셨습니다. 구약의 열둘은 “남은자(The Remnant)”의 상징이고, 신약의 열둘은 “택함 받은자(The Elect)”의 상징입니다.이들이 합하여 참 이스라엘(true Israel) 즉, 영생을 얻을 교회를 이룹니다. 영원히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남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며 삽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멸망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수라 할지라도 예수를 진실로 믿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확실히 믿는 사람은 남은자가 되어 영생을 소유하고 영원한 승리자가 될 줄로 믿으십시오. 불신자들이 아무리 잘되어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시잠깐 누리다가 없어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남은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에스라 6장에 남은자의 행한 두 가지가 나옵니다. 21절에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무릇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다 먹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남은자는 먼저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렸습니다.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사상적으로 더러운 것과 스스로 분리시켰다는 것입니다. 점을 치러 다니고 사주팔자를 보는 것은 영적인 더러움입니다. 예수 믿는 남은자는 영적 윤리적 사상적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해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였습니다(They sought the Lord). 이번 여름산상부흥성회의 주제가 “여호와를 찾으라(사 55:6)” 였습니다. 시편 105편 3절에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오는 것입니다. 세상환경은 하나도 즐거울 것이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면 즐거움이 옵니다. 여러분 마음에 즐거울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분들은 여호와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역대하 16장 9절 전반에도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찾으면 즐거움(joy)과 능력(power)이 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이 에스라 6장 22절에 이루어졌습니다. “즐거우므로 칠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의 중요한 단어가 하나는 즐거움이고 또 하나는 힘 즉, 능력(能力)입니다. 유다백성들에게 즐거움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더러움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더니 즐거움과 능력이 와서 결국은 일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 론
진실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남은자가 가져야 할 세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눈은 “남은자”를 향해있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의 축복의 눈은 남은자인 나를 향하고 있어 세상이 연합되어 나를 죽이려 해도 나는 죽지 않고 죽어도 다시 산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둘째, 남은자는 스스로 격려하여 용기를 내야 하나님의 축복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 핍박도 있고 반대도 있고 좌절도 있습니다.그런데 이런 것들이 와도 주저앉아있지 말아야 됩니다. 그리고 성전을 세워야 됩니다. 일어나서 돌 하나라도 갖다놓아야 됩니다.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주저앉아있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서 일을 해야 됩니다. 할 일이 없으면 등산이라도 하고 교회에 와서 작은 봉사라도 해야 됩니다. 설거지라도 청소라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저앉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서 무슨 일이라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남은자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내가 가서 손으로 일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내 발이가면 하나님의 복이 거기 임하며 내게 복이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남은자가 된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셋째, 남은자는 세상과 분리하여 여호와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은자는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고 여호와를 찾아야 됩니다. 그러면 즐거움과 능력이 우리와 항상 함께 따라서 우리는 복있는 사람으로 살다가 복 있는 곳에 돌아갈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남은자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형통한지라
스 6:13-18 / 고신일목사
할렐루야 !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주일 교회 리모델링과 증축을 위한 기공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 가지 절차에 따라 공사가 진행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공사를 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모두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크게 관심가지고 많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운 코로나19 가운데서도 대부분의 지교회들이 평안하고
우리가 협력하고 있는 교회들이 평안합니다.
선교사들도 특별한 연락이 없어 마음이 놓입니다.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도 승리해야 합니다.
옆의 분과 “승리하세요.”라고 인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니 조서가 내려졌습니다.
‘조서’는 임금의 명령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적은 문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지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레스 왕이 성전 재건을 허락했지만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연합과 회복을 원치 않았던 주변 민족들이 공사를 방해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합니다.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주변 국가에서 우리나라가 통일되기를 원할까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것이 우리들만의 소원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남북이 하나 되어 힘 있는 나라, 안정된 나라, 큰 나라가 되기를 원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되는 것,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주변 민족들이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사를 방해했습니다.
에스라 4장 4~5절 봅니다.
“이 말을 들은 그 땅 백성은 성전 짓는 일을 방해하여, 유다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들은 고문관들을 매수하면서까지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방해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다스리던 모든 기간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가 통치하던 때까지 이어졌다. <스 4:4~5, 새번역>
고문관들, 관리들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성전건축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들 앞에서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스라 4장 23~24절 봅니다.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유다 사람들이 일을 하지 못하게 무력을 써서 막았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공사는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이년에 이르기까지 중단되었다. <스 4:23~24, 새번역>
시간이 흘러 새 왕이 즉위했지만 성전 건축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때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공사 재개를 예언했고 (스 5:1) 예언대로 새로운 왕 다리오<Darius>는 이스라엘이 성전을 건축할 것을 다시 명했습니다. (스 6:12) 그 후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스 6:14)
학개와 스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유다 장로들은 선지자들의 권면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성전 건축이 “형통”했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사를 다시 시작한 지 4년이 지날 무렵 성전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스 6:15)
우리 기둥교회는 47년 가까이 모여 예배드리던 부천역 앞 복잡한 상가로 둘러싸인 땅을 뒤로하고, 2018년 11월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 금년이 창립50주년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 처소를 옮기기 전에 여러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부흥관을 건축하여 교육공간이 좁지 않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와 코로나 19로 인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예배 <온라인 예배>에 적응해야 했고 저와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공간에 대한 개념이 바뀌게 되었고 장로님들도 같은 생각으로 정리 되었습니다.
수천 명이 들어가는 대형 예배실이 아니라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공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예배실 <비전성전>을 리모델링 하고 교육 공간 일부를 증축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지난주일 <리모델링과 증축>을 위한 기공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펜스가 설치되고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서 주차장이 좁아졌고, 앞으로 예배드릴 공간도 넉넉지 않아 이리 저리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들 모두는‘많이 참아야’하고 ‘잘 견뎌야’합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어려움이 없도록 노력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짜증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참고, 잘 견뎌야” 합니다. 여러분 잘 참고, 잘 견뎌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리모델링과 증축이 진행되는 동안 투덜대고 불평하면 만원씩 건축헌금을 하면 어떨까요?
예루살렘 성전건축이 멈추어 졌을 때 민족의 어른, 장로들을 중심으로 하나 되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형통가운데 성전건축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기둥교회 성전 리모델링과 증축도 잘 마무리 되려면 불편함이 있더라도 …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 교회가 하는 일을 신뢰해 주셔야 합니다.
담임목사의 권면을 따라 주셔야 합니다. 장로님들이 중심되어 하나 되어야 합니다.
기둥교회는 이미 신뢰 중에 하나 되어 담임목사의 권면을 잘 따르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리모델링과 증축> 하는 모든 과정이 형통할 것입니다.
잘 될 것입니다. 순조롭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성전 리모델링과 증축을 하면서 세 가지를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1. 이렇게 동참하겠습니다. ‣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살전 5:17)
기도의 힘 아시지요? 기도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습니다. (살전 5:17)
가정을 위해, 일터를 위해, 앞날을 위해서도 힘써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할 때 마다 성전 건축의 모든 과정이 ‘형통하도록’/ 잘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이렇게 동참하겠습니다. ‣‣ 힘써 드리겠습니다. (눅 8:3)
고레스 왕이 성전을 짓도록 조서를 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으로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스 1:6)
고레스 왕도 성전 건축을 허락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창고지기에게 명하여, 전에 예루살렘에서 가져왔던 금 접시와 은 접시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 … 등을 수백 개에서 수 천 개씩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스 1:7~11)
성전건축을 위해 쓰라고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성전을 세우기 위해 물질이 필요합니다. 아니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 6:21)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보물 있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성전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만큼 우리도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 기둥교회 성도들 가운데 넉넉한 분도 있지만 어려운 분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벽돌 한 장, 유리창 하나, 의자 하나, 책상 … 등
교회에서 사용할 작은 비품 하나라도 내가 마련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전에 성전을 건축할 때 IMF 전에 건축을 시작해서 IMF가 터지고 나서 건축을 마무리했습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때에 건축이 끝나서 빚도 많았고,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때 우리 기둥교회 성도들이 눈물로 기도했고 물질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고 빚을 마무리 했습니다. 그 많은 분들 중에 한 분을 소개합니다.
이봉연 권사님 아버지이시고, 구종순 권사님 남편이신 故 이기만 권사님입니다. 권사님은 폐지와 고물을 주우러 다니셨습니다. 자식도 있고 힘든 일인데 그만 다니시라고 했더니 교회 건축하는데 벽돌 한 장 값이라도 보태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면서 어느 날 봉투를 가져오셨습니다.
故 이기만 권사님 뿐 아니라 기둥교회 많은 성도들이 정성스런 마음을 모아주셨고 그렇게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기둥교회가 된 것입니다.
3. 이렇게 동참하겠습니다. ‣‣‣ 즐거이 헌신하겠습니다. (시 110:3)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예배 공간은 줄지만 교회와 예배를 위한 여러분의 헌신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 찬양대원이십니까? 마스크 벗고, 새 성전에서 마음껏 찬양할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십시오.
가운 하나라도 챙겨 보관하며 준비하십시오.
- 교사이십니까? 아이들/학생들과 계속 온라인으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맡은 아이들, 학생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 속회, 선교회 인도자이고 회장이십니까? 교회를 위해 기도하자고 권하십시오.
가능하다면 시간을 정해하는 기도 모임도 만드십시오.
(모이지 못해도 시간을 정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릴레이로 기도하고,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기회/기도하는 시간을 만드는 섬김이 필요합니다.
- 안내 위원이십니까? 새신자 영접위원이십니까?
‘내가 서던 자리가 없어질 텐데 좀 쉬어야지.’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배 공간이 좁아지면, 주차공간이 좁아지니까 더 환한 얼굴로 더 친절하게 더 열심히 섬겨야 합니다.
흩어져 예배드리게 될테니, 더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필요한 모습으로 할 수 있는 일로 성전 건축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성전건축을 끝내고 봉헌식을 행했습니다.
본문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 (스 6:18)
‘분반대로’라는 말은 ‘갈래별’로, ‘순차대로’는 ‘무리별로’라는 뜻입니다.
성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제사 드릴 수 없었습니다.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완성되고 제사 드리면서 제사장은 제사장대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레위 사람은 레위 사람대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자리를 찾아 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전을 이전하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코로나 때문에, 지금은 공사 때문에 …
우리 신앙생활에 / 봉사하는 일에 자리를 잃어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성전이 지어지면 우리의 자리를 되찾을 것입니다.
예배, 찬양, 봉사, 전도도 … 크고 작은 여러 모임들도 …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제 자리에서 일하고 쓰임새와 목적대로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전이 세워지는 모든 과정이 ‘형통하기를’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형통하도록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전이 세워지는 만큼 우리의 가정도, 일터도 형통하고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으로부터 일상이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날을 기대하며, 봉헌할 날을 기대하며 봉헌한 뒤에 마음껏 찬양하고, 마음껏 섬기고 마음껏 일할 그 날을 기다리며 …
힘써 … 최선을 다해 … 하나님의 성전을 새롭게 하는 일에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기를 권합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우리가 봐야 합니다.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마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감사하는 자리의 주인공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