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같은 밤. 불켜진 방 하나
책상에서 한 소녀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머리는 묶었는데 약간 흘러내린 머리칼이 여간 매력적인게 아니다. 마지막 문제까지 다 푼 듯 책을 덮고 기지개를 펴면서 머리를 푼 뒤 흔든다. 치렁치렁한 머리는 어깨 약간 밑까지 내려왔다. 다시 묶고 시계를 본다. 새벽 1시 7분. ‘밤이 늦었네’ 방을 나간다.
고장난 가로등이 다시 깜빡 꺼졌다. 합선된 탓인 듯 잠시의 정적을 깨고 다시 가로등이 깜빡 켜진다. 볼을 옆에 끼고 땀에 젖은 몸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다시 깜빡 어둠... 여태 몹시 뛰었던 듯 거친 호흡을 몰아쉰다. 어깨가 들썩인다. 깜빡. 다시 가로등이 켜짐과 동시에 드리블 돌진한다.
소녀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천체 망원경으로 별자리를 살피고 있었다. ‘오늘은 참 하늘이 맑네’ 소녀는 카시오페아를 찾았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별자기가 바로 카시오페아다. 별 다섯이 망원경의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차례로 빛이 났다. 환해지는 소녀의 얼굴.
“안녕...잘 자 카시오페아”
돌아서려던 순간 아래서 뭐가 번쩍 밝아진다. 자연스런 시선 속에 뭔가 움직이는게 보인다. ‘거긴 공원인데 이 시간에 뭘까?’
움직임을 찾아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는데 깜빡 다시 꺼져버리고 만다. 은은한 달빛을 쫓아 더욱 초점을 맞춘다. ‘사람인 것 같은데...’
그때 다시 불이 들어온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는 소년. 골대를 향해 난다. 그렇다. 난다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소녀의 눈과 입은 번쩍 커지고 시간이 정지한 듯 느껴진다. 그대로 슬램덩크. 골대를 한번 흔들고 내려오는 그의 얼굴에 소녀는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었다. 헝클어진 머리, 폭발할 듯 강렬한 눈빛, 표정없는 얼굴. 여학생은 얼굴이 붉어지며 다시 집중해서 그의 모습을 망원경에 담는다.
소년, 가상의 상대를 상대로 드리블을 펼친다. 오른쪽, 왼쪽, 갈 듯 갈 듯 하다 오른쪽으로 한번 튀기고 왼쪽으로 턴드리블 해 들어가 링을 향해 격렬히 뛰어오른다. 180도 리버스 오른손 한손으로 링을 깨부수듯 통렬한 덩크를 먹인다.
타다다닥...
열심히 뛰는 발걸음이 바쁘다. 소녀는 시계를 힐끗 쳐다보고 더 빨리 뛴다.
‘지하철 늦으면 안되는데...’
7시 25분. 지금 타지 않으면 엄청 밀린다. 그래도 여기는 기점에서 멀지 않은 터라 약간의 여유는 있다. 막 플랫홈에 들어섰는데 소녀의 눈이 번쩍 트였다. 덩크보이 그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체로. 슬그머니 뒷걸음쳐 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밤에 본 느낌과 같았다.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에 무언가 한 맺힌듯한 고독한 눈빛.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 치면서 뜨거운게 올라왔다. ‘눈치채면 어쩌나... 나만 봤을 뿐인데.. 모르겠지, 모를꺼야..’
띠이잉... 전철이 왔다. 소녀는 의도적으로 같은 칸에 탔다. 비교적 한가했다. 그가 자리를 잡고 섰다. 소녀는 같은 쪽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떨어져 섰다.
크고 아름다운 집이었다. 마당엔 고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중년 부인과 한 소년이 나온다. 소년의 키는 무척이나 크다. 그런데 생김새는 틀림없는 황인종인데 머리칼은 금발이다. 두 사람이 타자 자가용은 부드럽게 출발하기 시작한다.
“한국이 어떤 것 같니?”
“좋은데요.”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니?”
“조금요”
어머니에게는 웃어 보이지만 차가운 듯한 인상이 느껴진다. 별 느낌 없는 시선으로 창 밖을 쳐다본다.
띠이잉~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한다. 언제나 처럼 끼고 또 끼는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소녀는 계속 밀리고 밀려갔다. 버티려고 안간힘을 써도 남자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오늘은 왠지 더 밀리는 것 같네’ 소녀가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 순간, 갑자기 짓누르던 힘들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왠일인가 놀라 돌아보는 순간 아연해졌다.
그였다. 덩크보이가 넓은 어깨로 사람들을 막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홱 돌아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돌아다보면 빨개진 얼굴을 보일 것 같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는 지금 이대로로 만족하세요?”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생각 많이 했나 보구나. 하지만 그 얘긴 다음에 하기로 하자”
소년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아직은 뭐가 옳은진 모르겠다. 난 어리다. 하지만 결코 후회할 행동은 하지 않겠다’
오늘 등교길은 유난히 긴 것 같다. 그대로 꿈쩍않고 있다보니 땀이 송글송글 맺혀왔다.
띠이~잉
드디어 도착이다. 그가 서서히 움직여 갔다. 소녀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갔다.
‘필시 날 알아볼거야. 어떡하지?’
어느새 둘은 교문을 통과했다. 얼핏 그의 2학년 뺏지가 보였다. ‘어떻게 우리 학교 학생을 1년이 넘게 모를 수가 있었지? 저렇게 잘 생겼는데’
양쪽 잔디밭이 펼쳐진 가운데 학교 건물까지 쭉 길이 이어져 있었다.
덩크맨은 갑자기 옆에 있던 게시판에서 멈추었다. 자신도 모르게 머무른 시선.
‘38회 춘계 전국 고교농구 연맹전’ 포스터였다.
한해에 전국대회로선 가장 큰 3대 빅 게임에 속하는 규모가 큰 대회이다. 그리고 옆에는 지역예선 대진표. 전국 본선대회 일정표 등이 붙어져 있었다.
유림고가 속해있는 조는 16개 팀이 속해있는 강북 ‘나’조로서 A, B조 각 8개 팀씩 리그전으로 7게임을 치르게 된다. AB조 각 1위만 전국대회 본선 티켓을 딸 수 있다. 그리고 지역의 자존심 싸움을 그 두팀이 마지막으로 벌이게 된다. 서울에서만 8팀이 본선 티켓을 딸 수 있고 전국적으로 32개팀이 본선에서 맞붙게 된다. 그런데 유림고는 지역예선에서 중간쯤 가는 학교로서 전국대회와는 한 번도 관계가 없는 거리가 먼 팀이었다.
학교 육성차원이 아닌 클럽활동 수준으로 감독, 코치도 없고 농구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만든 팀으로 지역 중간 수준이면 그게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교실의 창문을 통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야. 뭘 보고 있니?”
“으..응”
뭘하다 들킨 듯이 놀라는 소녀. 미소. 바로 그녀의 이름이었다.
“아니야, 유정아”
“별일이네. 학교오기 바쁘게 책만 펴던 네가 왠일이니? 바람났니?”
“아니...전철에서 너무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고”
유정이는 그렇게 공부는 잘하지 못하지만 붙임성이 좋고 특히 마음씨가 좋은 친구다. 그래서 공부할 때 미소도 유정이가 말을 걸때면 항상 받아주곤 했다.
그가 뚫어질 듯 바라보던 게시판 앞에서 갑자기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마치 모든 생각들을 떨쳐버리겠다는 듯이.
그리고 묵묵히 현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과연 그는 뭘 생각했던 것일까?
“유정아, 잠깐.. 쟤 누군지 아니?”
“누구?”
“저기 걸어오는 키큰 애!”
“아! 저 애. 하지훈이라고 10반에 전학온 앤데 잘생기긴 했는데 너무 말이 없데”
“그런데 왜 묻니? 관심 있어서?”
“아니, 그냥”
“쟤 인기 절정이다. 꿈도 꾸지 마라”
“이렇게 이쁜 내가 유혹해도 안될까?”
유정이를 간지름 피며 애교있게 말하자 유정인 꺄르륵 거린다.
“하지마”
‘하지훈’이라고.... 미소는 큰 선물을 받은 듯 가슴에 좋은 느낌이 번져가는 걸 느꼈다. ‘오늘이 3월 28일이니 역시 온지 얼마되지 않았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고급승용차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현관까지 와서는 한 소년과 중년여인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게 뭐야... 그 애 머리가 금발인 것이다. 살짝 물들인 것도 아니고 완전 금발. 교복을 입은 걸로 봐서는 전학하러 왔나?!
생각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현관으로 들어서 보이질 않았다. 살짝이긴 했지만 강렬한 눈빛이 인상에 남았다.
“안녕하십니까?” 교장실엔 나이든 중년신사가 책상에서 일어나 반긴다.
“예, 안녕하십니까? ... 말씀하신 아드님이신가 보죠”
“예, 그렇습니다. 성진아 인사드려라”
“안녕하세요” 흘러가는 투로 내뱉고 만다.
“미국에서 살다와서 버릇이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교장선생님”
“뭐, 애들이 다 그렇죠, 저희 학교는.....”
성진은 둘의 대화는 관심없는 듯 창밖을 내다본다. 오고가는 얘들의 활발한 분위기가 썩 맘에 든다.
‘여기 생활은 잘해야 될텐데’
어머니와 교장선생님의 대화는 관심도 없다. 뭐 잘 따를테니 돈이나 많아내라는 소리겠지. 뻔한 소리였다. 성진의 어머니는 국내 굴지의 중소기업 회사 사장이었다. 대화가 끝나고 교장선생님은 한 여 선생을 불러왔다.
“성진군! 앞으로 네 담임 선생을 맡게되신 강 미 영 선생님이시다. 잘 생활하도록 해라”
“안녕, 네 얘기 들었다. 잘 지내보자”
강 선생과 어머니 사이에도 인사가 오간 후 성진은 강 선생을 따라 반으로 들어갔다.
2학년 3반. 자율학습 중이던 애들의 눈이 일제히 성진에게 쏠렸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지낼 새로운 친구애요. 미국에서 왔어요. 키가 무척 크죠?
성진아, 네 소개를 하렴“
“안녕하세요? 김 성 진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여기서 살았구요, 미국으로 가서 쭉 살다가 이번에 오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저기서 질문이 빗발쳤다.
“예, 좀 크죠.. 192cm입니다. 아 농구요? 좀 합니다. 아주 좋아하구요, 이 학교에도 농구부 있습니까? 있으면 들어갈렵니다. 여자친구요? 아직 온지 얼마 안되서 없습니다.
머리요? 원래 금발입니다. 가 아니고 맞아요, 염색했어요. 좀 튈려구요. 선생님들이 뭐라 않느냐구요? 밑에서 올려다보니까 잘 안보이나 봐요.“
학생들의 시끄러운 웃음속에서 1교시 시작종이 치고 일과는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같은 반 농구부원인 일재가 주장에게 이야기해서 정상수업후 입단 테스트가 있기로 했다. 벌써 소문이 쫙 퍼져서 3반 노란머리가 농구를 잘 할거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하여튼 수업 끝난 뒤 강당이 시끌벅적할 터였다.
어느 새 수업이 다 끝나고 하얀 건물 안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훈은 먼저 나와 운동장 스탠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북문 현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며 한 무리의 애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 중 가운데 둘러싸인 노란머리, 지훈은 벌써 노란머리의 소문을 들었었다. 노란머리가 키가 커서 그런지 쉽게 눈에 띄었다. 무심결에 쳐다봤는데 노란 머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것이었다. 살아 있는 눈. 무언가를 이룰려고 강하게 열망하는 눈. 자신과 같은 눈이 하나 더 있었다.
지훈은 획 눈길을 돌렸다.
‘저 눈은 광명 속에 있어야 하고 난 어둠 속에 있어야 한다’
텅빈 스탠드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운동장 농구코트는 벌써 나온 아이들이 편을 가르고 있었다. 미소는 창문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애의 가슴은 뭔가의 응어리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큰 고민거리를 가지고 말야. 뭔가 도와줘야 할텐데... 내가 도와줄 무슨 일이 없을까’
“패스, 패스!!”
패스를 요구한 한 학생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점프 슛을 쏘았다. 깨끗한 골인.
애들은 즐겁게 웃고 떠들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지훈은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슛날린 그 녀석이 가로채기를 해서 곧바로 드리블 해 갔다.
수비와 일대일.
런닝슛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유투 자리보다 조금 앞 오른쪽 45° 자리에서 깨끗한 폼으로 슛을 날린다. 지훈의 눈이 반짝 빛났다.
빙그르르 돌면서 박혀가는 공. 그 공과 함께 지훈은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갔다.
그 공이 낙하하면서 쉬익 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58-56 ‘이것으로 2점차’
가로채기에 이은 슛으로 산호중의 사기는 오를대로 올랐다. ‘여기가 승부처다’ 남은 시간은 6분 12초 였다.
추계중학농구 연맹전 결승. 남은 시간은 겨우 6분 12초였다.
이 게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이제 그 모든걸 불태울 시간도 6분 12초 밖에 남지 않았다. ‘이기자, 이겨야 한다’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자세를 낮춰갔다. 광주 산호중으로 처음의 결승전이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팀이었지만 강호들을 속속 격파하고 올라오자 이변이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영운을 만들었다.
하지훈. 3년생. 178cm 파워포워드로 뛰며 겨우 178cm의 키로 매 게임 덩크를 터뜨리는 엄청난 점프력의 소유자.
꽁지머리를 하고 항상 웃으며 플레이를 하는 하지훈. 결국 결승까지 왔다. 이에 맞서는 유호원의 부산 동아중.
중학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 유호원. 고교에서 주목하는 중학 최고의 대어였다. 동아중이 여기까지 온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까지 근소한 리드를 펼치던 동아중. 마지막 6분을 놓고 승리를 지키기 위해 계속 몰아 붙였다.
“진혁아! 뚫리면 안돼”. 지훈이 부르짖었다.
수비는 맨두맨이었다. 승리를 위해선 그것밖에 없었다. 지훈과 호원 서로를 마크했다. 패스가 호원에게 갔다. 지훈이 양팔을 더 벌리고 자세를 낮췄다. 느낌을 믿어야 한다. 뚫리면 끝이다.
동아중 선수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이건 완전 호원과 지훈의 일대일을 유도한 것이다. 벤치에서 지시한 것이고 동아중 선수들도 호원이 이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까진 서로 용호상박이었다. ‘내가 이깟 녀석에게 당할까’ 호원이 왼쪽으로 뚫어왔다.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지훈은 간발의 차로 옆을 뚫리고 말았다. 그대로 돌진해서 점프. 지훈이 같이 뛰어올랐으나 막진 못했다. 지훈을 의식하느라 덩크를 꽂진 못했지만 그래도 덩크에 가까운 슛. 도원은 키가 190cm 였다. 같이 뛰어오르면 키 큰 쪽이 유리한 법이다. 그것도 10cm가 넘을 경우에는. 60-56. 다시 4점차.
첫댓글 하지훈선수 첨에 프로필은 182인데 나중엔 178이됐네요 ; 6풋-> 5풋 10인치 아이버슨인감?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