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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 정희성
- 이진명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래처럼
외로운지를 알았다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망가지는 것들이 한때는
새것이었음을
하지만 나에게 무슨 영광이 있었던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나
사람들은 내가 한쪽 눈으로만 본다고
그래서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고
세상은 그렇게 일목요연한 게 아니라고
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일 거라고
결코 상상해서는 안된다고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이념을 내려놓으라고
그런데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버릴 수 없는 꿈이 있기에
나는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알면서도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더 외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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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희성을 만나다
시절은 하수상하여, '선비'라는 단어가 척결돼야 할 구시대의
낡은 유물로 취급받고 있다. 하지만 선비들이 지녔던 덕목
모두를 버리고 우리는 어떤 새로운 시대로 갈 수 있을까?
옛 것은 모두 불온할 뿐인가?
시인 정희성.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선비"라고, "금도(襟度)를 아는 사람"이라고. '결곡'과
'염결(廉潔)'이야말로 선비의 기본. 이 두 단어를 자양분 삼아
70년대 '젊은 정희성'은 이런 시를 썼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일이 끝나 저물어
/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통성 하나 없는 군부가 통치하던 야만의 시대.
정희성의 선비정신은 '분노'와 '저항'에 닿아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어젯밤 술친구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 가고, 열 여섯 어린 여공원이
사장의 하룻밤 술값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위해, 사흘 건너 하루씩은
잔업과 철야로 이어지는 죽음같은 긴긴 노동을 견뎌야했던 시절.
바로 그때 정희성은 '음풍농월' 대신 '광야에서의 함성'을 택한다.
평론가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민중지향적 서정성'이란 바로 그 당시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이곳에 살기 위하여' '아버님 말씀'
등의 시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까?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향한
구호만으로 그치지 않고, 시로서의 품격 또한 지켜낸 작품들.
세월은 흘러 2001년이 됐다. 시력 30년에 이른 '중진 정희성'이
말한다. "축적된 모든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진 않았다.
하지만 가파른 시대엔 거기에 걸맞은 목소리가 있었듯, 지금의
상황을 노래할 다른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목청만 높아서야 호소력이 생기겠는가."
자신과 자신의 시를 바쳐 냉혹한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온 작가의
진술이 가지는 진정성은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다칠세라
몸 숨기며 살아온 소시민의 그것과는 다를 터.
정희성의 30년 고민은 이런 시로 나타난다. 2001년 만해문학상
수상작 <시를 찾아서>에 수록된 '봄소식'이다.
이제 내 시에 쓰인/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 시대상황을
연상치 마라/ 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 아아,
수런대는 소리
'분노와 증오의 시학'에서 '사랑의 시학'으로 옮겨오기까지, 시를 통해
대중을 일깨우는 '선각자'에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와 "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고, 보고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이라고
고백하는 '겸손함'에 이르기까지. 그 지난하고, 복잡다단한 과정에
대해, 정희성의 삶과 문학에 관해 물었다.
시인을 꿈꾼 이유? "여학생들에게 멋있게..."
- 유년시절엔 어떤 아이였는지.
"아버지가 기술직 공무원이었고, 전출이 잦았어. 중학교 입학 때까지
대전과 전북 이리, 전남 여수와 서울 등지로 자주 옮겨다녔지.
전쟁 이후의 호전적인 분위기때문인지 국군과 빨갱이로 편을 갈라
총싸움 놀이도 자주 했고, 도둑 영화구경도 많이 했어.
신파극 <며느리 설움>과 우스꽝스런 변사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선해. 백일장에 나가기도 했지만 상을 받거나 하진 못했고,
오히려 그림을 잘 그렸어. 다섯 자식들에게 보리밥도 양껏 먹이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어머니의 모습도 떠오르네."
- 문학과 관련된 기억도 있을텐데.
"<새벗>이나 <명랑> 따위의 잡지 외에는 읽으려고 해도 읽을 책이
없던 시절이었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책읽기 좋아하는 장남을
위해 아버지(정헌규, 79년 타계)가 서점 하나를 정해주더군.
내가 보고싶은 건 다 보라는 거야. 책값은 월말에 한꺼번에 계산해
준다고. 아버지의 그 배려가 나를 문인으로 만든 건지도 모르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신곡> 등을 열심히 읽었어.
'읽는 게 이렇게 재밌는데 쓰면 얼마나 재밌을까'라는 생각도
그때 했지. 도스토예프스키를 흉내내서 습작소설도 쓰고 그랬어."
- 64학번이다. 어지러운 시대에 대학을 다녔는데.
"6.3세대라고 그러지. 굴욕적 한일외교 정상화 반대시위가 있었던
해잖아. 주동까지는 아니지만 시위에는 참여했어. 잡혀서 경찰버스에
실려 안양 어디쯤인가로 갔는데 거기서 강제로 하차시키더니
차는 떠나버리더군. 안내양에게 아무리 사정해도 공짜 버스는
태워주지 않아서 영등포까지 걸어왔는데, 경찰관을 하던 외삼촌이
엄마 걱정시키는 불효자라며 호되게 야단을 치더군."
- 왜 시인이 되고 싶었는지.
"용산고를 다녔어. 해마다 문예반이 <청맥 문학발표회>라는 걸 하는데
여자친구들 불러서 구경도 시키고, 폼잡는 게 멋있어 보이더라고.
그래서 적을 두고 있던 서예반 활동은 뒤로 하고 교지에 시와 소설
따위를 썼지. 문학으로 상을 받은 최초의 경험은 대학 3학년 때야.
<서울대문학상>이었고, 당선작은 '탁목조(啄木鳥)'였지."
- 등단은 언제인가?
"70년 동아일보야. <변신>이라는 시로 나왔지. 그걸 68년도에도
동아일보에 보냈는데 낙선한 거야. 그해 당선자는 마종하(시인)였어.
오기가 생겼어. 제대할 무렵에 대폭 개작해서 다시 응모했는데
당선됐더군. 68년 심사평이 '옥석이 섞여 있는 시'였어. 옥은 남기고
돌을 골라낸 게 적중했지 (웃음)."
"태작(馱作)으로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겠다"
- 고등학교(숭문고) 국어교사로도 30년을 살았는데.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잖아. 그래서 학교에서 나오면 말을
아꼈던 것 같아. 70~80년대엔 사회현실을 직접 말하기가 어려워
그 시대를 일제시대에 비유해 학생들에게 설명하곤 했지. 그래도
알아듣는 영민한 아이들이 많아서 나 스스로도 감동하고 그랬지.
요새는 그런 아이가 드물어. 좋아진 시절 탓만은 아닐텐데..."
-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는?
"시 쓰는 고운기야. 고등학교 때 직접 시집을 만들어 나에게 보여줄
정도로 조숙했지. 요즘도 가끔 '건강하시냐'고 안부를 물어오지.
'역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는 김범이란 제자도 아주 영특하고,
예의 바른 친구였지."
- 설화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답청>(74년)에서 현실과 인간의
세계를 노래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78년)로 방향전환한 이유는?
"내가 고전문학 전공이야. '우리 문학의 전통을 먼저 알고 시를 쓰자'
라는 생각에서 였지. 고문 전공자가 <삼국유사>와 '향가'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잖아. 그 영향권 아래에서 나온 게 <답청>이야.
당대현실에 설화적 요소를 담으려고 노력했어. 반면에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파산한 아버지 대신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장남으로서의 현실을 접하면서 만들어진 거야. 엄혹한 시대와 함께
내게 닥친 개인적 불행을 보며 신문에 실리지 못하는 약자들의
현실을 노래하고 싶은 열망이 생긴 거지."
- 청춘의 대부분을 군사독재 아래서 살았는데.
"농촌은 붕괴되고, 도시는 기이한 구조로 팽창하던 시대였지.
부모는 '저곡가 정책'에 자식들은 '저임금 정책'에 혹사당하던.
문학으로 시대를 증언하고,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게
한다는 시인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했나를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해.
참으로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세계 시인대회>에
말 그대로 '쳐들어'가, 김지하를 석방하라고 외치다가 연행도 됐고,
그 때문에 해직의 위험도 겪고 그랬지."
- 등단 31년에 시집 4권만을 낼 정도로 과작(寡作)인데 이유가
있는지.
"재주가 없어서 그래 (웃음).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 활자화되면
못 견디겠어. 지나친 결벽증이지 뭐. 하지만 시인은 독자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고, 태작으로 독자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
- 김지하, 신경림, 조태일 등과 '70년대 민중시인'이라 규정하는데.
"내가 보기에 완벽한 민중시인이란 <노동의 새벽>을 쓰던 시절의
박노해 정도라고 생각해. 우리야 그저 그 이전에 민중지향적
지식인 문화를 만들어낸 것에 일조한 정도지."
- 사숙한 작가와 주목하는 후배 시인은?
"30년대 시인들이야. 이용악의 호방담대한 목소리, 백석의 빼어난
서정, 정지용의 담백한 아름다움을 동경했지. 후배 시인이라...
박영근이 들려주는 민중성에 입각한 가난한 사랑노래는 바뀐 시대에도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아."
- 완벽한 퇴고 없이는 새 청탁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산문청탁도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무시무시한 소문이 사실인가?
"사실이야. 오자는 물론, 구두점(句讀點) 하나가 틀리는 것도
견딜 수 없이 싫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건 독자에 대한
책임 아니겠어?"
"시인이란 짝사랑을 찾아 헤매는 사람"
- 아직도 시가 사회변혁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직접적 혁명이나 변혁의 수단은 될 수 없다고 해도 불의한 시대를
꾸짖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
- 무지한 질문이다. 시란 무엇이고,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끊임없는 의문이자, 답이 없는 질문이 시 아니겠어?
그런 의미에서 30년넘게 시를 썼지만 겨우 시의 옷자락만을 잡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 시가 무언지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시를 쓰지 않겠지. 시? 짝사랑 같은 거야. 그러니 시인은 짝사랑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겠지."
- '시의 시대는 망했다'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떠돈다.
"그건 아니지. 아직도 우리나라엔 시를 읽는 독자가 많아.
경제적으로 윤택한 어떤 나라보다도. 프랑스같은 문화선진국에서도
시는 겨우 자비출판 정도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잖아. 물론 요사이
경제상황이 나빠지면서 책 판매가 다소 저조하지만, 그런 일시적
현상만으로 '시가 망했다'느니 떠드는 건 억지고, 무지야."
- 젊은 시인들이 '시적 치열성'을 잃어간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문학이란 동시대와의 의사소통에 다름 아니야. 그런데 요즘 젊은
작가들의 시를 읽으면 우리말로 쓰여졌는데도 도대체가 우리말이
아닌 것 같아. 시인인 내가 그런 느낌인데 독자들은 어떻겠어?
암호같은 시로는 독자를 감동시키거나 설득할 수 없어.
복잡한 시대일수록 단순하고 간결해지는 방법을 고민해야지."
- 올해 '8.15 방북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왔는데.
"내가 해방둥이(45년생)야.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우리의 반쪽땅을
50년이 걸려 도착했으니 그 감흥이야 필설로 다 말하기가 어렵지.
북한의 지나친 자존심이 인민을 굶기고, 남한의 과도한 대외의존도가
국가의 자주적 기반을 흔드는 상황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어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이제 지난 시대의 굴레인 '전쟁'과 '분단'을
떨쳐내고 '누구의 입에도 밥이 고르게 들어가'는 평화의 21세기를
맞아야 하지 않겠어? 미약하지만 내 힘도 거기에 보태고 싶어."
- 올해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상의 주관사인 '창작과비평사'가
출판상업주의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가 몇몇 젊은 평자들 사이에서
떠돈다.
"그게 대세는 아니잖아. 상업주의 냄새가 나는 몇 권의 시집으로
창비가 출판하는 책 모두를 매도할 수는 없지."
'미움의 언어'에서 '사랑의 언어'로... <시를 찾아서>
- 근작 <시를 찾아서>에 대해서 몇 가지 묻자.
정말 '발표 안된 시 두 편만 있어도 부자'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해. 하지만 청탁이 오면 늘 미안하지. 준비해둔 게
없으면 주질 못하니까. 그렇다고 시를 많이 쓸 재주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앞으로도 청탁 받아 시를 쓰는 일은 없을 거야.
문학은 주문생산이 아니잖아."
- 짧아진 당신의 시를 두고 이시영 시인은 '여백의 미학' '침묵의
시학'이라 평했는데.
"여백은 곧 시의 맛이지. 그 말이 맞아."
- '내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길을 나서겠다'라고 했다.
해방되었고, 길을 찾았는가?
"시를 쓰지 않아야 완벽히 해방되는 것 아니겠어?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유연성에 이르는 길을 찾고는 있지. 애쓰고 있어.
여전히 시란 시인의 아름다운 굴레이니 해방을 꿈꾸며 길을 찾으면서도
시는 놓치지 않겠지."
- '그대가 사라진 자리에 섬광처럼 꽃이 피는 것을 보았다'고
노래했다. 당신의 꽃은 무엇인지.
달라진 시대에 걸맞은 또 다른 목소리를 찾기 위해 "이전 시집과는
달리 이번 시집에선 '시' '말' '사랑' '그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해.
그것들이 내 꽃이지. 꽃과 같은 사람 하나 가지는 게 내 평생의
꿈이기도 하고."
-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고 그랬는데,
아직 저항할 대상이 남았는가?
"지난 시대 '유신'이나 '군사독재'처럼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저항할 대상은 엄존한다고 생각해. '빈부격차'나 '성차별'
'전염된 절망'같은 다양한 형태로 말이야."
"희망만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
- 인터넷문화에 대한 견해는?
"집안에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파악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온 거지. 하지만 어떤 문명의 이기(利器)든 간에 악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사소한 것 같지만 소리나는 대로 쓰는 채팅언어는
습관으로 굳어져서는 안될 모국어 파괴행위 아니겠어? 특히 남에게
피해를 주는 가학적인 글들이 익명의 가면을 쓰고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걸 보면 속이 상할 때가 많아."
- 정치, 사회, 경제를 포함한 최근 한국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보는지.
"DJ 정부가 들어설 때는 상당히 기대도 많이 가지고, 자존심을 가진
정권으로 서주길 바랬어. 그런데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미국을
포함한 외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안타까워.
하지만 일관된 통일의지는 높이 평가할 만하고, 다음 정권에서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 젊은 독자들에게 한마디.
"나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겠어. 하지만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희망만이 평화로운 시대를
불러올 수 있다는 말만은 해주고 싶어."
당신의 시로 '망해가는 세상'을 부활시키길
요사이 출판되는 통상의 시집에는 적게는 60여 편에서 많게는
100여 편까지의 시가 실려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정작 '건질만한 시'
라고는 3~4편에 불과한 것이 안타깝지만 엄연한 현실. 하지만
정희성의 시집에서는 '버릴만한 시' 3~4편을 찾기가 힘들다.
하나하나가 절창(絶唱)이고, 탄성을 자아낸다.
정희성은 한 편의 시를 위해 수십 번을 고민하고, 수백번을 퇴고한다.
1년에 겨우 3~4편의 시만을 쓰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제2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 제3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내기까지 13년, 제4시집 <시를 찾아서>에 닿기까지는
다시 10년이 필요했다. 그러고도 단출한 43편. 자신의 시에 대한
냉혹하리만큼 엄정한 태도. 이를 '결곡' 외에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지난 10월27일 아침. 여의도공원에 모여 '교육시장화 저지'와
'공교육 정상화'를 외치는 젊은 전교조 교사들 틈에서 정희성을
보았다. 그리고는 "왜 이 자리까지 나왔냐"고 물었던가?
"후배교사들에겐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충고도 했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면 어쩌겠어. 젊은 사람들만 다치게 할 순 없잖아."
그날 아침 정희성은 22년만에 다시 만난, 국어교사가 된 제자
차주원의 어깨를 다독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비록 짤막한 몇 마디와
잠시동안의 감동이었지만 그것은 '염결(廉潔)한 삶'을 살아온
사람만이 들려주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시를 찾아서>에 실린 '同年一行'이란 시가 우리를 울린다.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 밖에
없던
南柱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金明秀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 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아니다. 시인이 '어디로 가서 절마당이나 쓸'거나, 우울에 빠져
줄담배나 내처 피우기에 세상은 아직 혼탁하고, 시절은 어둡고 수상하다.
우리에겐 아직도 '결곡'과 '염결', 선비의 미덕을 지키며 살아온 시인이
필요하다. 하여 기자는 정희성에게 매달려 이런 억지스런 부탁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1년에 서너 편이 아니라, 곱절로 늘여 예닐곱 편씩만 써주길.
그래 주길. 그리하여 회갑을 맞는 4년 후엔 결 고운 당신의 노래를
다시 듣는 행복을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게 해주길.
'사랑'과 '꽃'을 노래할 당신의 시로 망해가는 세상을 부활시키고,
'분노'와 '증오' 또한 함부로 누그러뜨리지 않아 어두운 시대
오만가지 타락과 방종과 오만을 준엄히 꾸짖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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