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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서문
우리의 삶은 하나하나의 영적 실험실과 같아서, 그 안에서 우리는 마주치는 가르침들을 자기 경험의 불꽃 속에서 시험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진실들이나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수행법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탐구를 통한 영적인 발견들이다.
아디야샨티(Adyashanti, 근본적인 평화라는 뜻의 이름)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나는 정말로 직접 진리를 발견한 영적 스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신이 선(禪)의 전통에서 벗어사 깨어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1996년에 34살이던 그에게 가르침을 펼쳐 보라고 격려한 사람은 그의 오랜 선 스승이었던 아비스 저스티였다.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디야샨티를 통해 비약적인 통찰을 경험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내 삶의 영적 실험실에 그의 조언을 추가하고 싶었다.
그래서 2004년 11월, 아디야샨티와 함께 하는 5일간의 수련회에 참가하였다.
수련회에서 아디야샨티는 몇 차례 강연을 했고, 강연이 끝난 뒤에는 참가자들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질문들가 관심사들에 대해 그와 공개적으로 대화하는 기회를 가졌다.
또 우리는 매일 4~5시간 동안 고요히 앉아서 좌선을 했는데, 그 시간에는 아디야샨티가 '참된 명상(True Medit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좌선에 잘 적응하기 위해 우리가 받은 기본적인 지시 사항은 두 마디 말뿐이었다.
"조작하지 마십시오."
20년 넘는 세월 동안 다양한 종류의 명상 수련회에 참가해 왔고 수십 가지 명상 기법과 접근법을 실험해 왔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조금 당혹스러운 지시 사항이었다.
"조작하지 말라고? 그게 전부야?" 구부정하게 앉아 있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 산만한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
이것도 정말 명상이긴 한 것일까? 아니면 아디야샨티는 그저 우리가 멍하니 앉아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하고 있는 것일가?
도대체 '참된 명상'이란 무엇일까?
"조작하지 마십시오." 라는 지시 사항 외에, 수련회 장소에는 우리가 읽으면서 숙고해 볼 수 있는 한 장짜리 인쇄물이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다행이군,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아디야샨티와 그의 접근법에 익숙할지 모르지만, 나는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 어쩌면 그 인쇄물이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참된 명상
참된 명상은 방향도, 목표도, 방법도 없습니다.
모든 바법은 마음의 일정한 상태를 성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모든 상태는 제한되고, 일시적이며,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 상태에 대한 집착은 오직 얽매이게 하고 의존하게 만들 뿐입니다.
참된 명상은 근원적인 의식으로서 머무르는 것입니다.
참된 명상은 알아차림(awareness)이 지각되는 대상들에 고착되지 않을 때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처음 명상을 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알아차림이 항상 어떤 대상에, 즉 생각이나 신체적인 감각, 감정, 소리 등과 같은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대상들에 초점을 맞추어 좁혀지도록 길들여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자기가 알아차리는 것(대상)을 어쩔 수 없이 기계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에 조건 지어진 대로 결론을 이끌어 내고 근거 없는 추측을 하기 시작합니다.
참된 명상에서는 모든 대상이 저마다 자연스럽게 기능하도록 허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인식 대상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억누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참된 명상에서는 알아차림으로 있는 데 중점을 둡니다.
즉, 대상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알아차림 그 자체로서 편안히 쉬는 데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알아차림(의식)은 모든 대상이 그 안에서 일어나고 가라앉는 근원입니다.
당신이 부드럽게 이완되어 알아차림으로 존재하며 귀를 기울일 때, 대상들에 초점을 맞추어 좁아지는 마음의 버릇은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존재의 고요함은 더욱 분명하게 의식되어 편히 쉬며 머무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어떠한 목적이나 기대가 없는, 열린 수용의 자세는 침묵과 고요함의 현존이 당신의 자연스러운 상태로서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침묵과 고요함은 어떤 상태가 아니며, 따라서 만들거나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은 그 안에서 모든 상태가 일어나고 가라앉는 비(非)상태입니다.
침묵, 고요함, 알아차림은 어떤 상태가 아니며, 결코 대상으로서 전체적으로 지각될 수가 없습니다.
고요함은 그 자체로 모양이나 특성이 없는 영원한 목격자입니다.
당신이 목격자로서 더욱 깊이 휴식할 때, 모든 대상은 저마다 자연스럽게 기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은 마음의 좁아지는 버릇과 동일시를 벗어나서 자기의 자연스러운 비(非)상태인 현존(Presence)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간단하지만 심오한 질문은 자기 자신이 에고-인격의 끝없는 독재가 아니라, 대상이 없는 존재의 자유이며 --모든 상태와 대상이 (당신 자신인, 불생불멸하는 참나의 현현으로서) 그 안에서 오고 가는 -- 근원적인 의식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 인쇄물을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은 뒤, 나는 나에게 익숙한 기법들로 명상하는 것과, 편안히 이완하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무 조작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을 번갈아 실천하며 5일간의 수련회를 보냈다.
그러나 수련회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는 내가 해답들보다 훨씬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즉, 명상에서 기법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러한 접근법은 모든 수준의 명상 수행자들에게 효과가 있는가, 아니면 이미 오랫동안 수련을 하여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게 된 숙련된 수행자들에게만 효과가 있는가?
명상을 하는 동안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육체적, 감정적 고통은 어떻게 해야 하며,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들을 품은 채로 나는 아디야샨티에게, 우리 출판사와 함께 '참된 명상'에 관한 지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볼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동의했고, 이 책이 그 결과물이다.
나는 아디야샨티에게 질문들의 목록을 건넸고, 그는 '참된 명상'이라는 주제에 관한 두 개의 법문으로 응답했는데, 첫 번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기'에 관한 법문이고, 두 번째는 '명상적 자기탐구'에 관한 법문이다.
아디야샨티에 의하면, 영적인 발견은 자기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증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직접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참된 명상에 관한 이 책이 여러분 자신의 진정한 발견의 과정을 더욱 멀리 이끌어 가서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기를 바란다.
타미 사이먼
1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기
● 마음과의 전쟁을 끝내기
-중략-
나는 이런 식의 명상(마음을 통제하여 명상 상태로 들어가는 것)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난 뒤에는 내게 다른 명상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쓰고 있던 방법은 분명히 효과가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스스로 '참된 명상'이라 부르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스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마음과 전쟁을 벌이면서 이기려고 애쓰면 영원히 전쟁 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은 내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그 순간, 이제까지 내가 명상을 마음과 싸우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마음을 통제하고, 마음을 진정 시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영원히 그런 상태에 있을 거라니, 끔찍하군. 명상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아야겠어."
이런 식의 명상을 아무리 계속해 봐도 마음과의 전쟁이 한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면, 마음과 전쟁하지 않는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나는 내 마음, 내 느낌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내가 인간으로 겪는 모든 경험과도 전쟁을 벌이지 않는 명상이 무엇일지, 조용히 그리고 아주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명상하기 시작했다.
명상이란 어떠해야 한다는 견해도 놓아 버렸다.
내 마음은 명상에 대해 수많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명상은 평화로워야 한다고 믿었고, 명상을 하면 어떤 기분을 느겨야 한다고, 주로 평온함을 느껴야 한다고 믿었다.
명상을 하면 존재의 어떤 깊은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지도받고 있던 명상의 기법에 통달할 수 없었으므로 다른 명상법을 발견해야만 했고, 그것은 어느 하나의 기법에 매이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 앉아, 나의 경험이 그저 존재하도록 내버려두었으며, 내면 깊이 그렇게 했다.
경험을 통제하려는 노력도 놓아 버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참된 명상'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 전환 --어떤 기법이나 수행에 통달 하려는 노력으로부터, 기법과 수행을 실제로 놓아 버림으로의 전환 -- 이 내게 명상에 참여하는 법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 아무것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p21
명상에 관한 우리의 견해들은 대게 과거에 학습한 것들로 물들어 있다.
명상에 관해 배운 것들, 명상이란 어떤 것이라는 생각, 명상을 하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 등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다.
명상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는 수없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신체적, 정서적 건강을 위해서, 또는 몸을 진정시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명상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흔히 차크라라고 하는, 몸 안의 미묘한 에너지 통로들을 열기 위해 명상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과 자비심을 계발하기 위해 명상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변형된 의식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명상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싯디라고 부르는 어떤 영적 혹은 정신적 능력을 얻기 위해 명상을 한다.
그리고 영적인 깨어남과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명상이 있다.
내게 정말로 흥미가 느껴지는 것은 이런 명상, 즉 영적인 깨어남과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명상이다.
'참된 명상'은 이런 명상이다.
어떤 사람이 명상을 처음 시작하는지, 아니면 오랫동안 명상을 해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명상 경력 자체는 아무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명상에 참여하는 태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린 태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은 태도로 명상에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나 대중 매체, 다양한 영적·종교적 전통을 통해서 명상에 대해 들은 지식들로, 그런 과거의 것들로 물들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는 새롭고 때 묻지 않은 방식으로 명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적 교사로서 나는 기나긴 세월 동안 명상해 온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만났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흔히 들은 얘기 중 하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명상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명상은 내면을 깊이 변화시키고 영적인 진실을 드러내지만, 많은 사람은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심지어 오랜 세월 명상을 해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한때 내가 행했던 명상을 비롯한 일부 명상 수행들이 이러한 변화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데는 분명히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놓치기 쉬운데,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태도로 명상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통제하고 조작하는 태도로 명상을 한다.
명상을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닥쳤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존재의 깨어난 상태, 존재의 깨달은 상태는 존재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통제와 조작이 우리를 자연스러운 상태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 통제와 조작을 포기하기
깨달음이란 결국 존재의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이다.
복잡한 용어들을 모두 벗겨 내고 보면, 깨달음이란 그저 우리 존재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상태란 당연히 꾸며내지 않은 상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나 훈련이 필요 없는 상태, 몸이나 마음을 어떤 식으로 조작한다 해도 더 나아질 것이 없는 존재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해, 완전히 자연스럽고 완전히 자발적인 상태이다.
명상을 하다가 자주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명상 기법들은 일종의 통제를 위한 수단이다.
마음이 우리의 경험을 통제하고 좌우하는 한, 마음은 우리를 자연스러운 상태로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상태란 마음에게 통제당하지 않는 상태이다.
마음은 통제와 조작을 통해 다양한 의식 상태를 유발할 수 있다.
당신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고, 심령 능력을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기법 위주이거나 조작 위주인 명상법을 통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자신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존재 방식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한 사실이다.
내면의 통제와 조작을 통해서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자발적인 존재 방식에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도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법이 깊은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명상의 방식이나 기법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명상에 참여하는 태도에 있다.
만약 우리가 통제하고 조작하려는 태도를 취한다면, 또 어떤 수련법에 통달하려는 접근법을 취한다면, 그런 태도가 바로 장애가 된다.
그럴 때 명상을 하는 것은 실제로는 마음(mind) 즉 에고이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음이나 영적인 깨어남에 대해 얘기할 때, 당연히 우리는 '마음으로부터의' 깨어남 '에고로부터의' 깨어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참된 명상'이라고 부르는 명상에서는 통제하고 조작하고 수행하려는 마음의 성향을 맨 처음부터 포기한다.
통제와 조작을 놓아버리는 것이 '참된 명상'의 기반이다.
재미있게도, 통제를 포기하고 조작을 포기하는 더없이 단순한 태도가 바로 참된 명상의 시작이다.
많은 사람은 명상을 하기 위해 앉으면 제일 먼저 "좋아 어떻게 해야 마음을 통제하지?"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내가 조작이라 부르는 것이다.
조작이라는 단어는 어감이 센 단어이지만, 나는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일부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명상을 하기 위해 앉아서 "좋아, 어떻게 내 마음을 통제할까? 어떻게 하면 평화로워질까? 어떻게 하면 고요해질까?" 라고 스스로 물을 때, 마음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통제해서 기분이 좋아질까?" 라고 묻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 주목하도록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통제하는 기법을 이용하여 마음을 통제하고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잠시 동안 기분이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평화롭거나 평온한 상태를 얻기 위해 마음을 통제한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조용하게 만들기 위해 테이프로 그의 입을 틀어막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조용하게 만든다 해도, 그것은 매우 조작적인 방법을 통한 것이다.
테이프로 그 사람의 입을 막아 조용하게 만든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입에서 테이프를 떼어 내자마자 그들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렇잖은가? 그들은 할 말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명상을 해본 사람이라면 명상 상태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 통제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럴때는 기분이 아주아주 좋다.
그 경험은 심오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뒤 명상을 멈추자마자, 방석이나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마음은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우리는 통제를 통해 일종의 명상적인 고요함을 경험하지만, 우리가 통제를 포기하자마자 마음은 고요함에서 벗어나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이전의 방식 그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명상 수행자들은 이런 딜레마에 너무나 익숙하다.
우리가 명상을 하고 있을 때는 어떤 평화로운 상태를 얻을 수도 있지만, 명상을 멈추면 평화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서 자취를 감춘다.
참된 명상이란 어떠한 기법에 숙달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진정한 명상이다.
다른 모든 것은 실제로는 일종의 정신 집중이다.
명상과 정신 집중은 별개의 것이다.
정신 집중은 훈련이다. 정신 집중은 사실 우리의 경험을 감독하거나 이끌거나 통제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명상은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며, 우리의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의도를 포기하는 것이다.
통제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에게 실로 엄청난 일이다.
"그저 통제하는 것을 포기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우리의 전체 심리 구조, 우리의 전체 심리적 자아, 우리의 에고는 거의 전부가 통제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마음 즉 에고에게 통제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다.
통제를 포기할 때는, 단 한 순간만 포기하더라도 어떤 감추어져 있던 두려움과 망설임이 일어난다.
마음은 말한다. "통제를 포기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쩌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명상하기 위해 앉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우리가 어떤 기법이나 훈련에 집착하는 이유는 대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통제를 포기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참된 명상'에서 내가 제안하는 바는 직접 실제로 보라는 것이며, 하나의 탐구 방법으로서 명상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참된 명상은 사실 새로운 기법이 아니다.
그것은 통제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기 시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자기의 몸에서, 자기의 마음에서, 자기의 권위에 근거하여, 자기의 경험에 근거하여 -- 스스로 탐구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당신이 경험하는 것을 달리 변화시키려는 노력없이 정확히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참된 명상은 기법이 아니며, 실제로는 하나의 탐구 수단이다.
우리가 통제와 조작을 실제로 포기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 명상하는 자를 넘어서기
p30
참된 명상의 두 번째 측면은 명상적인 자기탐구이다.
명상적인 자기탐구란 명상 상태에 있는 마음에 질문을, 강력하고 중요한 영적 질문을 제기하는 수행이다.
이때 우리는 그냥 아무 낡은 질문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치 있는 질문들, 조건화의 단층들을 꿰뚫고 우리의 근원적인 본성에 도달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질문들을 한다.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질문은 그저 "나는 무엇인가? 명상하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은 경험을 통제하려 애쓰는 에고를 계속해서 약화시킨다.
이 질문은 "누가 경험을 통제하고 있는가? 누가 명상을 하고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명상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명상하는 자를 넘어서는 것, 즉 에고 또는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명상하는 자가 통제하고 있는 한, 마음 또는 에고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참된 명상에서는 명상하는 자를 포기하는 수행을 한다.
이 명상에서는 맨 처음부터 통제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도록 권유한다.
이러한 수행은 명상하는 자를 해방시켜 준다.
만일 명상하는 자가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그저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며,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명상하는 자'에 대해 말할 때, 명상하는 자란 통제하고 있는 자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명상하는 자는 애쓰는 자이며, 조작하는 자, 열심히 노력하는 자이다.
거의 모든 형태의 명상에서 명상하는 자는 매우 분주하게 뭔가를 한다.
마음은 끊임없이 무언가 할 일을, 무언가 숙달해야 할 일을 마련한다.
그리고 마음은 무언가 할 일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마음은 무언가 숙달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야만 마음이 계속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깨어남 --우리의 진정한 본성으로의 깨어남 -- 이라는 측면에 상응하는 형태의 명상을 위해서는 명상하는 자, 통제하는 자, 조작하는 자를 넘어서야만 한다.
● 우리는 본래 깨어나게 되어 있다
p51
내가 말하는 방식으로 명상할 때, 즉 통제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깨어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깨어남을 향해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에고가 가진 통제를 포기할 때, 우리 존재의 본성이 깨어난다.
각자 나름의 명상 전통을 배운 사람들이 나에게 오면 나는 그동안 배운 기법을 포기해 보라고 제안하는데, 그렇게 하면 물론 처음에는 그들의 마음이 조금 밖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꽉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아주면, 그것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개를 가죽 끈으로 매어 놓은 것과 같아서, 가죽 끈을 풀어 주면 개는 본능적으로 달아난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 매어 두었다면, 속박에서 풀려났을 때 마음은 그 성향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된다.
우리는 개의 가죽 끈을 풀어주듯이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할 수 있다.
개는 재빨리 당신에게서 도망칠지 모르지만, 잠시 기다려 주면, 결국 개는 대개 당신의 발치로 돌아가고 싶다고 마음먹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마음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면 마음은 한동안 조금 소란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진실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마음은 그 성향에 따라 조화로운 상태, 고요한 상태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 내면의 모든 것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라
p53
우리 전 존재의 본성은 깨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있도록 깊이 허용하면, 흔히 우리의 정신 속에 억압되어 있던 부분이 밖으로 드러난다.
사실, 수많은 영적 구도자들은 부지불식간에 정신 속에 억압되어 있는 부분을 계속 억압하는 데에 명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지 모르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놓아 버리고, 정말로 열리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있도록 허용할 때, 어떤 억압된 부분이 떠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닌데, 이것은 상당히 충격적일 수 있다.
갑자기 명상 중에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슬픔이 밀려올 수도 있다.
눈물 흘리며 울 수도 있다.
갖가지 기억들이 의식에 되살아나서 스스로 드러날 수 있다.
신체에서 통증을 느낄 수도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있도록 허용할 때 몸 이곳저곳이 아팠다고 말한다.
우리가 정말로 놓아 버리기 시작하면, 표면으로 떠오를 필요가 있는 것들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마음은 이 부분이 나타나는 것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많은 영적 구도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을 억누르기 위해 영적 수행을 이용한다.
우리가 억누르는 것을 멈출 때, 우리의 무의식은 스스로 떠올라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런 무의식적인 부분이 표면으로 떠오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분석할 필요가 없다.
떠오르는 것은 대개 우리 내면에 있는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다.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느끼도록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감정들이며, 우리가 충분히 경험하도록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고통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떠오른다.
우리 안의 이런 해결되지 않은 부분은 무의식으로 내쫓기지 않고 충분히 경험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니 우리의 억압된 부분이 떠오르면, 그것이 억제되지 않고 떠오르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그것을 분석하려 하지 말고, 이런 느낌들이 몸에서, 우리의 존재에서 경험되도록, 그리고 그것들이 원하는 대로 펼쳐지도록 허용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고통이든 --감정적이든, 심리적이든,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그 밖의 다른 것이든 -- 이 억압된 부분은 떠오르고, 스스로 드러나고, 경험된 뒤에 사라질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디엔가 저항이나 거부, 집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을 놓아 버릴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한다고 해서 우리의 명상이 반드시 완전히 평화롭고 고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목적은 깨어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존재의 실재로 깨어날 수 있는 방법이며, 우리는 자기의 인간성과 관계함으로서 자기 존재의 실재로 깨어난다.
우리의 인간성을 회피함으로써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우회함으로써, 그것을 기도나 주문이나 명상으로 떨쳐 버리려고 노력함으로써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모든 것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느껴지도록, 경험되도록, 알려지도록 허용함으로써 깨어난다.
오직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더 깊은 수준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아주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적 경험을 억압하거나, 우리가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을 억압하는 데에 명상 기법을 사용하기 쉽다.
그러나 정작 요구되는 것은 정반대이다.
참된 명상은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보이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경험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스스로를 놓아 버린다.
우리가 놓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놓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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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조용한 곳에 앉아 있을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여기면 영성과 우리의 일상생활은 둘로 분리된 별개의 것이 된다.
‘나의 영적인 삶’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나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착각이다.
실재에 눈을 뜨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하나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 모든 것은 온통 하나인 영(靈)의 나뉨 없는 표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