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골짜기에 병으로 누워 정신이 혼미한 채로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조금 나아진 다음에야 그대가 보낸 두 폭의 편지가 방에 놓여 있음을 알았습니다. 평소에 안부를 물어 주고 병이 들자 죽을까 걱정해 주시니 저를 돌보아 주는 마음이 눈에 선합니다. 감격에 겨워 몇 번이나 우러러 탄식하였습니다. 편지를 통해 그대가 갑자기 산속으로 돌아갔다고 들었으니, 일상생활이 더욱 한가하리라 생각됩니다만, 조정에서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기르지 못하고 물고기를 보는 즐거움을 방해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나는 그때 거의 귀신 같은 몰골로 실낱같은 목숨이 다시 이어지리라 생각지도 못한 채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도로에서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으니,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은 터라 저의 생각들을 감히 다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받은 편지는 저로 하여금 〈습상(隰桑)〉의 마지막 장을 다시금 외게 하였습니다. 편지에는 또 저에게 왕림하고 싶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잡기도 어려운 일인데 공교롭게 이처럼 어긋나고 말았으니, 제가 그대를 만나는 것에도 운수가 있나 봅니다. 제 아들이, 저의 사칠설(四七說)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방을 받고 있다는 그대의 당부를 전하였습니다. 제가 얕은 생각으로 한 말이 남들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야 본디 이상할 것이 없겠지만, 그 가운데에는 혹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말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30년 전에 《사칠편(四七編)》 한 질 17편(篇)을 찬술하였는데, 1편 사단자의(四端字義), 2편 칠정자의(七情字義), 3편 사단유부중절(四端有不中節), 4편 성현지칠정(聖賢之七情), 5편 사칠유상사처(四七有相似處), 6편 칠정횡관사단(七情橫貫四端), 7편 사칠유이의(四七有異義), 8편 칠정변시인심(七情便是人心), 9편 칠정청명어사단(七情聽命於四端), 10편 칠정역무유불선(七情亦無有不善), 11편 칠정역유인도심발(七情亦有因道心發), 12편 고인논정부동(古人論情不同), 13편 승주유(乘舟喩), 14편 연승마설(演乘馬說), 15편 도설(圖說), 16편 부록(附錄), 17편 후설(後說)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편들은 선현들이 남긴 뜻을 채록하여 제목으로 삼고 온 정력을 쏟아 상호 고증하였습니다. 저를 이해하는 사람 중에는 더러 퇴계 선생의 문하에 공이 있다고 하면서도 책 상자에 넣어 두고 함부로 꺼내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율곡(李栗谷)의 학설과는 근원부터 구별이 되고 모든 것이 어긋나서 피치 못하게 조목조목 따져서 비판을 하였으니, 만약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이를 본다면 그 피해 또한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돈후한 학풍을 지닌 영남에서조차도 절부(竊鈇)의 의심을 가지는데 하물며 세상에 없는 허물을 잡아내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야 어떻겠습니까. 이번에 그대의 말씀을 들었으니, 저의 견해를 대략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순(舜) 임금의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심학(心學)의 조종(祖宗)입니다. 주 부자(朱夫子)가 이에 대하여, 혹 형기(形氣)에서 나오고 혹 성명(性命)에서 근원했다고 했으니, 남김없이 보여 주고 물샐틈없이 설명한 것입니다. 노선생(老先生)이 사단칠정을 논할 때 반드시 이 말을 인용하여 논리적 증거로 삼았으니, 그렇다면 이 말을 할 초기부터 두 가지 모양을 지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릇 성(性)이 발하여 정(情)이 되므로, 인심과 도심은 성에 해당하고, 사단과 칠정은 정에 해당합니다. 한 점의 방촌(方寸) 속에 어찌 다시 네 가지의 정이 나오겠습니까. 주자의 설에 근거하면, 사단은 도심이고 기한(飢寒)과 통양(痛痒)은 인심입니다. 또 “희로(喜怒)는 인심이다.”라고 하였고, 또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인심이며, 오직 의(義)에 따라 생겨난 것이 도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도심과 사단은 부절(符節)처럼 흔적 없이 들어맞고 칠정은 형기(形氣)상에서 기한과 통양의 마음이 일어난 것이므로 주자가 그리 말한 것입니다. 〈호학론(好學論)〉에서 형기에 감촉되어 칠정이 나온다고 어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미 형기에 감촉되었으므로 기한과 통양의 마음이 그 속에 저절로 생겨나고, 칠정이 이로 말미암아 싹이 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평숙(李平叔)이 질의한 편지에서 선생의 말씀을 기록하여 “사단은 도심이고 칠정은 인심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무릇 인심이 위태한 것은 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칠정의 치탕(熾蕩)이 없다면 기한과 통양의 마음이 어찌 위태롭다고 하였겠습니까. 이제야 비로소 인심도심(人心道心)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동일한 말이며, 선생이 말한 칠정기발(七情氣發)의 기(氣)는 단지 정자(程子)가 말한 “형기에 감촉되어〔觸其形〕”라든가 주자(朱子)가 말한 “형기에서 나왔다.〔生於形氣〕”라고 할 때의 기(氣)로, 주자의 〈감흥시(感興詩)〉에서 말한 “사람의 마음은 오묘하여 헤아릴 수 없으니, 드나드는 데에 기기를 탄다.〔人心妙不測 出入乘氣機〕”에서의 기(氣)와는 같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천리(天理)에 대해 말을 잘하는 사람은 반드시 인간의 일상을 가지고 증명을 합니다. 만물이 비록 천지(天地)의 대기(大氣)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산은 산의 기운을 가지고 있고 물은 물의 기운을 가지고 있으며, 나무, 불, 쇠, 돌 등도 모두 그러합니다. 각자 종류별로 모이고 음양(陰陽)으로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그 형체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직접 보고 알 수 있는 것으로서, 기가 서로 유통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애초부터 대소(大小)의 구별이 없다고 말한다면 결코 맞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형기(形氣)는 천지의 대기와 같고 방촌(方寸) 사이에 출입하는 기(氣)는 종류별로 모이고 음양으로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기와 같으니, 하나로 묶어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자가 말한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 어찌 성명(性命)에 근원한 것이 아니겠으며,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 어찌 형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퇴계 선생의 말씀은 이 두 구절을 조술(祖述)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이발(理發)의 이(理)는 성명 이외에 다른 것이 없으며, 기발(氣發)의 기(氣)는 형기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이치입니다. “형기가 발하고 이가 그 위에 탄다.〔形氣之發而理乘之〕”라고 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성명이 발하고 형기가 이를 따른다.〔性命之發而形氣隨之〕”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선생이 ‘기(氣)’ 자를 두 가지의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이(理)에는 동정(動靜)이 있으므로 기(氣)에도 동정이 있다. 만약 이에 동정이 없다면 기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동정이 있겠는가.〔理有動靜 故氣有動靜 若理無動靜 氣何自而有動靜〕”라고 하였고, 또 “이와 기는 본래 선후로 표현할 수 없다. 다만 논리적으로 추론할 때에는 이가 먼저이고 기가 나중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理與氣本無先後之可言 但推去時 卻如理在先氣在後〕”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이(理)는 기(氣)의 장수이고 기는 이의 졸개입니다. 무릇 움직임에는 모두 이가 앞서며, 기가 앞서고 이가 그 뒤를 따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에 방촌(方寸) 사이에 출입하는 기를 대상으로 혹 이가 앞서고 기가 뒤따른다거나 기가 앞서고 이가 그 위에 올라탄다고 말한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율곡이 퇴계 선생의 학설을 잘못 보고서 대뜸 이와 기의 호발(互發)을 주장한다고 비판하였으니, 신 신고 발바닥 긁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호발은 결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퇴계 선생이 필시 그러한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오래도록 연구한 끝에 그 학설을 도출한 것으로, 방촌 사이에 출입하는 기를 대상으로 이가 발하고 기가 따른〔理發氣隨〕 것이라고 말한 것이니, 사단과 칠정 사이에 어찌 구별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칠정의 경우는 이가 발한 것 위에 다시 한 층의 묘맥(苗脈)이 있으니, 이때 이가 발하는 것은 형기를 매개로 발하는 것이지 이가 곧바로 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발한다면 형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므로 단지 방촌 사이에서 이가 발하고 기가 뒤따른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만약 형기에 감촉되어 발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기가 발하고 이가 그 위에 탄다는 의미가 되어 방촌 사이에 “기가 따른다.〔氣隨〕”라는 두 글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더라도 그 의미가 모두 드러납니다. 선생의 생각은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형기를 배제하고 이와 기가 방촌 사이에서 번갈아 앞선다고 말한다면 퇴계 선생이 호발(互發)을 주장한다고 의심한 사람들이 퇴계 선생을 전면적으로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학설들이 허다하여 편지로 다 쓰지 못하였습니다. 병중에 정신마저 혼미하니 어찌 다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율곡의 학설은 그 대지(大旨)가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것〔善一邊〕이지 칠정 밖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저의 뜻과는 하늘과 땅, 동과 서처럼 큰 차이를 보이는데 율곡의 학설과 서로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순(舜) 임금의 성냄과 맹자(孟子)의 기쁨을 언급한 글은 고봉(高峯)의 〈사단칠정후설(四端七情後說)〉에 나오는 것으로 결국 이발(理發)의 뜻을 고수하였으며 퇴계 선생이 자주 칭찬한 글입니다. 제가 처음에 고봉의 말을 기발(氣發)로 단정하였으나 매번 퇴계 선생의 말씀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그 뒤로 다시 말을 바꾸어 마지못해 고봉의 말을 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의 붕우(朋友) 가운데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의심하는 이가 있는데, 저 또한 자신할 수가 없어 다시 누군가가 바로잡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고봉이 한 말이며, 퇴계 선생이 인정한 말입니다. 저는 단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옛 성현의 말씀을 믿고 따랐을 뿐입니다. 옛 학설을 변형시켰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전에 제가 퇴계 선생의 유집(遺集) 가운데 모범이 될 만한 글들을 모아 분야별로 편집하여 《도동록(道東錄)》 1책을 만들었고, 또 예법(禮法)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채록하고 각각 그 요지를 뽑아 주제별로 분류한 다음 관혼(冠婚)의 예법에서부터 향방(鄕邦)의 예법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편집하여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 상하 두 책을 만들었습니다. 후대 유자(儒者)들이 쓴 글들도 모두 집록(集錄)해 놓았으니, 이 책을 읽고 적용해 본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종이가 부족하여 미처 정사(淨寫)해 놓지 못하였습니다. 병을 앓은 뒤로는 정신과 기운이 없어 눈은 어지럽고 손은 떨리며 말에도 조리가 없고 글자조차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피곤하여 이만 마치겠습니다. 그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살아생전에는 만나 뵐 길이 없다가 그대의 편지를 받고 보니 슬픈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부디 덕을 쌓는 데 더욱 노력하시어 멀리 있는 저의 바람에 부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C-001]권태중(權台仲) : 태중은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 자이다. 권상일의 호는 청대(淸臺),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710년(숙종36)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1720년에 예조 좌랑을 지냈다. 1727년(영조3)에는 만경 현령(萬頃縣令)이 되어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하여 영문에 보고하고, 난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사헌부 장령, 울산 부사, 형조 참의, 우부승지, 대사간, 대사헌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관직 생활과 함께 학문과 강학도 겸행한 그는 경상도 상주(尙州) 출신으로 같은 지역의 선배 학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와 교유하였다. 또한 54세에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을 지내면서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 간행을 주도하였고, 《퇴계집속집》의 편찬과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및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 퇴계 이황(李滉) 저작의 중간에 참여하는 등 당시 영남 퇴계학파의 중심에 있었다. 저술로는 문집인 《청대집(淸臺集)》 18권과 《초학지남(初學指南)》, 《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 《소대비고(昭代備考)》, 《가범(家範)》, 《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 및 《청대일기(淸臺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며, 문경의 근암서원(近嵒書院)에 향사되었다. 《안병걸, 성호 이익의 퇴계와 영남에 대한 관심, 민창사, 2009》[주D-001]새의 …… 못하고 :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옛날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노(魯)나라 교외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노나라 임금이 그 새를 좋아하여 좋은 음식을 가져다 먹이고 좋은 음악을 연주하여 즐겁게 해 주려 하였으나, 새가 처음부터 수심이 가득하고 어지러워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이것은 자신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렀기 때문이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정에서 권상일을 학문에 몰두하게 하지 않고 그에게 걸맞지 않은 관직을 제수하여 서울로 부른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권상일은 1745년(영조21) 3월에 봉상시 정(奉常寺正)에 제수되었고, 9월에는 필선과 헌납에 제수되었다. 《淸臺集 年譜》[주D-002]물고기를 보는 즐거움 : 《장자》 〈추수(秋水)〉에,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호(濠)라는 강 위의 다리를 거닐다가 장자가 “피라미가 조용히 노니니 이는 물고기의 즐거움이로다.” 하니, 혜자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이에 장자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줄 어찌 아는가?” 하니, 혜자가 “나는 그대가 아니므로 진실로 그대를 알지 못하니,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므로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권상일이 관직을 떠나 학문의 세계에 몰두하는 즐거움을 가리킨다.[주D-003]저로 …… 하였습니다 : 〈습상(隰桑)〉은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마지막 넷째 장은 “마음에 사랑하니 어찌 말하지 않으리오.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거니 어느 날인들 잊으리오.〔心乎愛矣 何不謂矣 中心藏之 何日忘之〕”이다. 이 구절에 대해서 성호는 “대개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이 깊으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입을 열어 마음속의 생각을 먼저 말해 버리는 사람은 그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지극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다면 반드시 갚겠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요, 정이 바다와 같이 깊다면 잊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가슴속으로는 더욱 굳게 새겨 두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星湖僿說 卷21 隰桑末章》 즉 성호 자신에게 관심을 써 준 권상일의 호의를 잊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주D-004]절부(竊鈇)의 의심 :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옛날에 도끼를 잃어버린 어떤 사람이 이웃집 아이를 의심하였는데, 걸음걸이를 보아도 그렇고 얼굴 표정을 보아도 그렇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모든 행동거지가 도끼를 훔쳐 간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계곡에서 도끼를 찾았다. 그 후 다시 이웃집 아이의 태도를 보니 전혀 도끼를 훔쳐 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말은 의심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보면 사람의 언어와 행동이 모두 의심스럽게 보인다는 의미이다. 실제 성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옹호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비판한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퇴계를 버리고 율곡에게 나아갔다.〔舍退就栗〕”라는 의심을 받았다. 《星湖全書 卷17 答李汝兼》[주D-005]순(舜) 임금의 …… 말씀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隱微)하니, 정(精)하고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주D-006]혹 형기(形氣)에서 …… 근원했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序文)에서 주희(朱熹)가 순 임금의 인심과 도심의 말을 부연 설명하면서, “마음의 허령지각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혹은 형기지사(形氣之私)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지정(性命之正)에서 근원하여, 지각을 한 것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주D-007]노선생(老先生) : 퇴계 이황을 가리킨다.[주D-008]호학론(好學論)에서 …… 나온다 : 〈호학론〉은 정이(程頤)가 19세에 태학(太學)에서 공부할 때 호원(胡瑗)이 출제한 ‘안자(顔子)가 좋아하였던 것은 무슨 학문인가?’라는 시험 문제에 대해 쓴 답안인 〈안자소호하학론(顔子所好何學論)〉을 가리킨다. 이 〈호학론〉에서 정이는 “형기가 이미 생기고 나면 외물이 그 형기와 감촉하여 마음을 움직인다. 그 마음이 움직여 칠정(七情)이 나오니, 희로애락애오욕이 그것이다.〔形旣生矣 外物觸其形而動於中矣 其中動而七情出焉 曰喜怒哀樂愛惡欲〕”라고 하였다. 《二程全書 卷62 伊川先生文4 顔子所好何學論》[주D-009]이평숙(李平叔) : 평숙은 이황의 제자인 이함형(李咸亨)의 자이다. 이함형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산천재(山天齋)이다. 서울에 거주하였으며 이덕홍(李德弘)과 함께 이황의 《심경석의(心經釋疑)》를 정리하였다.[주D-010]형기에서 나왔다〔生於形氣〕 :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序文)에서 주희(朱熹)가 순 임금의 인심과 도심의 말을 부연 설명하면서, “마음의 허령지각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혹은 형기지사(形氣之私)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지정(性命之正)에서 근원하여, 지각을 한 것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주D-011]이(理)에는 …… 있겠는가 : 《주자대전(朱子大全)》 권56 〈답정자상(答鄭子上)〉에 나온다.[주D-012]이와 …… 뿐이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 〈이기 상(理氣上) 태극천지 상(太極天地上)〉에 나온다.[주D-013]순(舜) 임금의 …… 기쁨 : 순 임금의 성냄이란 순 임금이 사흉(四凶)을 처단하면서 공공(共工)은 유주(幽洲)로, 환도(驩兜)는 숭산(崇山)으로, 삼묘(三苗)는 삼위(三危)로, 곤(鯀)은 우산(羽山)으로 방축(放逐)하여 죽인 것을 두고 한 말인데, 정자(程子)는 이 사건을 남에게 성냄을 옮기지 않은〔不遷怒〕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書經 舜典》 《論語集註 雍也 好學章》 맹자의 기쁨이란 맹자가 제자 악정자(樂正子)가 노(魯)나라에서 정사를 맡게 되자 그 소식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喜而不寐〕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孟子 告子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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