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동 봄날
강 문 석
개화시기 절정을 맞은 철쭉이 부산 가로를 울긋불긋 수놓았다. 이제 도시에서도 꽃을 찾아 굳이 멀리 떠날 일이 없다. 도심 곳곳이 꽃 대궐인 동시에 꽃동산인 것이다. 남녘 항구도시 도심의 옛 영화는 저물었지만 사람들은 그나마 아름다운 봄꽃이 있어 위안을 받을 것 같다.
일제 때 거대한 방직공장이 자리했던 범일동. ‘조선방직’을 줄여 조방으로 부른 때문에 지금까지 '조방낙지'라는 말이 남았다. 오랜 세월 허허벌판이던 조방 터에 들어선 고속버스터미널도 떠나고 철길 건너 도로변 서너 개 극장들마저 문을 닫은 후 국내 굴지의 대기업 백화점이 코앞에 들어오는 바람에 한때 전국 최대를 자랑하던 부산진시장의 전성기도 '아! 옛날이여'가 되고 말았다.
1960년대 말 범일초교 밑 변전소에서 공급하던 3300볼트 배전선로 전압을 11400볼트로 높이느라 범일동 골목골목을 누비던 때가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11400볼트는 부산과 의정부 두 곳에 실험삼아 공급했다가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바로 22900볼트로 바꾸는 바람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무렵 들어선 자성대고가도로가 시대의 요청으로 헐리고 있어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경제성장기에 시가지 건널목마다 우후죽순처럼 분별없이 들어섰다가 헐린 육교에 비하면 고가도로는 그래도 수명을 웬만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우리도 선진국처럼 한번 건설하면 백년 이상은 사용하는 교통시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양산에서 발원한 샘물이 초읍-연지-부암-서면을 거치며 생활폐수와 섞여 역한 냄새를 풍긴다. 그동안 동천을 살린다고 쏟아 부은 돈이 얼만데 참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잠시 지나치는 행인도 코를 들기 힘들 정도로 악취가 심한데 하천 인근 아파트 주민들은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다. 현장에 붙은 수질개선공사 개요엔 바닷물을 하천 상부까지 끌어들여 폐수를 정화한다고 하는데 바다가 혼탁해지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자성대공원을 한 바퀴 돌아 공원 밑 조선통신사 역사관으로 향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외교사절단으로 한일간 평화교류의 상징이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역사관 앞 영가대는 1614년 경상감사가 자성대에 세운 8칸 규모의 누각으로 한일외교를 증언하는 중요한 유적지다. 역사관을 나서자 거리에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