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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작(牡丹孔雀)
모란과 공작새라는 뜻으로, 옛 권력자(고려 때)가 살던 집이 폐허가 되어 아름답던 모란이나 공작새가 있던 정원이 없어졌다는 비유의 말이다.
牡 : 수컷 모(牛/3)
丹 : 정성스러울 란(丶/3)
孔 : 구멍 공(子/1)
雀 : 참새 작(隹/3)
출전 :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유득공(柳得恭)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에서 고려의 개성을 읊은 9수 중 제5수는 이렇다.
指點前朝宰相家,
廢園風雨土墻斜.
고려 때 재상이 살았던 집 가리키니, 황폐하다 비바람에 흙담마저 기울었네.
牡丹孔雀凋零盡,
黃蝶雙雙飛菜花.
모란과 공작은 모두 다 스러지고, 노랑나비 쌍쌍이 장다리꽃 위를 난다.
예전 고려 때 재상이 살던 집은 흙담마저 기울어 금세 무너져 내릴 판이다. 옛날 권력에 취해 거리낄 것 없던 시절에는 모란이 활짝 핀 정원에 공작새가 놀았을 것이다. 지금은 누군가 빈터에 일군 채마밭에 노랑나비만 난다.
고려 신종(神宗) 때 일이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차약송(車若松)이 특진관 기홍수(奇洪壽)와 함께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갔다.
차약송이 물었다. '공작은 잘 있소?' 기홍수가 대답했다. '고기를 먹다 가시가 목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번에는 기홍수가 물었다. '모란을 잘 기르려면 어찌해야 하는지요?' 차약송이 그 방법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말했다. '재상의 직책은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함에 있거늘, 다만 꽃과 새만 논하고 있으니 어찌 백관의 본보기가 되겠는가?'
유득공의 위 시는 이 고사를 가지고 지었다.
我朝正廟時, 柳泠齋得恭 二十一都懷古詩。
명나라 중종이 화미조(畵眉鳥)를 몹시 사랑했다. 수많은 조롱 속에 한 마리씩 따로 넣어 길렀다. 누가 말했다. '화미조에게 갓 까고 나온 새끼 거위의 골을 먹이면 더 기막히게 운다고 합니다.'
천자가 즉시 광록시(光祿寺)에 명해 날마다 새끼 거위 300마리를 잡아 그 골만 빼서 화미조에게 먹이게 했다. 과연 새의 목소리가 더욱 아름다워져서 궁궐의 깊은 정원이 화미조의 맑은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평자가 말했다. '운치야 있겠지만, 천하일을 살펴야 할 천자가 어찌 이 같은 일을 한단 말인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 공작변증설(孔雀辨證說)에 나온다. 재상은 모란과 공작에 취해 나랏일은 뒷전이었고, 천자는 새 울음소리에 빠져 하루 300마리나 되는 새끼 거위의 골을 파냈다. 모란이 탐스럽고 공작이 화려하며 화미조의 소리가 사랑스러워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를 살피지 않았다. 차례가 틀렸다.
유득공[柳得恭; 1748년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 1807년 10월 1일(음력 9월 1일)]은 조선 경기도 포천군 군수 직책을 지낸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문신, 시인이며 조선 정조 치세 시대 당시의 실학자, 시인이다. 그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혜보(惠甫), 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영암(泠菴), 가상루(歌商樓), 고운거사 (古芸居士), 고운당(古芸堂), 은휘당(恩暉堂)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입격(합격)하고,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 제천, 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풍천부사에 이르렀다. 규장각 검서 당시 다양한 서적을 읽으면서 신라사 위주의 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이후 발해고와 사군지 등을 출간하였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를 겸임하여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서얼 출신 학자로 실학 사상가이면서 역사가로, 발해고의 저자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시대로 인식한 학자이다.
생애 출생과 가계
진사(進士) 유춘(柳瑃: 1726 ~ 1752년)과 남양 홍씨 부인(1725 ~ 1801년)의 아들로 1748년 12월 24일(영조 24년 음력 11월 5일) 한성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유춘(柳璉)은 16세 때인 1741년 1년 연상인 남양 홍씨, 홍이석의 딸과 결혼하여 7년 만에 외아들 유득공을 낳았다. 그러나 유득공의 증조부인 유삼익(柳三益)과 외할아버지 홍이석(洪以錫)이 서자인 까닭에 그는 태어나면서 서얼 신분을 타고났다. 또한 그의 할머니 우계 이씨 부인 역시 이서우의 서녀였다.
그는 본래 남인 가계로 그의 외5대조 홍석신은 만전당 홍가신(晩全堂 洪可臣)과 사촌 간이며, 홍가신의 손자인 남인의 중진 홍우원은 그의 외증조부뻘 되는 친족이었다. 또한 외외증조부 이서우 역시 남인의 중진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 들게 되었고, 이후 노론 북학파로 전향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암기력에 능하였다. 후에 호를 영재(泠齋)라 하고 다른 호로는 영암(泠庵), 고운당(古芸堂) 등이 있는데, 특히 고운당은 지명으로 운동(芸洞)이라고도 불리던 한성부 교서관동(校書館洞, 후일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2가 부근)에 그가 오랫 동안 살면서 지은 당호(堂號)이다.
생애 초기
그러나 1752년(영조 28년) 아버지 유춘이 사망하자 남양의 외가로 이사했다. 1757년 8세가 되자 외가에서 한성으로 돌아왔다. 유득공은 일찍이 18~19세부터 시짓기를 배워서 능했다. 20세 이후에는 북학파인 박지원에게 사사하고 이어 이덕무, 박제가를 만났는데 이후 유득공은 그들과 평생의 지기로 교류했다.
그는 좋은 시를 짓기 위해 여러 책을 읽었다. 그는 다른 북학파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독서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국지와 수호전을 비롯, 중국의 고전 서적을 다양하게 구해서 독서하였다. 구하기 어려운 책은 직접 빌려서 탐독하고 이를 필사본으로 베껴서 자신의 집에 비치해 두고 계속 읽었다.
또한 만주, 몽골, 타타르, 회회(回回, 이슬람), 인도, 베트남(安南), 라오스(南掌), 미얀마(緬甸), 타이완, 일본, 류큐 및 서양의 홍모번(紅毛番, 영국), 프랑스(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존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청나라 일변도, 청나라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冷齋集)'을 출간하고 1772년에는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을 편저하였다.
1773년(영조 49년) 생원시에 합격, 생원(生員)이 되었다. 그 뒤 영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얼인 탓에 관직의 제한이 있었고, 그는 출사 대신 지기들을 만나며 학문 연구와 역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관료 생활
그 뒤 1777년 청나라 여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청나라 여행의 기행문이자 여러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을 출간하였다.
32세 되던 1779년(정조 3)에 정조의 서얼허통령을 내리면서 시문과 글짓기와 해박한 지식이 인정되어 1779년 7월 13일(정조 3년 음력 6월 1일) 특별히 규장각 검서관(奎章閣 檢書官)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된 박제가, 이덕무,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의 4검서'라 불린다.
규장각 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장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의 사료까지도 읽을 기회를 많이 가졌다. 이런 저런 역사서를 읽고 그는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되었다'라며 발해사가 국사에서 제외된 것에 한탄하기도 했다.
시문과 재주에 능하여 정조의 특별한 지우를 얻은 계기로 그는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786년 포천 현감(抱川縣監), 제천군수(堤川郡守), 1788년 양근군수(楊根郡守),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사도시주부(司寺侍主簿)를 거쳐 1792년 가평 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외직(外職)에 있으면서도 규장각 검서(檢書)의 직함을 가져 세상에서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4검서로 불린다. 그는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의 제자로 이덕무 등과 더불어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산업 진흥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한학 4가(漢學四家)라고도 불리었다.
은퇴와 말년
그 뒤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로 나갔으나 1800년 8월 18일 그를 아끼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그는 개성, 평양, 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베이징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으며 자신이 본 문물과 경험을 토대로 기행문과 소설, 역사서 등의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1807년 10월 1일(순조 7년 음력 9월 1일)에 5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후
사후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송산리(松山里, 현 의정부시 송산동) 송산에 안장되었다.
저서
《경도잡지(京都雜誌)》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영재집(冷齋集)》
《앙엽기(盎葉記)》
평가
시문에 뛰어났으며, 규장각 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치된 국내외의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다. 그는 한국사의 독자적인 발전과 체계화를 위해 역사 연구 대상을 확대했다.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이 세운 21개 국가의 도읍지를 답사하여 역대 국가들의 도읍지돌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로서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민족의 주체 의식을 되새겨보려는 역사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해사 연구
그는 최초로 발해사에 관심을 갖고, 발해사가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봤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조선 역사의 체계 안에 포함시켜야 함을 주장했다. 또한 기존의 통일신라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로 규정했다.
그는 남방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북방 중심으로 변모해갔고, 그 결과 《발해고》 《사군지》를 저술하여 북방의 역사를 조명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는 《발해고》를 통하여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고, 《사군지》에서는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특히 《발해고》 머리말에서 유득공은 역사가 신라사 중심으로 된 것을 고려의 탓이라 보았다.
유득공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자처한다면 당연히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 역사까지도 포함된 남북국사(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하였으며,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대씨(大氏)가 고구려의 유민이었고 발해의 땅도 원래 고구려 땅이었으며 고구려인들이 구성된 국가임을 기록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하였다.
그의 연구는 발해사에 대한 초기 연구의 하나이며 그의 역사 인식은 나중에 정약용(丁若鏞), 한치윤(韓致奫)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가족 관계
유득공의 가계는 서얼이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유삼익이 고조부 유성구의 서자였고, 외할아버지 홍이석은 외증조부 홍시주의 서자였으며, 외조모 우계 이씨는 이서우의 서녀였다.
조부 : 유한상(柳漢相)
아버지 : 유춘(柳瑃, ? - 1752년)
어머니 : 남양 홍씨, 외조부 홍이석(洪以錫)의 장녀
부인 : 전주 이씨
아들 : 유본예(柳本藝)
숙부: 유련(柳璉)
외조부 : 홍이석(洪以錫, 1687년 - 1742년, 이원현감, 병마절도사 홍시주의 서자)
외조모 : 우계 이씨, 송곡 이서우(松谷 李瑞雨)의 서녀
▶️ 牡(수컷 모)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소 우(牛=牜; 소)部와 음(音)을 나타내며 土(토, 모)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牡(모)는 ①수컷 ②양(陽), 양성(陽性) ③자지(남성의 생식기), 남근(男根) ④열쇠(여는 쇠) ⑤언덕,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관상용으로 재배하는데 잎은 크며 늦은 봄에 여러 겹의 붉고 큰 꽃이 피는 작약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관목을 모란(牡丹), 소의 수컷을 모우(牡牛), 말의 수컷을 모마(牡馬), 가축의 수컷을 모축(牡畜), 수치질로 항문 밖으로 두드러져 나온 치질을 모치(牡痔), 수레에서 물건을 싣는 부분을 모복(牡服), 모란과 공작새라는 뜻으로 옛 권력자가 살던 집이 폐허가 되어 아름답던 모란이나 공작새가 있던 정원이 없어졌다는 비유의 말을 모란공작(牡丹孔雀) 등에 쓰인다.
▶️ 丹(붉을 단, 정성스러울 란/난)은 ❶지사문자로 굴 입구에서 붉은 광물질을 캐내니 붉다를 뜻한다. 혹은 井(정)의 생략형(省略形)을 바탕으로 땅속의 돌을 파내는 우물으로, 점 주(丶; 불똥)部는 그돌을 나타낸다. 돌에 五色(오색)이 있었는데 적색(赤色)이 가장 귀하다 하여 붉다의 뜻이 되었다. 전(轉)하여 변치 않는 마음의 뜻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丹자는 ‘붉다’나 '붉은빛'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丹자의 갑골문을 보면 井(우물 정)자에 점이 찍혀 있었다. 여기서 井자는 광산의 입구를 그린 것이고 입구에 찍혀있는 점은 주사(硃砂)라고 불리는 수은 광물질을 표현한 것이다. 주사는 광산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광물질이다. 그래서 丹자는 주사를 얻을 수 있었던 광산 입구에 점을 찍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주사는 단사(丹砂)라고도 불리는데, 예부터 중국에서는 경련이나 발작을 진정시키는 약재로 사용했다. 주사가 붉은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丹자는 '붉다'나 붉은빛'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丹(단, 란)은 ①붉다 ②붉게 칠하다 ③성심(誠心: 정성스러운 마음) ④신약 ⑤단사(丹沙: 수은으로 이루어진 황화 광물) ⑥붉은빛 ⑦남쪽 그리고 ⓐ정성스럽다(란) ⓑ거란(契丹)(란) ⓒ모란(牡丹)(란)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얼굴을 곱게 하고 머리나 옷맵시를 매만져 꾸밈을 단장(丹粧), 붉은색을 단색(丹色), 집의 벽과 기둥과 천장 등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림과 무늬를 그림을 단청(丹靑), 여자의 아름다운 붉은 입술을 단순(丹脣), 거짓이 없는 참된 정성을 단성(丹誠), 배꼽 아래로 한 치 다섯 푼 되는 곳을 단전(丹田), 붉은 칠을 한 기둥을 단주(丹柱), 붉은빛의 과일을 단과(丹果),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을 단충(丹忠), 속에서 우러나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단심(丹心), 붉은 꽃을 단화(丹花), 바위나 돌에 쓴 글씨 또는 붉게 새겨 쓴 글씨를 단서(丹書), 붉은 칠을 한 누각을 단루(丹樓), 햇빛에 비치는 붉은빛의 운기를 단하(丹霞), 곱고 붉은 빛깔을 주단(朱丹), 붉은 입술과 하얀 이란 뜻으로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이르는 말을 단순호치(丹脣皓齒), 붉은 정성이 둘도 없다는 뜻으로 진심을 다해 성심 성의로 일을 행함을 일컫는 말을 단성무이(丹誠無二),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란 뜻으로 한결같은 참된 정성과 변치 않는 참된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일편단심(一片丹心), 소경의 단청 구경이라는 뜻으로 사물을 보아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함을 이르는 말을 맹자단청(盲者丹靑),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충성을 일컫는 말을 우국단충(憂國丹忠), 아래 위를 하얗게 입고 곱게 꾸민 차림을 일컫는 말을 소복단장(素服丹粧), 여러 가지 패물로 몸을 꾸밈 또는 그 단장을 이르는 말을 칠보단장(七寶丹粧) 등에 쓰인다.
▶️ 孔(구멍 공)은 ❶회의문자로 어린 아이가(子) 젖통에서 젖을 빠는 모양(乚; 은)으로 젖이 나오는 구멍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孔자는 ‘구멍’이나 ‘비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孔자는 子(아들 자)자와 乚(숨을 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乚자는 뜻과는 관계없이 어미의 젖가슴을 표현하고 있다. 孔자의 금문을 보면 어린아이가 무언가에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아이가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孔자는 본래 ‘젖가슴’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하지만 지금의 孔자는 주로 공자를 대표하는 글자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孔(공)은 ①구멍, 굴 ②성(姓)의 하나 ③공자(孔子)의 약칭(略稱) ④동전(銅錢) ⑤새의 이름, 공작(孔雀) ⑥매우, 심히 ⑦비다, 공허(空虛)하다 ⑧깊다 ⑨크다, 성대(盛大)하다 ⑩아름답다 ⑪통(通)하다, 지나가다 ⑫허무(虛無)하다, 헛되다 ⑬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뫼 구덩이 광(壙), 구멍 혈(穴), 굴 굴(窟), 구멍 규(竅), 구멍 두(竇)이다. 용례로는 공자의 본명은 공구(孔丘), 공자를 성인으로서 일컫는 말을 공성(孔聖), 공자와 맹자를 공맹(孔孟), 공자와 노자를 공로(孔老), 몹시 밝음을 공명(孔明),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을 공로(孔路), 매우 급박함이나 몹시 지독함을 공극(孔劇), 구멍 무늬를 공문(孔文), 꽃밥의 정수리에 구멍이 생기어 꽃가루를 날리는 일을 공렬(孔裂), 구멍으로 사람 몸의 혈도를 공혈(孔穴), 털구멍을 모공(毛孔), 콧구멍을 비공(鼻孔), 눈구멍을 안공(眼孔), 눈동자로 눈알의 한가운데에 있는 빛이 들어가는 부분을 동공(瞳孔), 구멍을 뚫음을 천공(穿孔), 구멍이 많음을 다공(多孔), 몸안으로부터 몸 밖으로 땀을 내보내는 살갗에 있는 구멍을 한공(汗孔), 총알로 뚫린 구멍을 탄공(彈孔), 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뜻으로 어진 사람도 남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을 공자천주(孔子穿珠), 공자의 자리는 따스할 겨를이 없다는 뜻으로 한군데 오래 머무르지 않고 왔다갔다 함을 이르는 말을 공석불가난(孔席不暇暖), 공자의 문하에서 나온 열 사람의 뛰어난 제자를 이르는 말을 공문십철(孔門十哲), 묵자 집의 굴뚝엔 그을음이 낄 새가 없다는 뜻으로 여기저기 몹시 바쁘게 돌아다님을 이르는 말을 공석묵돌(孔席墨突), 형제는 서로 사랑하여 의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공회형제(孔懷兄弟), 둥근 구멍에 모난 막대기라는 뜻으로 사물이 서로 맞지 않으을 이르는 말을 원공방목(圓孔方木), 백의 구멍과 천의 상처라는 뜻으로 갖가지 폐단으로 엉망이 된 상태를 이르는 말을 백공천창(百孔千瘡) 등에 쓰인다.
▶️ 雀(참새 작)은 회의문자로 小(소; 작다)와 새 추(隹; 새)部로 이루어지며, 작은 새, 참새의 뜻이다. 작의 음은 躍(약; 뛰다)의 바뀐 음이다. 그래서 雀(작)은 ①참새 ②다갈색(茶褐色) ③뛰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공작의 모양을 수 놓아 만든 허리띠를 작대(雀帶), 성의 안쪽에 쌓아 놓은 대를 작대(雀臺), 도자기에 달린 발을 작구(雀口), 참새의 알을 작란(雀卵), 밤눈이 어두운 눈을 작목(雀目), 참새의 고기를 작육(雀肉), 새를 잡는 그물을 작라(雀羅), 너무 좋아서 깡충깡충 뛰며 기뻐함을 작약(雀躍), 주근깨로 얼굴의 군데군데에 생기는 잘고 검은 점을 작반(雀斑), 제비와 참새로 도량이 좁은 사람을 연작(燕雀), 옷끈을 꾸미는 일을 입작(入雀), 참새를 잡음을 포작(捕雀), 새와 참새 또는 참새 따위 작은 새를 조작(鳥雀), 문 밖에 새 그물을 쳐놓을 만큼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짐을 뜻하는 말로 권세가 약해지면 방문객들이 끊어진다는 말을 문전작라(門前雀羅), 기뻐서 소리치며 날뜀을 환호작약(歡呼雀躍), 수후의 구슬로 새를 잡는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손해 보게 됨을 이르는 말을 수주탄작(隨珠彈雀), 참새가 날아 오르듯이 춤춘다는 뜻으로 크게 기뻐함을 이르는 말을 흔희작약(欣喜雀躍), 눈을 가리고 새를 잡는다는 뜻으로 일을 건성으로 함을 이르는 말을 엄목포작(掩目捕雀), 자기를 이롭게 하려다가 도리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위총구작(爲叢驅雀), 안심하고 있어 재앙이 닥쳐오는 것도 모름을 연작처당(燕雀處堂)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