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대군 명종이 즉위한 후 수렴첨정을 시작한 문정왕후는 인종에 대한 태도는 정말 차가웠다.
제위기간이 1년이 안되는 왕은 임금의 예로 제사를 지낼수 없다하여 보통의 5월장 대신 갈장
(신분에 따라 정해진 장례기간을 무시하고 지내는 것) 을 치루고 또한 그 시신을 종묘가 아닌 연은전에 쳐박아 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대윤일파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먼저 공격은 윤원로가 열었다. 윤임이 무사를 사용해
경원대군을 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임파 대신들에게 오히려 역습을 당해 윤원로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문정왕후를 등에업은 소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윤임은 봉성군이나 계림군등(여인천하 참조)
다른 왕족을 이용해 역모를 꾸미고 있다. 이번에는 대윤일파가 쓸려나간다. 그런데 이떄 사림도 일부 쓸려나간다.
백인걸이 문정왕후가 밀지를 보내 절차없이 귀양을 쳐결한 것을 비난하고 나선것이다. 그러자 소윤은 백인걸을 포함한
그의 동조한 소위 조광조파의 남은 사림까지 줄줄이 털린다, 결국엔 대윤의 핵심인 윤임,유관,유인숙과 계림군이 사사되었고
이후에도 문정왕후를 비판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옥사가 줄줄이 이었다. 사관따윈 무시되었고 사관안명세가 시정기에서
대윤들을 동정한 사건등도 모조리 옥사된 것이다. 이도중에 개인적 원한까지 이용되어 조광조파이거나 소윤중 누구랑 사이가
나빴다는 이유로도 폭탄을 맞았다. 전부 56명이 사화로 죽었는데 이중 대윤이 절반이요 사림(조광조파)이 반절이였다.
그럼 문제 :대윤-소윤맞짱중 중립적인 사람들까지 모조리 털린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윤원형은 그동안 사림들에게 환심도
많이 사려고 노력했는데 말이죠 ? 댓글로 답을 아시는분은 달아주세요
윤원형은 천재 까지는 아녔어두 적어두 머리가 수재는 됬었나보다(간신도 똑똑해야 할수있다.)
윤원형은 명분바보(사림)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아주 잘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분리해서 지배한다 이다. (훗날 선조대에 붕당의 불씨를 집혀놓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히죠)
사림과 대윤을 쓸어버리는데(위사공신) 일조한 사람들 중에는 원래 사림중 이름이 높았던 홍언필,정순봉등이 있었고
조광조를 몰아낸 기묘 삼흉보다도 훨신 욕을 얻어먹게 되었다. 그 결과 사림에서 갈떄가 없어진 그들은
윤원형에 개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화를 변한 사람들도 정치가 엉망인데 손놓고 구경만한다고
신나게 욕얻어먹었으며 그 들은 정부에서 싸닥하고 있거나 낙향에서 고향에 뭍히는걸 택한다. 이렇게 사림이 서로 비난하고
사분오열 됨으로써 윤원형을 견제할 세력은 완전히 와해 되었다 볼수 있겠다.
윤원형의 권력의 축은 3개로 압축할수 있는데 첫쨰는 문정왕후요 둘쨰는 의정부,육조,대간등 윤원형 딸랑이들이요
세번쨰는 명종이 어리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윤일파로는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을사사화의 한명인
우의정이기와 한동안은 공동정권을 이루었다. 그러나 윤원형은 결코 반쪽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기의 심복을 하나 하나 천천히 찍어냈고 이기는 영의정에 오른것을 끝으로 권간이라는 욕을 얻어먹고
죽었다. 이기를 밀어내는데 일등공신은 구수담인데 얼마후에 윤원형에게 토사구팽당한다. 구수담을 공격한건 진복창인데
그역시 윤원형에게 토사구팽을 당하게된다. 이런식으로 조금이라도 권력이 맞먹게 될 가능성이 있는사람은 모조리
싹을 잘라버렸고 을사사화 5년후에 위사공신중 살아남은건 자기자신 윤원형 혼자였다. 그대신에 남은것은
윤원형의 딸랑이들(실록에는 윤원형의 개들이라고 적혀있다.)로 가득 채웠다.
그의 정부 장악력은 어느정도였나하면 명종6년에 윤원형에게 우의정을 제수하자 윤원형은 나이가 젊고 외척으로써
영수가 될수 없다고 짐짓 사양한다. 그러자 의정부 육조 대간까지 나서서 윤원형은 인품이 고귀하고 재능이 비범하니
정승벼슬이 당연하다고 상소를 올린다. 오늘은 의정부 내일은 홍문관 이런식으로 말이다.
이 글을 읽어보시는 여러분 왠지 선조의 선위파동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선조는 선위파동으로 자기 왕권을 확인하곤
했죠 물론 조선왕들이 다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윤원형은 왕도아닌 신하의 몸으로 가능했던겁니다.
그래도 모든벼슬을 윤원형의 딸랑이들로 채울수는 없었고 그래서도 안됬다.
(그랬다면 정부가 공공의적이 되어 재야인사들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을테니까)
위에 설명한대로 윤원형은 사림을 분열해서 지배했다. 그 것을 위해 한 정책중 하나가 불교의 부흥이였다.
윤원형은 과거시험에 승과를 설치했고 도첩제를 실시했고 승려보우를 중용하여 선교양종을 부활시켰다. 게다가
모든 내외명부와 신료들까지 모인 장소에서 거창하게 집회를 벌이는등 조선시대 억불숭유를 구시로 삼은 조선시대에
최강스팩으로 팍팍 밀어주었다. (야샤에서는 자신이 범한 죄악을 불교의 힘으로 용서받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글쎼요?)
그 효과로 불교행사를 이용해 자금과 인력을짜냈고 무엇보다 사림과 차별화를 위해서였다.
외척으로써 국정을 장악하고 사림을 박해라며 불교를 진흥한데가 부패의 온상인 윤원형은 사림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근데 적이 뚜렷해질수록 적과 아군이 확실히 나누어진다. 윤원형이 대마왕이 될수록 그주변인물들은 전부 딸랑이들로 여겨졌고
그나마 남은 사림들에대한 비난도 높아졌다. 정부에 남은 중립적인 사림들은 자신들을 비난하는 행동이 빡칠수밖에 없었다,
3개의 권력의축이 건재하고 모든 궁안밖소식을 장악하고 있는 윤원형에게 개겨봤짜 모조리 뎅겅 목잘리게 생겼는데
어쩌라는건지 그렇다고 더러워서 정치안해 하고 나가면 진짜 윤씨왕국이 되지않겠는가?
이즈음 사림의 영수로는 김인후,이언적,조식,이황은 꼽는데 김인후와 조식은 조정을 버렸고 이언적과 이황은 신나게 욕을
얻어먹었다.(이 일은 나중에 광해군떄에 정인홍에 의해 회퇴변척소에 영향을 미친다.)
회퇴변척소 사건은 서인 남인과 북인의 맞짱을 가져왔고 윤원형의 사림 분열책은 사화를 뛰어넘어 당쟁까지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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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플은 마음이 아파요 댓글구걸 굽신굽신
첫댓글 윤원형역이 이덕화인가요?
네. 그나저나 윤원형의 후손인 저로써는 그저 ㅠㅠ...
조...좋은 정보다. 감사합니다 ㅋ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