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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보다 음식이 중요하다는 말이 그릇이 더러워도 된다는 뜻인가?
2024년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오 23,23-26
어제 저희 성당 어떤 신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빚을 많이 내서 죽을 만큼 힘이 들 때 신부님 강론을 들었습니다. 바로 십일조로 하느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한 달 적자가 600만 원, 십억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음에도 십일조를 내어 주님을 시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코로나 때가 되어서도 적자가 흑자로 바뀌었고 매년 1억 이상씩 빚을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다른 곳에 분점을 계약하고 왔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잘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저는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심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하십니다.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이제 가톨릭교회에서는 더는 십일조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확신하건대 십일조를 내는 개신교 신자들이 더 평균 재산이 많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 비유를 통해 설명해보겠습니다.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멀리서 온 편지를 받고 유산을 받으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곳에는 협곡이 많았습니다. 어떤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계곡을 건너려면 수백 미터는 내려갔다가 다시 수백 미터를 올라와야 합니다. 도중에 뱀도 만날 수 있고 물살이 센 개울도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계곡들에는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 같이 안전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다리는 바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매 다리마다 거의 피가 묻은 글씨로 나무 판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를 믿어라. 보기엔 위험해 보여도 실제로는 아래로 가는 길이 훨씬 위험하단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이 길을 가며 다리를 마련해 놓았다. 네가 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지만, 제발 한 번이라도 시험해 보려무나. 나는 이것을 만들다가 많은 피를 흘려 너에게 돌아갈 수 없었단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붓지 않나 보아라.”(말라 3,10)
아버지를 굳게 믿은 자녀들은 다리를 건너서 아버지께 빨리 이르러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아버지를 믿지 않은 아들들은 계곡을 건너다 떠내려가거나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간신이 도착한 아들들은 이미 잔치가 마무리되는 때였고 자신들의 몰골이 심하게 구겨져서 감히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하느님 사랑과 보살핌을 믿고 시험하는 도구입니다. 이것만큼 믿음이 증가할 도구는 없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십일조를 내라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부터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칠 때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것, 그리고 구약의 맨 마지막 방금 읽은 말라키서까지.
우리는 어쩌다 이런 십일조 계명을 버리게 된 것일까요? 오늘 복음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게”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묵상해봅시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은 계명은 낙타입니다. 낙타를 삼키면 죽습니다. 그렇더라도 벌레들을 먹는 사람이 있을까요? 벌레는 여기서 십일조를 의미합니다. 사실 십일조는 작은 것을 걸러내면서 큰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방책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십일조는 그러면 그릇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그릇 안에 담겨야 하는 것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은 것들입니다. 그릇이 필요하고, 또 그릇을 닦는 이유는 그 안의 것들을 맛있게 먹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매우 맛있는 음식을 내어놓는다면 그릇이 필요 없거나 닦을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십일조를 내되 제대로 내라는 뜻입니다. 십일조의 의도를 알고 제대로 내라는 뜻입니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의 음식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릇은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또 다른 위선일 수 있습니다.
- 전삼용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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