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김 정 순
세상을 살다보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시이소를 타듯 오르내리며 사람의
마음을 저울질 할 때가 종종 있다. 올라갈 때의 느낌은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우쭐대고 내려갈 때에는 날개 없이 추락하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 슬
픈 몸짓으로 의욕을 잃어버린다 그 의욕을 잃어버리던 날! 나는 그 허전
한 마음을 잠시라도 잊고 싶어, 불혹이 넘은 나이에 첫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처음으로 타보는 비행기에 발을 옮겨보니, 두려움이 앞서고, 제주도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잠시 스쳤으나, 너무나 상냥한
여승무원의 친절한 인사말에 눈인사만 살짝 하고 자리에 앉으니 소풍 나
온 어린아이처럼 설레임으로 온통 얼굴은 상기되어 있고 불안함과 두려움
은 비행기 날개에 실려 보냈다.
온몸이 조여지는 듯한 짜릿함과, 아! 하는 나의 외마디소리에, 창가에 앉
은 사람이 나를 힐긋 쳐다보며 창밖을 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아는 듯
이 선 뜻 그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창밖을 보니 코발트 빛 맑은 하늘위로 솜털 같은 구름이 온 시야를 감싸
주고 흰 구름 사이사이에서 보이는 경지정리된 논과 밭들이 작은 바둑판
처럼 가물가물 보였다.
넓은 강줄기는 실낱같은 흰 금으로 희미하게 보이며, 산과 들의 어울림은
내가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속의 나라같이 아름답고 아득하게 보였다.
20분쯤 지나 남해안 창공을 지나니 고공으로 인해 고막이 짜릿한 아픔으
로 다가와 귀를 막아도 보고 침도 꿀꺽 삼켜보았다.
창밖을 보니 섬과 바다의 환상적인 어울림은 참으로 경이로운 한 폭의 동
양화를 옮겨 놓은 것 같았다. 하늘을 바라보니 하이얀 치마폭의 정교한 주
름 같은 새털구름이 시야에 들어와 감탄과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 환상적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시리도록 파란 바다 위를 헤치고 두
척의 배는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유유히 어디론가 흘러간다.
가까이에서 보면 거센 파도의 높이도, 하늘위에서 보니 고요히 흐르는 잔
잔한 물결로 보인다.
사람도 가까이에서 보면 미움이 더욱더 커 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그러한 미움이 그리움으로 승화 되여 변환되는 것처럼...
은빛 반짝이는 물위에 살포시 누워 마음과 가슴으로 우주를 노래하고 싶
다.
인생이란 작은 점 하나에 불과 한데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꿈도 많던 학창시절은 다 어디로 가고 서글픔이 밀려오고, 삶이
란 이다지도 허무함과 외로움뿐인가! 오늘따라 푸른 바다위로 밀려드는
슬픔만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흐르는 물위에 머물까? 흘러가는 저 구름위에 머무를까?
오늘 나는 한 마리의 갈매기가 되어 묻혀진 세월 속에 아득한 추억을 노
래하며 가슴속의 바다 위를 한없이 날고도 싶다. 하늘과 바다 위를 나르는
갈매기는 아름다운 날갯짓으로 끼룩거리며 수평선 위를 시름없이 날아가
고 있다.
어느새 온몸의 떨림으로 놀라서 눈을 꼭 감으니,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비
행기는 멈추고 드디어 45분 만에 제주에 도착을 알리는 여승무원의 방송
이 울렸다.
이국적인 분위기에 외국에 온 느낌이다. 제주에 첫발을 내디디며 공항을
벗어나보니 도심과 어우러진 푸른 숲이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차창밖에 스쳐지나가는 담장으로 쌓아놓은 검은색 화강암이 흑진주의 빛
처럼 맑은 햇살에 온몸을 드러내고 있다. 유일하게 제주도에서만이 볼 수
있는 암흑색의 화강암은 척박한 환경에서 견디며, 겹겹이 쌓인 오랜 세월
의 무게만큼이나 울퉁불퉁한 면이 더욱 거칠게 느껴진다 수많은 검은 돌
틈 사이로 제주의 투명한 햇살이 유난히도 반짝거린다.
멀리서 불어오는 시원한 해풍은 힘든 일상에서 찌든 내 가슴을 말끔하게
정화시켜 주고 있다.
늦여름,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푸르름과, 파랗고 드높은 하늘은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와 코끝에도 신선함이 묻어난다.
어디선가 바람에 전해오는 풀냄새와 나무냄새를 따라서, 그곳으로 발길
을 옮기니〈여미지 식물원>의 안내판이 보인다.
그곳에서는 온갖 분재들과 식물들의 푸른 빛깔을 뽐내는 신명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출입구 앞에서 우뚝서있는 야자수 나뭇잎은 관광객을
안내하듯이, 푸르고 긴 잎을 정중하게 흔들며 손짓한다.
오백 년 된 모과나무의 분재를 보니, 작은 키에 밑둥치가 꽤나 굵어 한눈
에 나이 듦과, 단순한 관상용의 품위로는 보이지만, 사람들의 억압으로 크
게 자라지 못함이 안쓰러움과 측은한 마음이 앞서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푸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며, 넓은 땅에서 자유롭게 호흡하며 자라는 쭉
쭉 뻗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제 크기와 같은 작은
화분 속에서만이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뼈아픈 제 운명의 고통을 감내
하며 견디어내는 인내심이 참으로 안스러워 보인다.
모과 나뭇잎의 푸른 살결을 살며시 만져보니, 촉촉히 윤기가 흐르고 보드
라운 감촉이 느껴진다. 부디 생명이 다하여 죽은 뒤에 다시 소생한다면,
사람의 손일랑은 멀리하고, 한라산 정상에 우뚝 서서, 넓은 산허리에 뿌리
를 힘껏 내리고 바다를 호위하는 낙락장송(樂樂長松)이 되어 드높은 위상
을 떨치는 나무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보니 흰 구름이 유난히도 하얗게 보인다.
해풍에 밀려오는 비릿한 바다 내음이 싫지만은 않으니, 제주도의 맑은 공
기와 이국적인 모습에 내 마음을 모두 빼앗긴 것이 아닐까?
2002/14집
첫댓글 오백 년 된 모과나무의 분재를 보니, 작은 키에 밑둥치가 꽤나 굵어 한눈
에 나이 듦과, 단순한 관상용의 품위로는 보이지만, 사람들의 억압으로 크
게 자라지 못함이 안쓰러움과 측은한 마음이 앞서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푸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며, 넓은 땅에서 자유롭게 호흡하며 자라는 쭉
쭉 뻗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부러워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