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하느님의 어린이
주교와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되면 사제 생활에서 성공한 것일까? 이는 교리를 모르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지극히 세속적인 생각이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끝까지 자기 삶을 헌신하고 목숨까지 바친다면 그런 사제가 성공한 사제이다. 조선 천주교 박해 시절 밀입국해서 사목하던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자신을 지키려고 교우들이 고통받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고민 끝에 자수해 순교했다. 자수를 결심한 결정적인 동기가 바로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건데(요한 10,15), 오히려 양들이 목자를 지키려고 목숨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기 전까지 제자들은 세상 속물이었다. 스승이 당신이 당할 수난과 죽음을 두 번째로 예고한 바로 다음에 그들 중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길거리에서 말다툼까지 했다. 무슨 일로 그랬냐고 물으셨는데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마르 9,34) 아니, 못했을 거다. 그런 세속적인 생각이 예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알기는 알았던 거 같다.
그런 그들 앞에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여기서 어린이는 맑고 순수함이 아니라 약하고 의존적임을 상징하는 존재다. 예수님 당신 마음이 하느님께는 늘 그렇게 어린이 같았다는 뜻이겠다. 종속과 순종 그리고 완전한 신뢰다. 아들이 죽기를 바라고 그를 사지로 몰아넣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당신의 사랑, 순종, 신뢰다. 하느님이 아들 예수님이 죽기를 바라셨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신뢰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부활한다. 어린이가 부모를 따르고, 부모에게 종속되는 거처럼 그렇게 아니, 그보다 더 하느님을 완전히 신뢰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어린이들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도무지 안 크는 어린이가 되는 걸 거다.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이이지만 생활 속에서는 말과 행동이 유치하고 미성숙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을 찾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불편하게 하는 교우들을 만나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하느님과 관계가 잘못돼서 이웃과 관계가 그런 거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실수는 할지언정 이웃을 힘들고 불편하게 할 리가 없다.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세상 속 소금과 빛인 그리스도인도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는 영원한 어린이면서 세상 속에서는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좋은 부모가 된다. 내적 인간은 어린이인데 외적 인간은 어른인 것이 서로 모순처럼 보인다. 하느님 뜻과 계명에 단순하고 담백하게 순종하는 이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고 좋은 부모가 된다는 뜻일 거다. 그런 어린이 어른이 좋은 부모,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 세속 일에는 조금 어눌해도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데에는 전문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속 거래에는 약삭빠르지 못해도 주님 따르는 데에는 철저하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을 통해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는 모든 어린 자녀들을 주님의 길로 인도해주소서. 아멘.